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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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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암을 다녀와서 스크랩 새해를 산사에서, 천장사 새해맞이 템플스테이
천장암 추천 0 조회 346 16.01.01 22:5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새해를 산사에서, 천장사 새해맞이 템플스테이

 

 

 

2015년 끝자락에

 

2016년 새해가 밝았다. 그날이 그날인 사람들에게는 새날이 왔다고 해도 의미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뜻 깊은 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길이 주차장이 되듯 막혀도 일출을 보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2015년 끝자락에 천정사로 향하였다. 천장사 새해맞이 템플스테이에 참가하기 위해서이다. 오전에 일을 마치고 점심 후에 숙제라고 볼 수 있는 글을 한편 쓰고 오후 세 시에 출발하였다. 다행히 길은 막히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 늦게 출발한 팀은 평소보다 배 이상 걸렸다고 하였다.

 

천장사에 도착하니 5 30분이었다. 이미 저녁공양이 끝난 상태이었다. 법우님이 차려준 밥을 먹고 차담시간을 가졌다. 이날 템플스테이에 참석한 법우님들은 모두 7명이었다. 서산에서 온 M법우님, 역시 서산에서 가족 세명이 온 S법우님, 구리고 서울에서 온 B거사님부부팀이다. B거사 부부팀은 차가 막혀 9시가 넘어 도착하였다.

 

선방스님들과 함께

 

2015년 마지막 날 저녁 고요한 산사에 사람들이 모였다. 성우당 1층 다실에 모인 재가자들과 동안거 결재 중인 선방스님들이 모였다. 이렇게 재가자와 출가자가 함께 모여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현재 천장사 선방에는 다섯 명의 스님들이 동안거 정진중에 있다. 이날 처음 본 스님들은 청정해 보였다. 아마 매일 수행해서 일 것이다. 매일 참선하고 흐트러짐 없이 정진해서일까 식이 맑아 보였다. 무엇보다 당당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선방스님들과 함께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은 대단히 희유한일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서산에서 온 M법우님은 기가 느껴진다고 하였다. 동안거 결재가 시작 되고 나서 부터 도량에서 기운을 느꼈다고 하였다. 아마 선방스님들의 정진의 힘이 도량에 넘쳐 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M법우님은 케익을 준비하였다.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성산아빠

 

이날 서산에서 가족 세 명이 참가 하였다. 대학입시를 앞둔성산이와 성산이부모가 함께 한 것이다. 그런데 성산아빠는 특별한 먹거리를 준비하였다. 커다란 대하를 한 바구니 사온 것이다. 그래서 공양주보살이 한바구니를 쪄서 상에 내 놓았다.

 

성산아빠는 왜 대하를 준비하였을까? 아마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아들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아들과 함께 부부가 절에서 연말연시 템플스테이를 함과 동시에 선방스님들에게 대중공양 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성산아빠는 스님들이 먹기 좋게 대하껍질을 일일이 다 벗겼다. 그리고 특유의 서산지방 토속어로 했슈” “안했슈” “안그래유” “잡숴보슈라고 서산지방 특유의 토속어로 말하였다.

 

 

 

 

성산아빠는 대하껍질을 깔 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성을 다해 스님들이 먹기 좋게 껍질을 발라내고 잘 드실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런 모습을 전에 보지 못하였다. 스님들을 극진히 공양하는 모습을 보니 유튜브 동영상 강좌에서 범일스님이 태국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생각났다.

 

범일스님은 태국에서 공양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태국불자들은 빅쿠들을 모시는데 있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하였다. 어느 재가자가 집에서 음식을 준비해 왔는데 최상품의 재료로 요리를 하여 절에 가져 온 것이다. 그런데 재가의 남자신도는 음식공양을 할 때 무릎을 꿇고 상을 차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빅쿠들이 공양을 할 동안 한쪽 켠에 가족과 함께 무릎을 꿇고 공양이 다 끝날 때 까지 앉아 있었다고 한다. 또 빅쿠들의 공양이 다 끝났을 때 남은 음식을 가족들이 먹었다고 한다. 범일스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재가자가 출가자를 공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으로 공양한다고 해도 테라와다 불교 만큼 할 수 없을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재가자들이 스님들과 합석하는 일은 거의 없고 함께 식사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조차 없는 일이라 한다. 이는 테라와다 빅쿠들이 재가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본다. 그런데 이날 성산아빠의 공양장면을 보니 테라와다빅쿠들에게 공양하는 것처럼 정성이 넘쳐난다. 아마 선방스님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보여진다.

 

출가자에게 공양하는 것은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공양하는 것은 공덕을 짓는 행위이다. 지나가는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공덕을 짓는 것이라 한다. 걸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개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더 큰 공덕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장자여, 바라문 벨라마가 행한 그 보시, 그 굉장한 보시보다 한사람의 견해를 갖춘 님에게 보시한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 올 것입니다.”(A9.20) 라 하였다. 여기서 굉장한 보시란 바라문 벨라마가 팔만사천개의 황금 그릇 등 일반사회에 보시한 것을 말한다. 또 견해를 갖춘 님이란 예류자를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든자를 말한다. 같은 보시를 해도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더 수승함을 말한다.

 

몸과 마음과 옷과 재산을 아끼지 않는 공양

 

최상의 보시는 어떤 것일까? 아마 부처님에게 보시 하는 것이 가장 공덕이 클 것이다. 그것도 몸과 마음을 아낌 없이 바치는 것이다. 이는 연등불 당시 선혜동자 이야기로 알 수 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Dhp 153)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 154)

 

 

이 두 개의 게송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3번 게송에서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나는 개인이라고 하는 집을 지은 자인 갈애(, tanha)  찾아서 오랜 세월 백천의 거듭 태어남으로 이루어진 윤회를 하는 동안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유행해 왔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디빵까라(Dipankara, 연등불)의 발아래 엎드렸다.” (DhpA.III.123) 라고 되어 있다.

 

주석에 따르면 ‘연등불의 발아래 엎드렸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 장면은 부처님이 보살로 삶을 살아 갈 때인 ‘수메다(Sumeda)존자’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선혜동자’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수메다 존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현자 수메다(Sumeda)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부를 물려 받았다. 그러나 그 재산이 결코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아니라고 깨달은 그는 그 재산을 버렸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서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곧 명상수행으로 깊은 선정을 얻게 되었고,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디빤까라붓다(Dapankara Buddha)가 람마와띠 마을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수행자인 수메다가 들었을 때 붓다가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붓다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여전히 길 주변을 정리 하고 있었지만 움푹패인 더러운 물 웅덩이가 있어서 미래의 붓다가 되기를 맹세한 그는 거기에 엎드리기로 하였다. 그의 옆에는 수밋따(sumitta)라 불리우는 젊은 아가씨가 연꽃 여덟송이를 들고 있었는데, 이중 다섯송이를 수행자에 주고 그녀 자신은 3송이를 들고 있었다.

 

디빤까라붓다가 도착 하고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 때 수메다는 미래의 붓다가 될 것을 수기 하였고, 젊은 아가씨 수밋따는 그의 동료이자 조언자가 될 것이라고 또한 말씀 하셨다.

 

(Life of the Buddha)

 

 

 

 

디빵까라부처님(연등불)은 과거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따진다면 과거 25불에 속한다. 그런 디빵까라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에 출현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수메다 존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움푹 패인 물웅덩이에 배를 깔았다.  부처님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은 신심이어서일까 수메다존자는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를 받았다. 그 수메다존자가 미래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었다.

 

최상의 공양은 몸과 마음과 옷과 재산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수메다존자가 물웅덩이에 배를 깐 것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몸과 옷 등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몸을 땅바닥에 던져 공양하는 행위를 전체투지(全體投地)’라 한다. 오늘날 티벳불교에서 보는 전체투지가 바로 수메다존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불교에서 사뿐사뿐 절하는 오체투지와는 다른 것이다.

 

가난한 절 천장사

 

2015년 그믐밤 천장사에서 최선을 다해 공양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마치 테라와다불교 불자들이 공양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선방스님들에게 공양하는 장면을 보니 테라와다불자 못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천장사 선방은 가난하다는 것이다. 절이 산중 오지에 있다 보니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하다고 한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작은 절, 가난한 절 천장사에서 선방을 운영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전기세 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사오년 전에 염궁선원을 개원하게 된 것은 주지스님의 은사스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은사스님이 사비로 전기세 등 일부를 보조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선방스님들에게 여유 있게 잘 대우해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선방스님들에게 가난한 절임을 말하고 협조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가난전략이다. 가난한 절에서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은 가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고한 바 있다.

 

 

가난한 것은 죄인가? 아니면 가난은 불편할 뿐인가? 가난을 이야기 하려고 작정했을 때 마음속에서 멈칫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마치 멀리서 찾아온 도반스님에게 “요즘 절의 사정이 어려워서 여비를 못 드립니다”라고 변명하는 것처럼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

 

사실 ‘수행자는 가난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처음 출가 할 때도 가난한 생활이나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았다. 원효 스님도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지라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지 않으셨던가. 부처님이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신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도 청빈락도(淸貧樂道)의 살림살이 이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지를 맡기전 선방에 다니거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 내게도 병원비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책을 사고 싶어도 여유가 없어 구입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도와달라는 말을 못하는 것이 나의 천성이기도 하였고 특별히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지만 그러한 가난은 불편한 것이었지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걷지 않은 산길을 혼자서 걷는 기분처럼 상쾌하였고 ‘수행자의 가난은 복이다’라는 믿음도 있었다.

 

주지가 되고 나서 주위에서 만나는 주지 스님들이 툭하면 절 살림이 어렵다 호소하기에 나만은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지말자고 다짐 하였다. 어렵다고 한들 누가 도와 줄 것도 아니고 어렵다는 것이 도대체 기준이 없었기에, 모두의 어려움은 모두의 엄살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게도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죄가 되어가고 있다. 가난한 사찰에서 선방을 운영하는 것이 벅차서 힘겨울 때, 특히 열심히 정진 하고 떠나는 스님들께 차비를 넉넉하게 드리지 못할 때, 선방에 다니는 반연 없는 사제스님들에게 공양금을 보내지 못할 때, 오랜만에 찾아온 도반스님들에게 차비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죄스럽게 느껴진다.

 

왜 우리는 가난한 수행자로서 끝까지 살아내지 못할까.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 종단도 가난하고 스님들도 가난하다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종단은 부자인데 그것을 투명하게 관리하지 못하여 일부 스님들은 부자이고 대다수 스님들은 가난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재 승가는 부끄럽게도 사회와 똑같이 부익부빈익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행자의 가난은 종단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왜곡되어 있고 가난한 수행자가 존경받는 분위기가 아니라 다만 능력없음이 되어버렸다.

 

이번 동안거에는 일부러 우리절은 어느 사찰보다 가난하니 가난을 미덕으로 아시는 분들만 방부를 들이시라는 ‘안내문’을 각 선방에 보냈다. 설사 나의 편지를 받고 선방에 방부를 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보낸 편지였다. 다행스럽게도 7분이나 방부를 들이셨다. 자발적으로 가난한 사찰을 선택하는 분들을 보니 아직도 선방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선방에 다닌 구참스님이 자신의 소유물은 아끼면서도 사중(寺中)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나는 몇십년 선방에서 수행한 이력보다 뒷방에서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행자가 더 존경스럽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개인사찰이을 가지고 있고 통장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스님으로 불리운다 해도 나는 그를 인정하지 못한다.

 

(허정스님, 가난을 이야기하다, 2014-12-03, 암자에서 하룻밤(천장암))

 

 

스님은  “가난한 것은 죄인가?”라며 의문을 표한다. 출가수행자가 가난이라는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시골에 있는 시골절이고, 그것도 작은 절이기 때문에 가난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한숨짓는다.

 

자발적 가난에 동참한 스님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여비도 줄 수 없는 현실이라 하였다. 멀리서 온 스님들 뿐만 아니라 삼개월 동안 안거를 마친 스님에게도 여비조차 줄 수 없는 현실에 난감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 제방 선원에다 자발적 가난에 동참할 수 있는 스님들만 받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청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가난에 동참한 스님들이다.

 

자발적 가난에 동참하는 스님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곳이 염궁선원이다. 그런데 주지스님에 따르면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스님은 이것 저것 요구가 많은 스님들도 있다고 한다. 이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기꺼이 가난에 동참한 스님들은 욕망을 내려 놓은 것으로 보면 틀림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조건이 열악해도 참고 인내하며 또한 걸림이 없다고 하였다.

 

서산 연암산 기슭 오지에 있는 작은 절, 가난한 절 천장사는 얼마나 가난할까? 이번 겨울 초입에 눈이 왔다고 한다. 눈을 치워야 하는데 선방스님들도 울력에 참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수인원으로 도량은 물론 절의 입구 길까지 모두 치우기는 무리이었던 것 같다. 그러자 선방스님 중의 한스님이 자비로 제설기를 구입 해 주었다고 한다. 사례는 하나 더 있다.

 

어느 절이나 김장을 한다. 천장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김장을 하고 나니 난감했다고 한다. 김장김치를 마땅히 보관할 장소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 상태로 몇 일만 지나면 쉬어 버리게 될 것이다. 이를 공양주보살이 걱정하자 선방스님 중의 한스님이 자비로 김치냉장고를 사 주었다고 한다. 아마 이런 사례는 보기 드물 것이다.

 

선방스님들은 손님이나 다름 없다. 한철 살다가 해제 때가 되면 떠난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고 한다. 더구나 선방스님들도 초면인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새로 인연을 맺어 사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초면에 대중이 화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절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선방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제설기를 사주고 김치냉장고를 사주는 등 초유의 일이 발생된 것이다.

 

선화(禪畵)를 잘 그리는 스님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대에 걸쳐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재가자들은 순례법회 떠나면 해제철 선방을 둘러 보며 문고리를 한번씩 잡아 본다. 그런데 12월 그믐날 끝자락에 선방스님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공양하였다. 그런 선방스님 중에 특이한 스님이 한분 있다. 한주역할을 맡고 있는 스님은 그림을 잘 그린다. 선화(禪畵)라 한다.

 

선화를 잘 그리는 스님의 법명은 무주스님이다. 나이가 환갑으로서 겉으로 보기에 도인처럼 보인다. 경상도 억양이 있는데 말을 재미나게 한다. 스님은 천장사에 대하여 도인공장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네 명의 도인, 즉 경허, 수월, 혜월, 만공스님이 천장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절이 가난해도 스님들이 찾아 오는 것 같다.

 

무주스님은 선화에 대하여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날 참석자 모두에게 선화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최인호의 소설 의 표지에 실려 있는 그림을 스님이 그렸다는 것이다. 최인호의 할은 어떤 소설일까? 검색해 보니 2013년 발간 되었다.

 

 

 

 

할에 대한 책소개를 보니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선승들의 이야기 『할』. 이 책은 경허의 기행으로부터 시작한다. 경허는 겨울날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던 여인 한 명을 자신이 머물던 해인사의 조실로 데리고 온다. 이후 경허와 여인은 조실에 틀어박힌 채 며칠 동안 두문불출한다. 당시 경허를 보필하던 경허의 막내 수법제자 만공은 스승의 기행이 사내 대중들의 입에 오를까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조실에 들어선다. 그리고 한센병이 들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여인을 스승 경허가 품에 안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 라 되어 있다.

 

소설가 최인호는 길없는 길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소설의 첫 장을 보면 어느 나그네가 석양 해질 무렵 깊은 산중에 있는 천장사를 찾는 것부터 시작 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소설을 보고서 천장사를 많이 찾는 것 같다.

 

최인호의 마지막 소설 할의 표지에 선화가 있다. 그런데 그 선화가 이번 동안거 결재기간에 정진중에 있는 무주스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정진중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

 

새해를 법당에서

 

선방스님들과 가는 해 끝자락 저녁에 함께 하였다. 서로 덕담을 주고 박으며 재가와 출가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취침시간이 되자 선방스님들은 처소에 돌아 갔다. 절에서는 9시가 취침시간이다. 대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날 주지스님과 템플에 참가한 사람들은 거의 자정까지 차담을 나누었다. 주지스님이 팽주가 되어 차를 만들어 끊임 없이 차를 나누는 것이다.

 

새해를 법당에서 맞이 하였다. 서울에서 온 B거사 부부팀과 함께 셋이서 법당에앉았다. TV등 온갖 소음으로 가득찬 세상과 달리 깊은 산중에 있는 산사는 고요했다. 마침내 새해가 시작 됨을 알았을 때 밖으로 나왔다. 사방은 고요하고 사람사는 불빛 조차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세상과 차단 되어 있다. 그래서 하늘이 감추어 둔 절 천장(天藏)’이라 하였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하다.

 

 

 

 

끝내 해는 보지 못하였지만

 

새벽이 되었다. 새벽 4시에 예불이 시작 되었다. 사미승이 도량석하며 하루가 시작 되었음을 알린다. 템플스테이한 대부분 불자들이 예불에 참석하였다. 예불이 끝나고 6 20분까지는 각자의 시간이다. 6 20분에 아침공양을 했다. 늘 그럿듯이 공양이 끝나면 다실로 이동하여 차를 나눈다. 우리말 일상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새해를 알리는 첫 해가 7 30분 경에 뜬다고 하였다. 스님과 템플참가자들은 연암산 정상으로 향하였다. 정상으로 가니 서산시 고북면 주민들이 풍물놀이패를 동원하여 흥을 돋구고 있다.

 

 

 

 

 

 

 

 

 

 

 

 

 

연암산 정상에서 해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름이 끼여서 끝내 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날은 밝았다. 새해를 맞이 하여 해를 보고자 하였으나 해를 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소망을 빌고자 어두운 산길을 걸어 올라온 고북면 주민들의 표정이 밝다.

 

 

 

 

 

 

 

 

 

 

 

 

 

 

 

 

새해를 산사에서

 

새해 첫날 많은 사람들이 천장사를 찾았다. 새벽같이 대전에서 인천에서 오신분들이 있었다. 인천에서 오신 부부팀은 차로 먹을 것을 잔뜩 가져 왔다. 주로 공양간에 사용될 부식들이다. 이렇게 오지에 있는 절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어 보니 일부로 찾는다고 하였다. 부유해 보이는 절 보다 오지에 있는 절로서 선방이 있는 절을 찾는다고 하였다. 선방스님들을 위한 일종의 대중공양이라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만 자리를 비켜 날 때가 되었다. 11 20분에 점심공양을 하고 난 후에 자리를 떴다. 연말연시를 절에서 보낸 특별한 날이었다. 한해를 절에서 마무리 하고 또 한해를 절에서 시작하였다. 동해안에서 떠 오르는 해를 바라 보는 것 보다 더 나았다. 해돋이하러 바다로 갈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산사로 눈을 돌려 보면 어떨까?

 

 

 

 

 

 

 

 

 

 

 

 

2016-01-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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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1.0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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