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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논문> (1994)
한국 근대시의 고향 상실 모티프 연구 /-김소월, 박세영, 정호승, 이용악을 중심으로-
조 용 훈
차 례
Ⅰ. 서론
Ⅱ. 시적 현실의 서정성과 이념성
Ⅲ. 서정성과 이념성의 상호 교호성
1. 궤멸된 고향과 복원의 향토적 정서
1) 궁핍의 참상과 수난의 현실
2) 와해된 고향의 향토적 치유
3) 상실감의 변이 양상과 그 의미
4) 반어적 세계관과 역전의 묘미
3. 소결
Ⅳ. 고향 상실 모티프의 구조와 의미
Ⅴ. 결론
*본 논문은 청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조용훈 교수의 서강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논문(1994년)이다. 지면이 방대하여 본고에서는 정호승에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였다.
국문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의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 상실 모티프와 그것의 탐색과정을 통해 한국 문학의 이해를 촉구하고 우리의 근대시가 전개되어온 특성을 고찰하는데 있다. 고향 상실 모티프는 식민치하라는 한국적인 특수 상황으로부터 도출되어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조국 상실의 비애로 연계된다.
우리는 한국의 근대시에 되풀이되는 고향 상실 모티프의 사회 상징적 의미를 구명하고 해석함으로써 한국의 근대가 내포하는 정신사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 연구는 식민치하의 고향 상실이 국가 상실의 주제로 연결된다는 기존의 단편적인 논의를 지양하고, 각 작품들에서 고향 상실과 복귀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시학적 의미를 구명하는데 노력할 것이다. 이것은 시대와 문학과의 제연관을 개방적이고 통합적으로 조망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암울했던 식민치하에서 현실과 시인, 세계와 자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작품 속에서 서정성과 이념성이라는 원리하에 어떻게 심화되거나 해소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인들이 당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미적으로 형상화했는가 하는 시적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작품 속에 형상화된 고향 상실 모티프의 구체적 양상과 그 의매를 해석하기 위해서 시대와 사회에 따라 동일한 모티프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주목하고 그것이 현실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주제론적 관심에서 보면, 모티프는 시대와 정치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맥락과 문학 작품을 연계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문학 작품의 존재론적 혹은 사회 정치적 차원은 미학적 차원과 상호 연계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고향의 개념을 지지적(地誌的)이고 물리적인 장소로 한정했다. 이러한 관점은 파행적으로 전개된 한국의 식민지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럴 경우 고향은 원형적인 패턴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 영위되는 핵심적인 생활 현장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문학 작품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고, 작품의 역사성이 우리의 미적 경험에 포함되는 하나의 사실임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20,30년대 심화되는 농촌의 황폐화나 열악한 현실로 인해 야기되는 고향 상실의 역사적 형성 배경이 참고될 것이다. 이러한 상실성을 드러내는 고향 상실 모티프는 한국적 정황 속에서 도출되어 주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티프로서의 이미지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것은 조국 상실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확대됨을 알게 된다.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고향 상실의 구체적 양상은 고향에서의 내몰림으로 형상화 된다. 그런데 시인들이 고향 상실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언어로 표출하여 그것의 아픔을 형상화하는 것은, 당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갈망하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고향의 상실을 시화하는 것은 오히려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려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확인시키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욕구로 작용하여 작품 속에서 고향에로의 복귀로 사화된다. 그래서 시의식도 ‘상실에서 극복’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작품에서는 ‘떠남과 복귀’라는 시적 원리로 구조화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자아와 현실과의 상관성을 포착하게 되고 세계와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것이 해소되는 양상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상기한 고향 상실의 구조원리가 시를 형성하는 조직 원리로 현저하게 부각되고 있는 시인은 김소월, 박세영, 정호승, 이용악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들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공유하는 많은 시인과 그들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한국의 근대시의 한계를 구명하고자 했던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소월은 한국의 궁핍 현실에 주목하고 그것을 구체화 했다. 그러나 그의 시와 현실과의 관계는 직접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의 시는 현실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중략-
박세영은 한국의 궁핍한 현실의 요인을, 소작인과 지주관계에서 파생되는 계급 모순과 일제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민족적 모순에서 찾고 이에 대응하는 투쟁성을 시화한다. -중략-
정호승은 궁핍한 현실의 요인을 계급 모순에서 찾고 황폐화한 농촌의 참절함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고 이를 거부하는 시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의 그의 시의 출발이 갈등의 해소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시가 초기에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나 판단을 위주로 하는 서사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세계와의 조화를 거부하는 식민지적 상황은 갈등의 해소를 지난하게 한다. 후기에 들어서 갈등의 심화와 체험의 구체성을 강화하는 서정성이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토착어나 전통적인 율조가 동반된 향토적 정서로 세계와의 갈등관계를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정성에 비해서 이념성이 상대적으로 전경화 되어있다. 그가 끝내 역설적인 시적 구조를 통해 세계와 대항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이 기층에 내재한 이념성이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가 대립적 모순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통합하는 원리에 기초하는 것처럼, 정호승은 부조리한 현실의 마찰에서 초
래되는 갈등을 주관에 의해 극복하고자 한다.
이용악은 생동감 있는 비유를 구사하여 흉몽스럽게 변해가는 고향을 시각화하고 그것을 거부한다. -중략-
결국 우리는 앞서 상술한 네 명의 시인들의 구체적 작품을 분석하면서 이들의 정신적인 거점이 고향 상실로 비유된 국가 상실에서 초래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세계와 자아의 근본적인 갈등 관계를 시인들이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를 보이면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음도 아울러 살펴보았다. 이처럼 우리가 식민지 시대의 특징적인 고향 상실 모티프의 시적 구조 원리와 그 의미를 고구하는 것은, 파행적으로 전개된 한국의 근대가 갖는 정신사적 의미가 결코 가볍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현재 진행중인 고향 상실의 제 국면의 요인을 일관되게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게 하는 적절한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앞으로 몇가지 과제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 우선적으로, 보다 확장된 시사적 맥락 속에서 고향 모티프가 고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원형적인 실상으로서의 고향 모티프를 노래한 백석이나 노천명 등의 시가 더해져 상호 보완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해방 직후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한국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이에 대한 시적 형상화의 문제도 재검토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조국을 떠나 실향의 상태로 연변 등지에 정착한 한민족이 배출한 문학과, 한국 문학과의 연계성을 찾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만주나 간도 등지로 내몰린 사람들에 의해서 발간된 시나 시집은 해방 이전의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것까지 살펴봄으로써 한국적 실향의 의미가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Ⅲ. 서정성과 이념성의 상호 교호성
1. 궤멸된 고향과 복원의 향토적 정서
1) 궁핍의 참상과 수난의 현실
가중되는 일제의 포악한 탄압으로 날로 심각해지는 국내 정세의 일단을 시인들은 농촌의 피폐와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들의 모습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내었다. 그러나 농촌의 문제 이외에도 노동시 등을 발표하여 한국적 현실의 모순을 직시한 작가도 물론 있었다. 그리고 상술한 박세영의 경우도 노동자들의 참담한 생활을
노래하면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직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탈의 핵심적 현장인 농촌을 통해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시화(詩化)하는데 보다 큰 비중을 두고자 했다. 그가 이향 후 독립투쟁을 전개하거나 농민조합을 통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농촌 저항 운동에 관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는 20년대와 30년대를 연계하는 시작 활동을 통해 2.30년대의 시대적 의미의 지속적인 계승을 노래하였다.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서 황폐해진 농촌의 기아와 굶주림의 양상이 지속적이면서도 뚜렷한 변이를 보이는 시대적 징후들은 어떠한 것인가 파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보여준 20년대 중반에서 30년대 후반의 한국적 현실의 피폐상은 30년대 중반에 등장하여 계급모순을 직시하면서 토착적인 향토성을 추구한 호승(昊昇) 정영택(鄭英澤)의 경우와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이는지 궁금해진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정호승은 박세영에 비해 전원적인 향토성을 통한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개인적인 체험이 보다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김소월과 흡사하고 농촌의 모순을 계급적인 면에서 파악하여 이념성의 우세를 보인다는 점에서 박세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그는 박세영과 김소월의 중간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호승(昊昇) 정영택(鄭英澤)에 관해선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여타의 월북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그의 시가 읽혀지고 논의되는 것 자체가 금지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의 언로가 타의적으로 폐쇄되었다기 보다는 연구자들의 기억 밖에 존재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솔직한 대답이리라. 연구자들이 해금된 작가 중에서도 임화나 정지용 그리고 김기림 등의 지명도 있는 시인들에 우선적인 시선을 집중한 것도 사실이고, 이후에도 그의 시에 관한 언급 자체를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30년대를 대표하는 비중 있는 시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분명 그는 30년대의 한국의 시단이 시대적으로 요청했던 고향의 상실과 그 아픔을 체화하여 민족적인 비애로 형상화한 시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그의 시를 논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즉 고향을 상실하고 쫓겨 간 유랑민의 참상이 계급적인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한국민들의 정한을 향토적인 서정을 통해 노래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시가 당시 피폐한 농촌을 노래한 여타의 시들에 비해 개정적인 면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시의 대부분이 고향을 중심으로 독특한 시세계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30년대 활발했던 농민문학과의 수수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초기 시부터 본격적으로 수탈되는 농촌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당시 농민들의 좌절감과 고향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시적 기조가 그의 시 전체를 통어하는 강력한 시적 원리가 되고 있다.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소박하고 향토적인 정감을 노래할 때도 기저에 깔린 고향 상실감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런 점에서 그의 고향 시편들의 시사적 위치를 조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시적 출발부터 그를 짓누르는 것은 농촌의 수탈상이고 그것의 효과적인 시화였다.
뉘를 위해 아껴왔는지
싹싹 긁어뫃아야 석섬을
두섬을 질어지고가니
흉년이라고 두말을 감해주더라
금년같은해
농사 참 잘되었다구
연방 치하도 하구
장예벼나 속히가주오라구
명령사(命令詞)를 붙이는 지주님
눈초리도 음침하다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돌리니
옆에있는 도야지울엔
누룩도야지가 길게누워 낮잠만자는구나
그-욕심많은 놈이
배ㅅ대지가 여간 불러서야
죽을 저-만큼 남겼을게냐
그놈의 배ㅅ대지
지주님의 배ㅅ대지와 흡사하다
가-마니있자 이도야지가?
그렇지! 우리것과 한날 사왔었지
우리새끼가 원악 적기야했지만
짐성두 먹어야크지!
내꼴좀보지 살한점붙었나
말해야 소용없을줄 짐작은하면서
연기해달란게 나의불찰일가?
안된다면 그만이지
눈을 그렇게 흘겨뜨고
소리소리 지를게 뭬-람
집에 남은 베한섬을 마저
질머지고 나오는 나의꼴을
바라볼 식구들의 표정이
지금부터
눈에 발피구 발피구
- 풀무고개에서
- 「소작인」 전문
작품의 제목 그대로 위의 시는 시적 화자인 소작인이 겪는 수모감과 피탈감을 통해 모순된 농촌의 궁핍상을 노래한다. 식민치하에서 자행된 일제의 착취와 수탈은 농촌이 분해되어 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았을 때 소작인인 시의 화자는 당시 농촌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호승은 소작인에게 과중하게 부가되는 소작제도와 장리제도를 통해 궁핍과 기아가 가중된 당시 부패한 농촌의 실상을 고발한다.
이런 척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소작인의 자탄과 비관이 지주와 소작인과의 계급 모순으로 첨예하게 부각된다. 일제하의 농민 계급은 시간이 가면서 자작농 층의 감소와 자소작농 및 순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고 자소작농은 순소작농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김소월의 시를 살펴보면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순소작농 층의 격증이다. 위의 시는 이러한 농민분화 상태에서 빚어지는 지주와 소작인과의 계급 모순을 시화한 것이다. 그리고 지주는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계급 모순은 늘상 민족 모순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위의 시는 지주 집에 있는 살찐 돼지를 지주로, 삐쩍 말라가는 돼지를 화자 자신으로 우화적으로 풍자하여 지주와 소작인과의 대립적 구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살찐 돼지를 통해서는 지주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부각시키고, 소작인을 마른 돼지로 표현함으로써 자조적인 감정에서 야기되는 자학감을 효과적으로 표출한다. 이처럼 정호승은 지주와 소작인과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감과 극단적인 대립을 통해 소작인의 피학적인 상태를 강력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이는 김창술이 “한녀름 불볏을 실타안고/ 거름주고 붓도다서 / 순집고 벌레잡어/ 잘지어논 이담배를/ 맘대로팔엇다고 잡혀가는이몸!/ 엇지타 이몸은 이농사를 지엇는고”(「매벌(賣罰)」) 하면서 자조적 심사를 노래하는 것이나, 남영(南英)이 끝내는 “고생사리 십년만에/ 먹고입긴 고사하고/ 집도터도 다ㅅ배것네/ 칠백쉰양 빗을젓네”(「추수」)하고 극도의 착취 상태를 노래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정호승은 위의 시에서 당대의 비그적인 삶을 날칼롭게, 그러나 드러내지 않고 내성화하여 표현하는 뛰어난 시적 비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마지막 연, 곧 악랄한 지주의 탐욕으로 인해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베한섬을 마저 질머지고 나오는 나의 꼴”을 바라보는 식구들의 표정이 눈에 발핀다는 것에 있다.
식구들의 표정을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절박함에서 그의 가슴이 조가조각 분해되는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더구나 풀무고개를 오르면서 내딛는 발자국과 눈에 밟히는 식구들의 모습이 “발피구 발피구”라는 운율의 반복을 통해 고개 오름의 고단한 등정에서 슬픔을 감내하려는 화자의 내면 풍경이 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내를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애처로운 운율에 실어 표출하는 것이다. 식구들의 비극적인 모습을 눈에 밟고 갈 수밖에 없는 감각적인 비유는 슬픔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극대화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이는 같은 상황을 노래한 정로풍의 “수확조차 만치안흔/ 가을이 되면/ 황소등에 베ㅅ섬실어/ 지주집으로/ 이것저것 치룬뒤에 한숨을쉬니/ 일년동안 보수업는/ 심부름햇네”(「시골광진곡(狂進曲)」)이나, 남석종의 “논과밧헤 곡식은 다엇지햇노/ 압바형님 저다가 누구주엇나/ 조그만 밧두렁길 발자구마다/ ㅅ더러트린 눈물방울 나는봅니다”(「늣가을들」)과 같은 맥락이면서도 형상화 면에서 돋보이는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소작인과 지주와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시 많은 시들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일곱달동안 ㅅ담흘려가꾼 귀여운곡식이다
벼ㅅ단을훔쳐가는 좀도적을직히려고 기나긴가을바람을 들에서새웟섯다
벼ㅅ단에기대여 기럭이의소리를 자장가로들으며
(중 략)
그러나 나는 ㅅ개달엇노라
이것은 우리의 운수속도아니고 게으름도 아닌것을
- 「추수에서」에서
온식구가 매달려서/ 봄누에를 첫다해야/ 뵈한자도 못사는걸/
누에값도 안되는걸/ 가을누에 또치라고/ 면서기는 야단이지./
검정개만 짖어도./ 동리꾼들 수선수선/ ‘집달리’가 오는가/
‘조합’ 사람 오는가.
- 「농촌애상」에서
지주, 農監, 水稅, 비료/ 그리고 빚쟁이들에게/ 그해의 총결산을
다 치뤘다
- 「농촌행진곡」에서
이 외에도 석영해의 「농부의 노래」, 이천숙의 「전가(田家)」, 정상규의 「보리타작한날」, 이대용의 「범람(汎濫)」, 허무용의 「이웬일인고」, 김동락의 「탄식」, 야화(夜火)의 「벼를훌트며」 등의 시들이 농촌의 수탈상과 그 폐해를 논했다. 이미 박세영을 논하면서 살펴본 바 있지만 1925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많은 시인들이 농촌의 제도적 모순을 시화하고 그것의 타파를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런데 정호승의 경우처럼 계급적인 모순에서 비롯되는 박탈감은 대개는 카프계열의 작가들에서 많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김소월이나 이상화, 그리고 주요한 같은 시인들은 계급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주로 민족적인 위기의식을 본능적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에는 흙, 토지, 들, 대지, 노동 등의 시어가 무수히 발견되지만 소작인, 제도적 모순, 지주, 수세(收稅), 박탈, 차압 등의 시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의 시에서는 농민개개인에 국한되어 인식되는 현실(물론 이들 개인들은 저마다 전형적인 인물로 나타나고 있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지만)이 어느 정도 우세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객관적 정황이 추상화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본 김소월의 후기 시나 박아지의 초기 시들은 물론이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비를다고」,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주요한의 「늙은 농부의 한탄」, 「전원송」 등에서 우리는 쉽게 그것을 확인한다. 잠깐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오랜 오랜넷적부터
아 몃백년 몃천년넷적부터
호미와 가래에게 등심살을빗기이고
감자와기장에게 속기름을ㅅ배앗기인
산촌의ㅅ벼만남은 ㅅ당바닥우에서
아즉도사람은 수확을 바라고잇다
(중 략)
마음도입도업는 흙인줄알면서
얼마라도 더달나고 정성ㅅ긋뒤지는
그들의가슴엔 저주를바들
숙명이주는 자족이 아즉도잇다
자족이식힌 굴종이 아즉도잇다
- 「폭풍우를기다리는마음」에서
이상화가 황폐화된 농촌을 “ㅅ벼만남은 ㅅ당바닥”으로 비유하고 기아로 인해 고통 받는 어린이나 노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노래하면서도, 그들의 모습에서 숙명과 자족의 굴욕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현실적 모순을 시대적 역사적 맥락과 연계시키기 보다는 민족 본래의 감정과 정서에 밀착해서 그것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주요한이 “노래는 드을에 가득히 산에 울려나고/ 향긔와 빗갈은 산에서 드을로 퍼져간다./ 아름다운 봄!양디에보드랍게 풀린/ 흙덩이를 껴안꼬 입마추고시픈봄”(「전원송」)이라고 노래하면서 목가적 전원으로 화한 농촌의 비현실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과 차원을 달리함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이상화도 현실의 질곡을 국토의 대자연에 대한 예찬으로 형상화시키지만 당시 민족적 위기감의 심각성을 깊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카프계열의 작가들이 농촌의 현실에서 계급모순이 전제되는 상황이나 직접적인 원인을 시화하고 있는 것은 농촌의 문제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이후 정당성을 획득하여 현실타개의 적극적인 현안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프가 해산되어도 내발적으로 지속되었던 이러한 시적경향의 직𐩐 간접적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일군의 시인들이 민족의 해방과 그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정호승의 경우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근대의 파행성은 계급적 모순으로만 설명될 수도, 그렇다고 민족적인 모순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특수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일면적인 파악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제치하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반봉건적인 계급모순의 철폐와, 반외세 민족모순을 타파함으로써 바람직한 민족의 해방과 인간해방이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호승의 시는 출발부터 명백한 목적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소작인」에서 본 것처럼 황폐한 농촌과 농민들의 헐벗은 모습을 시화하여 당시의 계급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은 -
독사뱀 아가리로 들어간 개고리는 몇마리
독수리가 채간 병아리는 몇마리
쏟아저나온 내피땀은 몇섬이나 될것이고?
집에서는 지금쯤
죽먹기 싫다거니
보리밥을 달라거니
칭얼대는 자식놈이 발버둥이 칠때다
아마 마느라도
내팔자가 왜 요모양이니
웬수놈의 자식이니
푸념께나 착실히하고
한남은 박아지조차 내부쳐 깼을지도 모른다
(중 략)
점심에 간신히 막걸리 한사발
(그것도 권승지네 김밭에서
춘봉(春奉)아범 덕택으로 얻어마신술이다)
새이도 못먹고 단마지기 김을 매다니
참 ! 내힘두 어지간하다
- 「뻐-ㄴ이알면서」에서
위의 시 역시 앞서 살펴본 「소작인」과 주제면에서 유사한 측면을 많은 부분 공유한다. 위의 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농촌의 피폐한 현실의 이단을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기계처럼 일만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수탈만 당하는 당시의 농민의 실상이 “점심에 간신히 막걸리 한사발”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소작인」에서 지주를 살찐 돼지로 소작인 자신을 마른 돼지로 비유한 것처럼 여기서도 “독사뱀”과 “독수리”를 착취자의 대명사로,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소작인들을 “개고리”와 “병아리”라는 힘없는 동물로 비유하고 있다. “내피땀”과 “개고리”, 그리고 “병아리”가 동시에 배열된 것은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일상적이어서 당시의 시인들에게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터 술도가(都家)문앞에서는
술찌게미 사러온村사람들이
고닲은 한숨을짓는다.
아-평화하다는 고향의봄!
울타리옆 어린감나무 가지에
(중 략)
어제ㅅ 날 이때-소리개의 발톱에체여간
다음배병아리를 생가하는듯이
야웨인암닭은 날개를 펴치고
눈을 내리깜는 한낮-
축돍애 거터앉은 돌쇠어머니는
뼈만남은 손구락을 꼬저
x에간 아들의 도라올날과 아득한보리ㅅ 때를헤아린다.
아-평화스럽기 짝없고-
살기와경치좋기로 일흠난고향.
- 「고향」에서
넓은 하늘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날
뜰 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또락또락 겁을 삼킨다.
- 「마을」에서
「고향」에서는 소리개와 배병아리와의 공포적인 관계가 대립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 이는 수직적 구조 대립에서 연상되는 수탈의 위계질서를 표상한다. 그럼에도 농촌의 궁핍하고 고단한 현실을 “평화스럽기 짝없고-/경치와 살기(후반부는 ‘살기와 경치’로 되어있음)좋기로일흠난 고향”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여(그것도 2번씩 강조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강력하게 폭로한다. 이외에 병아리의 숨통을 끊는 삵쾡이의 잔혹함으로 계급모순의 참상을 묘사한 김창술의 「병아리의 꿈」 그리고 조금 다른 비유일지 모르지만 ‘꿩’ 과 ‘포수’의 관계로 계급모순에서 야기되는 수탈의 일방적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꿩새끼」 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이라는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먹이를 쏜살같이 채어갈 듯이 노리고 있는 솔개미의 음흉스러움과, 제 그림자에도 놀라 도망가는 암탉의 힘없고 겁먹은 표정에서 공포로 환기되고 있는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우화적인 상징기법은 현실의 우회적인 비판이고 풍자라는 점에서 현실의 악화로 인해 현실을 정면 돌파하지 못할 때 사용되는 기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호승의 「우울」 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솔개미는 하늘을 맴돌고/ 땅우에는 병아리떼가 어미품으로 쫓겨드는꼴/ 여기에 싸움이 내전망(展望)을 훙분시킬제/ 이 우울이 귀착(歸着)하는곳이/ 어찌 네 젓꼭지 뿐이랴만”(「우울」)이 그것인데 특히 농촌을 소재로 한 시들의 경우에 병아리나 솔개의 대립적 비유가 사용되는 것은 농촌에서 흔히 경험하는 체험에서 시적 비유를 도입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사료된다.
이처럼 황폐화된 농촌의 묘사는 정호승의 시적 출발부터 마지막 시로 알려진 「우울」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규정하는 시적 원리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향 상실감과 박탈감을 노래한 시의 예를 드는 것은 그의 시 전체를 거론해야 할 정도하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현실 원리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의 시가 현실의 맥락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수탈이 자행되어 참담하게 변모한 고향으로부터 오직 살기 위한 목적으로 북쪽으로 쫓겨가는 유랑의 무리가 간단없이 발생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2) 와해된 고향의 향토적 치유
“가난한 굴둑들은 모양 모양/ 내 한숨인양 실날같은 연기를 흘리”(「노래를 잊은 이몸」)고 있는 고향은 한심스럽기만 하다. “이름이 고향이라 요람마저 우울쿠나”(「우울」)라고 자탄하게 되는 고향의 처참한 현실에서 누구라도 마침내는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의 이향은 수탈의 현장을 부각시킬 때 이미 예건된 것이었다. 그의 시 곳곳에 음화처럼 숨겨진 이향은 살기위한 본능적인 욕망에서 발로된 것이다.
기와집 대말냉이로 노적데미가 솟든날
지어논 나락은 입에도 모대보고
고향을 등지는 행렬이 잣든가을
한마듸 말도 건늬지 못하고
끌여가든 오빠와 그가 있기때문이요.
황소와가치 힘차든 오빠
굳세이 뜻을품은 그(님이라기는 마음이 허락지 안으오)
갈곳도 없건만 고향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붓잡지 못해서 애ㅅ타하든 꼴을 나는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르오
-「잡스런 이몸」에서
그럼 잘 잇거라
다시 내고향아!
호박꽃 사탕 우물에 아침별 몸ㅅ될몸
기차를 탄다.
목을 놓고 불러야 울어야
지붕우의 박꽃은 대답은 없고
모래알 하나 울어주지안는
하그리 가느른 나의 휘파람
풀무고개 성황나무 가지에
내넋은 파랑새되어 앉는다
송아지의 애련한 게여 끝에
거듭 아금질은 눈물겹다
기차는 철교우로 달린다
못미덮다 잘잇거라
내루ㅅ배 건네는 낯선벗아
내마음도 장돌뱅이
- 달내江을건느며-
-「고향을 떠나며」에서
가장 풍요로운 수확의 계쩔에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박탈의 현장이 의 시 “노적데미가 솟든날/ 지어논 나락은 입에도 못대보고”에 집약되고 있다. 그리고 “고향을 둥지는 행렬이 잣든 가을”은 꼬리를 물고 지속되는 이향이 하나의 가을 행사처럼 다반사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가을이 수탈의 강력한 고발을 위한 중심적인 소재로 취급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도 확인한다. 오빠와 아직 님이라고 하기에는 화자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그”가 굳센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지만 실상 “갈곳도 없”이 떠날 뿐이다. 큰 뜻을 품고 떠났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고 그들이 가진 것은 고작 “황소”같은 힘 뿐이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대립 구도처럼 고향에 부조된다.
어쩔 수 없이 쫓기듯 고향을 등지는 이러한 사태는 해마다 양산되었다. 그리도 남겨진 사람들은 끌려가듯 고향에서 내몰린 사람들을 “붓잡지 못해서 애”만 태운 것이다. 향하는 곳이 어디건 간에 그래도 여기 보다는 낫다. 해마다 줄지 않는 이향의 행렬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한국의 농민을 만주로 진출시키려는 일제의 계획으로 1936년 이후 급속히 진행되는 유출인구의 증가는 1930년대의 일제의 농촌에 대한 학정이 보다 악랄하게 진행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떠난 자들은 말이 없다. 위의 시는 고향에 남겨진 화자인 정애가 죽심(竹心)이라는 가명의 술집여자로 타락하는 과정과 그러면서도 떠난 오빠와 “그”를 기다리는 한가닥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처참한 삶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우리는 “죽심(竹心)”이라는 이름에서 말 그대로의 변치 않는 절개를 느낄 수 있고 이를 통해 조국 해방의 미래를 간곡하게 갈망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푸른잔이 넘쳐흘으도록 따루는 술/술잔을 두손으로 받드러 올니어야만 하는/이 정애도/ 아니 이 죽심이의 가슴속 깊이도/ 항상 떠오르는 실낮같은 희망이 있다우”(생략한 5연)는 고향을 떠난 오빠와 ‘그’에 대한 변치않는 기다림, 곧 그들의 귀환을 통해 해방에의 확신을 귿센 의지로 피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시가 당시의 한 전형적인 인물의 자신을 억압하는 구체적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을 형상화함으로써(「소작인」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자칫 추상적이거나 도식적인 것으로 흐를 수 있을 시적 작위성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가난과 기아로 인해 술집 접대부로 전락하는 여성의 파멸상은 당시 수다했다. 예컨대 이찬이 “오오 옥순아? 너는 참으로 불상한 게집애였다/너는 참으로 가엽슨 게집애엿다// 오 가난해서 나서 가난에서 자라/ 열넷의 느즌 봄에 두 어버이 다여희구/ 행길가 주막집의 머슴이되여/ 음탕한 손(客)들의 조롱과건드릠에 숫처녀의볼작을 붓그럼에 태우”(「안해의 죽음을 듣고」)다가 끝내 죽어간 여성의 비참한 몰락을 얘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시인들은 이향의 심각상과 함께 어쩔 수 없이 타락의 길로 전락한 여성들의 실상을 통해 한국의 참담한 현실을 다각적으로 조감한 것이다.
정호승 역시 그러한 비참했던 사건을 토대로 하면서도 그러나 실날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여성의 의기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서 의 시는 이향하는 자의 입장이 고려된 시이다.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자의 아쉬움을 통해 떠남이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떠나는 자는 현재 달래강을 건너는 기차에 승차해서 차창으로 밀려가는 고향의 후경을 바라보고 있다. 고향을 멀리하면서 기차의 속도만큼 이나 그의 몸은 멀어 지겠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고향을 향한다는 것이 이 시의 주된 의도이다. 그럼 잘 잇거라/ 다시 내 고향아 ”하고 떠나면서도(위의 “다시”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향이 일회적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내넋은 파랑새 되어” 풀무고개의 “성황나무 가지에” 앉는다는 것은 비록 육체는 떠나지만 정신은 고향에 끝내 남겨진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다. 어쩔 수 없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제 모순이 구조적이고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자신을 고향에서 내몰지만 마음은 결코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비극적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몸은 비록 어느 곳에 처해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변치 않을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궤멸되어 가는 고향에서 쫓기듯 떠나기 보다는 오히려 고향에 끝내 남아서 와해된 고향을 복원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임을 그의 시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고향을 떠난 후에 강력한 향수에 젖는 나그네의 심사를 옲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호암제(虎岩堤) 고인물이 자유를 잃고
대해를 찾어 흐르는 한강수를 동경할 때
시인의 아들을 갖은 어머니의슬음을 위로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몸이 고달퍼라
아버지의 싸늘한 시체가
청금정(聽琴亭)뒷산 솔밭속에 묻어지든날
다정하시든 할머니의 무언(無言)이되신 원인도모르고
어머니의 목노와우시는 영문조차 모르든 시절엔
끝없는 지평선을 더듬어 보지도 않았건만-
깊어가든밤 외로히 차듸찬 달그림자에 왼몸을 의지하고
문허진 성터에숨은 슬픈전설이나 짜내는 듯 나의 넋은
고향의 울든곳 웃든거리를 누비질하여 보느니.
아침마다 계족산(鷄足山) 등허리로 웃는 태양을 토해놀 때
지개우에 오순도순 이야기를 싫고
풀무고갤 넘어 이심니
마지막재우로 꼬부라진 나무ㅅ길이 눈앞에 선-ㄴ하다.
아아 정겨워 뛰놀든 나의옛요람터
지금쯤은 이웃을 모르는 물싸움으로
가난한 보금자리에 아름답던 情도 바서지고
모실애ㅅ 넓은들은 누르렇게 무르익어
뉘 모가치가 될는지 너울치고 있을게다.
엷은 석양노을이 다소곳이 바치이는 우물등치에
타리박줄로 그르내리든 고흔꿈은
장구채에 맞추어 물없이 시든다고!
옷자락이 찢어지도록 부뜰고 놓지않든 정애
뉘라서 아즉껏 너만을 머물너 키워주겠니
-「씹어보는 내고향」에서
이 시에서 고향은 화자에게 “아아 정겨워 뛰놀던 나의옛 요람터”로, 그리고 파괴되거나 훼손하기 이전의 원형으로서의 삶이 터전이고, 혹은 아버지가 고향의 땅에 묻히실 때 까지도 아무 영문조차 모르고 자라던 어린 시절의 꿈이 보존되어 시인의 의식에 남겨진 구원의 공간이다. 이러한 고향은 행복함의 원체험으로서의 표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가 생각하는 고향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만큼 고향은 영원한 구원의 패턴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화자는 그러한 위안의 태반에서 “어머니의슬음을 위로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후에 회한에 잠긴다. 이것은 왜인가. 무엇이 “가난한 보금자리에 아름답던 정도 사라”지게 하여 이웃간의 물싸움을 이끌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넓은 들의 풍요를 박탈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게 하는가. 그리고 왜 떠나게 하는가.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농촌의 가혹한 수탈에서 야기된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이향할 수밖에 없었던 고향 상실감의 구체적 양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향에 대한 그의 향수가 이향한 자의 상투적 그리움에서 발로된 것이 아니라 붕괴된 고향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희망을 담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화자는 “밉쌀머리 스러운 내 고향 밉다가도 그리워/ 놓지못한 실날같은 미련이”(생략된 7연 1행)남아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고향을 상실한 자의 좌절감과 불안감은 고향의“정솟든 곳곳만을 헤매을가도/ 울음이 솟을 듯 억지한 가슴”(생략된 7연의 3,4행)이라는 비극적 심사로 시화된다. 이처럼 그의 시는 고향을 상실한 자가 고향의 곳곳을 “울든곳 웃든거리를 누비질하며” 그리움의 상처를 눈물겹게 기워내는 심사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감의 다양한 면모를 다각도로 표출한다.
살펴본 것처럼 정호승은 지주와 소작인과의 대립을 통해 농촌의 수탈상을 부각시키고 이향하는 무리들을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훼손되고 파괴된 농촌의 참담함을 이향하는 자의 괴로운 심사로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적 삶의 붕괴를 방치하지 않고 향토적 정서를 통해 훼손된 분래의 고향의 모습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궤멸된 농촌의 실상과 그것의 회복을 거의 동시적으로 나타내지만 실은 와해된 공동체인 고향의 복원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 다음의 시는 그 좋은 예이다.
아롱아롱 아지랑이 방정맞고
종알종알 종달새 밉살스럽다
이봄은 또 무슨 억와심정으로
이상을 연장시킬 준비를 장만하는게냐?
씀바귀 잴강잴강 씹어씹어 침을 삼키며
어제를 더듬어서 오늘 논둑우에 외로이 서
내일을 주름잡어보는 두려운 이몸
밭고랑 논둑길에 한숨 뿌리며
(비령 햇빛 양지쪽에 할미꽃 시들기전에
북국은 춥다는데 돌아왔으면)
몸부림 치고싶다 몸슬놈의 학선(學先)아 !
손꼬락 꼽아꼽아
시계바눌따라 이눈동자 몇백번 들았든고
옆에 낀 바구니에
냉이 한오콤 씀바귀 한오름
한숨만이 새지도 않고 넘쳐흐르는 구나
저-풀무고개 넘어도
소몰고 오는 목동들
무슨 情다운 이야기를 저리도 실고오는고?
네가석여 있던날은 사년전 웃음웃든 날
울음울며 보내든 날도 해로는 사년
아- 바라보는 눈알이 몹시도 맵다
(중 략)
학선아 ! 어서 오렴
양복모습 보기싫고 돈조차 귀치않다
나를두고 떠나가든 그때와같이
훗주의 적삼에다 집신으로 돌아오렴
풀무고개 말냉이를 바라보면
아지랑이만 아롱아롱
네 환영조차 빼아서 가는구나
논갈기십년에 남은 것은 惡뿐이라고
이를갈어 제치몀
이상을 현실우에 세우고야 말겠다고
주먹을 곤두세워 휘들을 때
핏줄섰든 네눈알을 지금인들 잊었겠니
(중 략)
냉이국은 누굴주며
씀배나물 무엇하리
먹을나니 아깝고
들나니 시들겠고
팔자니 돈안되고
캐기는 캔다마는 처치하기 어렵구나
기약은 돈많이 버는날
소식은 전혀없어
이봄도 못올줄은 어렴풋이 알겠구나
(중 략)
내 호미ㅅ자루 팽개치고
풀무고개 단숨에 넘어
네뒤를 따라감아
-「불안이풀리든날」에서
위의 시는 총 18연으로 이루어진 장시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시가 35편이지만 시집의 분량면에서 여타의 시인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위의 시처럼 사건 전달을 통한 이야기 전달의 성격이 강한 서사지향성의 시들의 주로 창작되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은 예상보다는 명료하다. 명료한 것은 그가 그만큼 당시의 한국에서의 핵심적 현안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가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 지향성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알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내포함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수탈로 인한 농촌의 황폐화 → 북국으로 쫒겨감”의 구도로 나타난다.
농촌의 수탈은 지금까지 얘기해 온 것처럼 일제가 자행한 농촌의 실정에서 찾아진다. 위의 시에서 농촌의 봄을 빼앗긴 곳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것을 대변한다. 농촌에서 봄의 대표적 표상인 아지랑이와 종달새가 “아롱아롱 아지랑이 방정맞고/종알종알 종달새 밉살스럽다”로 표현되고 있는 것도 봄의 새기운이 결코 우리가 기대하던 바의 봄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봄은 또 무슨 억화 심정으로 이상을 연장”시키려고 하는가, “이봄도 못올게냐 ?”(생략된 9연 5행) 하는 불안한 의문을 품게 한다. 그리고 “또” 라는 것에서 농촌에 자행된 수탈의 일상을 떠올린다. “논갈기 십년애 남은 것은 악뿐”이라는 화자의 자탄은 그래서 심상치 않다. 이것은 “홋주의 적삼에다 집신”바람의 학선이가 고향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4년전”에 그 춥다는 붑국을 향해 쫒기듯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학선”이가 북국으로 간 이유는 “이상을 현실우에 세우”기 위해서다. 여기서 우리는 박세영의 경우처럼 “학선”의 이향이 뚜렷한 목적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달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계속되는 굶주림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끝내 독립의 투쟁성을 강력하게 유지한 박세영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정호승의 시는 보다 기아에 치중해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양복이나 돈은 떠나간 자가 희구하는 물질욕의 총체적인 비유이지만 실상 농촌의 궁핍과 기아를 부각시키는 징표이다. 그래서 “기약은 돈많이 버는날”이지만 북국에 간 후로는 “소식은 전혀없”이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된다. 떠난 자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북국은 두려운 미지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호미 자루 팽개치고 북국으로 가겠다는 의욕을 불태우는 것은 당시 농촌의 핍박상을 오히려 강하게 전경화하는 것이다. 이는 박세영의 시 「다시 또 가는가」에서 확인된 것과 일맥상통하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봄은 수탈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좌절의 표상이다.
일제시대의 시 속에 등장하는 봄의 이미지는 농촌을 소재로 한 시의 경우 대체로 수탈의 악랄함을 고발하기 위해 선택된다. 박세영의 시에서 가을이 그랬듯이 많은 시인들은 현상적인 봄은 왔으나 본질로서의 봄의 도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함으로써 한국 현실의 암흑기를 노래한 것이다. 유완희의 「춘영(春詠)」 , 「봄의서울밤」, 허삼봉의 「소의 통곡」, 하해룡의 「나물캐는 처자」, 월탄의 「봄」, 정영의 「봄」, 박응삼,「뵈짜는 소리」, 조벽암의 「봄」, 이봉환의 「제비」, 동선의 「헛가마」, 이병각의 「봄의 레포」, 「고향」, 한죽송의 「방아찧는 처녀」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봄을 소재로 한 시들은 정호승의 위의 시처럼 수탈된 농촌인 봄의 현장에서 북으로 떠난 사람에 대한 유랑의 정한을 노래하는 것도 많지만 다시 두 분류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신생의 봄과 어긋나게 농촌의 수탈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춘영」,「나물캐는 처자」,「소의 통곡」, 월탄과 정영 그리고 조벽암의 같은 제목인 「봄」, 「봄의 레포」, 「고향」이고, 두 번째는 수탈로 인해 황폐화한 고향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북쪽으로 휩쓸려간 사람들의 유랑의 비애를 노래하기 위해 봄이 배경으로 처리된 것으로 「봄의 서울밤」, 「방아찧는 처녀」, 「제비」, 「헛가마」 등이다.
이처럼 정호승은 농촌에서의 봄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농촌의 수탈상을 부각시키지만 그의 작품 속에 산재한 향토성을 동반한 표현기법을 통해 그것에 대항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호승의 향토성에 대해 살필 겸 김소월과 박세영의 시를 검토하면서 논의하려다가 미루어 두었던 토작어와 시의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일수 있다는 사실”의 보편적인 측면을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제시대에 이들이 보여준 토착어 사용의 의미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민족의 상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언어의 상실 속에서 고유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시를 창작했다는 것은 결코 예사롭지만은 않다. “외래어 및 외래 한자어의 무절제한 수용의 거부와 토착어 지향성이 한국 근대시의 자기 발견과 자기 동일성 성취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던 시절이 바로 일제 식민지 치하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제 식민치하에서 토착어를 사용한 행위는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유종호 교수가 김소월을 두고 “단 한마디의 외래어도 쓰지 않았던 시인”이라고 하여 극찬한 것이나, 박세영이 자신의 어휘 부족을 토로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던 때는 항상 그들의 언어에 유의하여 적기도 하고 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사용해 보는 방향에서 노력했다”고 고백하고 “민요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나는 여기서도 풍부한 우리말을 섭취했으며 이를 창작에 도입하기에 적극 노력하였다”고 한 것도 한자어를 배척하고 우리말을 쓰려했던 시인들의 노력의 일단이다. 왜냐하면 모국어 그 자체가 “한민족의 정신의 총체요, 그 민족의 사고와 감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면모를 우리는 앞서 살펴 본 시들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정호승의 경우 이러한 토착어 지향은 크게 두 가지로 찾아진다. 첫째는 생득적인 농촌어의 시화이고, 두 번째는 민요적이고 동요적인 운율의 구사이다. 이것은 추상적으로 농촌의 실상을 노래하지 않고 그가 농촌의 실제적인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한 경험에서 유출되어 나타난 진솔한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전술한 것처럼 운율에 대한 것은 당장 1연의 “아롱아롱 아지랑이 방정맞고/종알종알 종달새 밉살스럽다”, “문풍지 쥐여뜯어 입어물고/ 잴강잴강 씹으며”(「고독」)에서 발견되는 ‘ㄹ’,‘ㅇ’ 음의 주기적인 반복이나. “씀바긔 잴강잴강 씹어씹어 침을 삼키며”에서의 ‘ㄹ’,‘ㅇ’과 경음의 반복적교체, 그리고 “냉이국은 누굴주며/씀배나물 무엇하리/먹을나니 아깝고/들나니 시들겠고/팔자니 돈안되고”, “비온다고 핑계대고/ 바람분다 핑계대고”(「귀여운손님」),“울타리에 호박꽃/ 지붕우에 박꽃도/ 쓸쓸히웃고 시들었소” (「길」) 등의 전통적인 4.4조 가사체의 반복을 통해 농민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 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토착적인 정서에 깊게 침윤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이러한 리듬감각을 통해 우리는 농촌의 피폐한 실정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호승은 내발적으로 계승되어 온 전통적인 운율과 토착어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당시 우리 농촌의 “경험의 원형적 패턴”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고, 우리가 자연스레 그 경험 속에 녹아들 수 있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해 준다 하겠다. 그래서 그의 시는 박세영의 경우처럼 확고한 이념에 의해 현실에 맞서는 것 보다는, 이러한 향토적 정서의 복원이 오히려 와해되는 고향을 복구하는데 보다 적극적이고 설득적인 대응일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가 구사하는 나물 이름을 통한 음실물의 용어 구사나, 구체적인 지명의 시화는 민족애를 자극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향토적인 시어가 생경하게 구사되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화자의 신분에 적절하게 적용되고 그것이 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시가 환기하는 향토적 정서에 침윤되는 것이다. 위의 시의 화자가 농사짓는 여성이기 때문에 음식과 관계된 시어가 화자가 처한 현재의 정황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고향의 정경을 부각시킬 경우는 나무나 새등의 시어를 통해 그것을 회화적으로 표출한다. “논두덕 개고리들 재빠른 합창의 운율과/ 뜸벅새 목청을 가다므어 띠업디업 심그노니/ 깊은 산중 녹색질어 호젓한 음영 속 뻑국/늡독수양버들 숲속에는 꾀꼬리가/.../또한 강근너 지터있는 녹음속 향기우에 우짖는 물새”(「전원교명곡」)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그가 고향에 터전을 두고 그러한 체험을 생득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묘사들이라 했을 때 그에게서 박세영이나 김소월등과 또 다른 면모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백석이 지방어의 독특한 사용으로 공동체의 회복과 나아가서는 국가 상실로 인한 심리적인 결핍을 충족시키려고 한 것을 상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정호승은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적 모순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극복을 민족의 경험에 기초하여 내재적으로 계승된 전통적인 운율과 생래적인 토착어를 통해 이루고자 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30년대 중반 이후 세력이 약화된 프로문학의 시세계가 새로운 시형식을 찾는 작업에서 시사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민문학에 대한 내용과 형식간의 문제는 그나마 소설 쪽에 비중을 두고 백철이나 안함광의 논쟁을 통해 1931년과 32년 정도에 국한되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한빛이나 임연에 의해 진전되어 이후에는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정호승은 이론적 차원에 머문 당시의 공소한 논의를 극복하여 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문학의 창작 방법에 대한 실종상태를 정호승의 시가 창조적으로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의 연구는 창작방법과의 연계하에 보다 본격화 될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는 고향의 지명인 “풀무고개”와 고향 산천을 수놓는 “모밀꽃”을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 속으로 확대시켜 우리를 공감하게 한다. “풀무고개”나 “모밀꽃”은 김소월의 “영변의 약산 진달래” 정도의 깊은 감동은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고개를 넘어가는 행위가 고향을 상실하고 북쪽으로 쫒겨가는 당시 민중들의 모습이며 이를 통해 민족적 비애를 형상화 한다고 했을 때, 고개의 의미는 김소월의 경우에서처럼 우리에게 고향 상실의 보편적인 표징으로 기능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풀무고개는 자신을 키워 내는 터전으로(「잡스런 이몸」), 쫓기듯 도망한 이역에서 고향의 그림움을 상기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호로 (「씹어보는 내 고향」), 고향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고향에 대한 한없는 미련을 간곡하게 표현하기 위한 징표로(「고향을 떠나며」), 그리고 정겨운 고향에 대한 수탈상을 서러워 하는 장소로(「우울」) 다채롭게 변용되고 있다. 김소월이나 이은상, 이찬의 시에서 적유령이나 추풍령등의 험난하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는 행위를 통해 고향의 떠남이 결코 자의적이 아니고 타의에 의한 것임을 부각시킨 반면, 정호승은 험준한 고개는 아니라도 고향의 정든 고개를 넘어가는 행위를 통해 고향에 대한 미련을 강하게 드러내 토착적인 정서를 환기시킨다.
마찬가지로 메밀꽃의 형상화는 당시의 농촌현실의 수탈상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작용하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모밀꽃을 시집 제목으로 선정할 만큼 그의 시에서 중요한 제제로 다루어 지고 있다. 시집의 서문에 자식을 “들 가운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로 비유하고 “소슬바람에 풍겨오는 모밀꽃 향기를 사랑한다”고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에서 메밀꽃을 시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모밀꽃 1」,「모밀꽃 2」이다. 「모밀꽃 1」에서는 메밀꽃은 “어느 여인의 /슬픈 넋이 실린양/ 헷쪽이 웃고 쓸쓸한” 꽃으로, “그 여인의 마음인양” 하얗고 깨끗하게 피는 꽃이나 “가난한 꽃” 이고 그러나 “그 여인의 마음인양/외로이 피는 꽃”으로 변주 되는데 이러한 다면성은 물론 시인의 감정이입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시대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메밀꽃처럼 맑고 순수함을 동경하고 사랑하지만 그것이 좌절되고 거부되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시는 서정성이 강조되어 현실과의 갈등이 고조될 때도 기저에 깔린 사회적 맥락과의 연계고리를 풀지 않는다. 그리고 향토적 정서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밀꽃 2」에서는 모밀꽃의 풍요와 개화를 통해서 나라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을 노래한다. 특히 나라가 가난하고 마음이 가난해 질 때 메밀꽃이 만개한다는 역설적 의미를 통해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그가 고향의 아름답고 순수한 정경을 노래해도 기저에 깔린 사회적 의미를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이외에도 “가난한 메밀꽃”(「잡스런이몸」),“가을이면 간나한 메밀꽃 향기로운 산기슭”(「나는 송아지가 좋아」) 등은 모두 모밀꽃의 시적 문맥 속에 당시의 시대적 의미가 부각되고 있는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토착어의 지향과 민요적인 운율의 자연스러운 구사로 독특한 향토성을 발휘하고 있다. 더구나 위의 시에 나타난 화자는 여성이다. 여성 화자를 내세우는 것은 “여성적인 것은 절박한 상황과 어두운 현실에 항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민지 상황에서 저절로 나올 수 있는 대개의 여성화자가 현실에 대한 좌절 등을 통해 허무주의에 침윤되는 낭만주의의 면모를 노래하는데 위의 시의 화자는 풀무고개를 넘어 학선이가 있는 북국으로 향하겠다는 결의를 통해 남성적인 면모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3) 상실감의 변이 양상과 그 의미
고향의 상실에서 비롯된 한국인의 궁민화로 살길을 찾아 고향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었던 뿌리 뽑힌 한국 사람들의 황폐화된 삶의 조건이 정호승의 시에 작품화 되고 있음은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런데 그의 시는 구체적인 토지 상실에서 비롯되는 박탈감을 강하게 외현화하고 고유어 사용이나 전통적인 운율의 사용을 통해 그것에 대응했지만 30년대 말기에 오면 차츰 약화되는 양상을 나타낸다.
이때가 되면 그는 조국의 상실과 그 비애를 직접적으로 외화하지 않고 님 상실, 벗 상실 등의 폐쇄적이고 개별적인 상징으로 변이시킨다. 슬픔의 추상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이러한 개인적 상실감은 허무와 절망을 동반한다.
왜 우느냐고 묻지를말고
푸드득 깃을차고 나르고 싶은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 긴하염을 뿜어를내며
끓어오르는 말못할 기흔을 잴강잴강 씹어를 보렴
씹을사록 치미는 낮모르는 슬픔
나역시 구슬피 무엇인지몰라
그저 하로종일 흐느껴 울고만싶다
목맺혀 흐느끼는 이 안타까운 00을
오즉 내 손수건뿐만이 위로하야 즐 것을
헛되이 운다고 탓하지마라
목놓고 울다 울다 선지피를 토하면
깨운할거와같은 이 심사의 비위를 못마춰 줄게 뭐냐
허공을 물고누어 바드둥거리는 목숨으로
간사스러이 찧고까불어 주서마추는 삶에
욕지기나는 오늘을
시궁에 처박고싶은마음
(중 략)
모든 것을 코웃음치고 제멋대로 내버려둘가부다
나라를 늘굼도
사상을 품음도
님을 불음도
어디 마음대로 찧고 까불어보렴
-「이마음을 알나거든」에서
까닭없이 슬퍼하는 화자의 비탄이 “욕지기 나는 오늘을/ 시궁에 처박고 싶은 마음”으로 형상화되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그저 “까닭모를 슬픔”(「우울」)이다. 이처럼 위의 시는 주관적인 화자의 애조 띤 정서만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추상적인 슬픔의 강도만이 느껴질 뿐 그 의미를 탐색하기가 지난하다. 왜 “그저 하루종일 흐느껴 울고만싶”은지 우리는 헤아리기 어렵다. 화자 역시 “나역시 구슬피 무엇인지몰라”하고 낮모르는 슬픔을 오열할 뿐임을 고백한다. 이는 “마음을 어느때나 내일을믿고 바라며 꿈꾸나/ 속여서 오늘은 언제든지 슬프구나”(「슬프구나」)를 통해 상실된 조국의 굴욕적인 삶에서 야기된 박탈감과 관계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여지는 있다.
이는 또 위의 시에서 동일한 범주로 병치되고 있는 ‘나라’와 ‘사상’과 ‘님’의 관계망에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연관에서 슬픔의 구체적 원인을 파악할 일말의 통로를 우리는 마련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와 사상과 님이 함께 공유하는 내포는 무엇인가. 치욕스런 식민지 현실에서 이들이 함축하는 의미망은 과연 무엇인가.
해마다 봄이오면
나는
한가지 꽃을 피우기위하여
만가지 잡초를 솎어왔소
그러나
아!
꿈심은 터전엔
회오리바람도 잦았소
뜯맞는 벗들은
생활이 아서가고
사랑은
생활아닌 생활이 짓밟었소
-「나는 탕아」에서
위의 시에서 우리는 각 그토록 슬퍼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연하지 않지만 추측은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것은 “해마다 봄이” 왔을 때 “한가지 꽃을 피우”는 것과 관련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만가지 잡초”를 제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러한 노력의 절정이 끝내 꽃 피우지 못하고 좌절로 나타났을 때의 침통한 심정이 나타난 것이 위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곷”이 상징한는 의미는 “잡초”와 “회오리 바람”과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시에서 봄의 상징은 희망의 표징이다. 「불안이 풀리든날」에서 느끼는 봄에 대한 좌절감도, 봄이 희망의 상징으로 인신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현상이다. 그럼므로 봄의 햇살은 그 이상의 기대를 예비한다. 그것은 “가난한 살임사리 따거운 삶/ 햇볕이 마음속에 차디찬날/ 살어야할 모든 생명을 위해/ 햇볕은 다시 찬바람속에 따시다”(「조춘」)에서처럼 고난을 극복하고 희망의 도래를 예견하는 강력한 힘의 원형적 심상인 것이다.
봄과 꽃의 희망찬 교유와 합일은 낡고 묵은 것을 털어내고 새날의 기약을 다짐하는 경쾌한 몸짓과도 같다. 이는 “동백나무가지로 꽃봉오리 실고가는/봄바람의 발자취”(「고독」)처럼 가슴 설레는 것이고 “순정을 담뿍실고/ 히망에 붙붙는 눈초리/ 기쁨에 아양피우는 입모습”(「찔레꽃」)처럼 청순하고 향기로운 정취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 진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의 좌절과 관계있다. 시드는 메밀꽃 가난과 슬픈 넋이 교호되는 것(「모밀꽃 1」,「모밀꽃 2」), “울타리에 호박꽃/ 지붕우에 박꽃도/쓸쓸이웃고 시들”(「길」)때 슬프다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도 그의 시에서 꽃이 함축하는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꽃은 “웃음의꽃”(「상흔」)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해마다 봄이 올 때 꽃을 피운다는 의미가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다. 꽃의 개화를 염원하는 것은 민족의 해방과 빛나는 새날을 기대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비록 봄바람을 실고 오는 “님의발자최는 몇 번이고 실망만을 실어오나/ 그래도 무엇을 엿드를나 설네는귀”(「고독」)처럼 봄이라는 계절의 순환과 꽃의 개화라는 우주적인 원리를 통해 마땅히 도래할 민족의 새날을 기원했던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잡초나 회오리 바람 등이 지시적 의미로 쓰여진 것임을 알게 되고 기존의 관습적인 의미를 재확인 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활이 벗을 앗아 갔다는 것, 그리고 생활 아닌 생활이 사랑을 짓밟았다는 것에서 당시의 악화된 객관적 정세에서 희생된 벗과 님임을 이해하고 이러한 벗 상실이나 님 상실은 국가나 고향 상실과 동궤에 놓여진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조국의 상실을 개인적인 상실로 축소시키긴 했으나 이는 파행적으로 전개된 당시의 한국적 정세에 나름대로 대응하고자 했던 방법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융에 의하면 무의식의 저장소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끌어 내는 긍정적 의미로서의 자기 방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력의 한 징표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슬픔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극복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살펴볼 수 있을 듯 하다.
나는
벗에게
님에게
거짓말을 하였소.
되지않을 일을
된다하였고
마음애 맞이않는일을
허락하였소.
내가 준 희망
조고마한 꿈들이
깨여지든날
얼마나 가슴이 따거웠겠소
그러기에
벗은 나를 떠나가고
님은 나를 미워하고
외로움뿐만이 남어있소.
(중 략)
벗이여
님이여
그래도 나는
내일도 거짓말을 할것만같소
-「나는 놈팽이」에서
위의 시에서도 우리는 벗 상실, 님 상실의 면모를 엿보게 된다. 님과 벗이 내곁을 떠난 것은 표면상으로는 화자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짓말이 예사로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왜냐하면 벗 과 님이 나의 거짓말로 인해 떠나고 없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마당에 다시 “내일도 거짓말을 할 것” 같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한 거짓말은 새날의 기대와 희망에 관한 것이다. 화자는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계속적인 다짐을 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조국으로 비유되는 님과 벗은 그러므로 영원히 자기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거짓말을 하면 벗과 님의 떠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이라는 어조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표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우회는 마치 “가혹한 일제의 검열 제도로 하여 정열을 한 곬으로 쏟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리어 쓰기도 하고 때로는 우회 작전을 해야 했으며 또 상징적 수법으로 쓰지 않을 수 없었” 다고 한 박세영의 글을 연상시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악화일로를 치닫던 당시의 한국적 현실에서 조국의 상실을 개인적인 상실로 축소시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호승의 내면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세계화의 마찰에서 비롯된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가 오히려 갈등의 심화로 연계될 수 있음을 그의 시는 보여준다. 여기서 그의 시는 서정성과 이념성이 상호 교호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것은 1930년대부터 날로 강화되는 일제 파시즘의 전면적인 공세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로 노동쟁의나 소작쟁의가 감소하고 있는 것도 일제가 한국의 국토에 전면적으로 자행한 악랄한 탄압과 관계있는 것이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전쟁을 개시하여 파쇼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노동자의 검거, 투옥, 집회의 금지, 노동단체의 해산등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여 조선인 노동자의 투쟁은 폭력적 성격을 띠고 20년대에 비해(1920년대에는 100건, 1만명이하) 인원면에서 조직적인 면에서 강화되었다. 그리고 항일무장투쟁과도 연계를 맺고 민족해방투쟁의 일환으로 싸워 나갔다. 그러나 악화일로를 치닫은 일제에 대항하기란 지난한 것이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으로 비롯되는 폭압적인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30년대 말이 되면 차츰 노동쟁의 건수나 인원면에서 감소하는 경항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농민운동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이미 일본 제국 주의의 미곡 수탈정책과 1920년대 말, 30년대 초의 경제공황에 의해 조선의 농촌은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1930년대 농민의 빈곤화와 몰락이 급진전된 것은 경제공황이나 만주사변등으로 개시된 일련의 악재와 더불어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한국의 농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고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되고 심화될수록 농촌의 궁핍과 피폐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소작쟁의가 중일전쟁 이후로 감소하는 것은 노동쟁이의 감소화 마찬가지로 일제의 단말마적인 파쇼체제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강력한 탑압으로 한국의 30년대 말은 암흑기로 종종 지칭되기도 한다.
이미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1932년 소작 조직령과 1934년 조선 농지령을 발동하여 소작 농민운동에서의 집단적, 조직적 농민운동을 봉쇄하고 탄압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농민운동은 항일농민투쟁으로 날로 고양되어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일 민족운동투쟁도 1936년 12월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실시와 1937년 7월 중일전쟁, 1938년 국가 동원령, 조선시행령 공포 등의 전시체제의 시작과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1937년 이후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되고, 1939년 소작료 통제령 공포로 소작쟁의마저 일체 봉쇄당하면서 1930년대 말에는 농민운동이 실질적으로 중지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시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박세영의 시를 검토하면서 확인했듯이 정호승의 경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초기에 보였던 사회적 대응의 양상에서 퇴행하여 일상에서 비롯되는 상실감을 자주 토로하게 된다. 이는 일제라는 현실적 위협에 대처할 효과적인 수단이 강구되지 못했을 대 발생하는 현상적인 후퇴와 관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궤도 수정이지 궤도 이탈이 아님을 명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가 개인사에서 비롯되는 상실의 아픔과 자조적인 슬픔을 토로할 때도 그것은 곧 바로 식민지 치하의 어려운 현실과 늘상 연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후기 시가 세계와의 갈등을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현실과의 긴장관계가 보다 팽창되어 서정성이 첨예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근본적인 원리는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계를 통해 드러나는 목적성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흐름은 그의 의지와 역행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대립적인 관계가 더욱 극한으로 치달을 때 자신의 내면세계로 몰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폐 심리는 객관적인 정세가 보다 약화되어 점차 자신의 삶이 굴욕적이고 치욕스러운 경로를 밟는다고 생각할 때 강화된다.
4) 반어적 세계관과 역전의 묘미
희망은 다짐만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호승이 끊임없이 당시의 현실을 부정하고 다가올 새 날을 고대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몸짓에 국한되는 것임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제 식민치하에서 시를 통한 적극적인 대응을 구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은 어느때나 내일을 믿고 바라며 꿈꾸나/ 속어서 오늘은 언제든지 슬프구나”(「슬프구나」)하고 탄식하는 것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기대의 좌절을 노래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산삼꽃 향기로운
저- 山말냉이에
무지개 박었다 하기로
내 그곳을 찾어갔소
아아!
꼬리를물은 山봉오리만
숨막킨 눈알을 볶어댈뿐
무지개는 나를 피해
저 바다복판으로 옮겼구나
산삼마저 뽑어가지고 갓기에
기-ㄴ 한숨 박어놓고
타박 타박
내 흐느껴울며 도루왔소
-「무지개」 전문
무지개를 잡으러 떠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희망의 좌절과 한 편으로 그러한 좌절마저 인정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위의 시는 무지개는 물론이려니와 산삼마저도 캘 수 있을 것이라는 측량할 수 없는 기대로부터 그 모든 것이 좌절된 심리적 자멸상태를 보여준다.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기대의 수치가 무지개와 산삼이라면 그것을 동경한 절대적 심리와 그로 인한 좌절감은 그 파탄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예측하게 한다. “숨막킨 눈알”. 무지개가 뽑아간 산삼의 자리에 한숨을 박어 놓고 오는 심정. 바로 이것이 그가 당시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처럼 세계와 단절된 인식. 세계와의 불화. 이러한 비극적인 태도가 그의 후기시를 주도하는데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가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모두 부정하는데서 기인한다. 이처럼 주관적인 내면세계로 침잠할 수도 그렇다고 객관적인 세계와 맞대응 할 수 없는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럴수없”(「다시 한번」)는 소외 의식은 후기로 가면 점차 강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세계와 절리된 단절감은 양가 감정이 기초가 된 상반된 이미지의 대립으로 시화 된다.
까닭모를 슬픔이
따스한 봄위에 차다
-「호들기」
마음아 !
너는 왜 이따금 헛되이
이 깨끗한 슬픔에 잠긴몸을 건질나 들어든고----
----「이마음을 알나거든」에서
목마른 해는
젊은이 가슴가득
모밀꽃이 피어나
모밀꽃이
많이 피는 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모밀꽃 2」에서
눈물어린 원망(遠望)에
대지의 기복을 사랑할제
녹색의 우울을 반겨맛보노니
바라보는 녹색의 보리밭이여
이름이 고향이라 요람마저 우울쿠나
아름다운것들은 비극들을 지녔구나
-「우울」에서
위에 인용한 시들은 모순어법등을 사용하여 대립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둔다. “슬픔이/ 따스한 봄위에 차다” 고 하는 추상적인 것의 촉각적인 것의 감각적인 비유적 대립에서부터 “깨끗한 슬픔” 이라는 모순 형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띠고서 나타난다.
의 경우는 슬픔이라는 주관적 정조를 따스한 봄이라는 계절과 병치함으로써 봄마저 자신의 차디찬 슬픔으로 치환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는 객관적인 계절의 순환적 질서인 봄마저 자신의 주관적 슬픔의 정조를 이끌어 봄의 상징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의 시도 깨끗한 슬픔이라는 모순형용을 통해서 슬픔의 관습적 의미를 거부하고 긍정화 한다. 이러한 의도는 상반되는 것의 결합을 통해서 주로 부정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이러한 부정을 통해 있어야할 세계를 강력하게 희구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표면적인 부정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를 창조하는 기법은 “가난한 살임사리 따겨운 삶/ 햇볕이 마음 속에 차디찬날/ 살어야할 모든 생명을 위해/ 햇볕은 다시 찬바람속에 따시다”(「조춘」) 의 경우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따거운 삶’, ‘따스한 햇볕:차디찬날’의 동시적인 대립을 통한 역설이 찬바람을 녹이는 태양의 이미지로 변중법적으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살아야할 모든 생명을 위”하는 절대적 의지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낙관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일철이 아이러니와 같은 모순어법이 변중법의 산모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튼 정호승은 이러한 대립적 이미지의 동시적 병치를 통해 세계와 자아와의 불화를 얘기하면서 나의 우위를 강조하고자 한다. 리챠즈가 구조적인 아이러니를 내포하는 시를 훌륭한 시라 하고 아이러니가 대립하는 두 상반된 충동의 조화, 곧 모순의 종합이라 한 것도 두 개의 이질적인 경험 세계를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성취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이러니는 대립적 요소를 동시에 조망하는 모순개념이면서 그 두 요소를 결합하여 새로운 전체로 만들어 내는 인식 작용이다. 이렇게 볼 때 정호승의 아이러니가 모순된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부조리한 지금의 현실과 도래할 해방의 앞날을 동시에 바라보고 전자를 부정하면서 후자로 발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지금의 현실과 도래할 해방의 앞날을 동시에 바라보고 전자를 부정하면서 후자로 발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지양하고자 하는 열망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것이 난망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의 시에서 자주 까닭모를 슬픔이 되풀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후기시에서 갈등이 강화되고 있는 것도 이와 관계있는 것이다.
의 시도 이런 범주에 드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메밀꽃은 풍요로운 계절인 가을을 보다 정취있게 만드는 꽃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모밀꽃은 가난을 상징한다. 예컨대 몇 편의 시들에서 “가을이면 가난한 메밀꽃”(「나는 송아지 늬가 좋아」)이나, “가난한 메밀꽃 향기를 마”(「잡스런 이몸」)신다는 것 등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위의 시도 마찬가지다. 모밀꽃이 많이 필수록 나라와 마음은 가난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 모순된 의미의 대립적인 병치는 어디서 연유하는가. 메밀꽃은 왜 가난을 상징하는가. 이것은 모밀꽃이 피는 가을이 풍요로운 농산물의 수확과 동떨어진 가장 극적인 수탈의 현장인 농촌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밀꽃을 노래한 여타의 시들에서 확인한 것처럼 모밀꽃은 가을의 추수에도 불구하고 수탈로 추수한 농작물이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할 때 그 분노를 삭이는 소재로 작품에 등장한다. “가날핀 빩안대궁 푸른 수내기에/ 하이야꽃 열매 조롱조롱 여섯모진/모밀의 통통한 까만알알을/ 잴강 잴강/ 씹어만 보는 나는 석양어린 언덕우에 홀러선 망두석(望頭石)”(「망두석」)에서 확인되듯 정호승은 모밀꽃을 노래하면서 모밀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밀을 씹는 행위를 통해 분노를 감내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을 비유한다.
잴강 잴강 씹는다는 행위는 그의 시에서 시름과 분노를 씹고 삭히는 서정의 외화이다. “슴바귀 잴강쟁강 씹어씹어 침을 삼키며”(「불안이 풀리든날」)는 봄이 와도 수탈의 현장만이 부각되어 어쩔 수 없이 설움을 감내해야하는 비통한 심정을 말하고, 외로움이 복받쳐서 “문풍지 쥐여뜯어 입어물고/ 잴강잴강 씹”(「고독」)는다는 것이나. “긇어오르는 말못할 기흔을 잴강잴강 씹어들 보렴//씹을사록 치미는 낮모르는 슬픔(「이마음을 알나거든」)등은 슬픔을 끝임없이 반추하는 비유로 설정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난 모밀꽃은 궁핍과 기아로 대변되는 당시의 농촌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의 시에 적절하게 반복적으로 구사되는 의성.의태어는 개념적 의미의 전달 보다는 표현적 가치를 위해서 사용되는 일상적 언어와는 달리, 시의 중심적인 의미와 맞닿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성,의태어의 시적기능이 주제적 의미의 형상화에 기여하기 보다는 시적 정조의 조성에 효과적일 수 있으나 정호승의 경우는 시적 정조의 환기는 물론 주제의식을 부각시키는데 반복적인 표현이 보다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농촌에게 가장 가혹하고 대규모적인 수탈이 자행되는 가을에 하얗게 피는 모밀꽃을 의성어와 의태어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현실과 첨예하게 대조함으로써,
모밀꽃의 개화를 통해 황폐한 농촌의 삶을 집중시키고 고양시킨다 하겠다.
단지 메밀꽃을 사랑할 경우는 향기가 환기하는 꽃의 이미지를 통해서 일뿐이다. 향기는 꽃의 아름다움의 상태를 원거리 까지 효과적으로 발현한다. “소슬바람에 풍겨오는 모밀꽃 향기를 사랑한다”(시집 『모밀꽃』 서문)고 한 것이나 “가을이면 가난한 모밀꽃 향그러운 산기슭(「나는 송아지 늬가좋아」)이라면서 바람 곁에 실려오는 향기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향기가 배제된 하얀 모밀꽃에서는 지독한 가난과 설움을 읽어내고 있을 뿐이다.
의 시도 대립적 이미지의 돌발적인 병치가 두드러진다. “눈물어린 원망”은 물론이고 “녹색의 우울” 의 병치는 상당히 날카롭다. 특히 녹색의 상기하는 이미지와 직접적인 정조를 나타내는 우울의 상반된 합일은 상이한 범주를 결합하는 양상까지 나타나 참신한 맛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한다. 또 안온한 행복의 공간인 요람인 “고향” 마저 “우울”하다고 하는 것 등은 모순적인 것의 대립을 통해 보다 본질적인 것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이러한 시적 기교를 통해 나타내려는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아름다운것들은 비극들을 지녔”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 역시 아름다운 것들은 왜 비극을 지니는가로 요약될 수 있겠다. 위의 시의 4연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솔개미는 하눌을 맴돌고/ 따우에는 병아리떼가 어미품으로 쫓겨드는꼴/ 여기에 투쟁이 내 전망을 흥분식킬제/ 이 우울이 귀착하는곳/ 어찌 네 젖꼭지 뿐이랴만”(생략된 4연에서)이 그것이다. 약탈자의 대명사로 치환된 솔개미와 수탈당하는 농민들로 치환된 병아리의 약육강식 원리가 병이리가 어미품으로 쫒겨가듯 자신은 여성의 가슴으로 귀착하는 직유를 통해 비유되고 있다, 병아리가 어미 품을 찾는 것처럼 여성의 품안으로 도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한국의 비극적인 시대 상황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호승의 시는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을 다양한 언어의 질서로서 표현하여 현실적 맥락을 강하게 부각시키는데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은 현실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적 부하가 그의 시에 작용한 결과 비롯된 퇴행 의식의 한 양상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시적 비유를 통한 갈등의 표출은 광포한 시대에 대응할 때 취할 수 있는 방어기제인 셈이다. 이럴 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비극적으로 보인다고 한 그의 태도는 그것의 절정이다. 그 만큼 악화된 국내 정세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모순된 것의 병치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모순 어법이 갖는 아이러니칼한 의미를 통해 당시 한국 사회의 파행적인 전개에서 비롯되는 울분과 비탄을 노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서 언로의 자유로운 유출이 억제되었을 때 이러한 시적 장치의 사용은 결코 악화된 한국의 상황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자아와 세계와의 화해할 수 없는 불화로 야기된 이러한 퇴행의식과 상실의식은 다음 시에 첨예하게 표현되고 있다.
소낙비 한줄금 지나간 다음
푸르른 한 장 한울우에
오색선 죽--ㄱ 그놓고
뭇새로 더부러 음부(音符)를 심는다
논두덕 개고리들 재빠른 합창의 운율과
뜸벅새 목청을 가다듬어 띠염띠염 심그노니
깊은산중 녹색질어 호젓한 음영속 뻑국도
고독의 심회를 발상하는 기교
얼마나 성가시게 아름다운 노래들이냐
늡둑수양버들 숲속에는 꾀꼬리가 한점 별빛
그래 조고마한 고놈은
얼마나 악을ㅆ 품어낸 음부들이기에
심장을 이리도 꼭꼭 찌르는게냐
침은병이나 고친다 치고
너는 우울만을 돋구는 귀여운 악마
또한 강근너 지터있는 녹음속 향기우에
우짖는 물새의 배열하는 음부여
내 날개없음을 한하고울 때
푸르른 창공이 심사굳게 부르는구나
아--오색의 무지개가
대지여 !
오월의전원이여 !
믿음직한 네 녹색의품에 안겨
끓어으로는 가슴을 부등켜안고
흐느껴우는 이심사의음보를 읽느뇨 ?
억센 너의포옹은
말못할 슬픔을 돋궈놓아
막걸 리가 없으면 벌서 죽어버렸다는
벗의 버털웃음도 오색선우에 심그자
우르렴 마음아 울라무나
비단 날개없는 이몸이나
목소리마저 창공으로 못나를게 뭬나
울어라
지주굴 재주굴 강남의 노래는 호수를찬다
아-- 파문이는 나의의욕아
님아 너도
흘린 한숨이 있거들랑은
오색선우에 심으렴
물새들이 심어놓은 악보속에
아름다운 내 오열이 꿈꾸는
저--오색선우에 심어놓으렴
-----「전원교명곡」 전문
한 차례 세찬 비가 그친 뒤 청청해진 푸른 하늘의 허공에 오색선을 걸어 놓고 그 위에 아름다운 새들의 흥겨운 노래 소리를 음부로 적기하고픈 경쾌한 심정을 위의 시는 노래한다. 이러한 흥겨운 정취는 2연의 전반부의 개구리들의 합창과 뜸벅새의 노래 소리 합주되다가 이것이 후반부의 뻐꾸기의 고독한 심사로 연계되면서 성가시게 아름다운 노래로 귀착되기 이른다. 성가시게 아름다운 노래라는 것에서 전반부의 흥쾌한 정취와 모순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대립적 이미지가 결국은 시 전체로 확산되면서 자연과 합일할 수 없는 단절감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3연의 꾀꼬리의 울음을 자신의 폐부를 “꼭꼭 찌르”는 날카로운 촉각 이미지로 형상화 하고 꾀꼬리를 “귀여운 악마”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연과의 단절을 노래하고, 3연부터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소리를 화자의 주관적인 심사로 용해하면서 화자의 슬픈 정조를 이입시키는 것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 때부터 시는 전원 교향곡의 맑고 경쾌하고 아름다운 정경과는 달리 이에 상반되는 화자의 주관에 의해 전체적으로 어두운 정조로 전환된다.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들은 모두가 국토와 조국을 비유하는 것인데 이러한 자연과의 단절감을 통해서 그는 조국 상실감을 노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고향을 시 「우울」에서 “녹색의 전원”으로, 대지를“녹색의 고향‘으로 비유하여 낙원의식을 강화하지만 결국 ”녹색의 우울“로 귀착시킴으로써 고향을 통해 조국의 상실을 노래한 것을 기억하다면 자연과의 단절이 곧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있다. 정호승은 이러한 대립을 통해 조국 상실과 고향 상실감에서 비롯된 박탈감을, 끝내 저항하고 냉소하려는 안간힘을 미학적 장치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대한 냉소가, 고향상실에 대한 박탈감을 고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의 어긋남을 대지 곧“오월의 전원이여!/ 믿음직한 네 녹색의 품에” 안기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지와의 억센 포옹에서 “말못할 슬픔을 돋궈놓”는다는 것은 화자가 비극적인 상태에 처해 있음을 말해 준다. 이는 여성의 가슴에 안김으로써 슬픔을 극복하고자 하나 결국은 우울로 귀착되고 말았던 앞의 시의 경우(「우울」)처럼, 위의 시는 대지의 품에 안긴다는 비유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실패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대지는 풍요로움과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징표로 기능한다. 자연의 모든 것이 대지로부터 생산되듯이 여성의 자궁으로부터 생명의 출산은 시작된다. 곧잘 여자의 다산성과 대지의 다산성이 동일시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품에 안기는 것이나 대지의 품에 안기는 행위는 동일한 의미로 작용한다.
그가 고향의 상실을 곧 조국의 상실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때, 대지의 품에 안기고자 하는 시적 열망은 고향과의 합일을 강력하게 추구함으로써 조국 상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의지의 비유적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는 위의 시를 통하여 앞서 살펴보았던 상실의 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벗 상실과 님 상실이었는데 여기서 벗과 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설움에 복받쳐 울음 우는 주체로 설정되고 있다. 그만큼 이 시는 조국 상실, 고향 상실, 그리고 벗과 님 상실을 총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상실로 야기된 무의지성을 강하게 표출한다. 이러한 비극적 의식은 어디고 귀착할 수 없는 마음이 “날개없는 이몸이나/ 목소리 마저 창공으로 못나를게 뭬냐”고 맑고 푸른 하늘을 지향하는 어떤 희망도 좌절시킨다. 왜냐하면 하늘 역시 “내 오열이 꿈꾸는/ 저--오색선”으로 전환되어 시적 자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동경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언어의 아이러니의 구사로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이에 대립되는 조화로운 세계를 창출하고자 한 주관의 우위는 그러나 악화일로를 치닫는 객관적 정세의 단말마적 암울함과 맞서기에는 힘에 부친 듯 하다. 이처럼 세계와 주관으로부터 소외된 자아의 상반된 가치는 뿌리뽑힌 자의 비극적인 삶을, 물방울처럼 스러지고 휘발하는 자체 소멸로 형상화 한다. “풀들의이름을 헤아리다 해가지고/ 꽃이이름을 지어내다 젊음이 사라지는곳/ 오늘도 녹색을 뚫고가는 상여가 아름답고나/대지여 ! 너의 요철(凹凸)우에 / 나는 소섰다 꺼지는 물방울이거니!”(「우울」) 가 바로 그것이다.
솟았다 꺼지는 물방울로 목숨의 자기소멸을 순간적으로 노래한 위의 시는 정호승의 참신한 비유 가운데 정점의 위치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의 찰나적인 삶을 대조시킴으로써 생의 허무의식을 극대화 한다. 이것은 덧없음의 절대치다. 그리고 자신은 자기 소멸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고 재생과 쇄신의 원형이지만 물방울로 개체화되어 사라질 때는 그것처럼 허무한 것도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이란 장단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지난한 것이고 철학적인 깊이를 동반하는 것이지만 인생이 순간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의 시적 형상화는 잠깐 솟았다 꺼지는 물방울의 찰나성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위의 시의 다음 부분에서
아— 대지여 녹색의 고향이여
시인의불평이 새로운 것을 장만할 때
마음은 바보같이 앞서서만 바쁘다
-----「우울」에서
면서 새로운 기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그가 모든 난관을 극복할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극적으로 반전되는 경쾌한 뒤집기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치 않았던 돌발성으로 인해 그가 끝내 갈등을 심화하거나 유지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하려는 강한 열망에 휩싸여 있음을 보게 된다.
정호승의 시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시집 『모밀꽃』을 끝으로 자취를 감춘다.
시집이 발간된 1939년 10월, 그리고 곧바로 연계되는 한국적 정세는 일제 파시즘의 간악한 한국 통치로 질식 직전에 처해지게 된다.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유관하다. 이 때의 문필활동은 거의 대부분 시인들의 경우에 극도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신문 잡지의 폐간으로 발표지면도 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국민문학』이 간행되면서부터는 우리말 말살정책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친일적인 논조를 띤 작품들이 일본어로 발표될 정도로 이 시기의 문학 활동은 굴욕적인 측면으로 치달았다. 다음에 살펴볼 이용악의 시에서 친일시 논의가 일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시를 창작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일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치욕스런 시대를 등에 업고 정호승은 시대의 부하를 견디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향에 칩거 했다.
정호승이 중앙고보를 4년간 다니고 중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서울에 거주하던 기간은 학창시절과 1935년에서 1937년 『조선문학』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약하던 시기로 추정된다. 이는 여타의 문인들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한정된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낸 셈이다. 그가 발표한 시들이 대부분 고향의 향토적 정서를 자연스럽게 노래한 것도 고향에서 보낸 그의 유년 체험과 성장기의 체험이 그의 시의 원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체험이 좌익적 성향과 결부됨으로써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의 시도 대사회적 측면을 드러냈다. 세계와의 갈등으로 서정의 강화를 보여준 후기시의 경우도 현실이라는 시적 원리에 의해 원격 조종되고 있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그가 경험의 원형적 패턴인 향토적 정서를 무기로 하여 당시 우리의 핵심적 문제이었던 농촌의 황폐화를 극복하고자 한 것도, 개인적 정서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민족이 처해있던 정황을 순전한 리얼리티로서 표출하고 이에 공감하게 하여 마침내는 현실에 대응하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갈등을 해소하는 그의 시의 시적 원리가 공동체적 삶, 즉 민족적 삶의 양식과 늘상 연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시가 이념성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그의 고향 상실 모티프는 앞서 살펴본 김소월의 경우나 박세영의 경우와는 달리 생래적이고 생득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농촌의 현실이 일제 수탈의 핵심적인 현장임을 직시하고 그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유이민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노래했다는 이용악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3. 소결
<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와 34년 계속된 제2차 검거 그리고 1935년의 카프해산이라는 문학적 경색과 침체 국면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의 문학사는 다채로운 문학적 기운이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다. 범박하게 말해서 한국의 근대 시사의 경우 30년대는 시의 예술성과 자율성 그리고 카프 이후 지속되는 계급성을 담지한 운동으로서의 시가 20년대에 비해서 양적으로나 미적 완성도에 있어 생생하게 개화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30년대 후반의 시적 다양성은 해방과 한국 전쟁, 그리고 이후 지속되는 현대시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만큼 30년대 우리 시문학사는 보다 팽창된 발표매체의 확대와 전문화된 문인들의 활발한 시적 활동을 토대로 새로운 감수성의 면모를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대였다.
30년대의 시는 20년대의 시에 비해서 언어에 대한 자각이 동반되고 한층 높아진 예술적 측면이 보다 심화 확대되면서 현대적인 면모를 띤다고 보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려할 것은 이러한 시의 개화에도 불구하고 30년대의 시가 20년대의 시에 비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력을 상실하고 예술성과 자율성이라는 미명하에 현실적인 측면이 소원해지고 배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지금까지 살펴본 정호승의 시는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정호승은 1930년대 중반 식민 치하의 궁핍한 농촌의 피폐함을 「소작인」을 필두로 한 시들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계급 모순으로 인한 소작인과 지주와의 극단적인 대립을 전형적인 인물을 통해서 재현함으로써 농촌 현실의 참절함을 시사화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되는 모순을 민족의 보편적 경험의 원형에 녹아들어 있는 향토적 서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자칫 생경하거나 지나친 현실 추수주의에 매몰될 수도 있을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토착어나 전통적인 율조 등을 활용한 향토적인 정서의 효과적인 구사로, 궤멸되고 와해되는 농촌의 현장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사실적 정황을 보다 감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이었다. 현실의 악화로 그의 시가 내면으로 내향해도 끝내 표출되고 있는 것은 폭압적인 현실 원리에 대한 효과적인 응전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용악의 시적 출발도 일제 치하의 망국민의 설움을 한탄스럽게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결코 현실과의 맥락에서 이탈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현실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는 가열차고 날카로운 응전력을 保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당시의 참혹한 한국적 현실을 절제된 어조로 시각화함으로써 현실을 객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시의 의장과 기법의 이면에는 늘 고향 상실을 통한 국가 상실의 어픔이 비수처럼 숨겨져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새로운 감상성이 동반된 모더니즘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기법적으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상실로 인해 유이민의 참상을 서정의 강화로 형상화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고향 상실의 참상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환국적 현실을 감내하고 극복하려는 시적 자아의 내면적인 고통과 갈등을 시화했던 것이다,
정호승의 시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계급 모순으로 인식함으로써 현실원리가 강하게 시 속에 부각되어 서사적인 양상을 띤다. 그의 시가 콘텍스트가 강조되고 사실적인 양상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실 추수주의에 쉽사리 매몰되지 않는 것은 계급 모순이나 민족모순의 타파가 그의 시를 기초 짓기는 해도 향토적 정서로 현실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서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화되는 현실의 부하는 그의 시를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럴 경우 그의 시는 서정성과 이념성이 상호 교호하게 되지만, 공동체적 경험에 기초한 향토성의 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갈등을 해소하는 이념성이 우세하다고 하겠다.
반면에 이용악의 경우, 비록 그의 시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시화하여 슬픔을 보편화했기 때문에 서정성과 이념성이 상호 교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끝내 현실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비극적 결말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서정성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의 시가 서사성을 동반하면서도 늘상 낭만적인 감상성이 노출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정호승과 이용악의 시에 나타난 현실과 시의 팽팽한 긴장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와의 갈등을 어떻게 인식하고 시 속에 형상화했는가에 따라 서정성과 이념성이 상화 교호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암울했던 현실을 어떻게 자각하고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뇌했던 식민지 시대 시인들과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Ⅳ. 고향 상실 모티프의 구조와 의미
상실과 회복, 갈등의 심화와 해소의 시적 구조
시인들이 고향의 상실을 논하고 그것의 아픔과 좌절을 애기하는 것은 그러한열린 상처를 방치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치욕스런 상처를 노출시킴으로써 파손된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표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컨대 동경으로부터의 좌절을 노래한 낭만적 이로니가 현실 극복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이것이 현실에 대항하는 내면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같은 논리라 하겠다. 낭만적인 태도가 객관에 대한 주관의 절대적 자유를 외치고 무한에 대한 그리움, 환상에 대한 애착, 온갖 굴레를 벗어난 자아를 숭배하는 태도를 말한다면 낭만적 이로니는 상대방을 긍정하는 척 하면서 기실은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고향을 상실했을 때, 우리가 수탈당한 농촌의 황폐한 현실에 주목하고 그것의 아픔을 형상화하는 것은 시대의 모순을 언어로 표출하여 당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갈망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살기 위한 본능적인 몸짓으로 수행되었던 이농이 국가 상실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현실적 패배임이 인정되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이고 내면적으로 그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이것은 일제를 부정하는 적극적인 태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 속에 끊임없이 고향의 상실을 논하는 것은 일제 치하의 참담한 현실을 부정하고 국가 상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시 속에 그것이 실천적인 양상으로 표출되지 않았다고 해도 시인들은 식민치하의 사회적 모순을 시화함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파행성에 주목하고 이러한 부조리를 지속적으로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조국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그 아픔을 시화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시인들의 시 세계는 ‘상실에서 회복’이라는 구조 원리를 공분모로 하면서도 세부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상실에서 회복이라는 심층구조는 작품에서 고향으로부터의 ‘ 떠남과 복귀’라는 시적 원리로 구조화되지만 시인들의 개성에 의해 각기 특징적인 표층구조로 표출된다 하겠다. 예컨대 고향으로의 복귀가 여의치 않은 당대의 암울한 상황에서 해외로의 또 다른 내몰림이나 자의적인 떠남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고, 끝내 고향으로의 귀환을 통해 상실감의 회복을 갈망하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김소월이나 박세영 그리고 정호승과 이용악, 그리고 이들 외에도 앞서 거론한 많은 시인들의 시 속에 나타난 고향은 철저하게 수탈의 현장으로 형상화된 바 있다. 이들 시인들은 일제의 물리적인 찬탈로 인해 고향으로부터 내몰리는 한국인의 참담한 심정을 노래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근대를 공간의 위기가 증폭된 시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식민 치하의 고향은 수탈로 인한 궁핍과 기아로 점철되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마저 궤멸당한 참담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중심을 상실하고 부평초처럼 浮游한 한극민의 처참한 일상은 당시 시인들이 외면할 수 없었던 사연이었다. 그래서 시인들은 자신이 정주하고 있던 공간의 파탄에 맞서 그것을 보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공간의 구체적 단위로 설정된 고향과 이것의 상실은 곧바로 조국 상실로 연계되므로 고향의 상실과 회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조국의 상실과 그것의 회복과 관계한다,. 조국 상실의 구체적 양상은 고향으로부터의 내몰림이며 상실의 회복은 귀향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의 공간은 개인과 사회가 함께 직조하는 삶의 전체적인 과정과 연관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간의 문제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샐존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인 구체성을 담보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공간은 텍스트 구조가 형성하는 공간이나 혹은 언어가 생성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시의 소재와 배경이 되며 시어가 지시하는 대상의 이미지에서 형성된 공간의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공간은 실제의 공간이기도 하고 시적 상상력에 의해 작품 속에 재현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품 속의 공간은 현실과 절대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사물의 단순한 모방이나 모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다. 이 때문에 현실적 공간과 작품 속의 공간은 유추적 관계에 놓인다. 오히려 작품 속의 공간은 현실의 세계가 변형되고 재창조된 정신활동의 구체적 양상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실제적 공간에서의 체험을 수용하면서 현실세계를 상상력의 힘으로 초월하거나 변형시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게 된다. 이처럼 시인에 의해 새롭게 조직된 공간은 내면정신의 외화이다. 이는 공간이 시인의 대상에 대한 의식이고 주간에 의한 인식이며 이미지에 의해서 구체화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예컨대 김소월의 ‘山水甲山’이 극복의 상징이면서 영원한 상실의 표징인 것, 물이나 산의 변방을 지향하는 시어를 통해 의식의 주변성을 지향하는 것, 이용악의 시에서 두만강이 두 두 공간을 매개하면서도 분리, 단절시키는 의식의 구조와 관계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공간이 사물을 통해 드러나듯이 작품 속의 공간은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므로 작품은 질서화 된 구조적 공간으로 형성된다. 설령, ‘나무리벌’, ‘풀무고개’ 등의 실제적인 지명을 통해 공간의 지지성을 직접적으로 노출해도 그것은 수탈의 공강이라는 주제적인 공간으로 보편화되어 작품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다. 더구나 고향 상실의 위기를 체험하고 그것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의 노력이 잔학한 탄압으로 내면화될 경우, 그들은 절망적인 상화의 극단을 중심 상실로 노래하며 그러한 의식의 양상을 공간 이미지로 시화한다는 점에거 우리는 이러한 공간 구조를 통해 자아와 세계간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고 시인의 의식구조를 통해 세계인식의 본질적인 측면을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고향으로부터의 떠남과 복귀’, 곧 ‘공간 상실에서 공간의 정위’라는 고향 상실 모티프의 구조원리를 기층구조로 하는 작품들의 시적 원리가 세계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 면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나타났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논의의 진행은 상실의 구조를 공시적으로 다룸으로써 각 시인들을 비교하여 상실감의 면모를 살필 것이다. 그리고 상실에 대한 회복의 구체적 노력도 공시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변별되는 극복의 제 양상을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암울했던 식민치하에서 현실과 시인, 세계와 자아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근보적인 갈등 관계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부각되는지 살피게 될 것이다.
고향 상실을 노래한 대부분의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향으로부터의 내몰림이다. 이는 고향을 상실한 시인의 상실감을 부각시키는데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김소월의 –이하 생략-
박세영의 -이하 생략-
정호승의 떠남은 위안으로서의 고향이 파괴되면서 내몰려진 한국민들의 참담한 모습을 이민 행렬로 나타낸다. 그는 고향의 물리적 파탄이 지주와 소작인과의 극단적인 대립에서 배태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고향 상실의 핵심에 다가간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그는 떠남의 요인에 주목하는 면모가 돋보인다 하겠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간으로 시화된 고향은 수탈의 현장으로서의 고향을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고향 상실의 아픔을 복원시키는데 큰 몫을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정호승이 카프 해체 이후에 위축된 사회 변혁의 현실인식 원리를 지속적으로 계승하면서도 향토적인 서정을 동반하여 접목시키는 창조적인 면모를 그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용악의 –이하 생략-
우리는 상술한 시인들의 떠남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고향을 등진 당시 한국민의 민족적 비애가,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에 따라 각기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고향 상실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시인들의 시적 면모와도 관계할 것이다.
조국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그 아픔을 폭로하고 그것의 극복을 도모했던 시인들은 상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복의 양상도 유사한 공분모를 토대로 하면서도 다양한 개성을 드러낸다.
김소월의 –이하 생략-
박세영은 -이하 생략-
정호승은 와해되고 궤멸된 고향의 공동체적인 삶의 회복에 정신적 거점을 설정하여 피폐되고 황폐화된 고향을 본래의 자족적이고 조화로운 삶의 터전으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토착어의 효과적인 사용과 전통적인 운율의 창조적 계승을 통해 와해된 농촌의 완벽한 재현을 도모한다. 그는 경직된 논리로써 고향의 당위적 복원을 생경하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향토적인 서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시화한다. 이것은 그가 불구화된 고향의 직접적 원인을 파악한 박세영과 유사하면서도 상이하게 나타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박세영이 상실의 원인에 초점을 두고 그것의 근본적인 치유를 통해 형상화 한다면 정호승은 투쟁성을 한국적 서정으로 내면화 한다. 이것은 그가 상대적으로 박세영 보다는 생래적인 토착성이 강하게 시의 중심 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서는 끊임없이 세계와의 조화를 꾀함으로써 세계와의 단절감을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용악은 -이하 생략-
결국 고향 상실 모티프는 고향이라는 공간의 상실을 회복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시적 구조원리가 기반이 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들은 이러한 고향 상실 모티프를 통해서 식민 치하의 한국민들의 암울한 정세와 그로 인한 정신적인 파탄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시의 면면을 세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세계를 인식하는 시인들의 다양한 면모를 섭렵하였는데 그것은 세계와 자아와의 대립관계의 구체적 양상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시인이 각기 자신이 처한 암담한 시대상황을 여하히 인식하고 어떻게 대응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상실감의 해소를 나름대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식민지 자체가 해소되지 않는 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제가 자행한 폭압적인 탄압을 생각할 때 그것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네 시인들의 작품의 구조, 곧 ‘고향의 상실과 회복’, ‘떠남과 복귀’를 통해서 자아와 현실과의 상관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처럼 세계와의 갈등과 해소의 원리라는 기호학적 체계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시의 짜임새인 구조 원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을 밝힘으로써 시의 시성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가 자신이 지시하는 세계 속에 대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기호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과 같다.
김소월은 -이하 생략-
박세영은 -이하 생략-
정호승은 궁핍한 현실의 요인을 계급 모순에서 찾고 황폐화한 농촌의 참절함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고 이를 거부하는 시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의 시의 출발이 갈등의 해소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시가 초기에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나 판단을 위주로 하는 서사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세계와의 조화를 거부하는 식민지적 상황은 갈등의 해소를 무화시킨다. 후기에 들어서 갈등의 심화와 체험의 구체성을 강화하는 서정성이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이념성과 서정성의 혼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토착어나 전통적인 율조가 동반된 향토적 정서로 세계와의 갈등관계를 해소하려고 해도 그의 시는 이념성이 강하게 전경화 되어 있다. 그가 끝내 역설적인 시적 구조를 통해 세계와 대항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이 기층에 내재된 이념적인 태도가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Muecke가 아이러니가 대립적 모순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통합하는 원리에 기초한다고 한 것처럼 정호승은 부조리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단절의 상황을 주관에 의해 통합하고자 한 것이다.
이용악은 -이하 생략-
결국 우리는 앞서 상술한 네 명의 시인들의 구체적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비록 상대적인 차이는 있으나 한국의 식민지 현실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은 작품 속에서 삶의 중심역(中心域)인 공간의 상실과 공간의 회복이라는 시적 구조로 형상화되고 이는 세계와 자아의 근본적인 갈등관계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로 귀결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식민지 시대의 특징적인 고향상실 모티프의 시적 구조를 고구하고 그 의미를 논하는 것은 이를 통해 식민치하의 시대정신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2. 고향 상실 모티프의 의미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김소월과 박세영, 그리고 정호승과 이용악의 시를 검토하면서 그들의 시에 나타난 고향으로부터의 내몰림, 혹은 떠남이 타의에 의한 것이었고 고향과 대립되는 공간으로의 휩쓸림에서 부유하고 유랑하는 한국민들의 실상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 탄압은 또 다른 내몰림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고향 상실 극복의 노력을 무화시켰다. 결국 단말마적으로 자행된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수탈과 폭압적 억압체제는 이향과 귀향의 악순환을 수없이 반복하게 하여 중심을 상실하고 무정주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한국민의 의식 구조를 비롯한 실제 생활 구조는 이처럼 고향을 비롯한 공간에서 소외되고 단절된 채 소외된 삶을 살 수박에 없었던 탈 중심적인 의식을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1920년대 중반에 우리 시사가 보여준 현실적 상상력으로서의 변모의 양상은 고향 상실 모티프의 전개와 회복의 양상으로 구체화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동일성 상실에서 회복으로의 시사적 전개를 보였던 1920년대 중반의 전환기에 대한 적절한 해명은 고향 상실과 회복을 촉구했던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구체화될 수 있다 하겠다.
둘째, 문학사의 시대 구분이 연대기적, 예를 들어 1920년대의 시나 1930년대의 시 등을 구별하는 연대기적 서술은 1930년대 시문학의 전개가 1920년대 시의 부정에서부터 찾아진다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을 크게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향 모티프를 통해 1920년대와 30년대의 시를 검토해볼 때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티프의 반복은 이미 시대적 단절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 상실 모티프를 통한 20년대의 시적 출발을 거쳐 30년대에도 지속적인 활동을 영위한 박세영의 경우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은 우리의 현대시가 1930년대에 싹터서 그 다양하고 찬연한 세계를 열 수 있었던 것도 1920년대의 시인들에 의한 창조적 축적에 힙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30년대의 시가 20년대 시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견해의 잘못”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럴 경우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의 징후로서의 개별 시인에게서 나타나는 동일한 모티프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시적 변모와 양상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대정신을 이해하게 하는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연구의 목적과 의의를 살피는 자리에서 언급된 바 있듯이 기존의 생각으로는 이질적인 시인으로 논의 되었던 시인들의 경향이 하나의 주제 유형으로 포섭될 수 있다는 새로운 문학사적 시각이 확보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고향 상실 모티프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근대시 연구가 서사적인 흐름을 고구하는 데는 물론이고, 시인 개개인에게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통해 각 시인의 시사적인 위상을 정립하는데도 효과적인 방법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넷째, 우리는 이번 연구를 통해 일제 치하의 문제는 물론이고 해방과 현재로 계승되는 한국 근𐩐현대시의 흐름을 일관된 눈으로 직시하고 해석하는데 커다란 시사점을 제공 받는다. 특히 근대화와 산업화로 발생했던 이농민을 시화한 작품들을 하나의 일관된 관점에서 통괄하는 안목을 시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고향 상실 모티프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김소월이나 오장환, 정지용의 시를 농민시로 개념 공유하여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 연구 방법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제 치하의 한국적 파행성을 주목하고 그것을 시화한 시인들은 당시 한국적 역사의 전개를 고향 상실로,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그것의 회복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태여 농민시를 창작하려는 장르의식에서 자신들의 시를 창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의 근대 시사를 통해서 고향 상실의 아픔을 노래한 시들이 왜 20, 3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가에 착목하고 지금까지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동안 수다한 연구자들이 한국의 근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의 의미를 논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는 단편적이고 산만한 경우가 많아서 세밀한 천착이 되지 못했고, 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을 논하면서 부분적으로 논의되는 수준에 머문 것이 많았다., 그래서 본 연구는 그동안의 단편적인 논의를 지양하고, 고향 상실의 실체를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초래한 궁극적인 원인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한국의 1920~30년대 한국 근대 시사의 전개를 고향 상실 모티프와 그것의 회복으로 규정하고 고향 상실 모티프가 갖는 시대적 의미를 고찰했던 것이다.
어차피 식민지 시대의 문학적 의미가 작품 외적인 테두리나 상황으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고 보면 당시 우리 시인들이 보여준 상실감이나 단절의식, 그리고 소멸감을 기조로 하는 시적 현상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제 상실감이 국가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작품 속에서 고향 상실로 시화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 근대시에 나타난 실향성이 식민 치하의 문인들의 정신적인 거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제하에 발표된 고향에 관한 작품들을 이런 시대상과 꼭 결부시킨다는 것은 도식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화나 산업화로 비롯된 고향 상실과는 달리 일제의 강요로 인한 근대였으므로 고향을 상실하고 어쩔 수 없이 내몰린 당시의 참절한 삶에 대한 한국적인 상황을 전혀 배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당시의 시 속에 나타난 고향 상실은 일제의 토지 수탈로 인해 고향을 상실하고 유랑하는 고향의 개념도 원형적인 패턴으로 다루기보다는 실향성의 구체적 면모가 드러나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으로 한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향 상실 모티프가 개인적 정신의 집결체로서, 그리고 당대의 시대의식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징표로 이해하고 각 시인들의 주제의식 하에 그것이 어떻게 작품 속에 재현되고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했다.
이런 이유로 고향 모티프가 일제하에서 어떻게 형상화 되고 어떤 특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탐색은 주제론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식민지 현실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20년대를 필두로 30년대 발표된 많은 시들은 고향의 상실과 비애를 노래하고 고향에의 그리움을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한, 두 편씩 고향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표출하긴 했어도 지속적인 면모를 띠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연구의 바람직한 전개를 위해서 김소월, 박세영, 정호승, 이용악을 중심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누구보다도 고향 상실의 아픔을 절감하고 그것의 회복을 노래한 사람들이며 시를 통해서 시대의 징후를 여실하게 표출하는데 자신들의 시적 구조 원리로서 고향 상실 모티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한국 시사의 흐름에서 통시적인 배열을 갖춤으로서 고향 상실 모티프의 시대적 의미는 물론, 각 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개별적인 차이나 개성을 효율적으로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시인들을 각기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각 시인들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통해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의 여타 시인들의 작품들을 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의 개성적인 표현 양상도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연구가 상호 보완되는 방법을 통해서 각 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고향 상실 모티프의 구조가 떠남과 귀환을 축으로 하는 공간 상실과 공간 회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향 상실을 노래하였던 당시 시인들의 의식은 실제적인 삶의 중심인 고향이라는 공간의 상실을 회복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에 있음을 이해하고 이것이 식민치하의 시대정신일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를 대하는 시적 자아의 태도에서 크게 두 축으로 나타났다. 세계와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작품 속에서 유지되거나 보다 강화되는 경우, 그리고 갈등이 작품 속에서 해소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에서는 서정성이, 그리고 후자에 속하는 작품들에서는 이념성이 강하게 전경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와의 대립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하는 두 축은 고정화, 정형화된 것만은 아니다. 각 시인들의 각각의 작품들에서 이 두 축은 상화 교호하면서 상대적으로 서정성이 강화될 수도 혹은 이념성이 부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사고유형을 보편적으로 드러내는 사고의 네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Ⅱ장에서는 김소월과 박세영을 통해서, 그리고 Ⅲ장에서는 정호승과 이용악을 검토하면서 살펴보았다. 이를 다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근대시에서 고향 상실을 노래한 시인은 서론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910년 중반에 『학지광』을 통해 문단활동을 시작한 최소월에서 비롯된다. 최소월은 고향을 떠난 유학생이 자신의 고향을 그리는 애수를 여러 작품 속에 시화함으로서 조국 상실의 아픔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쌜지움의 勇士」라는 시를 통해 국권상실의 비애를 비유적으로 노래했다. 그런데 이는 명백하게 고향의 수탈로 인해 쫒겨가는 화자의 참절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최소월은 조국 상실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본질적인 측면은 아직 시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향은 그에게 바라다 보이는 풍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이것이 최소월 시의 성격이고 1910년대가 가지는 시사적 의미라고 이해된다.
이에 비해서 192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한국의 시사는 변모하기 시작한다. 비록 3.1운동은 실패하였으나 이미 내발적으로 지속된 항일정신이 이를 계기로 분출되어 민족적 단위의 독립운동으로 기세를 떨치고 광범위하게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점차 침략자로서의 일본의 본질에 한층 다가설 수 있었고 일본에 의해 강탈당한 주권 상실의 의미와 국가적 위기를 보다 잘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 우리의 시가 서구적인 감수성의 유입으로 인한 자기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김기진 등에 의해 주장된 사회주의 이론의 유입으로 점차 작품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1920년대 초반은 우리의 시가 새로운 출발점에 서기 위한 모색과 진통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은 -이하 생략-
박세영은 -이하 생략-
정호승은 카프 해체 이후에 위축되었던 카프의 특성을 지속적으로 계승하면서도 향토적인 서정으로 새로운 면모를 개척한 시인이다. 비록 그가 초기서부터 궤멸된 농촌의 참담한 상태를 소작인과 지주의 첨예한 대립을 통해 시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생래적인 농촌의 토착어를 구사하고 전통적인 민요조를 통해 와해된 고향의 복구를 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갈등의 해소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그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절망적인 상황을 노래하게 된다. 이는 악화된 국내의 정세와 관계있다. 그가 비록 향토성은 끝내 유지하지만 조국 상실의 아픔을 벗 상실, 님 상실 등의 개인 상실감으로 축소하여 비극적 상실감을 노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시에는 서정성과 이념성이 교호되면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시가 반어적으로 세계를 냉소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위축된 자아가 현실과 대응하는 최소한의 노력이기도 했다. 이는 김소월이 초기 시에서 님 상실의 아픔을 노래하다가 후기에 고향 상실로 대변되는 국가 상실의 아픔을 노래한 것과 좋은 대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끝내 향토적 서정을 바탕으로 훼손된 고향, 곧 국가 상실을 복원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념성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하겠다.
이용악은 -이하 생략-
이렇게 보면 상술한 시인들은 나름대로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시대적인 사안에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은 시대에 짓눌리거나 구속되지 않고 자신들의 개성을 다양하게 발휘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자신들의 시를 통해서 시사적인 흐름에 행보를 함께하거나 길항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192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상실된 한국적 현실을 이해하고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카프의 전략이 사회와 개인 간의 응전력에 초점을 두는 시대적 언저리에 고향 상실 모티프를 기저로 한 시들이 발표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30년대 악화되는 국내와 국제 정세의 영향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시와 현실간의 문제가 절연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이러한 시인과 현실간의 맥락에서 당시 시인들의 정신적인 거점이 고향상실로 비유된 국가상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러한 시대의식의 구체적 양상이 작품 속에서는 고향이라는 공간의 상실을 공간의 회복으로 전환시키려는 의지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 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는 앞으로 몇 가지 과제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 우선적으로 보다 확장된 시사적 맥락 속에서 고향 모티프가 고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원형적인 심상으로서의 고향 모티프를 노래한 백석이나 노천명 등의 시가 더해져 상화 보완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해방 직후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한국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이에 대한 시적 형상화의 문제도 재검토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조국을 떠나 실향의 상태로 연변 등지에 정착한 한민족이 배출한 문학과 한국 문학의 연계성을 찾기 우ㅟ해서도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만주나 간도 등지로 내몰린 사람들에 의해서 발간된 시나 시집은 해방 이전의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것까지 살펴봄으로써 한국적 실향의 의미가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연구는 일제 치하는 물론이고 해방과 현재로 계승되는 한국 근‧현대시의 흐름을 일관된 눈으로 직시하고 해석하는데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서론의 연구의 의의에서도 살폈듯이 해방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로 발생했던 이농민을 시화한 작품들을 하나의 일관된 주제의식에서 통괄하는 안목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화 이후 김준태와 이성부, 김남주와 신경림, 조태일, 양성우, 민영 등의 시에서 발견되는 내몰린 농민들의 참절한 삶에 대한 시적 형상화의 문제가 본 연구의 주제 의식과 곧바로 맞물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연구는 일제 식민 치하에서 시작 활동을 전개했던 시인들만의 절박한 문제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처럼 일제 치하에서 고뇌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현실과 마주했던 시임들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논하는 것은 당대적 의미로 그치기보다는 현재 한국적인 사회, 정치 구조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는 한국민들의 총체적인 세계관과 맞물리면서 우리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향 상실 모티프 연구가 일제 치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현재를 올바로 이해하며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적인 작업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