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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 여래장, 브라만의 차이
요즘 항간에 많은 사람에 회자되고 있는 문제 중에 여래장 사상이 있다. 일부에선 이것이 ‘비불설’ 이라하며 원수 대하듯 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짚어보자.
불성, 여래장, 브라만은 어떤 차이가 있는 지 한번 살펴보자, 우선 힌두교의 브라만사상을 규명해 보면 그 차이가 쉽게 드러나리라 생각된다. 아트만이라는 자아가 있다. 이 자아 속에는 순수의식이 있어, 수행자가 모든 망념을 제거하고 나면, 비로소 그 순수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이 순수의식이 바로 바깥에 있는 우주의식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즉시 아트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순수의식과 바깥에 있는 우주의식과의 합일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면 이것은 불교의 “여래장사상”과 동일하다. 불교에선 중생 속에 여래가 내장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불교에선 힌두교와 같은 설명방법을 사용 했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비록 불교교리발달 과정에서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힌두교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어떤 한 사상이 오랜 세월동안 계속 전해 내려오다 보면 외부의 수많은 사상과 교류를 하면서 교리가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전해지는 동안에 수많은 사상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불교 고유의 핵심이 변경 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여기의 아트만과 브라만사상도 그와 같다. 그러면 다시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자. 불교의 불성과 브라만은 어떻게 다른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처음 마주친 사상이 사선팔정 이라는 인도고유의 수행체계다.
석가모니는 이 수행에서 제7선정과 제8선정을 다 습득하고도 그 수행체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선정에 들어 아트만 속에 있는 순수의식과 브라만이라는 우주의식이 합일되어 하나가 되어 영원불변하는 우주의식인 브라만을 체험했지만, 그것은 계속 유지되지 않는 결점이 있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서 육년 고행을 했던 것이다.
즉 브라만의 핵심은 영원불변하는 의식을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체적 자아인 아트만 속에 영원불변하는 순수의식을 체험하고 그것을 깨달아 신인합일(범아일여)이 되어 자아가 죽어 끊어질지라도 그 속에 있는 영원한 순수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우주의식이 되어, 계속 성. 주. 괴. 공을 거치더라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성, 주, 괴, 공을 거치면서도 유지되고 또 육도윤회를 거치면서도 그 순수의식은 남아 다시 다음 생을 받을 때는, 이 우주의식에서 또다시 인연을 만나면 다시 태어나고, 또 죽으면 다시 이 우주의식 속으로 돌아가서 영원함 속에 잠겨 있다가, 다시 인연을 만나면 다른 생을 사는 .....이렇게 끝없이 생사를 드나들면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불변하는 우주의식(유일신, 절대자, 창조자)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여기에서 정면으로 반대의견을 내셨던 것이다. 즉 영원불변하는 아트만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장사상은 힌두교식 이니까 틀렸지 않는가하는 문제인데 그러나 불교에서 여래장사상을 도입 했지만 아트만식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 아니다. 비록 불교에서 똑같은 형식을 취했을지언정 그 쓰임은 전혀 다르다. 단 한 치도 불교의 사상에서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게 불교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영원불변하는 순수의식 일지라도 그것 또한 너의 관념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관념조차도 내려놓아라! 그러면 열반이 올 것이다.” 라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열반이란 자유를 뜻하는 것이므로 무엇에 대한 자유냐 하면 자신이 만든 관념의 묶임으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관념 이냐하면 자아 속에 있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 남는 순수의식 이라는-- 이것도 결국은 너의 관념이 만든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것이 허상인가 하는 문제다.
순수의식 이니까 그대로 진리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맹점이 있다, 그 맹점이란 주시하는 주시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수의식을 바라보는 즉 알아차리는 주체가 있는 것이다. 자기를 인식 할 수 없어야 옳은 것인데, 자기를 인식하는 놈이 있는 것이다. 비록 제5선정인 공무변처정에서 제8선까지, 그곳에선 내 몸도 사라지고 대상도 사라졌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인식하는 놈이 있다”는 점이다. 그 영원함의 순수의식을 인식하는 인식자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것도 ‘네 가 만든 너의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놓아버려라 그러면 자유가 올 것이다...’ 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관념조차도 놓아버리면 더 깊은 순수의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설혹 더 깊은 순수의식에 들어간다 해도, 그것 또한 자신의 관념에 불과 하다고 본 것이다.
즉 “유식”에서 견분 뒤에 그것을 증명하는 자증분이 있고, 또 그것을 증명하는 증자증분이 있고, 또 그것을 증명하는 그 뒤의 증증자증분이 있는, 끝없는 연결 고리를 이어 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더 깊이 추구하여 들어간다 해도 결국은 그것도 스스로가 만든 자신의 관념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 관념도 놓아 버렸을 때 자기가 묶어놓은 관념으로 부터의 해탈이 오는 것이다.
즉 그 해탈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인식 할 수 없는 자리’ 바로 이것이 불성이다. 알 수 없는 자리며 곧 자기라는 고유의 자성이 없는 자리다. 고유의 자기성품이 없는 것. 자기라고 고집할 그 무엇도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다. 다시 말해, --천연자연적인 그 자리(불성)는 나의 인위적인 입김이 개입되는 순간 그 즉시 변질되어 내가 만든 나의 개체적 세상으로 바뀌게 되므로 당연히 ‘나’ 라는 개체의 시발인 자기가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섬광처럼 열리는 자리가 바로 불성자리다.
즉 이해가 완벽해지면 그 이해가 열어놓은 문을 따라, 바로 체험이 뒤따라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때는 이해한다고 해서 열리진 않는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되면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보통 땐 전혀 생각 할 수 없는, -시각을 180도 전환해서- 볼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평소에는 자존심, 명예심 등에 목숨 걸고 살았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의 관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불성이다.’ 그러므로 불성과 브라만은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즉 브라만이란 것은, 자신이 그 우주의식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와 달리 불성은 그 ‘체험하는 그 놈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 브라만이란 자아가 넓어져 거대한 우주적 나로 확장되어 우주와 하나된 것이지만, 불성은 그와 달리 (그것을 체험하여 우주와 하나된 것이 아니라) 그 체험하는 내가 사라져 나의 지식이 만든 관념의 굴레로 부터 풀려나 자유롭게 된 이 자유(해탈)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므로 절대 같을 수 없다.
견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결론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수행자상은 선정이나 삼매에 치우친 은둔자가 아니라 지혜를 계발한 실천가이다. 산중에 은둔하여 오직 참선공부에 전 일생을 걸 것이 아니라 빨리 지혜를 깨우쳐 남을 위해 봉사하고 실천하는 보살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오늘 날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라 생각한다.
의식전환으로 세상을 바꿔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습기를 하나하나 닦아 완전한 부처로 태어나야 하고, 그러한 실천자체가 나의 수행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 이웃과 자신의 가족을 안심하게 하는 대승보살의 사명 속에서 사는 자가 돼야한다. “깨치고 닦아야 한다.” 깨치고 닦는다고 하니까 아직 더 얻어야 할 것이 있어서 닦는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제 더 얻을 것은 없다. 더 얻을 것이 없음을 깨치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히 깨쳤지만 습관 이라는 것은 관성처럼 그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으로 직접 부닥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그 이치를 깨쳤다고 해서 그 즉시 오랜 습관이 저절로 길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마음이 공 한줄 확신하고 믿었지만 오랫동안 내 몸에 익혀왔던 자존심, 분노, 좌절 등의 착각들이 저절로 고개 숙이고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깨친 이 이치를 바탕으로 삼아 끝없이 도망 갈려는 습관들을 이것에 맞게 순종하도록 길들여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닦는 다는 이 말뜻은 더 얻을 것이 없음을 깨치고서 남아 있는 습기를 보살의 행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것이 바로 나의 습기를 닦아내는 것이 된다. 이것은 평생 동안 보살이 실천해야 할 사명이고 덕목이다. 보살이 닦는 것이 바로 중생을 위한 자비이므로 닦으면 닦을수록 세상은 밝아지고 동시에 보살의 마음은 점차 부처를 닮아가는 것이다.
수행이란 산중에 앉아서 닦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진정 ‘깨치고 닦는’ 이것이 수행이며 보살이다. 내 몸과 내 마음이 전부 허상이요 꿈인 줄 철저히 깨치고, 그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음에도 걸리지 말고 삶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자유자재로 이 세상을 위해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불국토 이리라.
- 끝 -
<요약문>
깨달음이 일어날 때 생기는 현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냐 하면 경전과 많은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이 됐지만 그러나 미혹한 현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대충설명 됐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부분을 현대에 맞게 재정리를 해 본다는 차원에서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견성의 상태를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그것은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견성도 결국 자신이 직접 체험한 체험물 이므로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옛 조사님들도 이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손에 직접 잡힐 듯이 설명 했지만 접근하는 사람의 수준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다 보니까 그 표현을 올바로 읽어 내리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이지, 결코 선사들이 표현을 못했거나 또는 표현 불가의 금기구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방면에서 설명을 하여 좁히다 보면 그 한계가 분명해지리라 생각하여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선정의 병폐에 대해 쓰고자 했다. 선정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수행자가 그곳에 묶여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선정이 무엇이고 신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4선8정에 입각해서 설명했다.
선정은 결코 번뇌의 뿌리를 잘라 낼 수 없다. 단지 그것을 덮어둘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나서 빨리 견성을 하여 그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현실세계에 나아가서 이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 온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육조단경 ......신수대사와의 필답
2) 도서(종밀선사)..마니보주 편
3) 벽암록 ... 주금강(덕산스님) .
4) 섭대승론 ... 뱀과 새끼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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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