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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강해노트 (4-2)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는 땅
사도바울도 온유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예로 들어서 성도들에게 온유를 설명한다.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속마음, 안정적이고 방해받을 수 없는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온유한 예수의 마음.)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속마음을 온유와 안정으로 채운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런 모습이 천국 백성들의 존재 양식이다. 우리는 점차로 ‘나’에 대한 신뢰와 가치 부여의 행사가 허망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어, 결국 텅 비워진 ‘나’의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 완성된다. 물론 그것은 묵시 속에서 완성될 일이다. 그게 온유이다. 그 어떤 욕망이나 외적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성도의 삶의 양태, 그게 온유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적지로 끌고 가기까지는 여러분 마음대로 살게 놔두지 않는다. 그게 온유이다.)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완료의 자리로 향해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임을 아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이나 역경, 혹은 경조사 등을 점차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수긍하고 인정하고 순응하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 그러한 현실들에 파르르 떨지 않을 수 있게 된다. (현실에 너무 휩싸여서 일희일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면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변화되고 있음을 현실 속에서 느낄 것이다. 눈에 띄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아도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전보다는 품이 많이 넓어지고 이해의 폭도 커졌다는 것을 종종 느끼게 된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오게 되었을까? (철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를 올바로 알게 되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신뢰와 가치 부여가 부질없고 어리석은 것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손발 벌벌 떨면서 ‘나’의 체면과 위신 챙기기에 올인하지 않을 수 있게 변해간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모자라고 추한 모습을 봐도 ‘어떻게 저럴 수 있어?’가 아니라 좀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온유이다.) /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을 배워가면서 자기 생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게 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게 되어 온유의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복 있는 자야 너는 온유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라는 말이다. 복을 주었으니 복과 함께 온유가 따라 오는 것이온유이다.)
(벧전 2:23~24)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예수님이. 하나님께 부탁했다고 한다. 욕을 한 자, 고난을 준 자, 위협을 한 자 이런 자들을 스스로 응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탁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니까 나는 벌할 수 없다. 나는 응대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게 온유이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온유의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해 버리셨다. 자신이 응대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셨다. / 예수님의 삶을 먼저 모형으로 살다 간 다윗의 삶 속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가끔 보였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도망갈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고 욕하며 쫓아 왔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나? (신하가 ‘가서 죽일까요?’ 하니까 ‘놔둬라! 하나님이 저렇게 하도록 나에게 보낸 사람이다. 만약에 네가 가서 죽여도 또 다른 시므이들이 분명히 나에게 올 것이다. 그러니 냅둬!’ -> 이것을 온유라고 한다.)
(삼하 16:9~13)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다윗이 자신을 욕하는 시므이를 죽여 버리겠다는 신하를 말린다. 다윗의 눈에는 시므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시므이의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면 시므이를 죽인다 할지라도 또 다른 시므이들이 자신에게 몰려올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자리로 밀려 내려간다. 그걸 온유라고 한다.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가지 증상들(부드러움, 온화함, 포용력 등등)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점점 나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또 ‘나’라는 존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말미암아 나만을 위해 사느라고 밖으로 터뜨리던 그런 표독스러움이나 강함이나 이런 것들이 점차 수그러들 수도 있지만) 그러한 증상들의 근원은 온유이다.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온유.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시편 37편을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조금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시 37:11)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 말씀은 다윗의 시편인데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그대로 인용하신다.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땅을 차지하게 될 자들의 온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3절: 온유 =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
4절: 온유 =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5절: 온유 = ‘자신의 길을 여호와에게 맡기는 것’
7절: 온유 =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기다리는 것’
9절: 온유 = ‘여호와를 기대하는 것’
10절: ‘악인들은 다 멸망하게 될 것임을 고지한다
11절: 온유한 자는 땅을 얻을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악인과, 땅을 기업으로 받을 온유한 자를 대조시키고 있다. / 여기에서 ’온유‘는 멸망 당할 악인의 대척점에 있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총칭하는 단어로 쓰였다. 시편 37편에는 복 받은 자에게 허락될 땅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온다.
(시편37:9, 22, 29)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 22: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 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그 땅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 기업으로 받을 땅인데 그 땅은 주의 복을 받은 의인만이 살 수 있는 곳이고, 온유한 자만 살 수 있는 곳이다. 이 역사 속에 오고 가는 수 많은 아담들 중에 그 땅에 살 수 있는 이가 없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으니 당연히 없다. 그러면 도대체 이 땅은 무슨 땅인가? 의인만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땅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시편 37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전 7:20)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그 땅은 어떤 땅일까? 여호와가 주시는 땅은 의인만 살 수 있는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을 온유한 자들이 받는다. => 마음이 온유한 자는 의인이다. (3단 논법) /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 이 세상에 온유한 자 또한 하나도 없다. => 스스로 온유한 자가 있을 수 없고 스스로 의인인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온유한 자나 의인으로 부르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어떻게 의인이 되었을까. 이 세상에 오직 유일한 의인이자 마음이 온유한 자이신 예수, 그 안에서 연합되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의인, 온유한 자가 된다. (성품과 기질의 문제가 아니고 그가 행한 일을 근거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칭해주는 것이다. -> 의인만이 살 수 있는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아 온유한 자가 된다.) -> 땅은 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 온유한 자가 되게 하는데 쓰이는 도구이다
온유하고 의로우신 단 한 분 예수에 의해 우리가 온유한 자가 되어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라면 당연히 복 받은 성도가 받게 될 땅은 예수가 기업으로 받은 땅이어야 한다. 예수가 의롭고 온유하여 우리가 그리로 연합된 것이니 그 땅도 예수가 받은 땅이어야 한다. /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하러 가겠다고 하신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 처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할 처소(땅)이다. (그게 교회이다. 천국에 만들어지는 맨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업으로 받으신 땅은 교회 즉, 우리 성도이다. / ’하나님께서 창세 전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 성도는 교회를 기업으로 받아서 온유한 자가 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적확한 해석일 것이다. 그 땅 이야기 역시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한 자에 대해서 공부할 때 찾아본 이사야서 61장에 똑같이 등장한다. / (성경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사 61:1-3,7)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고토라고 번역되어서 어렵게 보이지만 그냥 땅이다. => 땅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7절에 고토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게 땅이다. 메시아에 의해 건짐을 받은 자들에게 고토가 주어지는데 거기에서 갑절의 상속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갑절의 상속은 상상할 수 없는 보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메시아에 의해 거저 주어지게 되는 그 땅의 정체는 무엇일까?
(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이게 땅, 내가 너희에게 줄 땅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미 땅을 받았다. / 그런데 또 다른 땅을 이야기한다. 고토에, 땅에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한다. 이게 에스겔서이다.)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새 언약‘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내어 쫓은 자들을 하나님이 깨끗이 물로 씻어서 다시 당신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갈 것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고토를(땅을)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토는 어떤 땅인가? /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준 땅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땅이다. 그 열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땅은 원래 가나안 땅이다. 그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데 또 다른 땅을 말하면서 너희 열조에게 준 땅을 이야기한다. --> 그 열조에게 준 땅도 사실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뜻이다. / 그 열조가 하나도 가나안 땅을 취하지 못하고 전부 무덤 한 편에서 죽었다. -> 그게 그 땅 아니라는 말이다. / 그것이 모형하는 어떤 땅, 그 땅을 새 언약에서 ’고토‘라고 하고 거기에서 내 백성을 물로 깨끗이 씻겠다고 하신다.) 정말 그런 것인지 찾아보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어떤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창 12: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땅이 주어지고 있다. 13장으로 가면 그 땅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창 13:14~17)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 (땅의 티끌과 자손이 하나로 동일시되고 있다. (땅=자손) / 내가 너희들에게 허락할 그 땅에서 나는 그 땅의 티끌처럼 내 자손들을(하나님의 백성들을) 너에게 주겠다. / 그런데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자식을 하나밖에 안 낳았다. 이게 맞는 약속인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땅이 약속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땅뿐만 아니라 자손까지도 약속되고 있다. 창세기 17장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창 17:7~8)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땅과 후손이 언약으로 주어짐과 동시에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이 얹어진다. (왕이 함께 주어진다. => 다스리겠다. / 왕과 땅과 백성이 언약 속에서 주어진다. => 국가의 3요소 / 하나님 나라 = 여러분 = 교회) / 이 땅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바벨탑, 바벨성 이야기에서 연결된다. 탑=성 / 바벨성(바벨땅) =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하늘에 도달하겠다고 하며 쌓는 도성, 인본주의의 땅. = 시날 땅 = 야벳의 후예인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의 땅. / 니므롯은 하나님 앞에서 ’대적자, 용사, 유명한 자, 네피림‘이 되려 하는 모든 타락한 아담 군상들의 모형. 그래서 별명도 ’특이한 사냥꾼‘이다. / 특이한 사냥꾼 = 자신을 왕 삼아 사는 특별한 전사. 그의 후예가 앗수르, 바벨론 등 함의 후손들이다. 그들이 사는 인간들의 땅에 인간들의 도성이 선 것이 바벨론이다. / 그 땅을 하나님이 저주하여 흩어버리신 다음에 그 땅말고 내가 준비한 땅을 내가 택한 자에게 줄 것이라고 한다. --> 세상의 땅과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은혜의 땅이 대조되고 있다. / 세상의 땅, 바벨탑은 인간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는 곳이다. 그러한 타락한 아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거하는 곳이 바벨탑이다.
(세상의 땅과 은혜의 땅이 대조된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같은 엉터리 인간,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들이 사는 땅에 찾아가셔서 은혜의 땅으로 끌고 가는 것이 대조된다. / 은혜로 말미암은 새 하나님의 백성과 선악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이 대조된다. =>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이다. 그래서 11장과 12장에서 옛 땅 바벨성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땅의 얘기가 등장한다. / 열조 중의 하나인 이삭에게도 땅이 언약으로 주어진다.)
(창 26:2~4)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땅과 복, 그리고 자손이 언약으로 주어진다. 그 열조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야곱에게도 똑같이 땅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창 28:13~15)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땅에서 야곱이 장자권을 취득하자마자 쫓아내시고 다시 그리로 불러들이신다. 여기에도 땅과 복과 자손이 약속되고 있다. 물리적으로 보았을 때 열조에게 주어진 땅은 당연히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그런데 정말 그 땅이 열조에게 주어졌나? 아브라함이 얻은 땅은 자신의 무덤, 막벨라 굴 하나뿐이었다. 이삭도 무덤 하나 건졌을 뿐이다. 야곱은 아예 애굽으로 쫓겨 가서 거기서 죽었다. 그러면 그 열조들의 후예인 이스라엘에게는 어떠한 약속이 주어졌나?
(출 6:7~8)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기업으로서의 땅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수시로 쫓겨나거나 다른 민족들에게 빼앗기고 식민지 생활을 한다. 심지어 그 약속을 받은 당사자 이스라엘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과 성도의 죽음, 성도의 무덤이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땅을 약속 받은 자들은 다 죽는다. 이 땅에서 물리적인 그 땅을 못 받는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라고 하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처소인 교회가 탄생되었다.
온유한 자들이 받을 땅은 육의 죽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게 된 성령 안의 교회 즉, 우리 자신을 말한다. 그것을 선물로, 기업으로 주셔서 우리를 온유한 자로 만드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