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신춘문예는 자족적 양식 속에서 편안한 시들을 선택해 왔던 것 같다. 시가 시의 밖에 있을 어떤 가치를 지향하기 위한 방편적 언어일 경우에도 그 방편으로서 자족을 확보하는 것이 시의 아름다움이고 힘일 테지만, 우리나라 신춘문예의 오랜 세월은 자족을 반성하지 않는 자족적 상투형을 심화시켜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우리는 응모자들에게 전한다.
당선작으로 뽑은 조연호의 시는 환상과 언어를 긴밀히 엮어냄으로써, 환상에 삶으로서의 깊이와 무게를 얹어주고 있다. 살아서, 삶 속에서 유효하게 가동되는 환상의 모습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은 더 이상 환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그가 이룩해낸 새로움이 더욱 새롭고 깊어지기 바란다.
조연호
1969년 충남 청원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열매를 꿈꾸며
나는 순을 밀어올리며 껍질 밖으로 나왔다. 땅 위에 하늘의 끝자리를 조금씩 올려놓으며 안개가 내려올 때 다발 꽃을 손에 쥔 아이가 허전한 꿈가를 뛰놀고 있었다. 아무도 그곳에 와서 기웃거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이의 걸음, 한 줌의 사랑에도 묶이지 않았다. 안개는 강과 함께 흘러가고 들풀의 잠결로 깔깔한 삶이 두런거렸다. 그리움을 뒷전에 두고 나는 망울을 터뜨리며 봉오리 밖으로 나왔다. 몇 장의 꽃잎이 내 빈 손에 넓은 잎의 속죄를 쥐어주고 있었다.
길을 향하여
비가 온다. 비는 길 위의 사람들을 허물며 처마 끝으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구름은 둔덕을 건드리며 걸어가고 나를 닮은 가지 하나가 빗발을 꺾으며 물길에 떠내려간다.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구름 뒤편에 머무는 맑은 소리들이 먹으로 번진 하늘로 옮겨온다.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