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문씨가 ‘닥치고 등반’ 2피치의 핑거크랙을 등반하고 있다.
저승봉, 그 어감처럼 생김새도 으스스하다. 새붉고 거무께한 절벽의 균열이 거칠고 매혹적인 등반선을 그린다. 험악한 난이도에 볼트마저 귀해 등허리가 절로 오싹해진다. 저승봉을 등반하려는 클라이머들은 반드시 캐밍 장비를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캐멀롯 2세트 이상, 루트에 따라서는 옵셋 캠도 유용하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좀처럼 통하지 않는 바윗길이니 치열하게 단련한 신체와 강인한 정신력, 냉철한 루트판단능력 역시 필수다.
빼어나게 훌륭한 암장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지만 막상 저승봉 벽면은 늘 한산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암벽등반이 신나는 주말 레저스포츠로 대중화돼 가는 요즘, 저승봉은 자신을 찾아온 클라이머들에게 흔치 않은 요구를 한다. 불확실성의 공포를 견디라고,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라고, 기를 쓰고 올라가서 끝내 살아남으라고.
저승, 그 독특하고 짜릿한 봉우리
“그거 다 오해예요.” 저승봉 개척자들이 손사래를 친다. “소문처럼 위험한 암장이 아닙니다. 저승봉은 여러분을 해치지 않아요.”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들에 슬쩍 웃음이 난다. ‘저승봉 등반하다가 저승 구경했다’는 과장 섞인 경험담, 난이도와 위험에 대해 부풀어 오른 악명 때문에 방문을 기피하는 클라이머들이 적지 않다며 개척한 이들이 답답함을 토로한다. 좋은 암장이 근거 없는 풍문에 시달리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저승봉은 확보물을 직접 설치하는 트래디셔널 방식으로 자유등반을 추구하는 암장입니다. 인공으로 매달리고 당겨서는 진행이 안 되기 때문에 본인의 실력에 맞지 않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 곤란하지요. 하지만 추락 시 위험한 구간마다 볼트를 설치했고, 크랙뿐만 아니라 칸테, 디에드로, 슬랩과 페이스 등 다양한 루트들이 있으며, 고난이도 루트는 물론 초중급자들에게 적합한 루트들도 충분히 개척돼 있습니다.”
볕 한 조각 없이 바람소리만 요란한 어느 봄날, 개척자들의 안내에 따라 제천 금수산 북면에 위치한 저승봉을 오른다. 어프로치는 30~40분 남짓,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발등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급경사가 이어진다. 겨우 유순한 능선을 만나 한숨 돌릴 때쯤 불쑥 솟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도 깔끔하고 산뜻한 바위라고는 할 수 없지만 2014년 처음 발견됐을 당시 저승봉은 이끼와 흙먼지로 얼룩져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컴컴한 절벽이었다. 개척과정의 험난함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청풍테라스에 모인 저승봉 개척자들. 앞부터 조연식, 이명희, 김태원, 문성욱, 최석문, 안종능씨. 이날 동행하지 못한 장형원, 박미경, 김은숙, 김진형씨도 개척에 참여했다.
장형원(석우산악회), 문성욱(바위를 찾는 사람들), 최석문(개미산악회·노스페이스), 이명희(타이탄산악회·노스페이스), 안종능(블랙다이아몬드코리아), 조연식(제천코레일산악회), 박미경(여성산악회), 강태원(무소속), 김진형(무소속), 김은숙(무소속), 20년 지기 클라이머들은 개인등반도 포기하고 주말마다 저승봉에 매달려 이끼 제거와 청소에 몰두했다. 초봄에 시작한 개척은 한여름 땡볕과 장마를 견디고 서늘한 가을이 되어서야 마무리 됐다. 그리고 열 명의 개척자들은 새카맣게 타고 비쩍 마른 몸과 더욱 깊어진 우정, 저승봉이란 이름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암벽등반지를 갖게 되었다.
루트 재정비로 안전과 등반성 높여
‘현아랑 아빠랑’ 2피치 하단의 크랙 구간을 끝내고 페이스에 진입하는 문성욱씨.
침침한 그늘 속에 잠긴 저승봉은 까다롭고 불친절해 보인다.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등반해보세요. 뭐든 해봐야 맛을 알죠.”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바윗길도 눈으로 봐서는 모른다며 개척자들이 다감하게 등반을 권한다. 저승봉, 그 요란한 악명의 진위도 확인할 겸 기자가 ‘현아랑 아빠랑(총 3피치, 최고난이도 5.12b)’을 후등으로 오른다. ‘현아’는 개척자 장형원씨 큰 딸의 이름으로, 이 길은 언젠가 예쁜 딸과 저승봉을 함께 오르고 싶다는 아버지의 정다운 마음이 담긴 루트이다. “멘탈 그레이드가 조금 높긴 합니다.” 선등을 준비하던 문성욱씨가 슬그머니 고백한다. 함부로 덤벼들었다가는 영락없이 황천길이란 소리처럼 들린다.
과연 명불허전, 최고난이도가 있는 2피치는 수직, 수평 크랙에서 예민한 페이스, 무시무시한 멘틀링이 변화무쌍하게 이어진다. 상당한 오버행이라 추락해도 안전하지만 볼트거리가 멀고 펜듈럼 구간이 연달아 심리적인 부담감, 전문용어로 ‘쪼는 맛’이 어마어마하다. 고정확보물은 애처롭게 성글고, 정확하고 과감한 동작이 쉴 새 없이 이어져 온사이트 그레이드는 더욱 높다. 과거 인공등반으로 개척했던 3피치는 작년 가을 자유등반으로 새롭게 선을 이었다. 이날 ‘현아랑 아빠랑’ 3피치 마지막 정비작업을 마무리한 최석문씨가 “레이백, 핑거 재밍, 씬핸드 재밍이 섞인 재미있는 구간”이라며 “자유등반 난이도는 5.11c”라고 알려준다.
이미지 목록 ‘닥치고 등반’ 2피치 상단의 침니형 크랙을 돌파하는 이명희씨. | 문성욱씨가 ‘재밍 머쉰’의 벙어리 크랙을 등반하고 있다. |
이미지 목록 안종능씨가 ‘재밍 머쉰’ 크랙을 재밍으로 등반한다. | 늙은 제자 못난이 사부’ 2피치를 등반 중인 조연식씨, 루트 개척자이자 늙은 제자이기도 하다. |
개척자들의 등반은 쉼 없이 계속된다. 최석문씨와 이명희씨가 ‘닥치고 등반(총 3피치, 최고난이도 5.13- A0)’에 붙는다. 문성욱씨와 안종능씨는 그 우측 ‘재밍 머쉰(싱글피치, 5.11a/b)’ 등반에 한창이다. 조연식씨와 김태원씨는 ‘늙은 제자 못난이 사부(총 3피치, 최고난이도 5.12b)’를 등반한다. 최석문씨가 오른 ‘달빛 아래 춤을(싱글피치, 5.12c/d)’은 개척 당시에 사용했던 미세한 홀드들이 부서져 나가면서 등반이 한층 곤란해졌다. 페이스에서 칸테를 이용해 오르다가 다시 핑거크랙으로 진입하는 등반선으로, 스포츠클라이밍과 트래드클라이밍의 매력을 섞어놓은 루트다. 이 길들은 모두 개척초기에 비해 난이도가 상향조정됐다.
“트래드루트의 난이도는 전통적으로 스포츠클라이밍보다 엄격합니다. 저승봉에는 국내 흔치 않은 크랙 루트들이 많아 더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실제로 난이도가 약간 낮게 책정된 루트들도 있었습니다. 최근 여러 완등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난이도를 수정하고 볼트 위치도 좀 더 안정적인 클립이 가능하도록 조정했습니다.”
이미지 목록 수직으로 쭉 뻗은 얅은 밴드를 따라 오르는 ‘옷고름’ 1피치. 등반자는 이명희씨. | 안종능씨가 ‘멈출 수 없어’ 1피치를 등반하고 있다. |
저승봉 같은 암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클라이머들이 저승봉을 회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포처럼 깔깔하고 소금처럼 짭짤한 난이도에 있다. 고정볼트를 최소화하고 가능하면 중간확보물을 직접 설치하도록 하는 기본방침 역시 방문자 감소에 큰 몫을 했다. 안전성 확보라는 명목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트래드 등반지의 볼트 간격, 덕분에 실력에 맞지 않는 고난이도 루트도 어떻게든 등반이 가능하다는 최근의 추세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저승봉은 분명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암장이다. 난이도 조절, 볼트위치 재정비 등으로 사교성을 높였다고는 하나, 저승봉 바윗길이 갖는 본질적인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개척자들에겐 안타까운 얘기지만, 저승봉은 앞으로도 어떤 이들에겐 굳이 찾아가고 싶지 않은 3D 암장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안전’, ‘청결’, ‘편리’가 클라이밍에 적합한 수식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에게 저승봉은 세상에 둘도 없는 흥미로운 암벽등반지가 될 것이다. 개척 이후에도 꾸준히 저승봉에 루트를 더하고 등반선을 가다듬으며 공들여 가꾸고 있는 이들에게 감사한다.
“볼트 몇 개만 더 박으면 훨씬 많은 분들이 오실 거라는 얘기를 계속 들었어요. 힘들게 개척한 암장인데 이왕이면 많은 분들이 와주시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 있지요. 하지만 바위는 우리 것이 아니니까,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볼트설치가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척자들의 진중한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시대의 대안적 암장인 저승봉은 분명 미래의 클라이머에게도 신선하고 매혹적인 놀이터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저승봉에 가실 때는 부디 ‘충분한 장비와 믿을만한 자일파트너, 단련된 육체와 투지’를 챙겨 가시라. 등반은 모험이며, 그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음을 잊지 마시고.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위치한 저승봉은 금수산(1,016m) 자락의 신선봉 능선에 솟은 봉우리로 월악산과 충주호를 내려다보는 조망이 탁월하다. 한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한다하여 저승봉이라 하고, 멧돼지가 많은 산이라 돼지 저(猪)에 오를 승(昇)을 쓴다고도 전해진다. 최근에는 어감의 문제로 미인봉이라고도 불린다.
찾아가는 길
차량 이동 시 내비게이션에 학현청풍명월펜션(충북 제천시 학현리 316번지)를 친다. 최근 제천-평택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에서의 접근시간이 빨라졌다. 대중교통의 경우 제천역 중앙역 부근 남당초등학교 정류장이나 제천버스터미널 옆 동양증권 정류장에서 952번 버스를 탄 후 하학현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앞에 학현청풍명월펜션이 있다. 펜션 건너편의 신선봉·미인봉 표지판을 따라 좁은 등산로를 30분 정도 오르면 저승봉 암장에 도착한다.
숙박
학현청풍명월펜션(043-643-7600)이나 아름마을펜션야영장(043-647-7080)을 이용한다.
- 청풍명월펜션
- 위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학현소야로 251 자세히보기
- 전화번호 043-643-7600
- 학현아름마을펜션
- 위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학현소야로 299 자세히보기
- 전화번호 010-3789-7084
장비
저승봉에서 다양한 루트를 등반하려면 2조 이상의 캐밍 장비가 필요하다. 2명 기준 60m 로프 한 동이면 전 루트 등하강이 가능하다.
‘달빛 아래 춤을’ 칸테 구간에서 핑거크랙으로 넘어서는 최석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