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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갈석산의 위치
그럼,
왜?
요하에서도 한참 서(西)쪽에 있는 황하나 난하의 하류 부근에 있는 갈석산 碣石山이 난데없이 한반도 황해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당시,
이병도는 자신의 스승이자, 조선사 편찬위원인 이마니시 류 (今西 龍) 교수의 고뇌 苦惱를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쓰러웠다.
"한반도의 역사를 단축해야 하는데...따라서 영토도 엄청나게 축소해야 조선인들이 과거 조상들의 영광과 번영에 연연하지 않고 미련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자부심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대일본의 충직한 선민(選民)이 될 수 있는데, 그럼 우리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표창도 받고, 연구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텐데…"
분위기 파악하는 데는 타고난 귀재(鬼才)인 이병도, 조선의 옛 지도들을 들추다가 황해도에서 ‘수성’이란 군(郡) 단위도 아닌 조그만 마을 지명 하나를 발견한다.
일제 日帝의 앞잡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갈석산이 수성현(壽城縣)에 있다’고 중국 사서에 기록된, 그 낯익은 지명 地名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縣) 단위라면 우리나라의 행정단위인 도(道)가 최소한 서너 개는 합쳐야 하는 규모의 크기이며 넓이다. 이건 일반인 대다수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총독부의 주구 走狗에겐 그런 상식 常識 따윈 필요 없다.
그런 상식은 사치다.
이모 씨에겐 사실 여부를 떠나 ‘내게 필요한 자료로서의 쓰임새가 될 수 있느냐? 아닌가?’ 그것만이 중요한 사안이다.
이 씨의 논문에는
‘수성이란 지명이 황해도에 있다. 갈석산이 수성현에 있다 하니 이는 해안과도 멀지 않은 황해도 수성이 갈석산의 소재지이다.’
라고 아주 간단히 쉽게 단정 斷定을 지어버린다.
간략하다.
참으로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황해도에는 갈석산이란 지명이나 산 자체가 아예 없다.
한반도에는 존재하지도 아니한 ‘갈석산’을 홀로, 임의 任意로 만들고, 작명 作名해 버린 것이다.
* 그림- 갈석산
* 지도 - 고지도 갈석산
중국 고지도 古地圖를 보면 황하 하류 또는 난하 하류에 주위의 지명들에 비해 훨씬 커다랗게 ‘碣石山’ 갈석산이라고 표기된 지도들이 한, 둘이 아니다.
갈석산도 고지도(기주래우갈석도 冀州來右碣石圖)에서는 황하 하류에 표기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난하 하류로 슬쩍 옮겨 놓았다.
또, 동진 東進하고 있다.
산 山이 자동차처럼, 바퀴 달린 것처럼 이동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과 부여의 영역은 그만큼 또 좁혀진다.
갈석산은 동이족과 화하족들 간의 오랜 기간(고조선, 부여, 고구려)경계선이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지표 指標로 여겨, 주위의 다른 지명들에 비해 유달리 크게 표기해 놓았다.
중국의 고지도 古地圖에 그렇게 표기해 놓았다.
그것도 우리 동이족의 입김은 전혀 작용하지 아니한, 전적으로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지도다.
당시에는 영토나 세력이 약한 하화족들이 동이족을 염두에 두고,
‘여기까지는 우리들의 영토’라고 표기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실은, 그보다 더 서쪽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런데 그런 자료들조차도 아예 무시해 버리고, 난데없이 한반도의 황해도까지 가서 없는 갈석산을 만들어 내고 있다.
후안무치 厚顔無恥한 행위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다.
전형적 典型的인 곡학아세 曲學阿世의 표본 標本이다.
이런 식으로 논문 論文을 쓴다면, 그 누가 땀 흘려가며 이곳저곳을 발로 뛰고, 먼지를 뒤집어서 쓰면서 이 현장 저 현장을 답사하고 이 자료 저 사료(史料)들을 비교 검토하겠냐?.
*갈석산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禹貢第十‧ 十一章
- 書經. 夏書. 서경 하서
사마천의 ‘사기’보다 훨씬 빠른 ‘서경’ 書經에는 ‘갈석산 오른쪽(서쪽)을 돌아 황하로 들어간다’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발해만에서 오른편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황하와 영정하 그리고 호태하 뿐이다.
나머지 강들은 모두 남쪽을 향해 흘러 입해 入海하고 있다.
이는 담장 문제로 옆집과 분쟁이 일어났는데. 아들 중에 외국 유학까지 갔다 온 똑똑하다고 소문난 한 녀석이 느닷없이 나타나, 안방에 들어가더니 아랫목을 가리키며,
“예전에 여기에 옆집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옆집과의 경계선은 우리 안방 가운데다.”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남 모르게,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하얀 가루약을 먹은 증세다.
지나가는 개가 “미친놈” 하며 웃을 일이다.
옆집에선 이웃집과 담장 경계, 한 뼘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상대방 집의 똑똑하다고 소문난 아들이 경계선이 안방이라며 주장하니 ‘얼씨구나’ 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좌 證左를 상대국의 유명인사가 자해 自害하면서까지 제시해주니 사실 확인은 뒷전이고,
‘이게 웬 떡이냐?’라고
무조건 인용 引用해 버린다.
전쟁에서 패배 敗北한 사실도 감추고, 오히려 승리자로 왜곡 서술시키는 춘추필법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중화 中華 예찬론자들에겐 너무나 구미 口味가 당기는 맛 난 별미다.
* 이쯤에서 강단 사학자들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1) 이처럼 조그마한 지명 하나로 당시의 국경선이 수천 리가 오가는데, 평양(平陽, 平壤)이란 지명은 중국 대륙, 옛 고구려의 영역에만 수 개 처가 있다.
평양이란, 단어는 편편하고 넓은 햇살이 잘 드는 곳이라는 우리 고어 古語 아사달 阿斯達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일국의 수도 首都로서 적합하다는 뜻이다.
평양이란 지명 대부분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지형이나 지리적 여건 등을 생각하면 실제 수도 首都로써 활용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평양이란 단어 자체가 아사달 즉, 수도라는 의미다.
백제나 발해의 수도를 예로 들어보면 단군조선이나 고구려와 비교해 역사가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여러 번, 이곳저곳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고, 동시대 同時代에 수도를 두 곳 이상 함께 운용했음도 볼 수 있다.
고구려 침공의 후환 後患으로 인하여 멸망한, 대륙의 양 梁 수문제는 수도를 동시에 세 곳으로 나누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평양이란 지명은 황하 북쪽 주변과 난하, 요하 주변에도 수 개 처가 있다.
이들의 위치는 단군조선부터 부여, 고구려까지 대부분 동이족 관할 강역이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서에 기재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왜 굳이, 한반도 대동강 변의 평양 한곳으로만 국한 局限시키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한무제의 누이이자 대장군 위청의 처도 평양 공주다)
후기 조선의 성군 聖君. 사고 思考 가 과학적이며, 예지력 叡智力이 뛰어난 세종대왕은 역사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삼국 三國의 수도를 조사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해마다 제례 祭禮를 올리라”고 분부를 한다.
그래서 몇 년을 조사한 담당, 예조 대신이 “신라는 경주, 백제는 전주로 그 수도를 알겠는데, 고구려의 수도는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를 한다.
그러자 세종대왕은
“세월이 흘러 수도를 찾기가 어렵다면, 각 나라의 관할지역 내에 기념비를 세우고 제례를 지내라”고 분부를 내린다.
그래서 고구려의 영역 내에 선정 選定된 곳이 대동강 변의 평양이고, 그곳에 고구려의 기념비를 세우고 제례를 지냈다.
세종대왕의 지시 指示를 다시 새겨보면,
한반도 내에는 고구려의 수도 首都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후 5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사학자들은 제대로 된 연구도 없이, 조선 총독부가 시키는 대로 대동강의 평양을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의 수도라고 단정 斷定해 버린다.
강단의 역사학자란 작자들은 자국 自國의 예지력이 뛰어난, 훌륭한 세종대왕의 지시를 무시해 버리고,
일제의 조선총독부를 더 신임 信任하고, 그 지침 指針 그대로 현재까지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재야 사학계에서는 요하의 동쪽, 만주벌판의 요녕성(현재의 심양, 瀋陽)을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 比定하는 분들이 다수 있다.
고구려는 상당한 기간(초기부터 중기)을 요녕성 遼寧省을 수도로 삼아, 동북아 東北亞를 지배 경영하였다는 이론이다.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동북아 東北亞 지도를 펼쳐보면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2)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봉니 封泥 제작 가마터가 요하 서쪽의 대릉하 부근에서 발굴되었는데도, 아직도 우리 교과서에는 현도군이 요하 동쪽에 버젓이 자리 잡고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봉니 封泥는,
죽간 竹簡·목간 木簡 등의 간책 簡冊으로 된 공문서 公文書를 봉인 封印하기 위하여, 이를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점토 粘土 덩어리를 붙이고, 점토가 마르기 전에 그 위에 인장을 눌러 찍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용기나 상자를 봉 封하는 용도로도 이용된다.
공문서의 경우 전달 과정에서 물건이 바뀌거나 정보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수취인은 봉니의 인영 印影을 보고 발신자와 내용의 완전 完全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봉니의 제작 장소는 나라 (國)라면 왕궁 내에, 군현이라면 그곳의 최고 책임자나 권력자가 있는 위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조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보누설 情報漏泄을 최대한으로 방지할 수 있다.
그러니 대릉하에서 현도군의 봉니 제작터가 발견되었으면, 봉니 제작터 그곳이 현도군의 수장 首長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요하 동 東쪽에 현도군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다.
국적 國籍이 의심스러운 작자들이다.
3) 1976년 평양 덕흥리에서 발굴된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의 무덤과 그 고분 내의 벽화에 대한 설명은 왜 현재까지 깜깜무소식인지….
유주는 현재 중국의 수도 북경 부근이며, 유주자사는 북경지역을 직접 관리하며, 인근 여러 개의 지역과 멀리는 황하 지역의 관리자들이 유주자사 진에게 공물을 바치며 인사드리는 내용의 채색된 벽화 그림이 발굴되었다.
유주자사의 관할 영역이 큰 나라의 영토와 비교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는 것이다.
유주자사 진의 고분벽화를 본 일본인 사학자마저 “고구려의 영토는 지금까지 알려진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라고 신문에 기고도 하고, 일본의 조일(朝日) 신문은 1978년 11월에 발행한 신문에는 <고구려영토 북경 부근까지>라는 제목의 기사도 게재하는 등 주변 나라들이 동북아의 고대사에 의구심을 품고 안달을 내는데, 정작 당사자이자 후손인 우리 사학계에선 40여 년의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반세기 半世紀가 되도록 아직 제대로 된 논문(論文) 하나 없이 꿀 먹은 벙어리다.
면피용 免避用으로 겨우 한다는 소리가
“아마 고구려로 귀화 歸化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현재의 북경을 포함하여 황하 이북의 발해만 부근 영역 대부분을 관할하며, 대단한 위세를 부리던 유주자사가 왜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고, 고구려로 귀화 歸化 하였는지?
그 이유와 생몰연대, 귀화 시기(408? 추정) 아무것도 없다.
이를 역으로 추적 追跡해 보면 당시, 거대한 고구려의 위상 位相이 자연스레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서 위의 이러한 사실들을 안타깝게 여겨 고대사에 대하여 궁금점을 제시하고 나름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향토 사학자 鄕土 史學者분 들.
또, 강단 사학자들의 폐쇄 閉鎖성에 답답함을 느껴 전공이 다른, 타 분야의 학자들이 오히려 우리 고대사의 진실성을 연구하고, 상고사에 대한 논문과 저서를 출판하였다.
재야 사학자와 다른 분야 학자들의 연구 논문과 저술 著述에 대해서는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위서 僞書를 인용하였다.’ 등으로 비웃으며 외면 外面하고 만다.
고대사에 관하여 뚜렷한 신념과 민족 사관을 가진 소수의 양심적인 학자, 몇 분을 제외하고는 강단의 사학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줄도 모르고, 안일하게 주변국의 눈치나 보고 그들의 아전인수 我田引水식 주장에 반격은커녕 오히려, 장단 맞추어주기 바쁘다.
그렇게 팔짱 끼고, 가만히 있다가 자국 自國의 다른 분들의 연구는 폄하 貶下 시켜 버리는 나쁜 풍조 風潮, 매국노가 따로 없다. 반드시 개선 되어야 할 것이다.
- 9. 元甫
교정 : 10회분은 30회분 앞에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
본문의 내용을 보면 소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인 내용 즉 학문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인용한 내용 및 주석을 달아 논문 형식을 갖추면 훨씬 권위가 있을 것 같네요.
안내
신해경 10회분과 20회분은 7층의 귀농소설방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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