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김은혜
어두운 골목길 입구 홀로 깨어 있는
작은 24시 김밥천국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안에서
여자는 피아노 치고 있다
도마 위에서 손가락들이 흥얼거린다
검은 건반 둥글게 두드린다
끊어진 기억들이 스타카토처럼
손끝에서 튕겨나간다
소리들이 길게 말려지면
어둡고 둥근 터널이 된다
위태로운 여자가 검은 터널 끝에
비틀거리며 서 있다
긴 시간들이 쓸려간 자리,
그 끝에 떠나갔던 이들이 온다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살며시
시처럼 가벼이 온다
그 자리에 어느새 봄날처럼 떠난
어머니가 늦가을처럼 서 있다
이쪽과 저쪽, 그 날선 끝과 끝
여자는 그 생채기들을 둥글게
말아내고 있다
건반 두드리듯 울음을 그 터널 안에
겨우 들려준다
여자는 칼로 터널을 자른다
터널 속에서 아주 작은 틈처럼
여자가 보인다
제28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시 부문 심사평
시는 새로움이 생명이다
우선 수상자 전원에게 축하를 드린다. 그러나 수상의 여부와 무관하게 백일장에 참가해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고 시심을 불러보는 기회 자체가 아름다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의 본질은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식의 해석이 아닌 존재 자체의 비의를 현상을 통해 드러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현상들을 시인의 눈으로 발견해내는 일인 시는 그러므로 새로움이 생명이다. 이번 백일장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리얼리티를 얼마나 신선하게 드러내고 있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경구조의 조작된 문장, 진부한 시어들의 남발은 탈락의 원인이다.
장원으로 뽑힌 김은혜의 「이별」은 유리를 통해 본 어느 김밥집의 하루를 꼼꼼하게 짚어나갔다. 그러나 “어느새 봄날처럼 떠난 어머니가 늦가을처럼 서 있다” 같은 구절에서 한 문장 속에 직유들이 남발된 것은 흠이라 하겠다.
신형주의 「출근」은 어느 실직자의 하루를 다룬 작품이었는데 현실을 보는 성실한 태도가 돋보였지만 문장이 너무 상투적이고 설명적이라 아쉬웠다. 두 분 모두 시인의 눈과 감성을 가진 재능 있는 분들이라 생각된다. 입상자 전원의 건필을 빌며 참가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이재무(시인)
이경림(시인)
한원균(문학평론가, 충주대 교수)
김중일(시인)
시 부문 장원 당선소감
내 안의 시어들이 꿈꾸듯 부유한다
언제부턴가 바람이 불어오면 가슴팍이 간질간질거리곤 한다.
살비듬이 일어나듯 간지러워서는 자꾸만 가슴 속에서 말들이 굴러다녔다.
그즈음 외로웠던 나날 속 시를 만났고 사랑했고 마지막처럼 붙들고 살았다.
가끔은 시를 말하고 싶어 오물거리다 입안에서 녹여 삼키던 오랜 밤들.
혓바늘이 돋아날 정도로 쓰디쓴 맛은 나를 흔들어놓고 비워놓았고
그 끝맛은 침샘을 고이게 달아서 자꾸만 웃고 싶어졌다.
그 맛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아서 오늘도 또다시 시를 붙잡고 있다.
이제 시원하게 바람이 부는 날에는 나의 작은 창문을 열어 놓을 것이다.
그래서 내 안의 시어들이 꿈꾸듯 부유하고 미친 듯이 나를 간지럽게 했으면 좋겠다.
꿈꾸고 있는 지금의 발걸음을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먼저 부족한 작품에 힘을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의 기원, 시로 살아가시는 엄마께 사랑하고 감사한다는 말을 이렇게 전한다.
너무나 설레서 잠이 안 오는 밤이다. 시처럼 환한 밤이다.
김은혜
경기도 안양 출생.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에』2010년 겨울호
첫댓글 '나의 기원, 시로 살아가시는 엄마'라는 당선소감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재밌는 시입니다 참신한 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