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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강의를 묶어 다음 회로 하고
이번 강의는 <책갈피> 팁으로.
어느 시조시인께서 내게 질문을 하셨다.
언젠가 시조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말씀했는데
“구심력”을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없냐?
예문을 지어 설명했다.
그래서 이 번 강의는 그에 관련된
뇌,
… 사용법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진실은 사막의 우물처럼 어디엔가 숨어있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보지(看=겉모습) 말고,
보라(觀=안감, 본질).
<예문>
정이품송(正二品松)
입설단비/최길하
정이품 획(劃) 하나를
우지끈 꺾어 든 솔
그날 밤 눈 쌓인 밤
입설단비 ‘一’ 劃에서
문자향 싸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시작노트>
‘혜가’가 ‘달마’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다. 달마는 방안에서 문도 열어보지 않는다.
밤새도록 눈이 내려 쌓인다. 마당에 선 ‘혜가’의 무릎까지 쌓는다. 그래도 달마는 내다보지 않는다. 매정한 중 같은 이.
‘혜가’ 눈밭에 서서 팔뚝 하나를 뚝 잘라(立雪斷臂) 들어보였다. ‘一’ 劃!
붉은 피가 눈 위에 낭자하다. 드디어 ‘달마’ 문을 배곰히 열고 "그래,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 문답이 오간다. 이름 하여 '安心 문답'이다. "마음이 심히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다는 그 마음 가져와 보라" "(…) 찾아보니 없습니다" "됐다. 그대 마음은 편안해졌다." ‘달마’→‘혜가’에게 법복을 승계한다.
(영화가 아니다. 중국 선종불교 1대 달마가 2대 ‘혜가’에게 법을 승계하는 논픽션 장면이다. ‘혜가’가 팔뚝을 잘라 일획을 쓴 것이다. 바로 소림사 마당에서. ‘달마’나 ‘혜가’나 소림사 무술영화처럼 극적인 스님이다. 선종은 경전, 부처를 버리고(?) 바로 마음을 파고드는 종맥이다. )
정이품송이 어느 해 눈 쌓인 밤 가지 하나를 우지끈 꺾어 보였다. 一劃이 눈밭에 뚝 떨어졌다. 꺾인 상처에서 솔향기가 눈보라처럼 일어났다. ‘文字香’이다.
시도 글씨도 품절도 '一'劃를 얻는 일이다. 書畵에서 일획만 제대로 그을 줄 알면 일가를 이룬다. '문자향(文字香)'이란 '만 권의 책을 읽으면(書卷氣)' 쓰는 글씨에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文字香!. 벼락 치듯 일획을 보여주는 저 정이품송. 입설단비로 서있는 정이품송에서 ‘문자향 서권기’를 느낀다. 사자후 같은 범종소리다.
이 시가 구심력이다. 안감을 觀해 회오리를 일으킨 것이다.
유행가에 가장 많은 내용이 뭘까?
단연코 “사랑과 이별”이다.
사랑과 이별은 이 세상 만물이 흘러가는 길(道)이다. 물질과 마음
움직임 그 자체가 사랑과 이별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60조 세포를 보자. 끊임없이 '미토콘드리아' 구슬로 단백질이라는 실에 꿰고 있다. 분자끼리 만나 엉켜 결합(사랑)하고, 그 수만큼 헤어(소멸)져 분자의 낱알로 돌아간다.
물질들, 즉 분자 먼지들은 무상-잠시도 머무는바 없이 만나, 사랑(결합)하여 물질이 되고 열역학 2법칙(엔트로피=분해 흩어짐)에 따라 헤어져 에너지(분자)로 돌아간다.
이 세상은 “사랑과 이별”의 이벤트 무대인 것이다. 연기(緣起)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이 “사랑과 이별” 자체가 생명으로 정의된다.
세상 모든 만물(자연)은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자연(自然)이란 개념은 스스로 그 길(道)을 열어간다는 뜻이다.
자연 즉 물질(像=形)의 기하학(모형)은 평화와 안정을 위한 문법을 쓴다. 그 문법이 <대칭>이다. 대칭이 추구하는 등호(=)는 평화 안정을 위한 철학과 수학의 언어다.
그래서 생명의 둥지 “물”은 등호=수평을 위해 낮은 곳으로 끊임 없이 흐른다. 바닥이란 이름 '바다'로 수평을 이루기 위해.
'바람'도 그렇다. 온도의 등호를 만들기 위한 '바램'의 행위가 “바람”이 부는 원인. 바람은 세상의 온도를 맞추기 위한 흐름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 하루 중에는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저녁에 심하게 부는 것이다. 기후가 변하면 그 온도를 맞추기 위해 분다.
물과 바람은 철저한 노블리스오블리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만 흐른다. 자기를 나눠주며 등호(=)의 평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자연이 자기 목표인 안정과 평화의 등호(=) 대칭을 이루면 거기서 멈춰야 되지 않겠는가? 정물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정물이 뭔가? 정물은 멈춤 죽음이다.
자연이란 신은 여기서(목표 달성 찰라) 등호(=) 대칭을 깨트린다. 질서를 깨트리고 카오스 혼돈으로 빠진다. 인도의 만다라화가가 색모래로 길 위에 몇 일 그림을 그리고 완성되면 손바닥으로 쓱 뭉개버린다. 자연도 그렇다. 여기서(혼돈=카오스) 생명이 탄생한다. 호흡과 맥박이 출현한다.
질서=등호=대칭=평화=코스모스를 추구하여 질서를 이루는 순간 모두 무너진다. 태극원리다. 양(낮)이 극에 달하면 음인 저녁이 시작되고, 음(밤)이 극에 달하면 양인 아침의 동이 튼다.
왜? 무엇이 되기 위해?
-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실제 자연계에선 에너지보존법칙에 의해 물질의 변주(緣起)만 있는 것이지 절재적 새로운 에너지=물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질서=등호=대칭=평화=코스모스
이 절대적 평화 안정 질서의 이름 ' 죽음'의 등 뒤로 돌아가면,
무질서=비대칭=갈등=카오스가 시작 되는데
이 무질서 자유가 생명의 탄생이 된다.
새끼줄이나 실을 자르면 그 단면도가 어떻게 생겼을까?
바로 태극이 나타난다. 태극원리가 된다. DNA다.
여기서 <원심력 구심력>이라는 에너지 운동이 나타난다.
(태극은 새끼나 실 꼬은 것을 자른 단면도다)
구심력은 가을에서 겨울의 뿌리로 향하는 에너지다. 보이지 않는 운영자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다. 경신(가을 열매)과 임계(겨울 씨앗)의 에너지다. 관음-청각적 에너지다.
원심력은 봄에서 여름 향일(向日)성, 나무와 넝쿨의 에너지다. 갑을(봄,나무 넝쿨) 과 병정(여름, 불)의 에너지다. 번영(繁榮)=볼텍스운동법칙=피보나치의 수열이 모든 생물의 몸에서 자동으로 작동된다. 시각적 에너지다.
그런데 서로 반대의 이 에너지
밖으로 풀어지려는 에너지(원심력)와
안으로 수렴되려는 에너지(구심력)은
한몸으로 꼬여 새끼줄을 만든다.
원심력 구심력은 2개의 가닥이 한 몸으로 꼬여 실이 된다. 한몸의 나선 DNA가 된다. 세상의 원리다.
그래서 모든 생물은 동시에 뿌리로 뻗어 내려가고
하늘 우주로 펼쳐나간다.
뿌리(조상)와 나무 꽃(자손) =번영(繁榮) 양방향이다.
나무 꽃 즉 花樹의 생물학 법칙이 볼텍스운동법칙이다.
(생명의 성장전개 방식, 파노라마수열)
등각나선 피보나치수열로 전개되는 수열의 패턴
1↔1↔2↔3↔5↔8↔13↔21↔34↔55↔89↔144…
이 수열의 연기(緣起)법으로 전개된다. 즉 과거+현재=미래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이 위 수열의 21이라고 하자. 지금의 21 앞 수는 13이다. 그러면 미래 전개되는 수는 13(과거)+21(현제)=34(미래)가 되는 것이다. 이게 생명의 모든 넝쿨 성장판이다. 모든 생명들의 전개패턴 파노라마다.
(생물의 원심력인 성장 전개 방법)
피보나치수열=황금비=向日性=볼텍스운동법칙=전류=물=방향=잎=나무가지=인플레션(화장)=양극(+)=洲=마루=등각나선=갑을병정(天干)=율(律)=봄,여름=하모니=음향(音響)=율동(율동)=자음(子音)=울림=트랙경기방향=넝쿨이 꼬아가는 방향(繁榮)=망원경=우주=華嚴=행동…
이와 반대방향이면
(생물의 구심력인 씨앗, DNA, 에너지 수렴 응축)
얼음=가을,겨울=메모리=시계방향=음극(-)=골(谷)=려(呂)=정려(淨呂)=진동=모음(母音)=자축인묘(地支)=뿌리로 向=音=관음=기억(잠재의식)=法華=현미경=의식…
그러므로
자연이 곧 신(神)이었던 것
신(자연)은 수(數)로 설계하고, 그 수로 색을 입히고(빨주노초파남보), 그 수로 노래하고(도레미파솔라시도), 그 수로 삼라만상의 모습(기하학)을 만들고, 그 수로 정(精=씨앗=DNA)을 보존하고 전개 했던 것.
세상은 하나의 씨앗이 “사랑과 이별”을 하며 우리를 울고 웃게 했던 것. 우리는 곡예사의 첫사랑이었던 것.
물미(물리=物理)가 트이면 자연은 하나로 통일 된다. 넝쿨이 감아 올라가는 그 하나만 터득해도,
새끼를 꼬아 모든 것을 묶는 그 새끼줄만 알아도 삼라만상이 다 수렴된다. 이것이 진정한 화두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학교교육이 이런 이치를 먼저 가르치지 않고 기술만 가르쳤다. 공식만 가르쳐 산물만 생산해 갔다.
일본은 그 기초 이치부터 가르쳤다. 그래서 과학분야 노벨상이 30명이 넘는다.
이제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환경은 기초과학으로 융복합으로 편집되기 시작했다.
인문학 사회학 예술은 물리(기초과학)가 그 뿌리다. 이 화두를 잡고 문학 예술을 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뇌
(브레인) 사용법!
뇌=브레인(?)
사람의 뇌(브레인)에는 창의력 발전소가 있다.
그 발전소 이름이 베르니케 발전소다.
이 발전소를 가동시켜 전기(5감)를 만들고,
이 전기로 화학공장(의식 감정)을 가동시키 는 방법이 있다.
그 길을 나침반으로 안내한다.
뇌(腦), 왜
브레인(brain)이라 하는가?
나는 광산에서 38년간 돌을 깼다. 절반은 “<브레인>시험”을 하고 절반은 돌 속에 들어가(詩 용어로 이입) 살았다.
실제로 시험 명칭이 “<브레인>"이다.
브레인이라는 개념을 알면 뇌를 안다. 비유법이었다.
브레인시험은 돌가루 1g을 쫙 폈을 때
'비표면적(입자가 겹치지 않고 펼쳐질 수 있는 면적)'을 말한다.
가루가 고우면 그 비표면적은 넓어진다.
즉 고우면 고울수록 입자의 개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고우면 고울수록 물리적 힘이 커진다.
1g 속에 가루가 1000개 일 때와
1g 속에 입자가 100000개 일 때
콘크리트의 힘은 입자의 개수에 비례한다.
왜?
입자 하나하나가 물(수화발열반응)과 모래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뇌를 브레인이라 하는 것은 바로 기억(정보메모리)의 가루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감도(高感度)가 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브레인이란 정보를 처리하는 신경과 정보의 가루가 쫙 퍼져있다는 뜻이다.
앞의 뇌 그림에서 “베르니케”영역이 바로 브레인의 가루(기억
.의식)를 가지고 창의력을 뽑아내는 발전소다.
물고기 부레만 한 “베르니케” 발전소는 바로 2가지 연료로 가동되는 핵융합발전소다. 그 연료는 시각과 청각이다.
첫째, 눈=시각적 이미지를 저장하고 분석하고 융합한다.
둘째, 귀=청각적 소리와 音을 저장하고 융합한다.
즉 잠재의식으로 저장되었던 과거의 기억을 꺼내 지금 내게 들어온 감각 시그널과 융합하는 것이다.
기억(저장)은 과거의 기억(잠재의식)이 있어야 그 고리에 새로운 기억의 꽃을 피우게 되어 있다.
(의식이 형성되는 단계를 보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5감 5식과. 6감 6식(5감+생각). 7감 7식(6감+자아의식). 8감 8식(7식+잠재의식)인데, “베르니케”발전소에서 과거의 잠재의식(8식)과 지금 들어온 6감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융합하는 것이 상상력 창의력이다.)
그러므로 창의력은 나의 양질 정보량에 비례한다. 창의력은 그 기억(정보)을 접속시키는 능력에 비례한다.
상상력 창의력은 기억의 가지 끝자락에 피어나는 붉은 복사꽃이다. 추억, 잠재의식 이 기억의 가지끝자락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
잠재된 기억이 베르니케 발전소에서 일어나 현재 이 순간의 5감 6감과 스파크을 일으킬 때 피어난 불꽃이 상상력 창의력이다.
정보 즉 기억 추억과 창의력 상상력은 비례한다. 기억이 빈약하면 창의력도 빈약하다. 그래서 정보→공부와 사유(생각,명상)로 기억부자를 만들어야 한다.
문학적 감성인 복사꽃 핀 산골의 어린 시절 추억과 과학 수학 같은 엉뚱한 것과 스파크를 일으키면 금상첨화다. 그 창의력은 100점짜리.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을 만들듯 화학제품을 만들면 고급예술, 낯선 예술, 고급개성이 되는 것이다.
많은 정보와 엉뚱한 결합을 해보는 것이 이 발전소를 고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치매도 안 걸린다.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건강한 뇌를 유지 할 수 있다. 뇌가 춤을 추니 현대사회 가장 무서운 병 우을증도 사라진다.
“베르니케” 이 발전소는
시각 이미지로 그림을 그리고
청각 운율로 노래하고 춤춘다.
이 게 시 아닌가?
이 게 예술 아닌가?
문학,
공예품 만들지 말고 예술품 만들어라.
예술과 공예의 차이점은 뭘까?
철학=과학적 뿌리(根), 감정, 율동(리듬)을 가지면 예술
기술=기(技-가지) 술(術-꾸밈) 정물(멈춘 리듬)이면 공예다.
철학적 감정적 운율적이면 내용이 깊어져 예술이 된다.
철학적 감정적 운율적 내용이 없으면 공예다.
사람마다 이 발전소를 효율적으로 가동시키는 방법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산이나 들 강변을 걸을 때(명상 산책) 많은 스파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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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해가 될 듯 말듯,,,ㅎ 고급진 해석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