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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2)(마27:45-56)
십자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앞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값을 치르지 않고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내가 그토록 큰 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십자가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증거입니다. (롬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 둘을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말이 없습니다. 조용히 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재판받으실 때 말이 없으셨습니다.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불법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예수님은 몇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은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중보 기도였습니다. 두번째는 회개한 강도에게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세 번째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세 말씀을 하신 후 흑암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그 때가 오전 12시였습니다. 태양이 중천에 떴을 때 갑자기 온 땅이 캄캄하여 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바로 그렇게 시작됩니다. 45절,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예수님은 제삼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삼시면 오전 아홉시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아홉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제구시에는 온 땅에 어두워졌습니다. 십자가 주변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가끔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비명소리만 들려왔었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와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을 찢는듯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46절입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구시니까 우리시간으로 오후 3시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러 부르짖은 절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도 그에게서 잘못이나 흠이나 티를 찾을 수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버림을 받아야만 했고 이렇게 비통하게 부르짖어야 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고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신 분이며 아버지의 품에 계시던 분이었고 또 하늘로부터 죄많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결코 끊어진 것이 없었고 33년간 계속 하나님과 교통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 뿐이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을까요? 그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버림받는 것보다 더 슬픈 사실은 없습니다.
가령 한 아내가 병들고 가난하고 도울 자가 하나도 없는데 그 남편이 그 아내를 버려두고 영영 떠나가 버렸다고 한다면 그 아내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가끔 우리가 고난과 역경에 부딪히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지금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시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 기자는 악인이 형통하고, 오만한 자들이 성공하며 그들이 죽을 때 고통없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들이 심판도 재앙도 받지 않으며 그 자손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실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다윗도 이와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억울하게 사울에게 쫓김을 받아 가정에도 돌아갈 수 없었고, 사랑하는 조국에서도 살 수가 없었던 다윗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치에게 민족 전체가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때, 신앙을 가졌던 유태인들은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유태인뿐 아닙니다. 일본에게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 민족도, 그리고 70년 동안 공산 치하에 있었던 소련의 크리스천도, 문화 대혁명을 겪으면서 신앙을 지켰던 중국의 수많은 크리스천들, 귀가 잘리고 이가 뽑히고 손톱이 뽑히는 고문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만 했던 그들도 “하나님, 과연 당신은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신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다 쏟아 부어주시고 그 저주의 형틀에서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게 하시며 억울한 재판을 받게 하시며 희롱을 받고 고통을 겪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45절,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어두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어두움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전 열두시, 해가 가장 힘있게 온 세상을 비추는 시간에 어두움이 찾아온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터질 것같은 심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지 않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시기 때문에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아팠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오래 전이지만 죽어가는 아들을 보고 고통스럽게 바라보고 절규할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 때 전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었으면, 이 아이의 아픔을 내가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심정과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어두움을 보면서 읽을수 있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51-53절,"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말씀은 안 하셨지만 하나님은 또 한 가지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응답입니다. 구약에 보면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자기와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으며 심지어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피를 가지고 가는 대제사장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도 두려움과 떨림으로 먼저 자신의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제사였고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성소에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은 하나의 큰 휘장이 있었습니다. 이 휘장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위에서 아래까지 확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히브리서 9:11-12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에서는 송아지를 잡고 염소를 잡아서 그 피로 자기의 죄를 일년에 한번씩 용서받았지만 이제 예수님이 그몸이 찢기시고 그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운명하시는 순간에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단번에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송아지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필요없게 된 지성소를 허물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영원한 제사요 완전한 제사로 십자가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제사가 이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 더 이상 필요 없어진 휘장이 확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이 헐렸습니다. (히 10: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가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는 구약의 제사가 다 폐기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제사를 이룬 이 사건에 동참한 성도들을 가리켜 베드로전서 2: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가 막힌 심정으로 지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응답은 "너는 죽었지만 승리했다. 너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희생했지만 모든 백성에게 부활을 확인시켜 주었고 구원을 선포해 주었고 믿는 성도들에게 승리를 약속으로 주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성전의 휘장만 찢어진 것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52절에는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었던 자가 벌떡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시는 분들은 예수님이 처형당하시던 자리에 있는, 이 지진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의 지층이 흔들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고, 그의 생명이 끊어짐으로 모든 사망과 죄와 사탄의 권세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죽음을 정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승리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웅변적으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승리의 주님, 재림의 주님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시는 것을 이들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보았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한마디로 두려움과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태도를 바꾸고 맙니다. 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조금 전까지도 조롱하고 핍박하고 무관심했던 그들이 이런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아,이 분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날, 우리는 어쩌면 이런 고백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자 도마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두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셨을 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드리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55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예수님을 평소에 섬기던 사람들, 인간적으로 사랑하던 사람들, 예수님과 피를 나누었던 어머니, 형제들, 친척들,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까지 좇아왔으나 멀리서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온데 간데 없습니다.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56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여기서 "있더라'는 말은 '거기 있었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몰랐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 형제들, 부모까지도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다'는 표현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이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충격 속에 떨고만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보다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교회에 그렇게 많이 다녔고 그렇게 봉사를 많이 했고 충성했지만 십자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도 십자가 앞에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내가 죽을 그 십자가에 당신이 대신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종교에 익숙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익숙할 수 있습니다. 전통에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의 사랑과 공의, 구원의 도를 깨닫지 못했다면 다시한번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그 사랑, 그 은혜, 그 공로 앞에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주고 용서하는 경험을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 자녀로 인침받은 것을 확인하셨습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종교적인 하나의 형식속에서 위로받는 사람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내 죄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고통을 겪으신 것은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의 현장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의 현장입니다. 세 번째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충격만 받았습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재해석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들의 머리는 온통 혼돈으로 가득 차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생각, 그들의 모든 것이 흔들린 것입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정말 예수가 살아났다면 이 예수의 십자가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활을 경험한 그들이 충격을 받고 일대 혼란을 겪었지만 아직 십자가의 의미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기잡이하러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들을 변하게 하고 새롭게 할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는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십자가를 체험하고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때였습니다.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 그들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사람들이 변화합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설교할 때 듣는 자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역사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뿐 아니라 죄를 위한 고통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십자가앞에 내 자신을 다 내려놓고 그 십자가가 바로 나의 십자가임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함으로 주님이 이루신 그 구원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내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감사하는 믿음으로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십자가앞에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나의 구원을 다시 한번 체험하시고 그 은혜를 확신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