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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우연히 죽은 자와 평안히 돌아온 자! (역대하 18장 28절 - 19장 11절)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는 것을 가리켜 영어에서는 'a narrow escape from death,' 직역하자면 ‘죽음으로부터의 아슬아슬한 탈출’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구사일생(九死一生)’ 즉 ‘죽을 고비를 아홉 차례 넘기고도 살아남았다.’고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아, 죽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위험을 실제로 겪어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말들로써도 그 오싹한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부족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인생살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런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게 됩니다.
큰 교통사고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게 되든지, 죽을병에 걸려 거의 포기 상태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게 되든지, 혹은 전쟁터에서 총알이 바로 자기 철모를 스치고 날아가는 경험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구사일생을 실제로 한번 겪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생명의 원인에 대하여, 또 자기의 남은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조금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게 중에는 바로 그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에 그 이후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남조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여호사밧이 겪었던 구사일생의 경험과 그 이후에 바뀐 삶을 통하여, 우리 신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연장시켜 주고 계시는 귀중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사밧 왕이 바로 구사일생의 경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절실히 체험했었습니다.
본문 18장 28절로 32절에 기록하기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둘이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 아람 왕이 그 병거 장관들에게 이미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남조의 “유다 왕 여호사밧”은 북조의 “이스라엘 왕” 아합과 함께 연합군을 결성하여 “길르앗 라못”이라는 곳으로 아람 군대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방어전이 아니라 아합 왕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침략 전쟁이었는데, 여호사밧이 신실한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합과 같이 악명 높은 불신자와 그런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18장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여호사밧이 자기 아들을 아합의 딸과 정략결혼을 시키게 됨으로써 야기되었습니다.
이처럼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게 된 것이 결국 여호사밧 자신까지도 죽음의 위험 속으로 몰아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여호사밧 왕은 또 다시 참 순진하고도 고지식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아합 왕이 교활하게도 자기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 숨으면서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자기의 “왕복을 대신 입도록” 했는데, 그것은 곧 적군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을 자청한 셈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람 왕은 이미 자신의 “병거 장관” 즉 자기의 최정예 기동병력으로 하여금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즉 상대편의 졸병이나 장군은 상대도 하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는 특별명령을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전투가 시작되자말자 그 아람의 병거 장관들은 이스라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을 순식간에 엄습하여 집중공격을 가하게 됩니다.
즉 여호사밧 왕은 오늘 날로 말하자면 적군의 기갑부대에 혼자 포위당한 꼴이 된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은 목숨’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에서 적군에게 포위된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도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공포에 질려서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여호와께서 저(여호사밧)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병거 장관들)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저희를 감동시키사”라고 번역된 말은 ‘저희를 움직여서’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금 여호사밧을 집중공격하던 아람의 병거들의 전열을 흩어서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또 32절에 보면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다”고 했는데, 정상적으로라면 그 정신없는 전투의 와중에서 다들 그의 복장을 보고 이스라엘 왕인 줄 알지 누가 그의 얼굴을 살필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여호사밧 왕이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심”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전투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은 정반대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이어지는 33절과 34절에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 이 날의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왕이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스스로 죽을 길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여호사밧 왕과는 달리 아합 왕은 살기 위한 온갖 수단을 다 부렸습니다.
사돈을 희생물로 삼아서 자기는 살겠다고,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대신 입히고 자기는 평범한 졸병처럼 변장하고 군중 속에 몸을 숨겼던 것입니다.
그 아합 왕의 ‘나 혼자 살기’ 작전은 나름대로 잘 들어맞아서 일단 그는 적군으로부터의 집중공격은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전투에서 아합 왕이 생존할 확률은 여호사밧 왕이 생존할 확률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한참 치열한 전투 도중에 아람 병사 중의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추어 버렸습니다.
현대전에서도 보통 포격에 많이 죽지 총알 한 방 맞고 죽는 확률은 실제로는 그리 높지 않다고 하니 화살 한 방에 죽는 것은 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화살은 한 아람 병사가 조준도 하지 않고 그냥 “우연히” 아무 데나 보고 날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살이 아합 왕이 입고 있던 갑옷의 단단한 면은 다 피하고 공교롭게도 “갑옷 솔기” 즉 갑옷의 이음새 부분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또 화살을 맞았다 해도 빨리 치료받았으면 죽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합이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고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그날의 전쟁이 맹렬했던” 까닭에 그는 후송조치도 받지 못하고 온종일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 아람 사람을 막으면서” 나머지 기력까지 다 쇠진하는 바람에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우연의 요소들 중에서 하나만 빗나가도 아합은 죽지 않았을 터인데, 그 모든 주변상황과 인과작용들은 그가 반드시 죽도록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그를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반드시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을 위험에 제 발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한 사람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의 구원을 받았고, 같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으며 또 죽을 확률도 지극히 낮았던 다른 한 사람은 오히려 죽기로 정해진 사람처럼 간단히 죽고 말았습니다.
이래도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됩니다.
물에 빠졌거나 심장마비에 걸렸을 때, 그 사람이 응급실로 옮겨지는 시간의 몇 십초의 차이가 그 생사를 좌우합니다.
몇 년 전에 성수대교가 우리 교회의 어느 장로님께서 출근길에 지나가신지 바로 30분 후에 무너진 일도 있었습니다.
몇 달 전 어느 고가도로 진입로에서 떨어진 차량 하나가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타고 가시던 차의 바로 뒤쪽에 떨어진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사고 직후 원로목사님의 차를 운전하고 계시던 집사님께서는 너무나 놀라서 몇 초 동안 사람이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 차이란 것은 불과 일이초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원로목사님을 지켜 주시는구나!’하고 우리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들뿐이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자신이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도 훨씬 더 많은 위험의 순간들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온갖 교통사고의 가능성, 각종 병균에 의한 감염, 독성 음식물 등 생명의 위험들이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실상 얼마나 많이 우리 주위에 산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미처 도와달라는 기도도 드릴 생각도 못하고 도와주심에 대하여 감사드릴 줄도 몰랐던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 얼마나 많은 위기로부터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지켜 주셨겠습니까?
그 어떤 사람에게도 우연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날수가 결코 재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생명은 평소의 건강유지에, 꾸준한 운동에, 의료보험이나 의사의 솜씨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이고자 하시는 사람은 아무리 기를 쓰고 살려 해도 죽기 마련이고,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시는 사람은 아무리 죽음이 코앞에 있다 해도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하)라고 자기의 생명을 순간순간 연장시켜 주시는 그 은혜를 뜨겁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한 맥박 한 맥박, 한 걸음 한 걸음, 살아 숨을 쉬는 일분일초가 오직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연장시켜 주고 계시는 아주 특별한 시간임을 깨닫고, 그 생명의 하루하루를 귀중히 여기며 그 생명의 주님께 늘 뜨거운 감사를 잊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자신의 남은 생명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사밧이 19장에서 보여 주는 새 삶의 내용입니다.
19장 1절부터 4절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사밧이 그 전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평안히” 돌아왔다는 이 한 단어 속에는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꼭 같은 전투에서 생존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던 아합은 ‘우연히 날아온’ 화살 한 방에 죽어 버린 반면, 죽을 길로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여호사밧은 오히려 살아남아서 ‘평안히’ 제 집으로 무사귀환했습니다.
즉 이 말은 그가 아홉 번이라도 죽었을 수 있었던 위기를 기적적으로 벗어났다는 사실과 그 구사일생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맞이하면서 바로 그 점을 그에게 일깨워 주기 위하여, 그가 아합과 연합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왕에게 선한 일”도 있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호사밧 왕은 자기가 그 전투 중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 결코 우연이나 재수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이 도우심 덕분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저지른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자신이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신앙을 가지고 우상타파에 앞장섰던 사실을 하나님께서 선히 보아 주셨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문자 그대로 구사일생하게 된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여호사밧 왕은 이제 그 생애가 일백 팔십 도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이어지는 4절과 5절에서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17장 7-9절에 보면, 여호사밧 왕이 제1차 종교개혁을 하면서 순회 전도단을 조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만으로 그 전도단이 구성되었었습니다.
즉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일을 전문 교역자들에게만 맡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사밧 왕은 자기가 친히 “민간에 순행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개인전도생활을 시작합니다.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즉 자기 나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직접 자기 발로 찾아다니면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왕이 몸소 나와서 전도했으니 그 백성들이 얼마나 더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당연히 수많은 백성들이 “그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었던 것이나 진배없던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여호사밧 왕은 그 특별한 은혜로 연장된 생애를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에 보면, 여호사밧 왕은 또한 모든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재판관들을 세우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사법제도 정비가 아니라, 그 재판관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공의를 실행하고, “계명과 율례와 규례” 즉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실천하도록 만드는 영적 개혁이었습니다.
이것도 여호사밧 왕의 초창기 개혁 운동 때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는 그저 각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국고성” 즉 보급 창고를 건설하고 “견고한 채” 즉 요새를 구축하는 등 국방사업들만 크게 벌였을 뿐이었습니다(대하 17:2, 12).
그러다가 이제 여호사밧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더욱 높은 차원에서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백성들이 원하는 공의를 세우고 실로 백성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꼭 선결되어야 할 공정한 사법제도를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기초로 하여 다시 다지는 일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영위하고 있는 생명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연장시켜 주신 새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여호사밧 왕의 인생은 이렇게 뜨겁고 알차게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에 보면 로마의 함대 사령관 아리우스가 벤허가 타고 있던 갤리선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 그 배의 노를 젓고 있던 벤허를 위시한 모든 노예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몸들(condemned men)이지만 오직 배 때문에(to serve the ship) 살려 둔다. 그러니 열심히 노를 잘 젓고 오래오래 살아라.”고 일장훈시를 합니다.
나중에 벤허가 아리우스 장군을 구출하여 뗏목 위에 같이 떠 있을 때, 아리우스가 왜 자기를 살려 주었느냐고 물으니까, 벤허도 역시 “나도 배 때문에 너를 살려 둔다.”라고 대답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생명을 살려 두시는 것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이미 죄인으로서 지옥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몸들을 왜 구원하여 주시고 지금까지 생존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아직 하나님의 일에 쓰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직도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전도와 선교 활동에, 교회 봉사와 충성에 쓰여야 할 목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생명을 가장 헛되이 낭비하는 자입니다.
실로 살 가치조차 없는 생을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한 욕심에 다 써먹어 버리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난 줄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반드시 죽었어야 했을 나를 살려 준 사람이 청하거나 명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말이라고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중생 받은 성도의 삶이 이전에 저주 아래 있을 때와 꼭 같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교회 때문에(to serve the church)’ 살려 두신 줄 알아야 합니다.
조국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하면서 부지런히 이 배의 노를 함께 젓는, 이 교회를 섬기는 영적 노동력이 필요한 까닭에 우리를 아직까지 살려 주고 계시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웃을 순행하면서’ 전도하여 구원해 내어야 할 잃은 양들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빠짐없이 작정해야 할 태신자와 교회로 이끌어 와야 할 해산신자가 남아 있고, 우리가 사랑의 편지를 쓰고 새소식반을 위해 봉사하고 심방장, 구역장들과 함께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전도해야 할 일거리가 아직도 태산처럼 남아 있는 까닭에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이 타락하고 방탕한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용공 친공 사상, 아니 아예 공산주의 사상 그 자체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이 나라를 영적으로 개혁시켜야만 할 너무나도 중차대한 민족적 사명이 틀림없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생명을 아직은 거두어가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저주 아래 있다가 살려 주심을 받게 된 성도들의 마땅하고도 당연한 새 생활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왜 구원해 주셨는지 그 이유를, 왜 오늘도 나를 죽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살려 주시는지 그 목적을 바로 깨닫고, 자신의 중생 받은 새 생명을 오직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명을 위하여서 조금도 남김없이 기쁨으로 다 바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저도 죽을 뻔한 위험을 두어 차례 겪었습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살 때 어떤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아직 차가 없어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는데 길가에 주차하고 있던 어떤 운전자가 차문을 갑자기 여는 바람에 거기에 부딪혀서 제 몸이 자전거와 함께 공중에 떴습니다.
땅으로 떨어지면서 뒤에서 달려오던 차와 공중에서 또 한 번 충돌했습니다.
땅에 쓰러진 채로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 저는 하반신은 꼼짝할 수 없고 상반신은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서 “하나님, 반쪽이라도 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가보니 약간의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고 왼쪽 무릎 인대가 좀 다쳤을 뿐 뼈 하나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고의 순간에 그 타이밍이나 위치들이 조금만 어긋났더라도 충분히 중상 내지는 사망까지 이를 수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반쪽만 아니라 위아래 양쪽을 다 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자전거를 타고 절대로 차도로 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삼 년 후에 인디애나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이웃 마을 신학교의 도서관에 가느라고 제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시골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간선도로들과 직교된 곳들이 많았는데, 어느 작은 동네 사거리에서 한 트레일러가 일단정지 신호를 지키지 않고 제가 달리던 고속도로로 진입해 들어오는 바람에 시속 90킬로미터로 달리던 제 차가 순식간에 그 트레일러의 옆구리를 정면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제 차는 완전 폐차가 될 정도로 유리창 앞까지 찌그러졌지만, 저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던 바람에 몇 초 후에 정신을 차리고서 제 발로 차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 인대가 조금 상했을 뿐 다른 곳은 다 멀쩡했습니다.
이 기회에, 여러분들께서도 차 타실 때 앞자리든지 뒷자리든지 반드시 안전벨트, 아니 이 생명벨트를 꼭 매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신 적이 어디 그뿐이었겠습니까?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온갖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살려 주셨던 순간이 얼마나 더 많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저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신 까닭에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저를 살려 주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같이 ‘죄인 중에 괴수된’ 사람까지도 당신의 복음 전파를 위해 쓰시려고, 그리고 지금에 와서 다시 보면, 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종으로 하여금 오늘날 이 경향교회를 섬기게 하시려고 그때도 살려 주셨고 지금까지 죽지 않게 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죽었어야 했을 몸이 아직도 살아 있고, 지금 누리고 있는 날들이 공짜로 얻은 새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저와 여러분이 그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연히 죽은 자’는 사실상 우연히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꼭 죽게 만드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안히 돌아온 자’ 역시 결코 재수가 좋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몸이나 다름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명은 하루, 일분, 일초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과 손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이 그처럼 생명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어 주시는 생명인 줄 안다면, 우리가 그 생명 가지고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위해 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 앞에서 그 ‘장사하여 남긴 달란트’를 계수할 순서만 남아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 도처에 산재하는 온갖 위험 중에서도 오직 여호와께서 도와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생명이 오늘 이 순간에도 연장되어지고 있는 줄을 알고, 오직 주님 기뻐하실 사명에 힘을 다함으로써 각자의 남은 생명의 목적을 완수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