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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도벨의 계략과 후세의 계략 / 사무엘하 17:1-14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무엘서를 보면서, 다윗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인도되고 있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인생에 대해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앞섭니까? 다윗에게서 과연 무엇을 떠올립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의 왕이고,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약속까지 주어진 몸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다윗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왕으로 택하시고 하루아침에 사울을 몰아내고 다윗을 왕위에 앉혔습니까?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결국 살아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인생은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도우심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도우시는 것 말고, 한꺼번에 도와서 큰 것으로 채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곧 푼돈 말고 목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도움 받으며 사는 것은 전혀 힘이 되지 않고, 한꺼번에 왕창 도와주실 때 힘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작은 일이 아닌 큰일에 도움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닥치는 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도우시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윗을 괴롭히는 사울을 죽여 버리심으로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날마다 여러분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큰 도움, 나에게 힘이 되고 득이 되는 도움을 원하기에,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고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다윗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하나님이 누구를 돕고 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요? 분명 사람들은 누구든 지금의 일이 잘되고 있는 쪽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를 잘되게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압살롬 편에 서서 그를 돕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나중에 압살롬은 죽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에, 압살롬 편을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압살롬의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압살롬은 자신이 나중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지금 되는 일을 보면, 다윗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도망을 치고, 자신의 일은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을 돕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다윗을 돕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다윗을 도우시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우심은, 반역을 한 압살롬을 당장 멸망시키고, 다윗을 성으로 복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다윗을 해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야 말로, 멋있는 도우심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당장은 압살롬의 일이 잘되게 하시는 것에서, 다윗을 돕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아히도벨의 계략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이와 같은 계략을 내어 놓은 것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자들이 압살롬과 다윗이, 화해할 수 있다는 염려를 미리 제거함으로써, 신하들이 오직 압살롬에게만 충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리로 따지자면, 아히도벨의 말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아히도벨의 계략이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으로 여겨질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계략은 누가 생각해도 뛰어난 계략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히도벨의 계략이 오늘 본문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계속해서 압살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3절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아히도벨의 계략은 자신이 군사 만이천 명을 이끌고, 다윗이 곤하고 힘이 빠졌을을 때 다윗을 쳐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다윗만 죽이면 다윗을 따르던 모든 백성들도 압살롬께로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평안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결국 하나님이 택한 자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히도벨의 계략은 분명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누구하나 아히도벨의 계략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임을 고하지를 않은 것입니다.
압살롬이야 반역의 주동자이니 그렇다고 해도, 이스라엘 안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는 장로들까지, 아히도벨의 말을 옳게 여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압살롬의 반역의 성공을 굳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계략이 장로들에게까지 옳게 여겨진 것이야 말로,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열망으로만 가득차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면, 아히도벨의 계략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분명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일임을 알고,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압살롬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히도벨의 마음이나 압살롬과 장로들의 마음이 서로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성공을 위하는 그 마음이, 서로 교통하여 아히도벨의 말이 옳게 여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히도벨의 말이 옳은 계략으로 여겨집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윗은 좋은 편, 압살롬은 나쁜 편이라는 생각으로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히도벨의 말이, 여러분의 성공을 도와주고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십중팔구 이스라엘 장로들처럼, 그 말을 옳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개업하는 집에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이 성공하고, 크게 번창하는 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잘못된 것으로 들려지겠습니까, 아니면 지극히 타당하고 옳은 기도로 들려지겠습니까? 그 마음에 성공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러한 기도는 아주 타당한 기도로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도에는 아멘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개인의 성공을 향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음이 전해질 때, 그 복음의 내용을 옳게 여기지 않는 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라기보다는, 그 마음이 복음에 일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옳게 여길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믿으면 복 주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성공과 자기 이익을 위해 산다면, 그 사람은 성공과 이익을 선포하는 거짓 복음이 옳게 여겨질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생각에 일치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에, 내 모든 생각이 고쳐지고 새롭게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로인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구별해 들을 수 있는, 지혜로 살아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소원들, 곧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나의 일이 잘되기를 원하는 이 생각과 소원들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진리가 아닌 말을 옳다 여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 인해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방종한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들이 멸망을 받아야 마땅하나, 의인이 열명만 있으면 멸망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세대의 멸망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당연히 의인에게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한다면, 내가 피할 피난처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도움이시고 힘이 되시는 분이지, 세상을 힘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성공을 외치는 말, 세상에서 힘을 얻는 것을, 복이라고 외치는 말들이 옳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믿음의 중심 위에 굳게 서 보십시오.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고 강조하는 말들이, 왜 복음에서 벗어난 인간의 소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말하되, 믿음에 서 있지 않기에 믿음이 아닌 것을 말해도, 그 말이 옳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의 성공, 나의 잘됨을 위해,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다만 그분만을 의지하고자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것만이, 심판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인생의 성공을 엿볼 수가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피흘리신 현장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잘됨과 세상에서의 행복을, 약속하고 보장한다고 생각합니까? 십자가의 승리는 힘의 결과가 아니라 포기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시는 버림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나에게 나오라, 성공하게 하겠다,’ ‘나를 따르라,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버림의 길을 가신 것처럼, 성도가 가는 길도 버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말이 옳게 여겨집니까?
세상은 나를 잘되게 하는 신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으면서, 자신의 잘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공을 원할 때, 자연스럽게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말하기는 하겠지만, 십자가의 마지막에 교회의 성공을 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버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은 것으로 채워지는 것으로 보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들이 아히도벨의 계략과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옳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사도들의 행적들이 마치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한 위대한 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사도들을 세워서 일하시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사도들처럼 열심을 내서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말을 하게 되고, 그러한 말들이 옳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오직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여 봐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의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용서의 기쁨과 감사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무엇이 복음이 아닌 말인가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어봐야, 결국 마지막은 심판이며 멸망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확인하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 여러분을 살리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확고히 하기 바랍니다. 성공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복음의 진실된 외침을 듣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복음의 소리에 못마땅해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중심에 내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기 전 다시 한 번,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현장에서, 과연 나의 성공과 잘됨을 요구할 수 있는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과연 무엇이 보일까요?
5절 이하를 보면, 아히도벨이 다윗을 죽이고 반역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계략을 말하자, 압살롬은 후새의 말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 아히도벨의 계략을 말해주고, 그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몹시 격분해 있을 것이고, 또 다윗은 어느 굴에 숨어 있을 것인데, 그런 다윗을 잘못치다가 혹 무리 중에 먼저 몇이 엎드러지면, 소문은 압살롬이 패한 것으로 날 수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기울 수가 있으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새는 자신의 계략을 제시합니다.
11-13절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것이니이다 하매”
후새의 모략은 군사를 많이 모으고, 압살롬이 친히 전쟁에 앞장서서 나가서,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을 전멸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새의 계략을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고, 후새의 계략을 따르고자 하게 됩니다.
14절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고 계시는 결과였다는 사실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곧 후새의 계략은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기 위해,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파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후새는 다윗이 들여보낸 첩자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에게 후새를 가게 하신 것 까지, 다윗을 돕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의 위기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했다면, 다윗이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에 하나님은 후새를 보내시고, 더 나은 것처럼 여겨지는 다른 계략을 제시함으로써 다윗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 편에서는 이러한 일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전혀 알지 못한 가운데,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중지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못마땅함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다면, 후새를 보내서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버리게 하는 것보다는, 다윗에게 힘을 주셔서 압살롬을 치게 하신다든지, 아니면 압살롬이 있는 지역에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심판을 하시는 방법으로 다윗을 돕는 것이 더 폼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위기 상황에 있는데, 정작 하나님은 다윗을 돕고 계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의 도움을, 환경의 변화 또는 개선으로 이해합니다. 위기 상황에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신의 도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 상황은 그대로인데,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신뢰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환경의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설령 환경은 그대로이고, 어려움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새를 통해서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산시킴으로서,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며 돕고 계십니다. 비록 다윗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분명 하나님은 다윗은 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시, 여러분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여러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굳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게 불리하게 된 것 같다 해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불리함이 유리함으로 바뀜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돕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돕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도우시니까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기대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로 나오게 할 뿐입니다. 또한 그러한 기대 자체가 곧 악일 뿐입니다. 세상 일이 잘되든 못되든,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바라보고 살필 것은, 오직 영혼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환경을 본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의 생명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의 흔적은 분명 보여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봄으로써,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고통 가운데 있어도, 힘없는 약자로 살아도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비록 겉으로는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장래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되어지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겉으로는 세상이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내막은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내막은 멸망으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십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힘있는 자가 되도록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잘 됨을 위해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에서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들도, 원망의 조건에 불과했던 형편들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순간들이었음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음을 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