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구두의 집
오 현 정
우체부를 기다리다 여자는 광장으로 나온다.
천문 시계탑 위에는 해골로 서있는 사람과 기타 치는 사내와 유태상인이
쾌락과 돈만 쫓으면 빈 해골이 된다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신神을 만나러 아드리아 바다로 간 남자의 왕관은 오지 않고
소원이 끓고 있는 다리 위, 불빛이 연인들의 자물쇠를 따보려고 긴 팔로 블타바 강을 저어간다.
번지수 대신 양과 호랑이, 용과 물고기, 하얀 구두 장식이 달린 집의 대문에 기다림을 넣는 프라하의 골목은 첫사랑의 열쇠다.
처녀가 아침마다 새로 신는 하얀 구두다.
앞굽 뒷굽을 돌길에 누르며 탭댄스를 추다
여자는 닳은 발에 입맞춤하며 왕이 될 남자를 작은 봉투에 봉한다.
쓸쓸한 이마를 짚은 하늘이 붉은 술을 머금고 중세로 가고 있다.
성당의 성사고백을 다 들은 바람이 종을 치는 하늘의 집
창문이 열리고 열두 제자가 찰나의 시각너머 영원을 울리며 사라진다.
한 사람을 가슴에 들이기 위해 온몸에 종소리를 흔드는
여자의 하얀 구두는 젖빛으로 물든 긴 편지를 읽는다.
----오현정 시집, 『몽상가의 턱』에서
이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사람과 그를 기다리는 사람 중, 어느 누가 더 애간장이 타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이면 그것을 도로 풀어서 수많은 청혼자들을 물리쳤던 오딧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가 그것을 말해주고, 사랑하는 연인인 에우리디케를 찾아서 저승까지 내려갔던 오르페우스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도령을 기다리던 성춘향이도 그것을 말해주고, 백마를 탄 왕자를 기다리던 신데렐라도 그것을 말해준다. 기다림은 초조와 불안과 외로움과 쓸쓸함을 낳고, 다른 한편, 기다림은 기대와 설레임과 미래의 희망과 황홀함을 낳는다.
오현정 시인의 [하얀 구두의 집]은 가문의 문양이자 상징이고, 그 구두의 의미는 무한한 영광과 행복을 뜻한다. 미래의 희망이자 이상낙원의 상징이 아니라면 ‘하얀 구두의 집’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하얀 구두의 집]의 주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며, 때는 중세이고, 장소는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의 골목이다. 천문의 시계탑에는 세 사람이 있다. 기타 치는 사내는 놀기를 좋아하는 베짱이를 뜻하고, 유태상인은 돈을 좋아하는 수전노를 뜻하고, 해골의 사내는 그 둘을 비웃으며, 쾌락과 돈의 무상성을 강조한다. “우체부를 기다리다 여자는 광장으로 나온다”라는 시구에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역사 철학적인 사유가 함축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기다림은 쾌락과 돈에 맞닿아 있고, 따라서 그 기다림을 참지 못해 광장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무상성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저울추가 기울고 절망의 저울추가 올라가며, 그 어떤 불길한 조짐의 싹이 트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멋진 남자이고 백마 탄 남자이며, 황금빛 왕관을 쓸 제왕이지만, 그러나 그의 금의환향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전혀 엉뚱하게 “소원이 끓고 있는 다리 위, 불빛이 연인들의 자물쇠를 따보려고 긴 팔로 블타바 강을 저어간다.” 자물쇠는 행운의 자물쇠이며, 내 사랑 백마 탄 남자와 그 자물쇠를 따려는 수많은 불빛의 욕망들은 무서운 원수형제들이며, 다같이 황금빛 왕관을 노리는 짝패들에 지나지 않는다. 황금빛 왕관은 무한한 영광과 행복의 상징이며, 만인들의 욕망이 집중된 것이고, 서로간에 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권력투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번지수 대신, 문패 대신, “양과 호랑이, 용과 물고기, 하얀 구두 장식이 달린” “프라하의 골목은 첫사랑의 열쇠”라고 하지만, 그 첫사랑의 열쇠는 이내 피로 물들었거나 그 순수성이 퇴색해버린다. 기대는 배반을 낳고, 배반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첫사랑을 허무하게 만든다.
내 사랑 백마 탄 남자는 신을 만나러 아드리아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첫사랑을 기다리는 하얀 구두의 여자는 “앞굽 뒷굽을 돌길에 누르며 탭댄스를 추다”가 “닳은 발에 입맞춤하며 왕이 될 남자를 작은 봉투에 봉한다.” 내 사랑 백마 탄 남자가 없는 탭댄스는 공허하고, 닳은 발은 도로아미타불의 헛수고를 뜻하며, “왕이 될 남자를 작은 봉투에 봉한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박제화된 사랑을 뜻한다. 하얀 구두는 첫사랑이고, 첫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그 실체가 없다. 첫사랑의 이마는 쓸쓸하고,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 여자는 역사의 신을 거꾸로 싣고 중세의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성당의 종소리도 부질없고, 하늘의 집 창문이 열리고 열두 제자가 나타나도 황금왕관을 쓴 내 첫사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첫사랑은 이루어지면 환상이 깨지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첫사랑은 신화와 전설의 옷을 입고 더욱더 눈부시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영원히 떠나가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첫사랑을 기다리기 위해 온몸으로 종소리를 울리고, 하얀 구두를 신은 여자는 젖빛으로 물든 긴 편지를 읽는다.
젖빛, 모든 생명의 기원----.
젖빛으로 물든 편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의 편지----.
돈과 쾌락은 허망하고, 또 허망하지만, 그 허망함을 꿈꾸는 하얀 구두는 모든 연인들의 구두가 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된다.
오현정 시인의 [하얀 구두의 집]은 그의 역사 철학적인 인식의 토대 위에 세워진 집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더욱더 아름답고 멋지게 미화시킨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