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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홍모 목사
사41:8-13절 말씀은 이사야서를 읽는 중에 가장 은혜를 받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8-9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처음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렇게 소중한 말씀과 약속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은혜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정말 은혜되는 말씀이요, 소중한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라고 부르신 종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고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해주시고 알아주시고 인정하시면서 절대로 싫어하여 버리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으로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알아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알고 계신다는 것부터 은혜입니다. 이 세계 인구가 60억이 넘는데, 무엇 하나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우리를 알아주시고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것부터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선택하였어도 싫으면 싸우고 버리고 갈라서기도 합니다. 예전에 좋은 친구 관계에 있었어도 자주 만나면 친밀해지지만 눈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있습니다.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하면서 결혼한 사람들인데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갈라서는 이들이 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이 한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8, 11)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범죄하는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바르게 살아가면 좋겠는데 그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을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유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마다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땅 끝에 있을지라도, 땅 모퉁이에 있을지라도 그곳에서도 알아보시고, 불러주시고 일으켜 종으로 세우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명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명을 깨닫지 못하면 참으로 어두운 생애를 사시는 것입니다. 8절 말씀에서도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9절에서도 "너는 나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고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일에 참여하여 그 일을 마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말을 하니까 노예를 연상하지만, 자원하는 종, 섬김의 종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당신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12살 때에 성전에 있으면서 하신 말씀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1년이 지난 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33살의 나이인데,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명의 사람입니다. 사명(使命)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말에 나왔습니다. 우리 말에는 "맡겨진 임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나 직무"를 말합니다.
사명이란 대사나 사신이나 사절이 대통령이나 국가로부터 받은 명령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사명이 있다는 말은 무거운 책임으로 느껴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요, 일이요 직무라고 하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맡은 사람이 그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중압감을 느끼지만 한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주인이신 하나님과 동역 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보시고 당신의 동역자라고 하셨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명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살고 이것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목표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심부름할 일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살되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생애를 값지게 살아가는 사람이요,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거나 또 사명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데, 그것은 무의미한 연명일 뿐입니다. 우리의 정열, 우리의 충성심, 열과 성실을 다하여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종으로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사명감은 우리를 성실하게 만들며, 사명감은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고, 부지런하게 위대한 인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명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윌리암 제임스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애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일에 우리의 생애를 바치는 것입니다. 소중한 일에 쓰임을 받으면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악한 일에 앞장서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미련합니다. 그의 성격 때문에 그런 일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하셨습니다.
나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물질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우리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생명인데, 이 생명마저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바칠 수 있는 것이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9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세상에 어디를 가도 들어볼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힘있게 해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부터가 두려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놀라게 되는 일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힘있는 사람이 친구로 있다면 그와 함께 이 세상도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 혼자라고 하면 이 세상을 살면서 넘어지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한다면 그는 정말 담대한 사람, 용감한 사람, 위대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보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엡1:5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갈4:7에서는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유업을 받을 자, 상속자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하실 일들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 동행하시고, 더욱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에 주님도 함께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라 나갈 때에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하시고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우리에게 힘이 되십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축적한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미하여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9절 마지막에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13절 "이는 나 여호와 네 하나님이 네 오른 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에게든, 무엇에 붙들려 사는 인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과 이념에 붙들려 일생을 허송 세월하는 사람들도 있고, 위대한 사상과 신앙에 붙들려 참으로 보람있는 생애를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붙들려 살면 그도 일생 위대한 삶을 살아갈 것이요, 악한 사탄의 손에 붙들리면 악한 일에만 사용되는 악한 사람이 될 뿐입니다. 사상과 이념에 붙들리면 사상가도 되고 혁명가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무엇인가에 붙들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오른 손이란 말은 힘이 있는 손, 축복의 손, 창조의 손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48:13에는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 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89:13에는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 손은 높으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오른쪽은 지고한 자리, 영광의 자리요, 오른손은 축복의 손이요, 능력의 손이요, 창조의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오른 손으로 우리의 오른 손을 붙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행18:5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게 붙잡혔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를 붙들고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과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야 능력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능력있게 활동한 사람은 모세라고 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신발을 벗은 사람입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처음 대면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고 했습니다. 모세는 맨발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광야를 살아가면서 발을 벗는다는 말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며, 노예로 살라는 말이요,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은 전의 삶을 버리라는 말이요, 권리를 포기하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보호해주던 것들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일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붙들려 일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붙들리기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는데, 자신의 자신됨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포기하셨습니까? 주님은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악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하여 하늘 나라를 떠나셨습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거처할 곳도 없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귀신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예수 믿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이름을 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처음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놓을 때만이 주님의 손에 붙잡히고 붙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앞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지난주간 펠릭스 멘델스존의 관현악곡 중에 '한 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몇 곡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이란 작곡가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유대계의 은행가였으며, 할아버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모세스 멘델스존'이란 분이었습니다. 작곡가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 아주 부유한 가정과 신앙과 교양 있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면서 티 없이 밝게 성장하였습니다. 수도 베를린으로 이사하면서 일찍부터 음악교육을 받아 여러 악기를 다루게 되었고, 음악가 첼터의 지도를 받으면서 9살 때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고, 10살 때는 작곡을 시작하였고, 17세 때에는 관현악곡 '한 여름밤의 꿈'의 서곡을 쓰는 등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요한 스트라우스 바흐의 전곡을 암기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현악곡 '한 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부유하였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기에 그분의 음악은 품위가 있고 명쾌하고 낭만적인 정서와 서정미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38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하루는 후리드버그라는 곳의 오래된 예배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배당에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이 그 오르간을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관리하는 분에게 오르간을 연주해보고 싶다고 하니 못마땅하다는 듯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멘델스존은 진지하게 한번만 연주하게 허락하여 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간청하니 관리인은 마지못하여 한번 올라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멘델스존이 파이프 오르간에 앉아 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양손과 발이 오르간에 닿자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감동적인 멜로디가 온 예배당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의 연주는 정말 아름다운 연주요, 웅장하였고, 살아있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들어볼 수 없는 대가의 연주였습니다. 그의 연주에 취하여 있던 관리인이 멘델스존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네 저는 멘델스존입니다." 깜짝 놀란 관리인이 말했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에게 이 오르간을 만지지도 못하게 할 뻔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라고 하여도 위대한 음악가의 손에 들려졌을 때에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것이고, 거친 손에 들려졌을 때에는 아름답지 못한 소리나 낼 수밖에 없으며, 값비싼 오르간이라도 크게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애물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인생도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될 때는 위대한 생애를 기록할 것이요, 죄 많은 나 자신이 나를 움직이고 살아간다면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 모세가 위대한 인물입니까? 왜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손, 우리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연주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살아갈 것입니까? 적은 지식의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 하나님에게 붙들려 능력있게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