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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4
작으나 큰 영향력 / 김영대 목사
오늘 본문 5장 1절에는 나아만 장군의 존재를 설명하는 세 구절의 말이 있습니다.
① 아람제국의 군대장관
②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
③ 백전백승의 큰 용사라는 말입니다.
왕상 22장에 나오는 대로 이 나아만 장군은 아합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과 싸워 승리한, 아람 나라의 참모 총장으로서 임금의 총애와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아만에 대한 이런 화려한 형용사들 다음에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환자더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큰 용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 몸이 썩고 감각을 잃어버리는 나병,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여기 "나병환자더라"는 이 말은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약점 중에 하나를 그도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자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모든 삶의 희망을 꺾어 버리는 심각한 병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든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은 모두 '그러나'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썩는 냄새가 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듯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하고 허둥대며 살아갑니다. 온전한 듯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의학과 유전공학이 발달해서 인간의 유전자 구조까지 밝힌 게놈지도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불치병, 난치병은 그 수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만이 아닙니다.
절망의 불치병, 좌절의 암 덩어리, 간경화 보다 더욱 심각한 심령의 경화, 마음 문을 꽁꽁 닫아걸고 아무도 용납하지 못하고 누구와도 진정한 만남을 가지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보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고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받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받아 마음의 상처에 더 크게 덧이 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인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나 속은 썩어 있습니다. 행복한 것처럼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상처를 보이지 않으려는 거짓된 웃음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나아만의 문제였고, 또한 오늘을 사는 나의 문제요, 너의 문제입니다.
'나병'은 다른 병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있는 병'입니다. '내 속에 있는 병'입니다.
현대인은 큰 용사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 나병환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늘 우리의 실존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인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화려한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고 있지만 그 속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썩는 문둥병에 걸려 있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기쁜 소식이 나아만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그 집에 포로로 잡혀와서 집안 일을 돕고 있던 하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주인이 제 고향 땅 사마리아에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문둥병을 고칠 수가 있을 텐데"하는 것입니다.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 장군은 왕을 만나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요단강 물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라는 말을 전합니다. 나아만은 그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였더니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저는 오늘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시켜준 한 작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소녀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보잘 것 없는 아이였지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로부터 아람나라로 잡혀와 나아만 장군 집의 하녀가 된 어린 소녀(a little maid)입니다.
그야말로 힘도 없고, 신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3 No P (no power, no position, no possession)의 존재인 하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사로잡혀 온 노예요, 어린아이요, 해방될 가능성도 없는 여자 종입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람 제국의 국방장관을 복음화 시키는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아가서 이 여자아이의 조용한 전도가 결국 200년 후에는 요나 선지자를 통한 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회개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가 별 성의도 없이 전도하였지만 왕으로부터 짐승까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한 여자아이의 소리 없는 전도로 이미 복음의 씨가 나아만 장군에게 심겨졌고, 그를 통해 아람 나라 사람들의 마음 밭이 준비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지평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5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은 다시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온 천하에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 후에 그는 노새 두 마리에 이스라엘의 흙을 실어 고국으로 돌아가서는 그 흙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만 번제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하여 성경은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나아만 장군은 스스로의 그 약속을 분명히 지켜 아람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 믿음을 심는 역할을 한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작은 소녀는 이미 큰 숲을 이루는 한 알의 겨자씨였고, 한 숟가락의 누룩이었고, 아람 나라를 불태우는 성령의 불쏘시개였습니다.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 집사가 에티오피아 내시를 전도하므로 에디오피아를 아프리카 대륙의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든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름 모를 하녀 아이 하나를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자아이 하나의 확실한 믿음이 아람나라의 국방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 나라를 구원하는 초석을 이룬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무명의 한 소녀였지만 위대한 전도자요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그는 왕보다도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은 거룩한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살았는데, 이 소녀는 이방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작으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거인과 같은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1. 믿음의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야말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소비가 위축되고 경기가 침체되었습니다. 북한 핵과 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갈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긴장으로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 가려고 모색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안전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안한 시대에 더욱 믿음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불신, 불안, 불화, 불만, 불평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이 여자아이는 자기 집 주인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의에 빠져있던 주인 마님에게 너무나 확신에 찬 말을 합니다.
"주인 어른께서 우리나라의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면 간단히 나을 것입니다.(3절)"
이것은 죽음을 내건 발언입니다. 만일 낫지 않으면 능지처참을 당할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자아이는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면 나병도 거뜬히 나을 것입니다." 이로 볼 때, 그 몸은 포로로 끌려왔으나, 그가 가진 신앙은 포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확실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려면 먼저 나 자신부터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말이 길지 않아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감동시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동네에 들어가서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하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감동을 받았습니다.(요한 4: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확신이 있는 사람은 말이 길지 않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그러나, 분명합니다.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형 베드로에게 "형! 나 메시아를 만났어"라고 간단하게 전도했습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간단하면서도 확신 있게 전도했습니다(요한 1:41, 46). 말이 짧으나 많으나 확신 있는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이런 확신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신임 받는, 신뢰 받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부터 우리 교회는 6월 8일 "전반기 이웃초청주일"을 목표로 '태신자 작정'을 시작했습니다. 태신자란 '구원을 목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잉태한 잠재적 신자'를 말합니다. 즉 가족, 친척, 동료, 이웃, 친구 중에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고자 내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전도하는 잠재적인 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데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가족과 친지, 친구와 이웃들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전체 신자 중에 14%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인 86%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모두 가깝게 아는 사람들의 전도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 가족, 친지, 동료, 이웃들이야말로 내가 책임져야 할 태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태신자 전도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은 관계전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전도팀이 있어서 노방전도도 하고, 전도지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토양을 가꾸는 일일 뿐 실제적인 열매는 별로 없습니다. 사실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관계전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전도의 기초는 서로 신임하는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정한 태신자들로부터 신임 받는 삶을 살아야 전도의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자아이는 신분이 하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의 신뢰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설득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주인은 곧바로 자기 남편 나아만에게 보고했고, 4절을 보면 나아만 장군은 자기 나라 주인인 왕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폐하! 제가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엘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왠 일이냐? "예! 거기에 저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 누가 그러더냐? "예, 우리 집에 있는 어린 하인입니다."
얼핏보면 참 우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 되어 온 한 아이를 그 여 주인도, 나아만 장군도, 임금도 믿었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의 신뢰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전도의 표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은 나이와 신분과 직급에 상관없이 어느 단체, 어느 기관, 어느 직장에서든지 신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것이고, 그가 그렇게 했다면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신뢰성, Credibility가 필요한 때입니다. 믿는 사람은 말 그대로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자랑인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의 선구자 안철수씨는 성공철학 4가지를 주장합니다.
첫째, 명예와 돈을 빼고 생각하라.
그래서 그는 중대한 결함을 가져오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퍼지게 되면 언제나 퇴치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합니다.
둘째, 좋아하는 일에 미쳐라.
그는 본래 의사공부를 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컴퓨터에 인생의 승부를 걸었습니다.
셋째, 기초부터 튼튼히 하라.
그리고 마지막 넷째, 다른 이에게 성실하라.
그렇습니다. 성공 이전에 신뢰성입니다. 신뢰가 곧 성공입니다.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신임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뢰성이 없이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계절이 이 땅에 다시 한번 올 수 있도록 성실성과 신뢰도에 인정받아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소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옛날의 나병, 문둥병은 절망적인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저주받은 병이라고 했겠습니까? 오늘날로 치자면 에이즈(AIDS)와 비슷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 장군이 아람 제국의 총사령관이요 국방장관이라 하더라도 그가 문둥병에 걸린 이상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 화려한 계급장도 떼어야 하고,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되어야 하고, 동네로부터도 추방되어야 하는 처참하고 절망적인 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에서 포로로 끌려온 하녀 아이가 놀라운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얼마든지 나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3절).
절망 속에 있는 그에게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문제 속에 실의와 좌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도 예수를 만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어린 소녀가 입을 다물고 잠잠했다면 어떻게 나아만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아이가 전한 말은 뭐 대단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짧은 한마디의 말이었습니다.
"주인님이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면 고침 받을 수 있을텐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은 절망 속에 있는 나아만에게는 엄청난 소망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전도하느냐, 하지 않느냐, 전하는 내게는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듣는 상대방에게는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는 아주 중대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린 아이는 나아만 장군의 외양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의 실체를 본 겁니다. 그 화려한 군복 속에 썩어 들어가는 문둥병을 본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까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서서히 썩어들어 가고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바로 문둥병 아닙니까?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면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몰라요. 죄를 먹고 마시면서 매일 매일 죽어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소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상황이 어둡고 암담한 가운데서도 소망을 심어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거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절망적인 보고를 한 10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이름 없이 사라졌고, 소망적인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거인이 되었습니다. 절망은 광야에서 죽음으로 끝났고, 소망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팔레스타인의 골리앗 앞에서 절망적이었기에 패배자로 종지부를 찍었고,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과 승리의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 승리하는 역사의 거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은 언제나 희망적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소망입니다. "일어나라, 걸을 수 있다. 너도 고침 받을 수 있다. 나을 수 있다. 회복된다. 죽지 않는다. 살아난다. 나 역시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하여 살아난다. 누구든지 변화 받을 수 있다. 시몬아, 너는 베드로, 곧 큰 인물이 되리라.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망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의 공통점이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이 여자아이는 이스라엘에서 이방 땅 아람나라로 끌려간 하녀의 신분이었는데도 한 가정, 한 왕실, 한 나라, 한 시대를 복음화 시키는데 위대한 업적을 쌓는 위대한 믿음의 거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소망의 영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신분과 역량을 초월하여 성령의 큰 역사를 일으키는 전도의 불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믿음의 큰 영향력을 기치는 믿음의 거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