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해간도의 봄 날, 교회 옆 양지바른 언덕에 한 그루 하얀 목련이 화사하게 입을 벌리고, 마음은 구름이 되고, 언제나 두드려보는 하늘의 창은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끝없이 울어 부서지는 파도는 모래밭으로 밀려들어오고, 꺼져 없어질 조각들만 남기고 영영 사라진다. 바다 멀리 가물거리며 떠 있는 어선에서 흐르는 맑은 통기타 소리가 해풍에 날리며 멀어져 간다.
잠시 동안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은 지나가버립니다. 내 모든 꿈이 눈앞에서 지나가버립니다.
호기심도 바람 속에 티끌, 모든 것이 바람 속에 날리는 티끌입니다. 똑 같은 옛 노래 끝없는
바다 속에 작은 물방울 하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비록 우리가 원치 않는다 하여도 흙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집착하지 마세요. 땅과 하늘 밖에는 아무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도 단 1분을 사지도 못합니다. 바람 속에 나는
티끌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먼지와 같습니다. 세상만사 먼지와 같습니다.
록그룹 캔자스시티Kansas City 가 연주한 「바람 속의 먼지Dust In The Wind」이다. 대중가요의 傳導書라 할 이 노래의 가사처럼 인생은 바람 속의 날리는 티끌같이 미약하고, 인간사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한 줌의 먼지로 화해 황량한 대지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상의 이치를 눈 감은 채 얼마나 크고 긴 욕망의 꿈을 꾸고 있는지. 꿈을 품은 사람들이 사회적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예수가 선포하신 이웃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오로지 경쟁자만 있을 뿐이고 명예와 돈을 위해 갖은 수고와 노력을 다하며 육신의 영광을 노래하며 살아간다. 금방 눈앞에서 사라질 먼지와 같은 육신의 일들을 욕망이라는 빈 자루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생각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걸어온 인생길은 후회와 실망만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일찍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장 2~4절)라고 말씀한다. 영원할 것처럼 욕망의 바람을 마시며 따라 가지만 성취 후에 오는 허무가 얼마나 헛된가를 말하고 있다.
얼마 전 인간의 욕망이 너무도 허무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 온지 7년이 넘어가지만 한 번도 서부지역을 가보지 못하던 차에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내 생활을 아는 친구의 도움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오랜 만에 타보는 비행기 좌석에 등을 기대고 뉴욕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뒤 어둠 너머로 또다른 풍경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걸어온 길과 내 인생을 지배하던 욕망의 어두운 구름덩어리였다. 지나온 세월은 지금까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게 하고, 오직 인간적 욕심을 위해 헛되이 살아왔다는 후회의 서러움이 가슴 깊이 내려앉고 있었다.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내 자신은 오직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고, 거기에 안주하여 나태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어두운 대지를 가르고 날라서 다섯 시간 만에 라스베이거스Las Vegas에 도착했다. 진눈개비가 흩날리던 뉴욕의 매서운 날씨는 눈앞에서 가물거리다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늦여름 날씨를 연상케 하는 축 늘어진 가로수, 스페인 풍의 건물들은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기후와 더불어 같은 나라 땅인데도, 색다른 이국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호텔로 들어가는 택시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밤거리, 카우보이 복장을 한 사람들의 걸음걸이에서 자유분방함을 느끼고, 이 도시가 자유와 환락의 불야성임을 알 수 있었다. 여장을 풀고 일주일간 올해 유행할 패션을 알기위해 친구와 매직 쇼Magic Show에 참여했다. 미리 계획한 대로 일정을 쪼개어 네바다Nevada, 유타Utah, 그리고 애리조나Arizona 州 여행을 하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하는 경비행기는 그랜드캐니언으로 향했다.
흘러가는 은빛 구름 밑으로 깊고 깊어, 푸르다 못해 에메랄드Emerald빛 인공호수 미드 호Lake Mead와 거대한 인공구조물 후버댐Hoover Dam이 눈 아래 들어오고, 이윽고 수백만 년의 세월이 만들어놓은 277마일의 거대하고 웅장한 국립공원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NP의 남쪽 협곡South Rim이 눈에 들어왔다. 콜로라도 강의 급류가 만든 침식작용, 비바람이 깎아놓은 풍화작용으로 대협곡의 폭은 끝이 없어보였고, 영겁의 세월을 향해 대륙 전체를 갉아먹을 기세로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자연과 인공이 이루어놓은 세계 최대의 장관을 보며, 인간의 힘과 역사는 얼마나 유한한지, 그와 대조적으로 자연은 얼마나 위대하고 장엄한지를 깨닫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후알라파이Hualapai와 나바호Navajo 부족의 땅이었던 이 그랜드 캐니언의 장엄하고 광활한 위세에 눌려 정벌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원정길을 나섰다고 전한다. 여행의 즐거움이 이어지는 경비행기의 승객은 대부분 방학을 이용해 미국을 찾은 일본인 대학생들이었고 한국인이라곤 오직 나와 친구 밖에 없었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인들 속에서 우리 둘은 어린 시절 소풍을 즐기던 마음으로 농담을 하고,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가며 옆 자리의 일본인 여학생들과 즐겁게 한담을 나누며 여행을 했다. 다시 작은 비행기 안으로 콜로라도 고원의 광활함과 끝없이 이어지는 콜로라도 리버Colorado River의 긴 물줄기가 올라온다.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에 모두들 감탄사를 절로 나온다. 모두들 웅장한 기세에 눌려 숙연해지고 마음속 깊이 감동을 줄만한 분위기로 치달았다. 그 순간 그룹 캔자스시티의 노래처럼 자연 속에 서있는 나의 연약함과, 바람 속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은 미약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 시간여 가량 하늘을 날랐던 비행기는 공원 끝, 사우스림South Rim이 가까운 투사얀Tusayan의 그랜드 캐니언 공항Grand Canyon Airport에 기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야베파이Yavapai Point로 이동하여 정해진 시간 동안 대협곡의 오솔길을 거닐며 사진 촬영을 했다. 배경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협곡 아래 흩어져 있는 작은 돌멩이같이 세상의 한 부분도 안 되는 미미한 존재처럼 보였다. 영겁의 세월이 이루어놓은 자연을 보며 생각했다. 우주의 역사와 견주면 한 점의 먼지도 되지 않으면서 이제껏 하나님의 일보다는 육신의 일만 도모하고 있었다는 허무함에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이 여행은 대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선하고 아름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은 날마다 세속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 삶 속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며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 아귀다툼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내면의 존엄은 사라지고 세상은 서로를 지배하고 올라서기 위한 사악함만이 남게 될 것이다.
갈증의 고난을 이기고 대협곡의 절벽 바위 틈 사이에 홀로 핀 한 송이의 거친 들꽃만도 못내가 자연이 주는 교훈을 깊이 되새기지도 못한 채, 도시로 돌아가 아옹다옹할 모습이 선연히 눈앞에 떠올랐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이 곳에 다시 선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이젠 어느 곳에 서 있더라도 신비로운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한 이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말없이 변화하는 자연처럼 섭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싶다. 진리가 내 삶 속에서 자유롭게 맥동하는 하늘나라의 바람이고 싶다. 누군가의 가슴에 안개비처럼 젖는 줄 모르게 조용히 스미는 작은 예수가 되어 살아가고 싶다.
돌아서면 까맣게 당신을 버리나니 버리고 그 문밖에서 내가 떨거나 혹은
나의 문 저편에서 당신이 떨거나 우리는 그같이 서로 하나이기 원하며 하
나이지 못하는 G선상의 아리아 날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죄목과 날마다
한 눈금씩 자라는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나의 빈 영혼의 병실엔 바람 부
나니 버리고 못 잊는 회한과 不忘의 바람 부나니 서른세 살 청무처럼 살
다 간 한 사내의 삶과 죽음의 아리아가 울리나니 나의 병실엔
- 홍윤숙,「나의 예수」
지금껏 어느 여행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두려움과 엄숙함, 그리고 장엄함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던 그랜드 캐니언의 여행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나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오래 곱씹으면서,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늦저녁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마천루의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글은 2007년 출간된 제 수필집 <미운 얼룩말의 고독> 중의 한 글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이민 온지 7년이 되었던 2004년에 쓴 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첫댓글 아주 오래전 이야기군요. 잔잔한 감동이 있어 추억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향기// 예.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항상 관심을 갖어주시는 주향기님께 감사드립니다. ^^
모닥불// 감사합니다. 모닥불님. 모닥불님께서 쓰시는 시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