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계십니까? (제 2편 )
요 15:4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고후 13:5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요 14:20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시면 여러분들이 매우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성경 구절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은 어떤 집이나 빌딩 같은 건축구조물에 붙어있는 출입문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 같은 사람들의 마음문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문을 열면 우리 주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들어가셔서 더불어 먹고 더불어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인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영으로 들려지는 어느 정도의 답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사신다든지, 아니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 계시고 아니 사사신다든지, 두 종류의 답변 중에 하나를 얻어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바라옵는 것은 여러분들 모두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믿음을 통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들 안에 들어와 계시고 사시는 예수님을 풍성히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지난번 첫 번 째 시간에 드렸던 말씀을 다시 강조합니다. 막연한 지식적 상상이나, 추상이나, 관념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 안에 계시고 사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실체이면서 거룩한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과 성품과 인격을 지니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 안에 계시고 사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을 인용합니다. 그 성경 구절에 보시면 특히 그, 라고 하는 3인칭 단수 대명사가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라고 하는 3인칭 복수 대명사가 아니라 그, 라고 하는 단수 3인칭 대명사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복수 명사의 어떤 모임이나 집단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각각의 믿는 자 개인에게 우리 주님은 들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들어가실 뿐만 아니라 들어가셔서 더불어 먹고 더불어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질 때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은 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더욱 넉넉하길 바랍니다.
1)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5장 4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말씀으로 현대인의 성경에 보시면 “내 안에 살아라 나도 너희 안에 살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처럼 진정한 예수 영접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아무리 아버지의 사랑을 입은 둘째 아들이라도 그 아들 스스로가 아버지의 뜻을 거절하고 아버지 품을 떠나는 탕자의 행동을 선택했을 때 그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도 없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 주님의 뜻을 거절한채 자기의 육신이 원하는 불신앙적은 뜻을 선택했을 때 그 사람에게는 예수 주님도 함께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예수 품안에 사는 심정으로 예수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영으로 믿는 자 알에서 계시고 사시는 그 예수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지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예수 주님은 더욱 더 믿는 자 속에 계시고 사시면서 복있는 일을 행하십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보시면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줄으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모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을 받은 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 안에 계시고 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적인 느낌과 감각으로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 안에서 게시고 사시는 예수 주님은 살아서 일하시고 행하시는 신격이고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한 것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있어야 합니다.
관계된 말씀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예수 체험을 말하겠습니다.
1913년 5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200일 저녁 특별 기도회를 마친 그 날이었습니다. 온 몸에서 들려지는 신비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네 안에 내가 있느냐? 나만 구하라, 내 안에 네가 구하는 것들이 다 있느니라”는 음성이었습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날동안 이같은 음성이 제 온몸에서 계속 들렸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비한 일이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목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내 안에 내가 영접한 예수님이 계실텐데 왜 나에게 이런 음성이 들리지.... 생각하면서 잔잔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 몸에서 들리는 이 같은 음성은 좀처럼 사라지지 아니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더 뜨거운 음성으로 계속해서 “네 안에 내가 있느냐? 나만 구하라, 내 안에 네가 구하는 것들이 다 있느니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제가 예수 체험의 영적인 신비를 성경적 근거에서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가장 먼저 제 영혼 속 깊이 사무쳐온 진리가 고린도후서 13장 5절이었습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줄으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을 받은 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들이 계기가 되어 저는 이 후부터 성경을 보는 시각과 설교 말씀의 방향을 오직 예수화된 예수주의로 설정했습니다. 때로는 하루에 1만번 이상의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믿음으로 예수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고 사심을 자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믿는자들 안에 계시고 사시는 예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제가 섬기던 교회가 사용한 모든 전도 용지에는 큰 제목으로 “지금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에 별내 신도시를 거치면서 퇴계원을 통과하는 80번 시내버스의 홍보 영상물에 “지금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라는 영상 글귀를 올려서 약 30분 간격으로 매번 반복하도록 했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지금도 여전히 지금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저의 이런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계속 이어지는 말씀으로 요한복음 14장 20절에도 보시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가장 중요한 키워드 말씀은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 안에 계시고 사신다는 사실을 알듯 모를듯 애매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무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기 안에 계시고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길 원하신다면 반드시 자기 안에 계시고 사시는 예수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회의 지도자와 기득권자들은 여전히 불신앙적인 타성과 습관에 깊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결단코 예수님과 세상의 세속적 시류를 함께 붙들거나 양립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한국 교회의 수 많은 사람들은 예수 쪽으로 치우친 예수주의주의 사람이 되는 것에 무관심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신앙과 삶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합니다. 그러면서 불신앙적인 불행한 삶의 업보를 자기의 것으로 가져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바라옵기는 지금이라고 자기 신앙의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면 지난 과거처럼 그냥 그대로 방치하지 마시고 보다 더 온전한 예수주의 신앙을 통한 예수 회복으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아름답게 세우시길 바랍니다.
지나간 한 때 미국의 풀러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던 로버트 멍어 교수는 자기가 쓴 소책자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내 마음에 모셨던 그 날 저녁을 나는 결단코 잊을 수없습니다. 그 분이 내 마음의 집에 들어오셔서 사시기 시작한 그 날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요? 그 것은 감정이 고조된 어떤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내 영혼이 중심에서 일어난 엄연한 실체적 사건이었습니다. 그 분은 내 어두운 마음에 등불을 켜셨습니다. 차가운 난로에 불을 지피고 모든 냉기를 몰아내셨습니다. 어둠의 정적이 흐르는 곳에 음악을 연주하셨고 불황와 불평이 있는 곳에 평화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집 문서를 그 분께 맡겼습니다. 그 날 후부터 그 분은 내 삶의 새로운 왕이시고 새로운 주인이 되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비 신앙 체험으로 자신의 영적 거듭남을 새롭게 체험했던 로버트 멍어 교수도 지나간 한 때는 교회의 제도권에서 길들여진 형식과 격식에 충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구원이 이미 완성된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과 이해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믿고 있었던 로버트 멍어 교수였지만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 실제와 실체적 예수님으로 찾아서 들어오신 것을 깨달았을 비로소 로버트 멍에 교수는 지난 과거의 막연한 형식적 추상과 상상과 관념으로 예수를 알고 믿었던 믿음과, 실제적이고 실체적으로 자기 안에 계시고 사시는 예수님으로 믿는 믿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로버트 멍어 교수는 신앙 생활을 무조건 자기의 능력으로 잘하려고 하지말고 그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온전히 모시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잘하기를 원하는 그 신앙생활을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보다 더 최선의 믿음으로 여러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사시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회된 에수주의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