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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진남군(鎭南郡) 사또(使道)에게 청원한 소지(所志) 2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대한제국기 진남군(鎭南郡) 사또(使道)에게 청원한 소지(所志) 2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소지(所志)란?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 청원서, 진정서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 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해,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 관원은 소지의 내용을 살펴본 뒤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뎨김(제음)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쓰며, 그 여백이 모자라면 뒷면에 계속해서 쓰기도 하고 별지를 붙여 쓰기도 하였다. 뎨김을 적은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다.
소지 문서에는 등장(等狀), 단자(單子), 원정(原情), 상서(上書), 의송(議送) 등이 있으며, 그 서식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등장은 여러 사람이 연명해 관부에 올리는 소장, 청원서, 진정서의 성격을 가진 문서이고, 단자는 대개 사대부가 직접 관부(관찰사 또는 수령)에 올리는 소장이나 진정서의 성격을 가진 문서다.
○ 이번에 소개하는 첫 번째 「1903년 7월 거제 한내(汗内)의 반전민(潘田玟) 청원서, 반전민 소지(潘田玟所志)」는 경남 거제군 연초면 한내(汗内)에 거주하는 반전민(潘田玟)이 진남군 선동(仙洞, 항남동)에 시집간 누이가 신랑이 가출하여 굶주리게 되자, 친정 오빠인 반전민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릿고개로 인해 형편이 어려워지자, 누이를 돌볼 수가 없어, 매제(제부)와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달라고 진남 군수에게 요청한 소지(所志)다. 나중에 매제가 나타나 아내를 왜 돌보지 않았냐고 행패를 부릴 때를 대비해 관청에서 공식적인 확인(면책)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군수는 "그건 부부 문제지, 네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며 간단히 거부했다.
두 번째 「1902년 억울한 폭행 및 갈취 사건에 대한 고발장, 박사인 소지(朴士仁所志)」는 경남 진남군 서면(西面) 동봉리(東峰里, 무전동)에 사는 박사인(朴士仁)이 진남(鎭南) 군수에게 선박 운행 중에 일어난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제출한 소지(訴志)다. 박사인은 자신의 배가 김신문(金信文)의 어망을 훼손했다고 자신의 배를 억류하고 자신과 선원을 구타하고, 수천 량의 돈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렸다. 진상 조사를 하니 범인이 따로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런고로 자신의 배 안의 집기 등을 탈취한 김신문을 상대로 배와 집기 등을 추징해 주고, 자신을 구타한 죄를 처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진남군수는 관련자들을 불러들여 직접 심문하겠다고 밝혔다.
1) 「1903년 7월 거제 한내(汗内)의 반전민(潘田玟) 청원서, 반전민 소지(潘田玟所志)」
이 고문서는 거제도(巨濟島) 연초면 한내(汗内)에 거주하는 반전민(潘田玟)이라는 인물이 진남사도(鎭南使道, 당시 진남군수)에게 올린 단자(單子, 청원서)와 그에 대한 판결인 제음(題音)이다. 주요 내용은 가출한 매제(제부) 때문에 굶주리게 된 누이를 거두어 살다가 보릿고개로 인해, 형편이 어려워지자 매제와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달라고 요청한 소지(所志)다. 이 문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오빠가, 가출한 매제 때문에 누이를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자 "나중에 매제가 나타나 아내를 왜 돌보지 않았냐고 행패를 부릴 때를 대비해 관청에서 공식적인 확인(면책)을 해달라"고 요청한 서류다. 하지만 군수는 "그건 부부 문제지 네 책임이 아니니 걱정 말라"며 간단히 돌려보낸 상황이다.
*본문을 요약하건대, 반전민의 누이가 7~8년 前, 진남군 선동(통영 항남동)의 최국률(崔國律)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매제 최국률이 본래 부랑자라 아내를 내쫓고 사방을 떠돌아다닌 지 벌써 7~8년이 되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누이가 친정으로 돌아왔고, 시부모조차 쫓겨난 며느리를 받아주지 않아 반전민이 누이를 데리고 살았다. 올해 보릿고개(麥凶)를 맞아 반전민도 집과 재산을 다 팔아먹고 누이와 흩어져 살아야 할 형편이다. 그런데 젊은 누이가 구걸하며 떠도는 신세가 가련하고, 훗날 부랑자였던 최국률이 갑자기 나타나 아내를 찾으며 행패를 부릴까 두렵다. 이러한 사정을 살펴서 나중에 근거로 삼을 수 있도록 처분(증명)을 내려 주십시오.(계묘년 7월)
*관청의 판결(제음) "시집간 자는 외인(남)이며, 부부가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떨어진 것은 그들 부부의 문제이지, 너(반전민)의 허물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번거롭게 소장을 올릴 일이 아니다." 7월 초6일, 진남군인(鎭南郡印) 직인.
○ 결국 이 문서는 대한제국기 계묘년, 1903년 지방 관청의 민원 처리 방식을 보여준다. 가부장제 하의 고충을 알 수 있다. 여성이 혼인 후 남편에게 버림받았을 때 친정 오라비가 겪는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책임(후환 방지)을 잘 보여준다. 진남군 사또는 이 문제를 '가족 내부의 일' 또는 '개인 간의 불화'로 치부하며 공권력이 개입하여 이혼이나 절연을 공식화해주기를 거부했다.
* 덧붙여 이번 「1903년 7월 거제 한내(汗内)의 반전민(潘田玟) 청원서, 반전민 소지(潘田玟所志)」는 발급자가 반전민(潘田玟)이고, 수취자는 진남사또(鎭南使道)이며 문서 종류는 사문서(私人文書) 소지류(所志類, 풍속風俗·토색討索)이다. 또 출전은 『규장각(奎章閣)』 고문서이며, 수결은 진남군인(鎭南郡印)이다.
**「1903년 거제 한내(汗内)의 반전민(潘田玟) 청원서, 반전민 소지(潘田玟所志)」**
거제(巨濟) 한내(汗内)에 사는 반전민(潘田玟)은 삼가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사람이 집을 얻어 사는 것은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일입니다. 일찍이 몇 년 전, 저의 누이를 관할 하에 있는 선동(仙洞, 항남동)에 사는 최국률(崔國律)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최국률이 부랑(浮浪)한 버릇이 있어 그 아내를 핍박하고 내쫓았습니다. 그는 사방을 떠돌아다닌 지 벌써 7, 8년이 되었습니다. 저의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친가로 돌아왔습니다. 이에 시부모를 찾아가 말해보았으나, 시부모 또한 이미 쫓겨난 자라며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제가 누이를 데리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릿고개(麥凶)를 당하여, 저 또한 집을 팔고 재산을 탕진하여 누이와 각자 흩어져 떠나야 할 형편입니다. 이 가련한 정상을 이루 다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누이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이가 젊은데(靑春) 빌어먹는 길에 올라야 하니 앞으로 누구에게 의탁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최국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본래 부랑하는 습성이 있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와 혹시라도 그 아내를 찾게 되면, 그 사이(누이를 데리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제가 반드시 곤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호소하오니, 살펴주신 뒤에 특별히 이 사정을 가련하게 여기시어 논리에 맞는 판결(題下)을 내려주심으로써 훗날 증거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진남사도(鎭南使道) 처분. 계묘년(1903년 추정) 7월 일.
[제음(題音) 관청의 판결] "시집간 자는 남(외인)이며, 부부가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떨어진 것은 잘못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요, 잘못이 너(청원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번거롭게 소송할 일이 아니다." 초6일 (진남군인 날인)
[巨濟汗内居潘田玟. 右謹言伏以盖人之貺室不可等棄而曾於年前使矣身之姊出嫁於 治下仙洞崔國律處是乎所同國律所習浮浪迫逐其妻周流四方于今七八年矣矣姊不耐飢寒還來親家故徃言其媤父母則亦爲迫逐者不可不矣身與之同居矣今當麥凶矣身亦爲賣家蕩産與姊各其散四此所可憐之狀無以盡訴是在果以矣姊言之年是青春丐乞之路未知依托於何人亦以國律言之習本浮浪還故之地未知或訪其妻則這間矣身必不免窘辱乙仍于敢此仰訴爲去乎 叅燭後特軫如右事狀論理 題下以爲憑後之地伏祝鎭南使道 處分. 癸卯七月 日. (題音) 出嫁者는外人而夫婦不和相離가曲在於渠也요
曲不在於汝則不必煩訴할事 初六日. (鎭南郡印 一個處)]
[주1] 한내(汗内) :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에 위치한 법정리인 한내리를 의미함. 마을에 큰 시내가 있어 '하냇골', '한냇골' 또는 '한곡(汗谷)', '하내(河內)', '한해(汗海)'라 불리던 것에서 '한내(汗內)'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주2] 선동(仙洞) : 경상남도 통영군(현 통영시)에 존재했던 지명으로, 현재의 통영시 항남동 일대. 원래 모래사장이 펼쳐진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었기에 '신선이 사는 동네'라는 뜻의 선동(仙洞)이라 불렸습니다. '선바우(입암)'라는 이름의 큰 바위가 마을 앞에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주3] 진남사도(鎭南使道) : 진남군 사또. 진남군은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된 후, 현재의 통영시 지역을 중심으로 거제군의 가조도와 한산도, 고성군의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1900년에 새롭게 설치되었다가 1909년 용남군(龍南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1902년 억울한 폭행 및 갈취 사건에 대한 고발장, 박사인 소지(朴士仁所志)」
이 소지(訴志)는 대한제국기 1902년(광무 6) 12월에, 경상남도 진남군 서면(西面) 동봉리(東峰里, 무전동)에 사는 박사인(朴士仁)이 진남(鎭南) 군수(城主, 수령)에게 배 운행 중에 일어난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제출한 소지(訴志, 청원서)다. 박사인은 자신을 구타하고, 자신의 배와 배안의 집기 등을 탈취한 김신문(金信文)을 상대로 배와 집기 등을 추징해 주고, 자신을 구타한 죄를 처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 내용인즉, 박사인은 거제에서 동래로 둔조(屯租, 세금으로 거둔 곡식)를 운반하던 중 거제 지섬(紙島) 앞바다를 지났다. 그는 수로에 익숙해 아무 사고 없이 잘 통과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지섬의 어망 주인인 김신문(金信文)이 나타나 "어제 네 배가 내 그물을 찢어놓았다"며 박사인의 배를 억류했다. 그리곤 김신문은 50~60명의 격군(사공)을 동원해 박사인의 사공 4~5명을 묶고 주뢰(고문)를 틀어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는 등 죽기 직전까지 폭행했다. 또한 배를 묶어두고 수천 량의 돈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렸다.
*진상 조사를 하니 범인은 따로 있었다. 박사인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조사해보니, 실제로 그물을 찢은 것은 같은 날 저녁에 지나간 창원 장선(昌原 場船)이었다. 박사인이 직접 창원 배의 주인 이성옥(李成玉)을 찾아가 확인한 결과, 이성옥은 "초사흘 해 질 녘에 그물을 건드린 것이 맞다"고 자백했다. 김신문 측 격군들도 "그물이 상한 일은 3~4일 사이에 단 한 번뿐이었다"고 인정하며 박사인의 배가 아니었음을 시인했다.
*박사인은 자신이 '죄 없는 백성(不關之民)'임이 밝혀졌음에도 김신문이 여전히 배를 억류하고 물건(식량, 땔나무 등)을 빼앗은 것에 분개하며 다음을 요청했다. ①장라(將羅, 관원)를 보내 억류된 배와 빼앗긴 집물, 그리고 그간 발생한 비용(부비)을 즉시 돌려받게 해달라. 그리고 ②아무 근거 없이 사람을 때려 다치게 한 김신문의 죄를 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 원통함을 풀어달라.
고발인 박사인이 주장하길, "나는 그물을 건드린 적이 없고 진범(창원 배)도 잡았는데, 김신문이 나를 때리고 배를 뺏어갔으니 관청에서 나서서 해결해달라"는 억울한 폭행 및 갈취 사건에 대한 고발장이다.
*관청의 판결 제음(題音) : 질문공결차(質問公決次) "사실 관계를 따져 묻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릴 차례다"라는 뜻이다. 박사인의 호소가 일방적인 주장에 그치지 않도록, 김신문 등 관련자들을 불러 직접 심문하겠다는 의지다. 捉待向事(착대향사) "관련자들을 잡아와서 판결을 기다리게 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잡아올 대상'은 억울하게 배를 뺏긴 박사인이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된 김신문과 창원 선주 이성옥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상민 주인(狀民 主人)’은 "장을 올린 백성(박사인)은 주인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당시 지방 관아에 소송을 하러 온 사람은 판결이 날 때까지 관아 근처의 '주인(관아와 연결된 숙박 및 민원 대행업자)' 집에 머무는 것이 관례였다. 신변을 확보하고 판결 시 즉시 출석하게 하려는 조치다. 마지막으로 ‘진남군인(鎭南郡印)’ 이 문서가 '진남군(오늘날의 경남 통영 지역)'에서 처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다.
*결론적으로 관청에서 박사인의 억울함을 접수했으며, "조사를 위해 관련자들을 다 잡아들일 테니 박사인은 일단 지정된 곳에서 대기하라"는 긍정적인 중간 조치다.
* 덧붙여 이번 「1902년 억울한 폭행 및 갈취 사건에 대한 고발장, 박사인 소지(朴士仁所志)」는 발급자가 박사인(朴士仁)이며, 문서 종류는 사문서(私人文書) 소지류(所志類, 무고誣告·옥송獄訟)이다. 또 출전은 『규장각(奎章閣)』 고문서이며, 수결은 진남군인(鎭南郡印)이다.
**「1902년 억울한 폭행 및 갈취 사건에 대한 고발장, 박사인 소지(朴士仁所志)」**
진남군(鎭南郡) 서면(西面) 동봉리(東峰里)에 사는 박사인(朴士仁)은 삼가 아룁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다 기러기가 그물에 걸린 격(魚網鴻罹)으로 실로 억울한 일을 당하였고, 갑에게 노하고 을에게 화풀이하는 격(甲怒乙遷)이니 더욱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저(民)는 갯가에서 배 타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 배 한 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달 초3일경에 둔조(屯租, 세금 곡식)를 싣고 세복(貰卜)하여 거제 관방을 떠나 동래로 향하던 중, 지섬(紙島)의 어망(후릿그물)이 설치된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었고, 평소 수로를 잘 익숙하게 아는지라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곡식을 다 풀고 돌아오는 길에, 지섬(紙島)의 어망 주인 김신문(金信文)이 민의 배를 붙잡고 말하기를, "엊그제 너희 배가 지나갈 때 어망을 건드려 상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50~60명의 격군(뱃사람)이 일제히 튀어나와 민의 배에 탄 사공 4~5명을 결박하고는 사사로이 주뢰를 틀었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배 또한 그곳에 묶어두고 수천 량을 뜯어내려고 행패가 매우 심했습니다.
제(民)가 그 가혹하고 억울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한편으로는 근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창원 장선(昌原 場船)이 그달 초삼일 저녁에 지나가다가 어망을 건드려 상하게 했다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 명백히 증언해 주었습니다.
제(民)가 흑백을 가리기 위해 이튿날 장터에서 창원 배를 함께 타고 현장으로 가서 사실을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해당 선주 이성옥(李成玉)이 말하기를, "이번 초사흘 해 질 녘에 배를 몰고 지섬에 이르렀다가 실수로 어망을 건드린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배의 사공들과 상인들도 한목소리로 인정했습니다. 또한 김신문의 격군들도 한결같이 말하기를, "어망이 상한 일은 3~4일 사이에 단 한 번뿐이었고 그 후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창원 배가 그물을 상하게 한 것이 명백히 증명되었으며 단연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망 주인 김신문은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고 무리를 이끌어 위협하며, 배에 실린 식량과 땔나무 등을 탈취하고 배 안의 집기들을 제멋대로 내려놓은 채 빈 배를 묶어두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민이 손을 묶인 채 생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만약 창원 선주 이성옥이 자백하지 않았다면 이는 고스란히 억지로 빼앗기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보를 궁구해 보면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 원수가 된 꼴(一舟中敵國)이라 감히 이렇게 호소합니다.
살펴 판단해 주신 뒤에, 특별히 창원 배가 어망을 상하게 한 점과 민의 배가 억울하게 피해를 본 상황을 가엽게 여기시어, 관원을 보내어 민이 빼앗긴 배와 집물들을 돌려받게 해주시고 즉각 그간의 비용도 받아내 주십시오. 또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때려 상처를 입힌 죄는 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 원통함과 분함을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처분을 바랍니다. 임인년(壬寅年) 12월 일.
【제음(題音)】 질문(조사)하여 판결을 내릴 것이니, (관련자들을) 붙잡아 대기시켜라. 고발한 백성(박사인)은 주인(관아의 실무 담당자 혹은 연고가 있는 자)에게 맡겨라. (진남군인 1개소 - 진남군 인장 날인)
[西面 東峰居 朴士仁. 右謹言 魚網鴻罹가 實所涉寃이요 甲怒乙遷니 尤何成說가 民以浦業所致로 有一船隻 而今月初三日良中에 載屯租貰卜하고 自巨濟關防으로 向往東萊之際에 到于紙島揮罹處 則于時日在中天이라 白晝行船에 兼之熟諳水路하야 無事過去이올던니 及其解卜回還之路 紙島揮罹船主金信文니 執捉民船 而言曰 日昨汝船過去之時에 觸傷揮罹網니다하고 五六十名格軍니 一齊突出하야 結縛民之船格四五名하야 私行周牢에 破頭流血하야 幾至死境하고 且船隻을 掛置其處하고 徵索數千兩次로 行惡이 滋甚 故로 民不勝其橫罹之寃하야 一邊은 陳其不然之由하고 一邊은 打探根因 則昌原場船이 伊月 初三日 夕時에 過去이다가 觸傷網子이다. 當觀之人이 明的立證 故民分別黑白次로 其翌場에 同載昌原場船하야 到于其境하야 備陳其事 則該船主李成玉言內 今初四日日落時 行船至紙島이다가 誤觸網子之事는 有之이다 該格軍與啇賈가 一辭同然더러 金信文格軍等段도 一齊言內에 觸傷網子之事는 三日四日間 一番而已 其後넌 更無其事이다이온則 以此一款으로 觀之라도 昌原場船之觸傷은 明明是證에 斷斷無他이겨을 該網主金信文이 不分是非曲直하고 率黨威脅하야 奪取船粮火木等物하고 船上汁物을 任自下置하고 掛懸空船하야 使此不關之民으로 至於束手失業한니 若非頭頓李成玉이면 乃是勒討之事니 究厥宅心하면 非但以無據로 論之라 即一舟中敵國乙仍于 敢此仰訴하겨온 ○叅啇敎是後 特軫昌船之觸傷과 民船之橫罹하야 發遣將羅하야 民之見執船隻汁物段도 幷浮費即刻推給니옵고 其無故毆人致傷之罪는 依律嚴治하야 俾爲雪寃雪憤之地 ○處分爲只爲行下向敎是事 城主 處分, 壬寅 十二月 日.
【題音】 質問公決次 捉待向事 狀民 主人 (鎭南郡印 一個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