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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복의 근원인 말씀을 기억하라. 유1:17-21
주신 말씀 유1:17-23말씀은 초대교회의 모교회이자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기록한 서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된 예수님의 형제인 유다는 사도들의 말씀을 왜곡하는 그로시스트 영지주의 이단들이 많이 출현하자 이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와 종말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는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복의 근원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세워라.(17-20)
본문20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르신 이유는 영지주의 자들에 대한 경계와 정통신앙에 입각한 성도의 바른 신앙자세를 견지하며 이단에 영향을 받는 자들에 대해 긍휼과 도움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의 무리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부각시키려는 마음과 그들도 동일한 애정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하며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사도들의 미리 한 말”처럼 본 말씀이 다른 서신들이나 복음서보다 비교적 후에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다는 “므네스데테”라는 말을 사용하여 마지막 때에 거짓 예언자가 출현하리라고 예언한 말씀들을 상기하며 기억하고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단(19) 즉 우리의 신앙을 좀 먹고 퇴색시키고 변질시킬 수 있는 진리와 유사한 거짓된 교훈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경계하고 교회 안에 인간들이 만든 거짓된 악습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성도자신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보아 신앙을 좀먹고 변질시키는 거짓된 가치관이나 사상, 전통을 확인하고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신랑되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신부는 교회에서 당짓는 것이나 분열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이단은 당짓는 자, 육에 속한 자, 성령은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단은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성도들을 떼어내어 영원한 사망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단자들은 교회에서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를 이간시키고 분열하게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 당을 지어 하나님의 몸을 분열케 하는 자들은 이단이 가장 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됨을 이룬 교회에서 당을 짓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명분을 내세워 분열하고 분쟁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자기가 하는 것은 정의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분열이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구원과 관계된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간에 문제가 생기고 편이 나뉘게 되어 끼리끼리 모이게 되면 공동체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성도가 이단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성결하고 거룩한 전통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진리의 길에 들어선 성도는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자신을 세우되 거룩한 믿음위에 바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은 특히 교회 전통에 의해 주어진 신앙 내용인 진리나 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에 정착되시 시작한 교리와 진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전승된 신앙의 토대위에 각자 자신의 신앙적 삶을 형성시킬 뿐만 아니라 신앙적 공동체를 구현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세우다라는 말 ‘오이코도메오:와 ‘έπί;~위에’라는 뜻을 가진 두 말이 결합된‘에포이코도메오έποίκοδμέω’로써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기초로하여 거기에 의지하고 신앙의 진보를 이룩하여 지어져가는 건축물처럼 계속하여 성장시켜 나가라는 말입니다.
복의 근원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라(20)
기도하되 성령으로 기도하라 합니다.
19절에서 이단은 육에 속한 자들로써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인간들이 짐승들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영적인 존재로 육적인 지배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즉 욕구와 정욕에 복종하는 감각적인 본성에 의 해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써 성령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요 죄에 종노릇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순전히 자연적이며 세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단자들은 성령없는 자로써 육에 관한 주문을 중언부언하지만, 성려에 속한 성도는 기도하되 성도들과 교통하고 있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말고 길게 기도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교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즉 진정한 기도란 자신의 의지의 발로라기 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께서 기도하라는 인도하심에 온전히 맡기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아뢰었으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듣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복의 근원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21)
유다는 자기를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영지주의 자들의 신비한 영적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하나님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랑 안에서 머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사랑 안에 거하라’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사랑안에 거하라 하신 하나님의 사랑안에 택함 받은 성도들도 머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랑입니다. 변함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므로 누구든지 그 사랑 안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마른 사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예수께서 부르신 대상들이므로 그 사랑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얻은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때 즉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 즉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이 특권과 축복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줄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가 영원하듯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사랑 역시 영원할 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말 ‘테레사태:τηρήσατε’는 감시하다, 간직하다, 보전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보존시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말로써 적대자들인 이단들의 도덕폐기론적 가르침에 미혹당하거나 현혹되지 말고 교회의 전통적 신앙 노선에 충실히 머물러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성령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세상을 살면서 구별된 삶을 살아 한 점 부끄러움이나 흠이 없는 깨끗하고 청렴한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복의 근원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1).
성도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주의 재림의 때를 소망하며 기다리라 권면합니다. 여기서 ‘기다리라;프로스데코메노이;πςοσδεχομενοι)라는 동사는 자신에게 받아들이다, 돌어 옴을 허락하다, 자기 자신에게 접근을 허용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부하지 않고 환영하여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긍휼을 환영하는 가운데 소망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단순히 수동적인 기다림의 태도가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을 향한 적극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여기서 긍휼(엘레오스:έλεος)는 종말론적 희망과 관련된 전통적인 용어로써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비의 뜻을 포함하고 있어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타개하기위해 실질적으로 행동하여 구체적인 동무을 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죄를 용서하시어 구원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긍휼을 베풀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이론이나 감정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찰 야유회를 가까운 무주 덕유산으로 정했습니다.
향적봉에서 중봉까지 여유를 가지고 구상목과 천년을 산다는 주목고목들과 고사목 그리고 괴목을 보고 느기며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심에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산하는 길에 반딧불이 체험관을 관람했습니다.
해설사가 갑자기 나비를 관람하던 중 질문을 합니다.
임금님이나 정승들이 쓰던 모자가 무엇인지 아냐는 것입니다. 쭈빗거리니 [익선관] 즉 매미모자라 합니다.
왜냐하면 매미는 애벌레로 3년을 땅속에서 살다가 성충이되어 매미가 되면 이슬만 먹으며 20일을 살다가 번식 후 죽는다 합니다.
애벌레로 3년을 사는 그 모습이 근면이요 머리 모양이 글을 읽는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문 즉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학문에 진력하라는 것이요 애벌레를 벗고 새로 거듭나 기쁨을 노래하니 믿음이 있음이요, 땅속에서 3년을 애벌레로 사는 삶을 마다하지 않으니 검소하고 겸양함이요, 이슬만 먹고도 기뻐하며 춤추며 노래하니 청렴을 배우라는 의미에서 익선관을 썻다합니다. 메모하지 않고 기억된대로 말해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니 참조만 해요
특히 매미는 집을 짓지 않고 먹이도 나무수액만 먹고 사는 모습은 오늘 우리 관리들이 추구해야할 덕목 즉 청렴결백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는 병들어도 너무 병들고 부패했습니다.
한수원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어떻게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불량부품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으며, 교사는 학생을 성폭행하고, 국정원은 야당 후보를 창녀와 성매수자로 , 싸이버사령부는 심리전은 안하고 국정원에서 교육받은대로 허수아비 노릇을 하며, 검찰은 공정성을 상실하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고, 교통사고, 음주운전, 폭행등 매일같이 절망적인 뉴스로 가득 찹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난 5년간 우리나라에서 존속살인이 일주일에 한번 일어나고 있으며 , 계모는 갈비뼈 24개중 16개를 부려뜨려 부러진 뼈가 폐를 뚫고 들어가 죽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호 통재라! 우리 모두 익선관을 쓰고 청렴결백하며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복의 근원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세워라.(17-20)
둘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라(20)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21)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1).
유다는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의 공격에 직면해 있는 교회에 대하여 정통신앙을 권면하면서 믿음(20), 사랑(21) 소망(21)을 중심으로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사랑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다가올 미래의 소망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삶을 살므로 복된 성도가 되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