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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인을 열다.(17)
말씀: 계 6:1-10. 2024년 5월 5일 일요일 오전 11시
계시록 1장은 사도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 안에서 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증언이고 2,3장은 2천년 교회사를 조명함과 동시에 큰 환란 때 이 땅에서 구원 받게 될 성도들로 큰 환란을 어떻게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자가 되어 승리하는 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계4:1, 주님은 요한을 “이리로 올라오라.” 하시며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요한은 이 땅의 밧모 섬에서 “주의 날 성령 안에서” 듣고 보았지만 4장에서는 “주의 날 성령 안에서” 하늘로 들림을 받아 하늘의 성막을 직접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4,5장은 지상이 아니라 요한이 하늘의 성막에서 본 것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그 내용들을 기록했고 우리는 지금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것들의 증언들을 기록한 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비롯한 왕좌의 주위를 볼 수 있습니다.
⚫ 하늘에 있는 한 왕좌(계4:2). 왕좌에 앉으신 분의 아름다우심(계4:3)
⚫ 왕좌 둘레에 있는 스물네 자리(계4:4). 자리에 앉아 있는 스물 네 장로.
⚫ 왕좌로부터 나오는 번개들, 천둥들(계4:5).
⚫ 왕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영)(계4:5).
⚫ 왕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계4:6).
⚫ 왕좌 앞에 있는 것들(계4:7). 이렇게 4장에서는 왕좌에 앉으신 분, 네 짐승들, 스물 네 장로들, 일곱 등불, 수정 같은 유리바다와 천사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 사역을 찬양합니다(계4:10,11).
요한 계시록 5장은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으로는 5장에서 처음 나옵니다.
⚫ 전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계5:6).
⚫ 왕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 손에 있는 봉인된 책과 그 책을 취하시는 어린양(계5:7) 입니다.
⚫ 책을 취하신 어린양(계5:8).
⚫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계5:12).
⚫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계5:13).
5장은 구속하신 어린양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내용입니다(계5:13,14).
계시록 6-19장은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던 봉인된 책이 열리면서 이 땅에 쏟아지는 재앙들과 그 결과에 대한 기록입니다. 땅에서 있는 일들과 하늘에서 있는 일들이 번갈아 가며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의 70째 주(단9:24-27), 고난의 때(단12:1), 예레미야의 야곱의 고난의 때(렘30:7), 주님의 전무후무한 큰 환란(마24:21) 등으로 불리는 기간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큰 환란 기간 중에 땅에는 주 예수님의 증언과 명령을 지키는 이들이 있고, 끝까지 견디며 이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수를 이기는 자들이 있습니다(계15:2).
큰 환란 속에서도 남은 자들이 있고, 이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큰 환란 때는 짐승이 성도들을 이기는 것을 허락받습니다(계13:7). 용이 진노하여 이스라엘의 씨 중에서 남은 자들을 멸하려 하지만 ‘남은 자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긴다는 의미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이 바로 큰 환란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겼으며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큰 환란 때에 유대 땅에서 페트라로 도망가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42개월을 지내는 무리들이 있고(계12:14), 산으로 도망가는 무리들도 있고, 흩어져 유리방황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마24:16). 거의 대부분이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기꺼이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계6:9,11, 13:10).
짐승을 이기고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고 수고를 그치고 안식을 얻게 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되, 기록하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매 성령께서 이르시되, 그러하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게하려 함이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뒤따르리라. 하시더라](계14:13).
큰 환란에서 구원 받은 무리들이 분명히 나옵니다(계7:14). 이들은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아닙니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로서 큰 환란 시작 직전에 들림 받아 하늘에 올라가게 됩니다(12:12, 13:6). 큰 환란은 땅에 거하는 자들(13:8,12,14)에게 임하는 재앙입니다.
큰 환란 때 용(龍)은 이스라엘의 씨 중에서 남은 자들을 멸하려고 할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이기는 자들”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진노하여 그녀의 씨 중에서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진 자들과 전쟁을 하려고 가니라.](계12:17). 큰 환란의 재앙 중에도 남은 자들이 있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진 자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구원의 날, 받아 주시는 때” 곧 은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고후6:2). 큰 환란은 재앙의 날, 크고 심히 두려운 날, 어둠의 때입니다. 주(主)의 날은 “주(週)의 첫날”인 일요일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때입니다. [이는 그날이 가까이 오되 곧 {주}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 그것은 구름 낀 날이요, 이교도들의 때가 되리라.](겔30:3). 대언자 요엘은 “슬프도다! 주의 날이 가까이 왔으며”(욜1:15)라고 합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로 주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집행하시는 크고 심히 두려운 날입니다(욜2:11). 크고 두려운 주의 날(욜2:31)입니다.
[{주}의 날을 사모하는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니](암5:18). [{주}의 날은 어둠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빛이 아니니라. 심지어 너무 어두우므로 그 날에는 밝음이 없지 아니하겠느냐?](암5:20).
주의 날은 큰 환란으로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날입니다. 교회가 공중으로 들림 받는 복된 소망의 날 이후에 진노가 쏟아지는 주의 날이 임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의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은 큰 환란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큰 환란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불신의 이교도들 위에 임하는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 계시록에는 주님의 공중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에 뒤이어 이 땅 위에 쏟아질 진노의 재앙에 대해서 기록하고 주님의 지상 재림에 의한 심판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계시록은 주제별로 기록되었다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고 연대기적이고 순차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분들도 있으므로 계시록 6-12장을 전 삼년 반, 13-19장은 후 삼년 반으로 해석하는데 어느 것이 옳다고 하거나 어느 쪽에 매이기보다는 기록된 대로 읽고 믿고 순리적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진노가 땅에 쏟아지는 장면을 보면 5,6장이 큰 환란에 대한 첫 번째 재앙계시이고, 8장에서 11장까지가 두 번째 재앙계시이고 12-14장까지가 세 번째 재앙계시이며, 15-19장까지가 네 번째 재앙계시입니다. 쏟아지는 재앙들은 6,7장은 일곱 봉인들로, 8-11장은 일곱 나팔들로, 12-14장은 적그리스도의 활동으로, 15-19장은 일곱 호리병(대접)들과 큰 바빌론의 멸망을 통해 큰 환란 때에 일어나는 사건을 보여 줍니다.
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해석이 틀리면 계시록 전체의 해석이 다 틀려집니다. 계시록의 큰 환란의 내용들은 2,3장은 교회들에 대해, 4,5장은 하늘의 성막에 대해, 6장은 일곱 봉인에 대해 기록합니다. 11장은 지상에서 두 증인의 사역과 순교, 12장은 이 땅의 이스라엘, 17,18장은 큰 바빌론의 멸망, 19장은 하늘에서 어린양의 혼인과 주님의 지상 재림, 20장은 천년 왕국과 사탄의 멸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대해 큰 주제를 정해 두고 기록합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금병들을 통해 이 땅에 쏟아지는 재앙들을 보면서 큰 환란 기간 동안 이 땅과 하늘, 적그리스도, 세상 사람들과 남은 자들, 그 때의 종교와 경제 상황, 지하에서 올라오는 무리들, 하늘에서 내려오는 무리들, 하늘의 전쟁,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을 모두 입체적으로 조명해 주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의 개요는 먼저 봉인을 여시는 어린양입니다.
첫째 봉인(1-2). 활, 왕관을 받음 - 적그리스도의 등장. 흰말 탄 자.둘째 봉인(3-4). 큰 칼을 받음 - 땅에서 화평을 제거. 붉은 말을 탄 자.셋째 봉인(5-6). 저울을 받음 - 전 세계적인 기근. 검은 말을 탄 자.넷째 봉인(7-8). 전 세계적인 사망. 땅의 1/4이 죽음. 창백한 말을 탄 자다섯째 봉인(9-11).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의 혼. 여섯째 봉인(12-17). 큰 지진, 해와 달, 별, 모든 산과 섬들의 이동. 어린양의 진노(계6:16). 진노의 큰 날(계6:17).
일곱째 봉인은 8:1에서 여시는데 땅에 어떤 재앙이 떨어지지 않고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한 것이 전부입니다. 본문 6장의 시작은 어린양께서 왕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봉인된 책을 취하셨고 봉인을 여는 장면입니다. 어린양께서 그 책의 봉인을 열 때마다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됩니다.
1절입니다. [[어린양]께서 그 봉인들 중 하나를 여실 때에 내가 보았고 또 내가 들으니 네 짐승 중 하나가 천둥소리 같은 소리로 이르되, 와서 보라, 하더라.](계6:1).
“내가 보았고”(1).
요한은 하늘에 올라와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보았습니다. 그는 증인이요, 증언자입니다.
“어린양께서 그 봉인들 중 하나를 여실 때에”(1). 예수님께서 그 봉인들 중 하나를 여셨습니다. 그 때에 네 짐승 중 하나가 천둥소리 같은 소리로 이르되 “와서 보라.”했습니다. 요한은 정확히 알아들었지만 아마 불신자들이라면 이 소리를 천둥소리로 들을 뿐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계와 인간 사이에는 알지 못하는 벽이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당시 한 예를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28-2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그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내가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곁에 서서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르기를,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하니] (요12:28-29). 예수님 외에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바울의 경험을 보십시오.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음성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말을 못하고 서 있었으며](행9:7).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은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도 그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행22:9). 우리가 이 땅에서 들림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으로 들림 받는 그 날 천사장의 호령과 주의 음성이 나지만 구원 받은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듣겠지만 믿음 없는 사람들은 천둥소리로 들을 것입니다.
2절입니다.
[이에 내가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고 왕관을 받으매 그가 나아가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 하더라.](계6:2). 요한은 네 짐승 중 하나가 말한 대로 와서 보니 “보라, 흰 말이라.”(2)고 했습니다. 그가 흰 말을 보았고 그 위에 탄자가 활을 가졌고 왕관을 받고 나아가서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 했습니다.
어기서 흰 말 탄자가 누구인가? 해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본 것만 기록했지 정체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주석가들, 신학자들, 설교자들마다 다양하게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대부분의 주석서에는 이 구절에서 흰 말을 탄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흰말을 타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나아가서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한다면 계시록 19장을 예로 들어 예수 그리스도 밖에 달리 특징지을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입니다(계19:11, 14).
성경엔 하나님께서 활을 당기시고 준비하셨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가 돌아서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자신의 칼을 가시리니 그분께서 이미 자신의 활을 당기어 준비하셨도다. 또한 그분께서 그를 위해 죽이는 도구들을 마련하셨나니 그분께서 그 핍박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자신의 화살들을 정하시는도다.](시7:12-13).
만약 흰 말 탄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께서 전쟁으로 온 땅을 다 정복하시고 이 땅은 곧 천년 왕국이 될 것이므로 여기서 계시록은 끝날 것입니다. 이는 전혀 말이 안 됩니다. 또한 복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한다고 해도 현실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 땅에서 복음이나 믿음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흰 말을 타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활을 받아 정복하려는 자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자신을 가장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나 유사해서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오해하고 숭배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라 말할 것이며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본문(6:2)에 나오는 흰 말 탄자는 계시록 19:11-16절에 나오는 흰말 탄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해 보이나 동일인물은 아닙니다. 사탄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며 속이는 자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록 19장을 펴서 흰 말 타신 예수님과 본문(6:2)의 흰말 탄자를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흰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6장에서는 어디서 등장하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19:12에서 예수님은 많은 왕관을 쓰셨지만 6장에서는 한 개의 왕관입니다. 계시록 19:14에서 흰말 타신 예수님 뒤를 하나님의 군대(천사)들이 따릅니다. 계시록 6장에서 흰말 탄 자 뒤에는 사망과 지옥과 기근이 따릅니다. 계시록 19:15에서 예수님은 예리한 칼을 가지고 계시지만 6장에 있는 흰말 탄자는 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가 있고 다릅니다.
그리스도가 다 같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적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 신(하나님)이 있고 참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탄은 모방, 위조, 흉내, 가장, 변형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으로 보이고 온 세상을 속이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나타내는 자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어떤 자인지 보십시오. 살후2:4,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한 자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도시(계17:18)가 있고 자신의 회당이 있고, 자신의 사역자들이 있고, 자신의 영(악한 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듯(계19:16) 사탄은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입니다(욥41:34). 예수님께서 화평의 통치자이신 것처럼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요14:30)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의 사자(계5:5)이시듯 사탄은 삼킬 자를 찾는 울부짖는 사자(벧전5:8)입니다. 예수님께서 흰 말을 타고 전쟁을 하셨듯이 적그리스도 역시 흰 말을 타고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고 전쟁을 벌입니다(계6:2). 사탄은 자신을 변형(transform)하여 온 세상을 속이는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계12:9).
본문에서 흰 말을 탄자는 ‘장차 올 통치자’(단9:26)로 불리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다시 2절입니다. “왕관을 받으매...”(2). 본래부터 왕관을 쓴 것이 아니라 왕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흰 말을 탄자가 활을 가졌는데 누군가에게 왕관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왕으로 추대 받았다면 그는 이미 세상의 슈퍼스타요 영웅으로 신격화된 인물입니다. 많은 이들이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되고 왕이 된 예들이 있습니다. 왕관을 받아 왕이 된 그는 “나가서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 하더라.”(2)한 말씀대로 온 땅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갑니다. 민족과 민족이 대적하고 나라와 나라가 대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전쟁, 지진, 기근, 재난은 고통의 시작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마24:8, 막13:8). 흰 말을 타고 활을 가진 자가 왕관을 받고서 전쟁을 벌이고 정복하다 이스라엘과 한 주간의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으로 적그리스도의 실체가 들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할 것이며 .......] (단9:27상)
3절입니다. [그분께서 둘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둘째 짐승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매](계6:3). 어린양께서 둘째 봉인을 여셨는데 요한은 둘째 짐승이 “와서 보라”고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둘째 짐승은 네 짐승 중에 ‘소’에 해당합니다.
4절입니다.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위에 탄 자가 땅에서 평회를 제거하는 권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들이 서로 죽이게 하려 함이라. 또 그가 큰 칼을 받았더라.](계6:4). 우리가 흔히 보는 갈색 말이 아니라 ‘붉은 말’이 나왔습니다. 붉은 말 위에 탄자가 화평을 제거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붉은 말, 붉은 용, 붉은 죄, 붉은 피 등 붉은 색은 피와 심판, 전쟁과 죽음 등을 상징합니다.
흰 말 탄자가 왕관을 받았는데 붉은 말 위에 탄자는 ‘평화를 제거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붉은 말 탄자의 출현으로 이 땅에는 평화가 제거되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도 온통 전쟁입니다. 붉은 말 위에 탄자는 평화를 제거하는 자이므로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사탄의 본질적 정체를 밝혀 주셨는데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요8:44). 마귀가 하는 일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마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오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이 세상의 통치자 마귀는 평화를 제거함으로써 전쟁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합니다. 인류 역사 6,000년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평화 조약에 서명을 했지만 진정한 평화는 없었습니다. 큰 환란 때 온 세상의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유지되던 평화는 완전히 제거 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노력해도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기까지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유일한 평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주신 ‘평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기노니 곧 내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방식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자신의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빌4:7).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골3:15).
“또 그가 큰 칼을 받았더라.”(4). 칼은 전쟁과 살육의 도구입니다. 붉은 말 위에 탄자는 큰 칼을 받았는데 그는 각 지역, 각 민족마다 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저 하늘에서 계획하고 벌이는 일들임을 보여 줍니다. 땅은 하늘의 통제를 받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지만 그들은 마귀의 속박 아래 있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엡2:2).
크리스천들이라면 누구나 이 땅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마귀들, 영적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권력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입니다(엡6:12).
하나님께서 욥을 시기하는 사탄에게 시험할 기회를 주셨을 때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울 왕은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삼상16:14-15).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했고 죽였습니다(삿9:23).
성경은, 마귀가 우리를 향해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 불붙은 화살을 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평소에 영적 세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기에 깨어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며 이 땅 위에서 활동합니다.
엘리사는 불 말과 불 병거를 보았지만 그의 종 게하시는 눈이 열릴 때까지 그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했습니다(눅6:17). 주님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붉은 말 위에 탄자가 큰 칼을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5절입니다. [그분께서 셋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셋째 짐승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더라. 이에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이라. 그 위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계6:5).
어린양께서 셋째 봉인을 여신 뒤에 요한은 “와서 보라”는 셋째 짐승의 말을 들었습니다. 셋째 짐승은 ‘사람’의 얼굴을 한 그룹입니다. 요한은 보라는 것을 보았고 그가 본 것들을 기록했습니다.
“보라, 검은 말이라.”(5). “검은 색”은 흉년과 기근을 나타냅니다. 칼에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것이 더 큰 고통입니다. 속된 말로 먹고 죽은 자는 때깔이라도 좋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에 죽는 자는 고통이 짧겠지만 굶어 주는 자는 그 고통이 길고 심합니다. 오늘날 탈북자들이나 북한 관련소식을 들으면 북한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배고파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어 함께 자살하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본문엔 하나님께서 땅에 기근을 보내셨습니다. 전쟁에 뒤따르는 것은 기근입니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후에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기간이 아주 길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굶주리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음을 감사해야합니다.
“그 위에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5). 검은 말 위에 탄자는 머리에 왕관을 받지 않았고 손에 큰 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저울’을 가졌습니다. 저울은 양식을 사고 팔 때 쓰는 측량 도구입니다. 밀이나 보리와 같은 곡물을 살 때 저울로 그 양(무게)을 재고 값을 매깁니다.
우리는 지금 말의 색깔과 말 위에 탄자가 지닌 도구(관, 큰 칼, 저울)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말이 무엇인지 말 위에 탄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맥상 흰 말을 탄자는 머리에 왕관을 받은 왕(정치인)이요, 붉은 말을 탄자는 칼을 든 전사(장군)요, 검은 말을 탄자는 저울을 가진 상인(경제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역사에서 어떤 특정 인물인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서 누구라고 지례짐작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직은 큰 환란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살후2:3)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에 탄자들의 용모나 쓰는 말이나 외모, 생김새, 민족에 대해서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말의 색깔, 그들이 받아 지니고 있는 것만 기록할 뿐입니다.
6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네 짐승의 한가운데서 한 음성이 이르되, 일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일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니라. 너는 주의하여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 하더라.](계6:6).
요한은 네 짐승의 한 가운데서 한 음성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누구의 음성입니까? “네 짐승의 한 가운데”(4:6)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검은 말 위에 탄 자, 저울을 손에 든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밀 한 되에 일 데나리온, 보리 석 되에 한 데나리온으로 곡물 가격을 정하셨습니다. 이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곡물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지를 말합니다.
이 땅 위에 일어나는 모든 재앙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일입니다. 일 데나리온은 요한이 살던 당시 로마의 병정의 하루 급여라고 합니다. 또한 당시 품꾼의 하루 품삯도 일 데나리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하루에 일 데나리온씩 주기로 품꾼들과 합의한 뒤 그들을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마20:2)
한 일꾼이 하루 일을 하면 그 품삯으로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를 살 수 있습니다. 하루 품삯이 곡물 값으로 다 나가도 살기 어려운 기근입니다. 노동력이 없는 가족이 많으면 한 사람이 일하고 번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로 온 가족이 연명해야 됩니다. 전혀 먹을 것이 없는 정도의 기근은 아닙니다. 하지만 배 고품이 얼마나 심할까 짐작 가며 경제적 파산이 일어납니다.
큰 환란 때 곡물 파동이 있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어느 나라나 곡물 확보에 비상이 걸립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주님은 큰 환란에서 물을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마시되 때를 따라 마실지니라.](겔4:11).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리니 그들이 염려하며 빵을 달아 먹고 또 놀라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빵과 물이 부족하여 서로 심히 놀라고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해 소멸되리라, 하시니라.](겔4:16-17).
큰 환난 중의 전쟁의 때는 매 끼니마다 저울로 음식과 물을 달아서 먹어야 하는 정도의 기근이 옵니다. 이는 마음껏 먹고 더 먹고 싶어도 적은 양을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배부르게 먹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오늘날 비만의 때에는 살을 빼기 위해서 절식하려고 음식을 달아서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는 주의하여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6). 우리 주님은 저울을 든 자에게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름과 포도즙은 밀과 보리와 같이 식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입니다. 쌀, 보리, 밀과 같은 곡물 생산 농가는 흉작으로 피해가 치명적이지만 유실수는 그대로 두셨는데 기름(올리브)과 포도즙을 생산하는 농가는 큰 환란 때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때 농사를 지어도 일단 과수원을 해야 유리합니다. 올리브와 포도원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기름은 음식을 만드는데 쓸 뿐 아니라 불을 밝히기도 하고 질병에 약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포도즙은 음료수로 쓰이고 발효되면 술이 됩니다. 기름과 포도즙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기름과 포도즙은 상처에 바르는 약으로도 사용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큰 환란 때 사람들에게 밀과 보리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기름과 포도즙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심판을 집행하시면서도 긍휼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환란이 끝나고 육체로 살아남아 천년왕국을 건설할 자들을 위하여 환란의 날들도 단축하실 것입니다.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나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이 단축되리라.](마24:22)
7절입니다. [그분께서 넷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넷째 짐승의 음성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기에](계6:7). 어린양께서 넷째 봉인을 여셨습니다. 요한은 넷째 짐승이 “와서 보라”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넷째 짐승은 ‘독수리’입니다. 왕좌 둘레에 있던 그룹들은 봉인이 열릴 때마다 요한에게 “와서 보라.”고 합니다.
8절입니다. [내가 보매, 보라, 창백한 말이라. 그 위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인데 지옥이 그와 함께 따라갔고 또 그들에게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이며 땅의 사분의 일을 다스릴 권능이 주어졌더라.](계6:8).
요한이 보니 “보라, 창백한 말이라.”(8)고 합니다. 이번 말은 색깔을 말한 것이 아니라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말은 굶어서 그런 것인지 본래 생긴 것이 그런 것인지 병들었는지 보기에 흉합니다. 창백한 말 위에 탄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동안은 말 탄 자가 받은 것, 가진 것만 말했는데 네 번째 봉인에서는 말 탄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사망’이요 ‘지옥’이 그와 함께 따라 다녔습니다. 사망은 육신의 죽음에 관련된 것이고 지옥은 그 죽은 몸의 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십니다(계1:18). 창백한 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와 함께 따라 다닙니다(계6:8). 큰 흰 왕좌 심판 때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는 자들을 넘겨줍니다(계20:13). 사망과 지옥은 불 호수에 던져집니다(계20:14). 사망과 지옥이 함께 다닌다는 말은 구약 성경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사망과 지옥은 어떤 사람의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생명이라 불리십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이름이 사망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마귀를 살인자라고 했습니다(요8:44).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친히 같은 것들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성경은 마귀를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라고 하셨으며 그의 이름은 사망입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중의 하나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요6:70). 주님은 가룟 유다를 일컬어 ‘멸망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요17:12) 그가 장차 자기모습을 들어내고 자기를 높여 하나님처럼 행세할 것입니다(살후 2:3-4). [그것들을 다스리는 왕이 그것들에게 있었는데 그는 바닥없는 구덩이의 천사니라. 그의 이름은 히브리말로는 아바돈이지만 그리스말로는 그가 아폴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졌더라.](계9:11). 여기서 ‘아바돈, 아폴리온’이라는 말이 ‘멸망자,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8절입니다. 창백한 말 위에 탄자는 땅의 1/4을 다스릴 권능을 받았습니다. 사망과 지옥은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사람들을 죽입니다. 창백한 말 위에 탄자가 사람이 아니라 ‘사망’이라 불리는데 ‘아바돈, 아폴리온’입니다. 땅의 1/4이라면 이 재앙은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사망과 언약을 맺었고 지옥과 합의를 맺었으므로 넘치는 채찍이 휩쓸고 지나갈지라도 우리에게 오지 못하리니 이는 우리가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거짓된 것 밑에 우리를 숨겼기 때문이라, 하였도다.](사28:15).
이스라엘은 사망과 지옥과 합의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그들과 맺은 언약을 큰 환란 중간에 깨뜨립니다. 그렇다면 넷째 봉인을 열었을 때 이들은 언약을 깨뜨리고 전쟁, 기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사망과 지옥과 맺은 언약이 깨어지고 본격적인 살육이 시작될 때 광야로 도망가서 후삼년 반의 42개월 동안 부양을 받습니다. 미처 도피하지 못한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유대의 남은 자들이 광야로 도피한 후에 넷째 재앙이 쏟아진다면 넷째 재앙으로 죽는 이들은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협력한 자들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창백한 말 위에 탄 ‘사망’이 땅의 짐승들로 사람을 죽인다면 이 짐승은 사자나 호랑이, 표범, 늑대 같은 맹수가 아니라 메뚜기, 쥐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들판을 덮치면 양식은 고갈됩니다. 쥐들이 불어나서 설치면 각종 전염병이 돕니다. 짐승들에게서 나는 인플루엔자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몰살 시킬 것입니다. 중세의 흑사병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럽 전 지역을 쓸고 갔습니다. 이런 죽음이 땅의 1/4을 휩쓴다는 것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 봉인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이고 넷째 봉인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9절입니다. [그분께서 다섯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간직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을 보았는데](계6:9). 어린양께서 다섯째 봉인을 여셨을 때 요한은 이전과 달리 아무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왕좌 둘레에 있는 어떤 짐승도 “와서 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봉인은 이 땅에 쏟아지는 재앙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큰 환란 때 이 땅에서 죽은 성도들의 혼들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어딘가로 도피하거나 숨지 못한 성도들은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할 것이고 그들은 목 베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봉인을 열었을 때 요한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간직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입니다. 아직 성전은 세워지지 않았는데 조만간 성도들이 휴거된 직후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고 유대인들은 거기서 율법에 따라 희생물을 드리고 경배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환난의 중간에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 하나님으로 보이며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적그리스도의 성전’으로 바뀝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성전으로 데려와 목을 벨 것입니다. 어린양이나 염소, 황소와 같은 동물들 대신 사람들을 짐승의 형상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혼은 ‘제단 아래’ 있게 됩니다.
구약 성도들은 죽으면 그 혼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죽는 즉시 그 혼이 저 하늘로 옮겨집니다. 연옥으로 가 거기서 머물러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는 확신에 차있으며 오히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고후5:8). 우리가 원하는 바는 진흙인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죽는 즉시 지옥에 있게 됩니다. 그들의 혼이 귀신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에게 마귀가 그들의 믿음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입니다.
죽음은 혼이 몸을 떠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혼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혼은 몸을 떠나 지옥으로 갑니다. 크리스천에게 죽음이란 참으로 원하는 바요, 이득(유익)입니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빌1:21).
죽는 것이 이득(gain)이란 말은 정신병자의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확신 가운데 소망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빌1:22). 우리는 육체 안에 살고 있습니다.
육체 안에 사는 것과 육체를 떠나는 것 중에 무엇을 택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라.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3). 바울 자신은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빌1:24). 바울은 죽는 것이 유익이고 바라는 것이요, 훨씬 더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위해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삶의 이유란 그것이 전부입니다.
큰 환란 때 죽은 성도들의 혼은 지하 아브라함의 품에 있지 않고 하늘로 곧바로 올라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제단 아래에” 있습니다. 제단 아래 있는 혼들은 들림 받을 때까지 제단 아래에서 안식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큰 환란 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계14:13). 사람은 죽을 때 이 땅의 물질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욥1:21,딤전6:7) 죽음을 통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게 되고 그들이 한 행위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됩니다(고후5:10,시62:12). 죽음은 육신과 이 세상과의 단절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살면서 행한 행위들은 모두 저 하늘에 옮겨져서 그에 따라 보상의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 죽임을 당한 혼들을 보았는데”(9). 이 땅에서 우리는 육신의 겉모습만 보고 혼이나 영은 볼 수 없으나 요한은 지금 영 안에 있으므로 하늘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들을 봅니다. 혼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눈, 귀, 코, 입이 있고 손과 발이 있고 혀가 있고 말을 하며 느낌이나 감각이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뜨겁고 목마르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혼이 몸의 형태로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몸은 혼의 옷입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몸의 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벗어 놓은 뱀의 허물과 같습니다. 몸의 모양이 혼의 모습을 결정해 줍니다. 지금 우리의 혼은 땅의 흙으로 지음 받은 육체로 옷 입고 있지만 저 하늘에서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광스런 몸으로 옷 입게 됩니다.
[이 장막 안에서 우리가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고후5:2). 지금 우리의 몸은 벗어버릴 허물과 같습니다.
제단 아래 있는 혼들은 왜 죽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간직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계6:9)이라고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성도들이 죽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아벨로부터 성전 제단 사이에서 죽은 사갸랴의 피를 말씀하셨는데(눅11:51)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사도들 역시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들의 증언으로 죽었습니다. 앞으로 진리의 말씀을 읽고 듣고 전하고 지키는 자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큰 환란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0절입니다. [그들이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 주께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우리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얼마나 더 지속되리이까? 하더라.](계6:10). 제단 아래 있는 혼들은 큰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도 아브라함을 보고 뜨거움의 고통을 호소하며 물을 구했습니다. 몸이 없는 혼들이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외쳐도 주님은 그 음성을 다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삶에서 목의 성대나 혀에 문제가 있을 때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혼은 여전히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단 아래에 있던 죽임을 당한 혼들은 주님께 외칩니다.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10). 혼들은 제단 아래에서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곧 바로 보고 외치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하늘의 별과 달은 보지만 셋째 하늘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데 제단 아래 있는 혼들은 마치 스데반이 죽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께 외치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자신들의 피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외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지옥 간 부자의 혼도 아브라함을 보고 물을 달라고 소리칩니다.
잘 보십시오. 크리스천들은 주님께 보복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입니다(눅23:34).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한 기도는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였습니다(행7:60). 바울 역시 자신을 버린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책임이 그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노라.”(딤후4:16)고 합니다.
그런데 제단 아래 있는 혼들은 원수를 갚아 달라고 주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죽인 자들에게 피의 보복을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성전의 제단아래에 있고 성전 체제는 율법체제이며 큰 환란 때는 신약의 크리스천들과 달리 율법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어떠합니까? “...오히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신19:21)는 율법에 따르는 것입니다(출21:24-25, 레24:20-22, 마5:38).
큰 환란 때의 경륜은 신약 시대의 경륜이 아니라 지금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또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바로 큰 환란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성도들과 대언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피를 주어 마시게 하셨으니 그것이 그들에게 마땅하니이다, 하더라.](계16:6).
환란 성도들은 피의 보복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는 그분의 심판들이 참되고 의롭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음행으로 땅을 부패시킨 그 큰 음녀를 심판하셨고 자신의 종들의 피의 원수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계19:2). 이들은 큰 환란 때 믿음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이나 대언자들의 글에 복수를 요구하는 기도가 매우 많습니다.
저주의 시편이라 불리는 글들도 있습니다. 내용이 용서는 없고 온통 저주와 복수, 원수를 갚아 달라, 죽여 달라는 말씀만 나오기도 합니다. 이는 큰 환란 때 해당되는 예언적 시편이요 말씀들입니다.
★전 삼년 반은 주님께서 고통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신 전쟁, 지진, 기근 같은 주로 자연적인 재해로 인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마24:8, 막13:8). 반면에 후삼년 반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극심한 자연재앙은 물론 적그리스도에 의한 직접적인 정치 종교로 인한 고통들이 임하는데 전무후무한 것들입니다. 42개월, 한때 두 때 반 때, 즉1260일 동안 내릴 재앙으로 이 시기에 일어날 일들은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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