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롬 7:22~25; 딛 2:11~12 등
제목: 죄를 억제하는 힘- 따뜻한 은혜
● 기독교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죄 사함을 받은 성도이지만, 그 성도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서 현실과 생활 가운데 죄와 투쟁해야 함을 자각하고 전투하는 믿음입니다.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성도는 칭의를 무너트릴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칭의의 결과인 성화의 과정에서 의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 죄의 현실적 공격과 영향을 받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 롬7: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현: 나의 내적 존재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만)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나의 내적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지만 나의 외적 존재인 육체와 현실은 TV나 인터넷을 더 좋아하고 심지어는 세상의 오염된 죄악을 더 좋아합니다. 혹시라도 기회가 되시는 분은 교도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가서 세속법상 죄인들의 종교를 물어보십시오. 최소한 4분의 1 이상은 명목상으로라도 기독교 신자일 것입니다. 자잘한 파렴치 잡범을 능가하는 중범죄자인 다윗은 시편 51편의 회개 이전에 형편없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인)이었고 신실한 성도의 모범 사례였습니다.
| 행13:21.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이전 왕이었던 사울의 불신앙이 드러나 폐위하고, 하나님께서 특심한 믿음의 용사였던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임명하신 것은, 다윗의 순전한 믿음을 보신 때문입니다. 아래에 나오는 다윗의 믿음의 선포는 최고의 설교입니다.
| 삼상17: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새: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새: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극한의 위기 속에서도 겁먹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고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고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했던 의인의 모습이, 다윗에게 (1)‘먼저’ 있었습니다. 그러했던 의인이 반전으로 나약하게 이성간 정욕에 굴복하여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궤계로 죽인 극악한 죄인의 모습은 (2)‘나중에’ 있었습니다. 죄인이 예수를 믿어 의인으로 간주되는 칭의가 (1)먼저 있지만, 그 의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아니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것에 불과하므로, (2)나중에 죄를 지었습니다, (1, 먼저)와 (2, 나중)이 동시성을 띠므로 현세에서 성도는 죄와 투쟁하고 종종 죄에게 패배하면 자백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91파의 영향으로 도덕률폐기론에 빠지면 안 됩니다. 아래 말씀에서요.
| 요일1: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만일 우리가”가 누구입니까? 요한일서의 저자와 독자들로서 신자들입니다.
●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당연한 진리와 교리를 알고 인정하면, 성화의 차원에서 죄를 억제하는 현실적인 방법과 힘이 필요합니다(은혜와 거룩한 슬픔 등). 죄를 억제하는 가장 큰 힘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고 그 은혜의 따뜻함을 느끼면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이를 거창하게 표현하면, 성경이 강조하는 ‘은혜의 통치’입니다. 율법의 공포나 의무감보다, 나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더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원리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가르치고 양육하는데요. 은혜는 단순히 죄를 덮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삶에서 경건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게 만드는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 더럽고 두꺼운 죄악의 코트를 벗습니다.
| 딛2: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공: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
영적 은혜는 물론이고 육체의 은혜를 받아도 마음이 넉넉해진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열심히 체력단련을 하고 기도해서 원하던 직장에 합격을 하니 걸을 때 발자국 발자국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친구의 의문 앞에 멈춘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한 1년가량 내 의식이 죄라고 여길만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았습니다. 비록 기복신앙이 조금 내포되어 있을지라도 행복하고 저는 용감했습니다. 극장에서 친구와 영화를 보는데 실내 흡연을 하는 비류(匪類) 같은 자에게 실외 흡연을 하라고 훈계했고, 해수욕장 탈의실에서 떠드는 청년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동행한 친구가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오느냐? 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은혜는 죄를 억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하고 담대하게 만듭니다. 은혜는 친자식을 두둔하는 힘과 권력을 가진 부모의 전폭적인 응원입니다.
| 롬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을 때 비로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따뜻함입니다. 사랑의 따뜻함이 주는 죄에 대한 억제력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따뜻함)을 경험하는 것이 곧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가장 큰 힘입니다. 교회 다니는데도 죄를 짓는 것은 은혜의 결핍 때문이죠.
|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현: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서 사람이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
은혜는 속사람과 내면을 강하게 만듭니다. 성도들의 내면이 은혜로 채워질 때, 외부의 유혹이나 죄의 영향력을 분별하고 극복해낼 힘을 얻게 됩니다.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공: 은총으로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공동번역: 예수를 통해서 받은 은총으로 굳세어지시오) |
성경을 보면 죄를 억제하는 과정은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의 원망이나 불평보다 감사함의 밝은 이유들을 더 많이 찾아야 합니다. 내가 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까 봐 무서워서 죄를 참는다! 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이토록 사랑하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차마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상태가, 점진적 성화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께 불순종하는 것(롬8:26 성령의 탄식)을 특히 회개해야 합니다. 은혜의 온기(성령의 충만함)가 식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최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죄를 이기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네, 일겠습니다.
<호크마 주석:로마서>
=====7:22
내 속 사람으로는 - 혹자는 23절과 25절에서 대조되고 있는 마음과 육신이 몸과 영 또는 정신과 물질 간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아니라 윤리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Murray). 이와 반대로 혹자는 고후 4:16을 근거로 하여 속 사람을 썩어질 겉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Black). 더 나아가 혹자는 속 사람을 인간의 실질적인 자아로서 영(spirit)과 혼(soul)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겉 사람을 사람의 몸과 그 지체로 이해한다(Lenski). 여기서 후자의 주장들은 바울의 전체 사상 중에서 인간 이해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시켜 줄 수 있으나 본절 이하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속 사람이 23절과 25절의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실체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속 사람을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와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노모 투 데우'( )가 '율법'을 의미하는지
8:2의 언급과 같은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율법'으로 이해한다(Hendriksen, Murray, Harrison, Lenski).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이 '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즐거워하되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도마이'( )는 일차적으로 '...와 함께 즐거워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치사 '쉰'( , '함께')과 결합된 합성 동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스키는 '...와 교제 하거나 교제하게 되어 즐거워한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함께'라는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순히 '...을 즐거워하다'(delight in, KJV, NIV, RSV). '...을
기뻐하다'(rejoice in;Scott, Robertson)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또한 이 동사가 1인칭 단수를 나타내므로 '내가...을 즐거워하되'라고 이해해야 한다.
=====7:23
내 지체 속에서 - '지체'(肢體)는 '육신'과 동일한 의미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킨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이다(6:13).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음의 법'은 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인 '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자체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이다. 한편 바울은 '한 다른 법'과 '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성도 안에는 이 두 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이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1)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2)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보는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
=====7:24
스토트(J. Stott)는 본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특정지워지면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으로 특정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혐오'(self-disgust)와 '자기 절망'(self-despair)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 이와 같이 스토트는 본절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거듭났으며 성숙된 성도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Murray)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달라는 호소이다. 불신자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 속에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탄식하지 않는다.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 )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 NIV, RS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자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은 절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나 '고민' 정도로 '탈라이포로스'를 해석하게 된다면 탄식하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망의 몸 -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망'은 '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한다.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절)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이다.
묵상과 함께 읽고 시너지 효과를 받습니다.
<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사 시대가 끌나고 왕정 국가 시대가 언급되고 있다. 왕정 국가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사무엘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와 함께 다른 열방들의 왕권 통치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되었다(삼상 8:5).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며 신정 시대(神政時代)를 폐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으나 호 13:11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여 왕권을 허락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왕권에 대한 요구는 부당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의 통치는 40년간(B.C. 1050-1010) 계속 되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삼상 31:1-6). 본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울의 통치 기간 40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므로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추측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Lenski).
=====13:22
폐(廢)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 바울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울 왕을 '폐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호 13:11)임을 보여준다. 이는 왕정국가가 성립되었어도 하나님 개입이 계속 되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바울은 18절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참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듯하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삼상 13:14과 시 89:20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왕가(王家) 의 정통성을 신적인 권위로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 다윗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23절에서 언급되는 메시야탄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다윗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속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속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야에게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키고 있다.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삼하 7:12에서 볼 수 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언약을 맺는 형식을(창 15:1-21) 취하지 않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약 맺음에 있어서 수반되는 축복과 저주, 충성과 복종의 조항이 언급되므로 삼하 7장을 '다윗 언약의 장'이라 부른다. 아무튼 바울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통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이 말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약간의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즉 본절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소명자로서의 바울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는 다윗 왕국을 강건하게 복원시키는 정치적 인물임을 믿었다(삼하 7:12-16).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해 다앙한 예언이 있다. 즉 수난의 '종'(사 42:1-7;49:1-7;50:4-9;52:13-53)또는 '인자'(단 7:13), '왕'으로서의 메시야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슥 4:11-14) 등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한 메시야에게 다양한 상(像)이 복합적으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굳이 일부분만을 취하여 메시야를 정치적인 즉 이스라엘에 국한된 메시야로 한정시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말한 것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메시야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예언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구주임을 권위있게 증언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국한시키는 말로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읽고 공부합니다.
<호크마 주석: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죄없다 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안우크 에코멘'( )은 죄가 자신들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것을 암시한다(Low, Brooke, Barker, Smalley). 죄가 부재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속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거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거부할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
===1:9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 )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 )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 )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 롬 3:25 ; 고전 10:13; 딤후 2:13 ; 히 10:23 ; 11 : 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 )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호크마 주석: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 '구원을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리오스' (* )는 '소테르'(* , '구원자')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해방하다', '석방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Simpson),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한편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구원이 사회적 지위나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함을 시사한다(1-10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 '하나님의 은혜가'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에 연결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일방적인 호의(favor)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救贖)을 의미한다(14절;롬 3:24).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이루는 날까지 바르게 살아가도륵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훈련시키고(train, RSV) 가르치신다(teach, NIV). 이 훈련과 가르침은 성도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계속된다(엡 4:13,15).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 본절은 헬라어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한다. 이는 본절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는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하는 목적절임을 시사한다(Lenski). 첫째로, 부정적인 측면이다. 그것은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말한다. '경건치 않은 것'은 불신앙적인 요소이며, '세상 정욕'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세상적인 욕망'으로서 세상의 쾌락과 악독과 다툼, 소유욕 등을 의미한다(3:3;요일 2:16). 둘째는, 긍정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근신함. 이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고 신중해야 함을 의미한다. (2)의로움.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게, 그리고 진리에 입각하여 행동해야 함을 나타낸다. (3)경건함.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이 세상에 살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여 양육하시는 현장이 천국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임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윤리는 세상과 분리된 환경 속에서 성취돼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는 실천 도장(道場)이다.
네, 좋은 설명에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딤후2:1
<호크마 주석>
내 아들아 그러므로 - '아들아'는 바울이 영적인 아버지로서 디모데를 자녀처럼 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1:2).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란 호칭을 사용해서 다정스럽게부른 후 1-7절에서 아들로서 행해야 할 디모데의 행동 방침을 권면한다. 한편 '그러므로'는 앞장의 후반부, 즉 아시아의 성도들의 배반과 오네시보로의 충성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 권면임을 나타낸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 '비가'의 헬라어 '수'(* )는 강조형 대명사로 디모데 개인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엔뒤나무'(* )는 '...에게 권능을 부여하다', '활력을 불어 넣다'의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자신의 여러 서신들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좀 더 강하고 담대해지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1:6-8;행 9:22;롬 4:20;엡 6:10;빌 4:13;딤전 1:12),디모데는 믿음이 신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유약한 점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딤전 5:23).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은혜' 앞에 전치사 '엔'(* , '...안에')이 있는 것은 디모데가 강건해지는 것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을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Guthrie).
맞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주님의 크신 사랑에 압도되어 죄를 멀리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성화의 과정임을 깊이 공감합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며 은혜의 온기를 지켜나가겠습니다.
어둠 속의 불평보다 빛 되신 주님께 감사의 제목들을 더 많이 찾으며, 죄를 이기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아멘!
징벌의 두려움이 아닌 은혜의 사랑에 압도되어 죄를 이겨내는 참된 성화의 삶을 소망하며 응원합니다! 아멘.
인간이 변화되고 교화되는 최종 수단은 따뜻한 은혜이며 사랑이라는 것에 공감케 하는 은혜로운 묵상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자발적으로 죄를 이기고 변화될 수 있는 힘을 주지만, 강압적인 힘이나 규율은 일시적으로 복종을 유도할 수는 있어도 명령하는 자가 없어지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거기에는 자율성을 부여해놓으셨습니다. 인격적인 존재이니까요.
이것은 더불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되죠.
하나님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고 자유함을 상실당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먼저는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단련시키시더니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얻어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율법에 얽매어 무서워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의 능력으로써, 성령의 법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매진을 해야겠습니다.
풍성한 복음을 담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아멘!
형벌과 매질은 인격을 왜곡시키고 사람을 더 악하고 독하며 병들게 만들 뿐입니다. 따뜻한 은혜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자발적이고 온전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나서서 모범을 보여 나가야겠습니다. 사회가 많이 악하고 사랑이 식어 갑니다. 말세적 현상들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존속 범죄가 아무렇지 않게 자주 일어나고, 부모도 아무렇지 않게 자식을 버리고 학대하고 죽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가 있는데,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한국교회,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아멘, 아멘!
복음이 충만한 좋은 본문과 사랑의 의미를 아는 위 댓글을 보면서 제가 은혜를 깊이 받습니다.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를 깊이 경험할 때 우리 영혼은 죄를 이길 정결한 힘을 얻으며 비로소 참된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보다 인자하신 은혜에 젖어드는 것이 죄의 지배를 끊는 가장 강력한 통로임을 믿으며, 날마다 그 사랑 안에 거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