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가 횅하다. 강의실에도 도서관에도 과수댁 막걸리 집에도 낯선 학생들뿐이다.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육법을 갑론을박하던 법우들의 모습이 군 입대 바람을 타고 하나둘 사라져버렸다. 덩달아 나도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훈련은 고되지만, 복무 기간이 짧은 해병대를 자원했다.
엄동설한 12월에 진해 해병대 신병 훈련소에 입소를 했다. 해병대는 타 군과는 달리 일주일간의 가(假) 입대기간이 있었다. 일주일간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야만 정식입대를 시켜준다.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고된 훈련일수록 동지애는 돈독해 진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의미도 지옥 훈련으로 다져진 끈끈한 동지애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완전무장을 하고 천자봉을 오르는 극기 훈련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훈련은 엄동설한의 심야지옥 훈련이다.
한밤중에 비상이 걸렸다.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이다. 바닷바람 휘몰아치는 연병장에 팬티 차림으로 세워놓고 칼날 같은 설한풍을 쏘이게 하는 훈련이다. 면도칼로 온몸을 찔러대는 기분이었다. 여기저기서 엉엉 울음소리가 들리고 몸은 달달달 떨었지만 입을 악다물고 참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이미 동태가 된 몸인데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입수하라니,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한겨울 바닷물 속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눈 녹듯이 사르르 녹는다. 이한치한(以寒治寒). 다분히 계획된 훈련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형님은 해병 대위로서 보급병들을 교육시키는 특과 교수였다. 나도 보급 병과를 받아 형님의 강의를 듣게 된다. 형님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공부한 결과 평가 성적이 좋았다. 2등을 하였으니 당연히 후방부대로 발령이 날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서부전선 최전방으로 발령이 났다. 형님이 야속하고 미웠다. 씩씩대고 있는데 형님이 밀봉된 편지 한 통을 주셨다. “네가 꼭 필요할때 이편지를 조00 대위한테 보여주라.”고 하면서.
진해에서 서부전선으로 가는 길은 낯설고 물설고 멀기만 했다. 형님의 본심은 철부지 막냇동생을 전방에서 고생 좀 해보라는 의도였겠지만 열 시간이 넘도록 군용트럭에 실려 덜컹덜컹 북쪽으로 가는 내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성적이 좋았던 친동생을 군기 빡세기로 소문난 최전방 전차 중대로 보내다니 생각할수록 형님이 원망스러웠다.
강화도를 지척에 둔 서부전선의 전차 중대 신병 생활은 무척 힘들고 무서웠다. 이북 방송이 왕왕대고 보초 서다가 졸면 간첩이 내려와 목을 베어간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김신조 간첩 사건이 발발하여 서부전선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대포알을 전차에 장전하고 조명탄이 펑펑 터지는 강화도 간첩 수색작전에 투입될 때는 너무 무서웠다. 밤잠을 설치며 작전을 수행하였으니 소득 없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였으나 진이 빠지고 맥이 풀린다. 불현듯이 형님이 준 편지생각이 났다. 꼭 필요할 때 써먹으라는 그 편지가.
조00 대위는 수천 명의 군수품을 총괄하는 보급소대장이었다. 나를 알릴 방법은 손편지뿐이었다. 그러나 최말단 졸병이 감히 하늘같은 조00 대위에게 편지를 쓰려니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났지만 몇 날 며칠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나의 편지와 형님의 편지를 동봉하여 우송을, 했다. 며칠 후에 보초를 서고 있는데 중대장 비서가 급히 나를 찾는다. 빨리 중대장실로 가 보라고, 그곳에 조00 대위가 와 계셨다. “네가 곽00대위 동생이야?” 하면서 당장 관물을 챙겨서 짚차에 타라고 명령을 한다, 조 대위와 형님은 잘 아는 사이였다. 형님을 미워했던 마음이 그때서야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여단 근무 중에 보급소대는 별천지 같았다. 보초도 서지 않고 온종일 따뜻한 사무실에서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업무가 전부였다. 중대장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고참병들이 형님의 강의를 들은 보급 병과이었기에 형님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곽 대위 동생이야.”하면서 반겨주었다.
전입신고는 노래로 대신했다. 나의 애창곡 〈녹설은 기찻길〉을 열창하였더니 내무반이 들썩인다. 그날 이후로 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순검 시간에 다른 병사들은 걸레질을, 하고 총을 닦는데 나는 노래만 불렀다. 덕분에 강화도 군관민 합동 위문 공연에서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군인 대표로 무대에 올라 인기가수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행운도 가질 수가 있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명찰을 달고 지나가는 후배들을 보면 정감이 솟는다. 도닥도닥 어깨라도 두드려 주고 싶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나는 죽어도 해병, 영원한 해병으로 살다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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