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판운 섶다리
강은 겨울에도 흐른다. 얼음은 물 위에 잠시 머물 뿐, 물은 그 아래서 여전히 길을 찾는다. 영월 판운리 섶다리 앞에 서자, 나는 강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 덮인 강 위로 낮게 놓인 다리는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면서도,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존재하는 겸손한 통로였다.
섶다리는 나무와 흙, 그리고 물의 약속으로 만들어진다. 철근도 콘크리트도 없다. 나무기둥을 박고, 그 위에 솔가지와 흙을 얹어 계절을 건넌다. 홍수가 나면 무너지고, 봄이 오면 다시 놓인다. 이 다리는 처음부터 영원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사라질 것을 전제로 태어난 다리다. 눈 위에 남은 발자국 몇 개가 다리 위를 지나간다. 사람의 흔적은 짧고, 강의 시간은 길다. 섶다리는 그 둘 사이에서 잠시 균형을 잡아준다. 건너는 사람에게는 길이 되고, 강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는 길. 그래서 이 다리는 늘 낮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강의 흐름보다 앞서지 않는다.
다리 위를 조심스레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리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이 다리에서는 속도가 의미를 잃는다. 빠르게 건너면 오히려 불안해지고, 천천히 걸을수록 다리는 단단해진다. 삶도 그러했을까. 서두를수록 흔들리고, 멈춰 설수록 비로소 길이 보였던 순간들.
강 건너편의 나무들은 모두 잎을 내려놓았다. 겨울나무들은 벌거벗은 채로 서 있으나, 조금도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해 보인다. 덜어낸다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버틸 준비를 마친 상태라는 것을 이곳의 나무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섶다리는 매년 다시 놓인다. 어제의 다리가 오늘의 다리가 아니고, 작년의 나무가 올해의 나무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다리를 ‘같은 다리’라고 부른다. 변해도 이어지는 것, 사라져도 기억되는 것. 그것이 이 다리가 가진 힘이다. 나는 문득 우리의 관계와 삶도 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매번 다시 놓는 다리들. 가족과의 인연, 사람과의 약속, 하루하루의 마음. 무너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놓을 수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건너간다.
강 위에 서서 잠시 멈춰 섰다. 다리 아래로 얼음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흐르는 것들, 말이 없어도 이어지는 것들. 섶다리는 그것들을 믿고 그 위에 몸을 맡기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다리는 목적지가 아니다. 건너가기 위한 장소일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다리 위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어디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 삶에서도 그런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도착보다 머묾이 더 중요한 시간.
영월 판운 섶다리는 겨울에도 사람을 건넌다. 차가운 강 위에서,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매년 다시 놓이는 다리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이 다리에게서 배운다. 눈 위에 놓인 낮은 다리 하나가 말해준다. 길이란,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놓일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