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이 끝나고 대한민국 국군이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는 납북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정지용 사이버 문학관에는 계광순의 증언을 바탕으로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됨.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함께 수용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당시 월북하였다가 2001년 남한을 방문한 정지용의 셋째 아들은 북조선에서의 아버지의 행적을 전혀 알지 못하였고, 2003년 문학평론가 박태상은 그가 납북되던 중 1950년 9월 25일 미군의 동두천 폭격에 휘말려 소요산에서 폭사하였다는 내용의 자료를 공개하여 정지용이 실제 납북되어 북조선에서 활동하였는가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단, 박태상이 공개한 자료는 북조선 언론 자료에 기초한 것이어서 남한에서는 신빙성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고, 현재까지 정지용의 정확한 사망 일자나 원인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이와 별개로 정지용이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 숙청 혹은 탄광행이 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확실한 최후는 지금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선, 2000년 북에 있던 셋째 아들(정구인)이 아버지 정지용을 찾겠다고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상봉대상자에 아버지, 어머니, 형, 조카를 다 넣은 것. 결국 큰 형(정구관)과 상봉했는데,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형에게 북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숙청이나 탄광행이라면 유가족이 이렇게 활동할 리는 없을 거라는 점에서 정지용의 월북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구인은 량강도 방송위원회 중서군 주재원 책임기자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정지용의 사망일자를 9월 25일로 쓰고 있다. 다만 조선대백과사전에선 정지용의 사인에 대해선 밝히지 않고 있다.
자녀로는 3남 1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정구관(鄭求寬)(2004년 4월 24일 별세) 정구익, 정구인, 정구원이다. 연일 정씨 문정공파 족보에는 정구관만 정지용의 자식으로 등재되어 있다. 정구인은 북한에 남았으며 정구익은 한국전쟁 때 병사했다. 장남인 정구관과 딸 정구원은 남한에 남았다.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1988년 해금 조치된 직후 '지용회'를 세우고 정지용의 복권 활동을 행했다. 이 지용회에서 매년 정지용 문학상을 발표한다.
시인의 작품세계
정지용의 시와 산문 140여편 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향수>, <고향>, <유리창1>, <바다9>, <백록담>, <인동차>, <압천> 등을 뽑아 읽고 그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향토색이 짙은 ‘향수’와 모더니즘 계열의 ‘유리창’의 작품세계를 알아보자.
1) 향수에 대한 해설
전체적으로 유장한 흐름을 보이는 가운데, 연마다 후렴시행이 따라와 음율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지용이 1923년 3월에 쓴 「향수」이다.
그러니까 휘문 고보를 졸업하던 무렵이다.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향리를 생각하며 지은 시일 법하다. 그러나 넓은 벌 동쪽 끝은 다만 지용의 고향을 가리키는 장소만은 아니다. 그 누구의 향리라도 붙일 수 있는 우리의 국토 조선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로부터 대륙에서는 우리를 東夷라 하지 않았던가. 그 동쪽인 것이다. 잔물결 반짝이며 실개천이 느리게 흐르는 곳, 옥답을 일구어주는 착한 얼룩 백이 황소가 앉아 쉬며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늙으신 아버지가 편안히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고향에는 넉넉한 인심과 잔잔한 평화가 있고 때 묻지 않은 꿈과 동경의 유년시절이 있다. 먼 신화와 전설을 그대로 간직한 순결한 이 땅, 짓밟히지 않은 우리의 향리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어린 누이, 앞머리를 양쪽으로 갈라땋아 귀 뒤로 치렁치렁 넘긴 어린 누이가 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동에 시달리지만, 지친 마음을 푸근하게 받아주는 늘 편안한 아내가 있다. 그 살붙이 피붙이들이 도란거리며 욕심 없이 사는 초라한 지붕 위로 성긴 별들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간다. 「향수」의 마지막 연에는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짓밟혀 순결을 빼앗긴 조선 땅, 고향마을의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엷은 근심이 깔려 있다. 그러나 화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조국, 사랑하는 사람들이 소박하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할 향리 그곳을 잊지 말자고.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을 지켜야 한다고. 지용은 일본 놈들이 무서워 조선시를 쓰지 못하는 시대에 민족어와 풀뿌리 말을 찾아내고 만들어 갈고 닦아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민족시인이다.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전문 <1927년 조선지광> * 해설피 : 해가 설핏 할 무렵인지 느리고 어설프게(혹은 슬프게)인지, *석근 별 : 성근(성긴) 별인지 섞인(여러 모양의 별들이 섞여 빛나는 모습) 별인지 불명확하다 이 작품은 정지용의 초기 대표작으로 1927년 좌익 진영의 기관지인《조선지광》에 발표되었다. 80년대 이동원, 박인수가 함께 노래로 불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불우했던 월북작가가 '향수'로 부활한 셈이다. 일본 유학을 가기 전(일본 유학시절에 쓴 작품이라는 설도 있음)에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흐르는 한가로운 농촌 풍경이 연상된다.
연마다 후렴구로 되풀이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구절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내며 한 편의 풍경화로 다가오게 한다. 또한 후렴구와 이어지는 매연의 마지막을 ‘우는 곳’, ‘고이시는 곳’, ‘휘적시든 곳’, ‘이삭 줍던 곳’, ‘도란거리는 곳’ 등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 또한 음악적인 리듬감을 주는 재미있는 표현이다.
‘금빛 게으른 울음’의 감각적 이미지는 모방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다. 어떻게 울음이 금빛으로 보이는가? 청각을 시각화한 대표적인 공감각적 표현이다.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베개’ 등의 시어는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나게 하는 고향의 그리운 풍경이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지줄대는’, ‘해설피’, ‘함추름’ 등의 시어은 잊혀져가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시인의 탁월한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표현이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정말 고향의 정경이 한 순간에 떠오른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린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오붓하게 살아가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은 우리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은 평범한 사람들의 보습이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뛰어가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는 너무나도 가슴 뭉클한 말이며 나의 고향의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특정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서 고향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고향이기도 한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