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유람 말하려 하건만,
꿈에서 깬 듯 하고, 산 위의 큰 바위는
언제나 정정하고, 저 붉은 노을은
멀리서 고고한 모습지어 보라하니
원기는 만고의 평안이 부지하라하네.
- 노을, 이시원(조선말문장가) -
추억은 미래보다도 새롭다고 했던가.
'추억이란 과거의 낡은 기억이 아니라
미래보다 새로운 것이다' 라고,
말 만드는 조각가 유하시인은 말한다.
그 추억을 찾아 용산역에 새벽으로,
작은 배낭에 망우리 송곡여고 출신
조미아 시집 한권과 세면도구, 말린
조미장어채를 넣고 여유롭게 새벽
바람을 밀어내며, 토요집회를 불참,
봄 바람 맞는 무궁화호 차장은
차거운 성에가 덕지로 붙고,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은 성에의 흰 눈꼽을
닦아내며, 봄 바람의 이중성을 채근,
계절의 수은주를 바쁘게 한다.
2시간 20여분만에 무궁화호 기차는
대천역에 고심자를 등 떠밀어
떨치고, 기적소리도 없이 장항선
선로를 기어가고, 희뿌연 안개같은
해무가 잦아든 대천은 기지개를
켜듯 부산한 움직임의 스크래치,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태안군 고남면
이만원, 콜을 하니, 택시기사 양반,
웃으며 승객들도 없으니 타시오,
주저리 '운여해변 여행가시죠' 묻고,
맛집이라고 식당을 소개해준다.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찔레꽃처럼 순정으로 불타오르다
애잔하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독한 술이 마시고 싶은 곳이다'
그렇다, 문병란시인 글이 아니라도
서럽도록 애환의 갯펄 삶을 살았던
선술집 같은 분위기 풍기는, 어촌의
흐린 해무적 내 고향같은 고남마을,
솔밭을 방파제 삼아 십리 백사장과
삼만평의 갯펄의 무수한 바닷생물이
사는 운여해변의 햇살, 그을린 여정.
붉은 노을, 그 섬광을 보려면 여유가
많아 80년 초에 멋모르고 날뛰던
그 시절에 왔던 추억으로 회로모드
전환, 회상하며 쓸쓸함에 젖는다.
기억의 저 편, 희묵수평선 너머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고 하얀 내
빤스 한장과 브래지어 두짝, 양말,
빨래줄이 흔들리며 허공에 펄럭,
낡은 4층 건물의 옥탑방.
사랑하기엔 비좁고 잡소리가 심한
단깐방이였지만 눈부신 봄 하늘이
되려 맑아서 우리의 빛나던 삶에,
곱던 그녀에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달디 단 입술,
소황사구 모래처럼 부드럽던 허리,
걷다 지칠수록 자꾸 길을 잃던 그녀
검은 숲속 길, 달빛이 새어 드는 창,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잃어버린
시간의 뒷골목에 외딴 섬의 여자로
감춰두고 살아 왔던 것은 아닌지,
세찬 바람불어 내 하얀 빤스와 양말,
걷은적 없는, 다시 찾아 입을 수 없는,
서럽게 펄럭이는 아득한 청춘의
책갈피, 저 밀고 밀리고 물결같이
해변에서 희미한 빛으로 떠도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택시기사가 소개해준 꽃지꽃게집을
찾아 고등어구이와 꽃게양념무침을
주문하니, 옆 테이블에 손님들이
태안 출신 상인 독립운동가 이야기,
귀가 솔깃해져 한참 주의해 들으니
'배인복'지사 이야기다.
상해 임시정부에 재정적 뒷바침을
했던, 총 칼, 펜의 저항 뿐 아니라
이름없는 상인들의 활약상까지도
독립운동사에 기록돼 남겨 졌으면
하는, 인천항에 우련통운을 설립,
석유업에 손을 대서 사업에 성공,
'배인복'지사는 상해에 잡화 물류
인삼, 농기구, 상인, 사백여명과
'조선상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자금
모금과 암략, 김구 주석의 명을 받고
조선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실질적
재정부 역활을 담당, 무기와 탄약,
화약 등 밀매로 구입해 임정에 전달,
안중근 의사의 아크로권총,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등 무기들을
조달했던 드러나지 않은 독립지사!
그 상인들도 조명해야할 때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꽃지해수욕장에서 부터 걷다보니
어느덧 기다리던 낙조의 석양이
서서히 함몰하는, 솥밭의 운치를
등지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와
50센티 자로대고 가로줄을 긋듯
그 자연의 켄트지위에 불 붙이는,
깊은 잠서 깨어나 바라보는 영산홍
붉은 입술같은 꽃물이 들어 속내
깊숙히 등유 부어 불사른, 화르르
타들어가는 오월의 꽃 무덤으로
선홍빛 폭죽소리, 음소거하고 태양,
흑점은 온몸에 무당벌레 문신으로
어둠의 속살 웅크린 바닷속에
잠수하는, 내 어둔 생애처럼 그렇게
운여해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다.
젊은시절 추억을 몽돌에 감아서
낙조 속으로 돌팔매질 했으니,
추억도, 사랑도, 인생도, 자연속에
흐른다는 '장자의 무위자연설'처럼,
용산역에 발 딛고 나서니 10시가
다 된 서울의 밤은 요란차고 태안서
유유자적하다 또 시퍼런 인광의
불을 켜고 삶의 생활, 그 욕망으로
뛰어들 생각하니, 인적 끊어진 내
삶도 보통의 고뇌가 아닌 닫혀버린
비상구처럼, 또 서성거려진다.
꽃지꽃게집 양념게장 참 맛나던데,
거주지에 가서 라면 끓일 생각하니
한숨만, 그렇게 여행후기는 살갑지
않는 여운과 현실 아득함 주는!
- 풍운유서(태안 운여해변) -
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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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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