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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행(修行) 은 수양(修養) 이 아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수행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래는 다음 사전에 나와 있는 수양과 수행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수양修養 : 몸과 마음을 닦아 기름
수행修行(산스크리트어: साधना 사다나) : 자아를 초월하는 영적 행위이다. 수행은 다양한 정신적 또는 의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따르는 힌두교, 불교 및 자이나교 전통의 다양한 학문을 포함한다. 수행은 사두의 목표가 될 수 있는 세속으로부터의 분리를 달성하기 위해 이뤄진다. 카르마 요가, 바크티 요가 및 즈냐냐 요가는 일상생활의 모든 흐름에서 최대 수준의 완벽을 달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수행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수행으로 설명될 수 있다.
수양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아나가는 겁니다. 이건 조선시대 선비들이 600년 동안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근본적인 속성상 아무리 오랜 세월을 수양한다고 해도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성찰하다 보면 겉으로 마음은 변한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마음의 본질적인 속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본질적인 속성이란? 마음은 허약하기 때문에 공포와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원래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늘 자신이 죽거나 사라질 것만 같아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타자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흔히 열린 마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하기 좋은 말일뿐 이게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수행이란 방편을 말하는 건데 모종의 행위를 말하는 겁니다. 즉,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행위를 말하는 겁니다. 수양과 수행의 특징은 수양은 마음이 하기 좋아하고, 수행은 마음이 하기 싫어합니다. 수양은 마음이 자기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들게 하지만 방편수행은 하면 할수록 자기가 지금까지 마음에 의지해서 살아온 날들이 모두 헛짓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알게 합니다.
또한 수행은 계속해서 마음을 끊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알아챔이 일어나게 하고 마음을 주인의 자리에서 원래의 감각기능의 자리로 내려 앉히면서 지금까지 없는 것처럼 여겨지던 원래의 주인인 "의식"을 불러내어 자리에 앉히는 작업인 겁니다.
십여 년 전, 조카가 수행에 입문하여 제게 이런 걸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삼촌, 수행하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확률? 아주 높지, 다만 제대로 된 길에만 들어섰다면 말야"
세상에는 여러 스님들과 종교학자들과 물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수행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천주교와 이슬람과 자이나교등에서도 성직자들이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열한 사람들은 진리가 뭔지 모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진리에 도달하는지 당연히 모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고, 강연을 하면서 진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건 눈이 먼 봉사가 장님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자고 하면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들 장님 일행들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다 운 좋게 서울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 곳이 서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법당에 앉아계신 부처님은 일 년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웃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절에 찾아와서 자기를 보고 절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정말로 진리를 찾아서 알고 진리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계합한 사람들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물론 글만 읽는 것으로는 되지 않고 방편도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찾는 많은 사람 중 극소수의 사람들이 운이 좋게 깨달은 사람들의 글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운이 좋은 극소수의 사람들 대부분이 방편은 행하지 않고 글만 읽으면서 마음의 만족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깨달은 이들의 글(경전)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저 달을 봐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저 달이 바로 너의 실체다.. 그러니 달이 되도록 하라." 이 말인 겁니다. 그리고 앉아서 날마다 "나는 달이다, 나는 달이야.."라고 중얼거린다고 해서 달이 되는 것은 아닌 겁니다.
진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편을 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다.
많은 깨달은 이들이 방편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러나 지성이 극도로 발달한 몇몇은 수행하지 않고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인물 중 한 사람이 J.크리슈나무르티입니다. 그는 아마도 전생에서 거의 깨달음에 근접하기까지 수행을 했을 겁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찾아야만 하겠다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동양적인 모든 수행 방법과 구루(스승) 들을 내 팽개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지성을 가진 이는 그냥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지난 글에서 마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그 글을 읽고 이해하고 납득하고 받아 들였다고 해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해하고 납득한 다음 받아들였다고 해도 정말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닌 겁니다. 정말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라면 마음은 사라졌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름 이해했다면 이후에 방편수행을 해야 하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 마음이 정말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방편수행을 한 사람의 예로 밀라레빠의 이야기를 그리고 방편수행을 하지 않고 깨달은 j.크리슈나무르티의 이야기를 각각 해 보겠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 내의 "별의 교단" 교주였습니다. 요즘 돌아다니는 차원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혹은 빛의 전사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히말라야 깊은 산속에서 인류를 영적인 차원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차원 높은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등은 모두 신지학에서 흘러나온 자료들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별의 교단 교주로써 이러한 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깨닫기 전의 일입니다. 깨닫고 나서 본인은 이러한 것으로는 진리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별의 교단 교주로 활동하고 있던 지두는 어느 날 니체가 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읽고 충격을 받습니다. 니체는 배화교 교주인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인간은 동물도 아니고 신도 아닌 중간과정에 있기에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하면서 인간의 상태를 다리의 중간에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다리 이쪽은 동물의 단계이고 다리 저쪽은 신의 단계인데 인간은 중간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초극되어서 초인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까지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인간의 상태가 초극되는 것인지는 니체도 몰랐을 겁니다.
지두는 이 책을 읽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로 세상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일단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다" 이 때까지 신지학 내에서 미래의 인류의 스승으로 길러지고 별의 교단 교주로 인류를 위해서 활동해 온 지두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한 일들이 모두 진정으로 인류를 위해서 한 일들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이런 결론에 도달한 지두는 나날이 극심한 허리통증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통증이 심해지자 어린 날에 신지학 2대 교주였던 베산트 여사에게 양자로 입양이 되어서 지금은 잊어버린 평상시에는 기억할 수 없었던 자기의 고향 언어(인도)로 말합니다.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는가? 나는 고향으로 가고 싶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두(수행자)가 되고 싶다."
그러나 통증에서 벗어나면 자기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날 겪고 있던 어느 날, 몸이 아주 편해져서 풀밭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됩니다. 그는 깨닫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멀리 보이는 농부가 바로 나였다. 저기 보이는 길에 있는 돌멩이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바로 나였다."
이 이야기는 메어리 루틴스가 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이 교주로 있는 별의 교단을 해체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진리로 가는 길은 따로 있지 않다. 진리로 가는 길은 집단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오직 개인만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진리를 향해서 갈 수 있다."
https://cafe.daum.net/nuurelarb62/bhMx/31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별의 교단 해체 선언" 전문
그리고 지두는 자기가 깨닫게 된 방식으로 이해를 통해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설법을 합니다. 하지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통해서 깨달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는 위에 쓴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오쇼 라즈니쉬는 제자들에게 직접 방편을 행하게 했고, 그로 인하여 몇몇 사람들에게 변형이 찾아 왔습니다.
밀라레빠는 집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흑마술을 배워서 잔치를 벌이던 백부의 집을 무너뜨립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이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던 밀라레빠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당대에 깨달은 이로 알려져 있던 "마루빠"를 만나서 끝도 없이 돌탑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밀라레빠는 참지 못하고 마루빠에게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스승의 부인이 다시 말라레빠를 설득하여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마루빠가 이런 일을 시킨 것은 밀라레빠에게 쌓인 업장을 풀어주는 과정이었고, 이런 과정이 끝나자 말라레빠에게 방편을 줍니다. 보통 티벳불교를 밀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승이 제자에게 은밀하게 방편을 전수하기 때문에 밀교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방편을 받아 든 밀라레빠는 동굴속에서 6년간 몸이 해골로 변해가는 고통을 겪으며 결국 깨닫게 됩니다. 마루빠는 밀라레빠에게 방편을 주면서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냅니다. 그 약속은 깨닫게 된다고 해도 이 생에서는 스승 노릇은 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마루빠가 이 약속을 받아내지 않았다면 밀라레빠는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수행자가 깨달아서 스승 노릇을 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수행중에 끝 없는 망상 퍼레이드가 펼쳐지기 때문에 수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마음의 속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마루빠가 이런 약속을 밀라레빠에게서 받아 내었다는 건 스승으로써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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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춘 밀라레빠의 일생
이후 밀라레빠는 티벳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승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왜 약속을 어겼느냐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수 있어서 말을 덧붙이자면 깨닫기 전에 한 모든 약속은 깨닫고 나면 무효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들었다는 건 곧 수행자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라졌다는 말이고 또 다른 말로는 거듭 태어났다는 이야기인 겁니다.
당신이 진리를 찾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 지성이 가장 탁월한 사람 중 한 사람인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지성이 정말로 경전을 읽고 자신이 사라질 정도로 준비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냥 단언합니다. 물론 어딘가에 그런 사람도 있기는 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글을 읽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진리를 찾고 싶어서 경전을 읽었거든 반드시 방편을 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경전을 읽고 방편을 행하지 않는다면 경전의 내용이 당신에게 해가 됩니다. 그리고 본인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경전을 읽고 방편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어떤 해가 있을까요?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곧 경전의 내용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게 되면 그 지식은 당신의 지성을 가로 막아서 영원히 진리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은 진리라는 사과를 먹어 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고, 먹어 본 적도 없는 진리의 사과의 맛에 대해서 떠들거나 중얼거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진리란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모든 깨달은 이들이 말하는 진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걸 알게 되면 당신은 곧 지식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지식은 끝이 없다는 말들을 하지만 지식에는 끝이 있습니다.
"지식의 끝"이라는 말이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지식에는 끝이 있고 그 곳을 지나 온 사람으로써 어떻게 지식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새로운 날 맞이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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