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토요칼럼 2026 5.9>
제2부 한반도의 근대사 =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국제전 승리와 500년 조선왕국의 멸망 그리고
일본의 대한제국 합방 (요약)
알기 쉽게 보는 625 전사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일본에 강점 되기까지에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위치상 요충지 여서 한반도를 둘러 싸고 있는 3대 강국인 중국, 러시와 일본이 서로 점령코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한국의 고대 역사에는 만주 들판에 고조선의 유적지로 심양과 대련이 있었고 3국시대에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 침범에 용감하게 싸웠던 고구려의 용암성과 비사성등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먼저 봉쇄봉건 500년 조선조 시절 1894년 한반도의 동학란과 관련하여 조선의 지배를 둘러 싸고 중국과 일본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서 일본이 승리하였다
1904년의 러일 전쟁에서 군국주의 일본 제국이 강자로 등장하여 여기서도 승리하였다 .
일본이 그러니까 3대 국가간의 국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무혈로 일본이 을사 보호조약 이후 1910년에 한반도의 대한제국을 일본이 합병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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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1945 년 815에 미소 연합군의 승리로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한반도는 45년 7월의 미영소의 포츠담선언에서 미소가 분활 점령키로 되어 남북으로 분단 되어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은 러시아군이 점령하였다.
1948년 8월15일에는 남쪽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설립되고 동년 9월 9일에는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조선 인민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주의에 의한 비극에 이어 계속적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3. 6 25 동란과 정치사회적 혼란
대한민국의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으로 건국은 되었으나 정치 사회적으로 소요와 불안속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쳐 일본이 남겨 놓은 시설로 전쟁준비를 하여왔다.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경시한 처사가 발생하였다. 즉 한반도는 미국의 극동 아시아의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벗어 나고 1950년 1월 주한미군이 철수하였다.
북한은 이를 빌미로 동년 6월 25일에 남한침략을 감행했다.
소위 625 전쟁을 이르켰다.
세계유례가 없는 민족 상잔의
대규모 전쟁이었다.
(625 76주년이 다가옵니다 )
북쪽의 핵보유에 대하여 남쪽의 무핵 비핵이 어떻게 하여야 되는가를 각오를 새롭게 하고 공부삼아 역사가 전하는 625 동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625 동란이라고 일컫는 한국전쟁쟁은 한말로 복쪽의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시에 남침을 하여 3년1개윌을 지속하다가 전쟁 참화를 이르키고 53년 7월에 휴전으로 전투가 멈춘 것을 말합니다.
북한은 남조선의 해방을 목표로 침공시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한에 러시아제 T34 T3O
탱크와 다발 총으로 무장하여
38선을 일제히 동시에 넘어 한국의 수도 서울을 3일만에 점령하였다.
UN군이 참전하였으나 침략군의 남하에 계속 후퇴하여 침공 한달만에 남한의 최후의 후퇴 방어선인 낙동강 하구의 교두보까지 후퇴하였다.
1950년 9일 15일 맥아더 인천상륙전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군과 UN군의 합동작전으로 섬이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많은 지형에서 성공률이 낮은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시켰다.
인천상륙 작전이야말로 전쟁정세를 완전히 뒤바꾼 것으로 맥아더 쟁군이야 말로 한국 전쟁의 최대 은인이다
이리하여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여 수도를 수복하였다.
그러니까 남한의 수도 서울은
3개월간 북한군 점령하에 있었다.
2026년이 서울수복 75주년이 된다.
UN군은 또한편으로는 수복후 10월 1일 38션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 까지 북상하여 북진 통일 일보 직전이었다.
1950년 11월 예상이 잘못 되어 대대적인 중공군 병력이 투입되어 14 후퇴로 정부를 부산으로 후퇴 시켰다가 다시 전선은 37도 선까지 내주고 중화력으로 수도를 재탈환하였다.
공산주의가 싫어 탈출하는 수많은 피란민 철수작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흥남쳘수 작전이었다
UN군이 다시 중화기로 회복한 전선은 38션 북쪽에서 오락가락 하였고 2년간의 협상끝에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UN 참전국은 16개국과 비전투 협조국 6개국으로서 UN군 참전 역사에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한다.
UN군 참전을 유도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인 노력도 약간은 있었지만 존재도 없는 코리어가 아니고 미국의 일본의 보호를 위해서 였다는 기록물이 있다고 한다.(625 전쟁사 끝)
1953년 휴전이 되었다
전후 3년간 UNKRA 자금등의 윈조로 상당한 복구기간이 있었다.
예를 들면 민간에 의한 제당, 제분, 시멘트 또는 봉제등의 3백 산업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1960년 3월 15일의 대통령 선거로 일어난 419학생 혁명으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물러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공적 뿐만이 아니고 UN군의 참전노력 그리고 53년 10월 한미 상호빙위 조쳬결과 힌미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는 공적을 세웠다.
1960년 7월 윤보선 대통령, 장면총리의 의원 내각책임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박정희 장군의 군샤혁명으로 장면 정부는 9개월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1965년 해방부터 61년 박정희의 군사 혁명정부가 설립될 때 까지를 보면 16년간 너무나 많은 정치 사회적 사건을 겪었다.
그러니까 국가는 전체적으로 혼란과 소요의 상태여서 민생경제는 제로에 가까우며 의약품, 농산물, 식료품,의류등을 미국의 원조 자금인 GARIOA, ICA, KRIC, PL480, UNKRA등의 원조자금 총 3억불과 군사원조 2억불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였다.
이기간 어려운 가운데서도 UNKRA 자금으로 건설한 문경 시멘트, 인천 판유리가 있었고 ICA 무상자금으로 한국 최대의 종합화학 공장인 충주비료공장등이 건설되었다.
민간이 추지한 시멘트와 섬유공장들이 이때 건설되어 하기에 따라서는 자립경제 구축의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박정희의 5.16 군사정부가 이어받아 빈곤에서 탈피, 기아에서 해방을 위하여 한국 실천주의 원칙하에 경제건설에 착수하여 아시아의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코리어의 네마리 용중의 한마리로 탄생하였다.
2026.5.9 김광모
(3부 박정희의 60년 대의 빛나는업적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