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운다. 보청기를 잃어버렸다며 어린애처럼 허둥거린다. 차분히 찾아보자고 설득해도 막무가내다. 괜히 비싼 걸 해주어 애먼 사람 골탕 먹인다며 원망의 말을 쏟아 붓는다. 하루를 살아도 제대로 들으며 사는 게 좋다고, 겨우 설득해서 맞춘 보청기가 엄마에게는 간수하긴 힘든 애물단지가 된 것 같다.
TV 프로그램에서 ‘고요 속 외침’이라는 게임을 한다. 다섯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앞사람이 한 말을 뒷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게임이다. 조건은 단 하나, 들을 수가 없다. 게임에 참여하는 모두가 머리에 헤드셋을 쓰고 있어 외부로부터 소리가 차단된 상태다. 처음부터 어긋나는 팀이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팀도 있다. 관찰력과 언어에 대한 감각이 탁월한 팀은 틀리게 전해진 말도 바르게 고쳐 전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몇 년 전부터 엄마의 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엄마와 대화를 할 때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엄마도 당신을 못 믿는지 내가 하는 말을 반복해서 따라하여 재차 확인하곤 한다. 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엄마가 제대로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하다 보니 자연히 내 목청이 높아갔다. 대화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나와 엄마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틀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게 되었다.
말에는 감정이 따라다닌다. 상냥한 말에서 친절을 감지하고 퉁명스러운 말에서 거부의 감정을 느낀다. 목소리가 커지면서 표정도 함께 변해가는 걸 ‘고요 속 외침’ 출연진들의 얼굴에서 읽는다. 내 말소리에 짜증이 담겼던가. 말을 못 알아듣는 엄마를 위해 목청을 높였더니 엄마가 되받아치듯 나에게 마구 언성을 높여 화를 낸다. 예능에서야 얼마든지 웃을 수 있는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웃고 넘길만한 여유가 없다.
엉뚱하게 알아듣고는 쌍심지를 켜는 엄마로 인해 형제끼리도 자주 부딪쳤다. 참새 떼처럼 몰려다니던 형제들이 모임을 조금씩 미루게 되었고 나중에는 따로따로 움직였다. 조금씩 두기 시작한 거리가 엄마를 외롭게 만들었는지 엄마는 토라진 아이처럼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 당연하다 여겼다. 아니, 홀가분하다 생각했다.
엄마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이웃에서 먼저 발견했다. 행동이 이상하니 병원에 데리고 가보라는 권유를 받고 나서야 인지력과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엄마는 낱말을 잃어갔던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니 어휘력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말을 걸지 않는 엄마에 길들여진 나는 말수가 줄어든 엄마를 보면서도 모르는 척 귀를 막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목에서 꺼끌꺼끌한 소리가 났다. 조금만 길게 말을 해도 통증이 왔다. 무리해서 목청을 올린 탓이라고 한다. 별일 아닌 일에도 핏대를 세우다보니 톤마저도 신경질적으로 변한 것 같다. 저녁이면 따뜻한 차로 아픈 목을 달랜다. 통증이 가라앉을 즈음이면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또 가슴이 아프다.
어느 날 아들에게서 엄마는 말을 곱게 할 것이지 왜 따지듯이 말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조신하게 말한다고 하는데도 아들은 나더러 화를 내는 것 같다고 했다. 친정 식구들이 모여 있으면 마치 싸움판에 들어선 것 같다고도 했다.
엄마에게 보청기를 맞춰주기 위해 이비인후과에 갔다. 엄마의 귓속에 귀지가 돌처럼 꽉 막혀 있었다. 어찌나 단단한지 의사선생님이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빼낼 수 있었다. 노화로 인해 안 들렸을 거라는 식구들의 추측이 빗나가버렸다. 모처럼 듣는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고마웠는지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현대 의학은 소리를 잘 들으라고 엄마에게 보청기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엄마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고요 속 외침에서는 웃음이 만발하다. 웃음이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안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엉뚱한 말을 해도 비난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 큰 소리로 말을 전하는 사람도 표정만은 웃고 있다. 이해와 배려가 섞인 몸짓으로 상대방에게 말을 하나씩 찾아준다. 그렇게 하나씩 의사소통이 진행되어 가니 지켜보는 나도 덩달아 흐뭇하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단절되었다. 모든 문화가 온라인 속으로 들어갔다. 스마트 세상에서 ‘고요 속 외침’을 하는 것이다. 온라인 수업, 온라인 회의, 온라인 공연…. 온라인 속 세상은 내 마음에 따라 쉽게 뜨거워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듣기에 따라 그 내용이 확연히 갈린다. 엉뚱한 오해를 하거나 곡해를 해서 관계를 헝클어뜨릴 때도 있다.
나는 세상을 탓하고 싶지 않다.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품을 팔았던가. 유-튜브, 밴드 등 라이브 방송으로 배우고 또 배운다. 그것만이 세상의 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길임을 알기에 어렵지만 노력을 한다. 허나, 기력이 쇠해지면 어떨까, 세상에게 기다려 달라고 외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때쯤이면 아마도 나는 엄마처럼 고요 속 외침을 해야 하리라.
엄마의 귀에 보청기가 걸린다. 보청기를 낀 엄마의 귓속은 고요해서 시끄러우면 소리를 잡을 수가 없다. 큰 도로변에서 새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새가 없어서가 아니다. 자동차 소음에 막힌 우리의 귀가 새소리가 들어올 틈을 주지 않은 탓이다. 엄마는 늘 나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바쁜 내 일상이, 짜증에 묻힌 내 목소리가 엄마의 말소리를 가로막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보청기가 보내는 신호는 조용할수록 잘 전달된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을 가다듬고 말소리를 낮춘다. 톤이 낮아지니 맵시도 달라진다. 고요한 숲에 떠도는 새소리처럼 맑고도 청량하다. 엄마의 귓속에서도 고요 속 외침이 시작된다.
화면 안에서 말이 전해진다. 이때 전해지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입모양이다. 말을 전하는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려고 애쓰다 보니 입이 천천히 움직인다. 입술로 말의 모양을 정확하게 잡아간다. 하지만 엄마는 입모양만으로 알아맞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보청기가 전해주는 큰 목소리만 듣는다. 우여곡절 끝에 건너간 말이 마지막 사람에게 와서 아귀가 들어맞았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박수갈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