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를 점안(봉안)하며
불화는 눈에 보이는 부처님입니다. 본디 불교는 붓다를 상으로 만들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겨 오랫동안 금지해왔습니다. 초기 불탑의 부조들을 살퍼보면 붓다의 자리는 금강좌 또는 보리수로 표현돼있습니다. 처음 간다라 지방에서 그리스계 인도인들이 불상을 조성했을 때 불상이라 칭하지 못하고 보살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의 칭호입니다. 붓다께서 바카리 비구에게 ‘다르마를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다르마를 본다. 장차 소멸할 육신을 보아 예배해 무엇 하겠느냐?’ 하시며 마지막 예배를 소원하는 바카리에게 나의 몸을 보고 예배하지 말라며 붓다 육신에 예배함을 금지하셨습니다. 붓다께 예배함은 다르마 붓다에 예배함이지 육신 붓다에 예배함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 불화가 출현한 것은 다르마 붓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고통 받는 중생의 염원입니다. 붓다께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함이다. 이 땅에 고통 받는 중생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셨으니 불상, 불화에 현실의 고통을 위무 받으려는 고통 받는 중생의 간절한 열망은 붓다께서 이 땅에 오신 뜻에 부합됩니다. 보리도량에 불상을 조성해 모시고 다시 불화를 그려 모심도 붓다의 위신력으로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길 원하는 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리도량의 불화는 한 중생이라도 붓다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고 더 이상 구원할 사람이 없는 날까지 고통 받는 중생과 함께할 것입니다. 삥기야 비구는 당신은 왜 붓다와 함께 있지 않고, 여기에 홀로 있느냐는 바웃또하의 물음에 나는 언제나 그분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답하셨습니다. 붓다는 나와 함께 하는 분입니다. 붓다는 어디서나 나와 함께해 계십니다. 단지 중생이 붓다께서 함께 함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입니다. 붓다께서 너희가 힘들고 고통 받을 때, 나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붓다의 구원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며, 나와 함께하는 붓다를 만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축복의 소식입니다. 붓다께서 탄생게에서 ‘신의 세계에서나 인간의 세계에서 나 홀로 존귀하니 고통 받는 중생을 내가 구원해 편안케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탄생게는 한 중생이라도 고통 받는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붓다의 구원도 끝나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붓다 구원의 말씀을 믿는 것이 불교입니다. 붓다 구원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불교도(바웃또하)입니다. 붓다께서 ‘어떤 사람이 나의 옷자락을 잡고 그림자를 밟는다 하더라도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나와 천리를 떨어져 있다 하여도 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 사람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다.’하셨습니다. 청명에 구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붓다의 구원을 불신하고 원망하지 않으면 한식에는 이뤄집니다. 한식에 구원이 이뤄져도 되건만 청명에 이뤄지지 않을까 조바심치지 않는다면 구원은 이뤄집니다. 도리어 중생의조바심이 구원을 멀어지게 합니다. 일상다반사에서 수행기도하면 구원받습니다. - 우 빤냐 혜천 불기 2562년(2018) 9월 12일 보리도량 불화 봉안식 안내: 불기2562년(2018) 10월 14일 오전 10시 30분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보리도량
http://cafe.daum.net/bodydhamma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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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ㅡ()ㅡ
모처럼 혜천스님 가르침을 대했습니다.
법문이 반갑고 감동적입니다.
불화는 역시 흥천사에 모셔지는 모양입니다.
흥천사 위치 주소 등을 알면 좋겠습니다_()_
흥천사가 아닌
대한불교 테라와다 승단의 보리도량으로
- 주소지 : 춘천시 동면 장학리 144-33 새로운 도량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