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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1735-1762)의 릉이 융릉, 정조대왕(1752-1800)의 릉이 건릉입니다.
수원화성에서 20여분 거리의 화산(花山)에 있습니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원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병원 뒤 배봉산에 묻혀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릉입니다.
풍수에 밝았던 정조대왕이 직접 잡은 자리이지요.
정조대왕은 풍수가 후손들의 화와 복을 가져온다는 화복설(禍福設)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조대왕은 묘소 이전을 결심하고 그에 대해 수백, 수천 번도 더 생각했고 명당들도 미리 조사를 해놓았습니다.
조선의 최고풍수가들은 여러 곳을 추천했지만 임금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정조대왕이 이장지로 점찍은 곳은 수원의 용복면 화산(花山)이었습니다.
그곳을 살펴본 지관들의 말은 한결같았습니다.
“지극히 길하고 모든 것이 완전한 묏자리입니다.”
경기도 이천 세종의 영릉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길지로 꼽히는 곳입니다.
용복면(龍伏面)이라는 지명도 용이 엎드린 곳이란 뜻입니다.
정조대왕도 아버지 옆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수원은 정조대왕의 도시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입장료 천원.
561년 조선역사에서 조선왕릉은 예법에따른 일정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1. 도성 10리 밖, 100리 이내.
교통과 통신이 열악했던 그 시기, 임금의 능행길에 갑작스런 변고가 생기면 즉시 환궁할 수 있는 조치입니다.
2. 배산임수.
조상들은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곳을 선호했습니다.
3. 상설제도.
세종 때 집대성한 오례의(五禮儀)에 따랐습니다.
4. 자연주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 능침 아래 언덕을 각(角)을 주어 깎지 않고 완만한 곡선으로 단장했습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황제릉과 왕릉이 있습니다.
능역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소나무를 송(松)이라 하는 것도 나무(木)에 귀할 공(公)을 써서 최고의 나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소나무 숲을 지나면 속계와 영계를 가르는 금천교가 있습니다.
다음은 홍살문, 신성한 곳이니 잡귀는 범접하지 말라는 문입니다.
홍살문 오른쪽에 네모 형태로 돌을 깔아 놓은 배위(拜位)는, 참배온 임금이 능으로 가기 전 네번 절하는 곳입니다.
홍살문에서 똑바로 깔린 길이 참도(參道)인데, 왼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입니다.
참도 끝에 정자각(丁字閣)은 정(丁)자형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입니다.
홍살문과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왼쪽에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과, 오른쪽에 릉을 지키는 참봉이 거주하는 수복방이 있습니다.
정자각 뒤 왼쪽에 축문을 태우는 예감, 오른쪽에는 제향을 마친 제관이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신석과 왕의 행적을 적은 비각이 있습니다.
능 구역에는 뒤에 쌓은 작은 담인 곡장이 있고,
봉분 뒤쪽 주변에는 석호(호랑이 모양), 석양(양 모양)이 네 개씩 있습니다.
봉분을 둘러싼 돌이 병풍석이고, 그 주변을 한 번 더 둘러싼 돌이 난간석입니다.
봉분 앞에 있는 네모형태의 돌이 혼유석으로 왕의 혼이 놀다가 들어간다는 곳이고,
혼유석 앞의 석등이 장명등입니다.
그 좌우에 서 있는 돌이 망주석입니다.
그 앞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습니다.
문인석, 무인석 뒤나 옆에 말모양의 돌이 석마입니다.
왕릉은 단릉과 쌍릉, 합장릉과 삼연릉(세개의 봉분, 景陵, 헌종과 왕비, 후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왕릉은 위압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고 편안한 자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서가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융릉과 건릉을 가리키는 표지판.
융릉으로 가는 길의 숲.
가족단위의 나들이 객이 많았습니다.
비운의 사도세자 묘 융릉(隆陵)
조선 국왕 27명 가운데 최장기 52년을 집권했던 영조(1724-1776)는
숙종(1674-1720)이 후궁 침소를 찾았다가 본 후궁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에 반해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보수 노론 세력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1720-1724)을 4년 만에 독살하고 자신들의 편인 영조를 즉위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론은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장희빈을 죽이는데 가담했기에 경종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조는 태생적으로 노론에 빚을 지고 있었고 노론 일색으로 정권을 꾸렸습니다.
영조는 왕비 2명과 후궁 4명에게 아들 둘을 얻었는데,
첫째 아들은 어려서 죽고(효장세자) 둘째 아들을 세자로 삼아 사도세자라 했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홍씨 집안과 결혼시켰습니다.
장인 홍봉한과 그 동생 홍인한은 골수 노론이었습니다.
1759년 66세의 영조는 2년 전에 사망한 왕비의 뒤를 이어 15살 정순왕후 경주김씨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오빠 김귀주, 사촌 오빠 김관주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노론 유생이었지만,
단번에 정계의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군주가 약하고 신하가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습니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개국했고, 왕은 자신들의 대표라는 것이지요.
대신들이 정한 결정을 왕이 뒤집기는 어려웠습니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당론에 따라 왕을 바꿀 수도 있었습니다.
세조의 쿠데타(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과 같이 쿠데타로 왕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새로운 왕을 세우거나,
조용히 왕을 독살시키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습니다.
7명의 국왕이 쿠데타나 독살 또는 독살추정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세력의 비호아래 52년을 재위하면서 비교적 강한 왕권을 누린 왕이었습니다.
왕과 지배층은 ‘국가개혁, 백성보호’라는 기본적 통치철학을 말로만 하고 잊기 쉬웠습니다.
관리들이 말하는 ‘부국강병’은 탁상공론에 불과했고 성리학은 실천 없는 말뿐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자기 가문의 권세를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나라가 약해빠지든, 백성이 굶주리든 그것은 안중에 없었지요.
그런 결과가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이었지만, 이후에도 지배층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1735-1762)는 영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자는 왕으로 적당히 권세를 누리다가 가는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전 국왕들과는 달리 세자는 점점 힘을 잃어가는 국가의 안위를 생각할 줄 알았고, 점점 핍박해지는 백성들의 처지를 볼 줄 알았습니다.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 이것이 사도세자가 꿈꾼 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노론을 중용하는 아버지 영조의 국정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세자는 노론을 국가와 백성의 안위보다 자기 가문의 영화를 유지하는 무리로 보았습니다.
장차 자기가 집권하면 이것을 개혁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생각은 아버지 영조와 집권 노론세력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결국 오랜 대립 끝에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와 같은 노론 중진들과 김한구, 김귀주 부자와 같은 정순왕후의 가문, 홍봉한, 홍인한 형제와 같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가문의 협공으로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28세.
1762년 5월 13일(음력) 운명의 날, 영조는 창덕궁 휘녕전(徽寧殿)으로 사도세자를 불렀습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세손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담담히 의관을 차려입으면서 혜경궁 홍씨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揮項, 조선시대 남자의 방한모)을 가져오라.”
부인 혜경궁 홍씨가 말을 받았습니다.
“그 휘항은 작으니 본래의 휘항을 쓰소서.”
홍씨가 세자의 휘항을 건네자 세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서
세손 휘항을 내게 안 씌우려 하니 내가 그 심술을 알겠네.”
세자는 혜경궁이 자신을 버렸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아들을 죽이는 것이 자신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휘녕전에 세자가 나타나자 영조는 칼을 주면서 자결을 명했지만 세자가 거부했습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뒤주를 가져와 가두어 죽이기를 청했고, 결국 세자는 좁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절명했습니다.
세자가 절명하는 날 장인 홍봉한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11살이었던 세손(훗날 정조)는 영조 앞에 엎드려 절규했습니다. “아비를 살려주소서...”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자기가문을 위해 이를 도왔습니다.
노론세력의 국가기록은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몰았고 죽음을 정당화했습니다.
정순왕후 오빠 김귀주의 상소,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것은 모든 신하가 ‘해와 달처럼’ 흠앙하는 대처분이옵니다!”
융릉에서 건릉 가는 길.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건릉(健陵).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세손도 죽이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1776년 결국 즉위에 성공했습니다.
즉위도 끝까지 방해했고,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즉위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정조 주변은 온통 적들뿐이었습니다.
지뢰밭을 가는 듯, 살 떨리는 아슬아슬한 국면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영조는 죽기 전 세손에게 유훈을 남겼습니다.
“사도세자의 일을 거론하지 마라. 그 일을 거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려라!”
정조는 모순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판정하면 영조가 잘못된 임금이고,
영조가 올바른 처분을 했다고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복수, 국가개혁’ 이 두 가지가 정조의 뜻이었지만 섣부른 처신은 곧 죽음이었지요.
시간이 필요했고, 노론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후 재위 24년은 정조의 정치력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정조는 먼저 아버지의 복수를 ‘즉위방해죄’라는 다른 명분으로 갚았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나 즉위방해 세력은 결국 같은 노론이었지요.
즉위방해죄는 분명한 명분이었기에 노론에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즉위방해죄로 아버지의 원수를 일부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즉위 다음 해인 1777년, 제거기회를 엿보던 노론은 자객을 보내 정조를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왕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자객 전흥문은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정조 침실로 들어가 살해하고자 했지만,
밤늦게 독서하는 것이 습관이었던 정조가 알아차림으로써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국왕 살해기도 사건으로 배후의 노론 세력이 다시 제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들 일부가 또 다른 명분으로 제거되었지요.
그 후에도 두 차례 쿠데타기도(1784년 문인방 이경래 역모사건, 1785년 이율 홍복영 역모사건)를 정조는 천운으로 넘겼습니다.
노론에게 정조는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원수들이 제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원수의 뿌리는 깊고도 깊었습니다.
법적인 할머니 정순왕후 김씨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그 원수의 뿌리였지요.
두 사람이 궁중에 있는 한 뿌리는 발본색원되기 어려웠습니다.
정조는 평생 이런 한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정순왕후가 주도해 훗날 정조를 독살하게 된 것이 정조의 운명이었습니다.(유력한 추정)
국가개혁
즉위방해와 암살기도 명분으로 아버지의 복수를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고 판단한 정조는 국가개혁에 나섰습니다.
우선, 계속된 암살위기에서 노론 일색의 군부를 대신하는 임금 친위부대인 장용위(훗날 장용영)을 창설했습니다.
장용영은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가 되었습니다.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백동수가 장용영의 무사였지요.
그리고, 규장각이라는 기관을 세워 신진 학자들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정약용과 같은 불세출의 학자가 나왔습니다.
점점 신진학자들이 커가자 정조는 자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재위 13년(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수원을 신도시로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원화성에는 정조의 국가개혁 꿈이 담겨있습니다.
성은 평산성(平山城)으로 계획되어 도성 안에 백성이 살고 왕의 행궁이 있는 형태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모든 노역에 임금을 지불했고, 그 모든 기금을 왕실비용을 아껴 모은 내탕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성축조는 늘 국가부역으로 백성을 강제동원 했는데, 임금노동으로 성을 축조한 것은 수원화성이 처음이었습니다.
수원성은 총괄 채제공, 현장건축소장 조심태, 설계 정약용으로 완공되었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정조가 기획한 화성은 평산성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품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솜씨가 참 대단하지요.
농업혁명
정조는 화성 옆을 흐르는 진목천을 막아 큰 저수지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해 거대한 농토를 조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조가 오랜 동안 꿈 꾼 ‘농업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저수지가 만석거였고, 농토가 대유둔이었습니다.
정조는 대유둔의 2/3는 수원성을 지키는 장용영의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수원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따로 국방비를 들이지 않고도 강군을 육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었습니다.
가뭄이 들면 농사를 포기해야 했던 백성들에게 만석거의 물을 이용하는 영농방법은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생산물의 반은 경작자가 갖고 나머지 반은 수성고(脩城庫)에 넣어 화성의 보수와 관리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대유둔에서 나온 비용만 가지고도 화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장용영 병사들에게 있어 군역은 무조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상업혁명
먼저 정조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독점하던 '금난전권'을 폐지했습니다.
금난전권은 상인명부에 등록한 시전상인들이 특별세를 내는 대신 쌀, 소금, 옷감, 생선 등 주요 생필품을 독점하던 권한이었습니다.
이것은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습니다.
일반 상인들은 한성 시전상인들에 막혀 수도권에서는 물건을 팔수가 없었습니다.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무기로 물가를 마음대로 조절해 거부가 되었고,
그 일부를 유력 벼슬아치들에게 뇌물로 바쳐 특권을 유지하는 정경유착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시행한 금난전권은 점점 조선의 상업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정조는 여섯 가지 품목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모든 물품에 대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명했습니다.
이것이 조선 상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신해통공(辛亥通共)이었습니다.
신해통공이 반포되자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며칠 만에 생필품 가격이 크게 내렸습니다.
노론 벌열들의 충격은 컸습니다.
당장 신해통공을 폐지하고 금난전권을 부활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뜻은 확고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상업은 발전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소수의 특권이 무너지자 다수가 만족하는 상황이 실현된 것입니다.
개혁군주의 역량이 국가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이어 정조는 화성 안 중심지에 인위적으로 십자가로(十字架路)를 조성했습니다.
상인들에게 1천 냥을 무이자로 빌려주고 3년 내 갚는다는 조건으로 상인들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화성의 십자로에 수많은 상점들이 들어서서 흥성거렸습니다.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요지인 화성의 십자로에서 시작된 상업혁명은 삼남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화성은 조선 후기 상업혁명을 선도하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정치개혁
정조는 오랫동안 노론 일당으로 일관된 조정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정조는 그 대안으로 남인을 주목했고, 남인 학자들을 키웠습니다.
보수적인 노론, 개혁적인 남인, 중도의 소론...
하지만 남인등용의 가장 큰 걸림돌이 천주교였습니다.
오직 성리학에만 매몰되어 말장난 수준에만 머물러 있던 노론에 반발해,
남인들은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성리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리학을 근거로 자신들의 권력유지만을 생각하던 노론에 비해,
남인은 양반과 평민이라는 신분, 남녀불평등, 병역, 세금제도 등 잘못된 국가시스템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노론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안 본 책이 없다고 할 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조의 시야도 넓었습니다.
정조는 천주교를 서양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했고,
무엇보다도 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해 최소한의 제한에 그쳤습니다.
벌떼 같은 노론의 천주교공격에 정조는 기막힌 방법으로 그 예봉을 피해갔습니다.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남인 인재들이 점점 국정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국가개혁의 원대한 꿈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성군(聖君) 정조
정조는 성군(聖君)이라 이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군주였습니다.
“나는 별다른 장점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품성이 그리 나태하지는 않아 공부에 유의하기를 상당히 좋아했다...”
“예로부터 궁중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일들이 꽤 있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관이나 궁녀들과 수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조용히 앉아 책을 보는 그 맛이 매우 깊다.”
정조는 즉위 당시 만 24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정조는 매일 밤 하루의 일과를 점검하고 반성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일하는 데 정성을 다했는가? 벗들과 사귀는 데 신의를 다 했는가? 배운 가르침을 실천했는가?”
“제왕에게는 사(私)가 없다. 신하는 혹 휴가라도 내지만 나는 일찍이 잠시도 쉬어 보지 못했다.”
정조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고 실천했습니다.
정조는 비단옷도 사양했습니다.
"나는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옷은 모시와 목면에 지나지 않고, 음식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화려한 옷을 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사치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정조는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서 입었습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 새 옷만을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습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식사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반찬이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다 그릇은 모두 흠이 있거나 일그러진 것뿐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정조의 의식주가 자신들보다 못한 사실을 여러 차례 목도하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정조는 모든 잡기도 멀리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기예(技藝)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 바둑도 잘 두지 못한다.”
정조는 여색 또한 멀리했습니다.
"나는 본래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 정사를 하는 여가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독서뿐이다."
정조에게 여색은 후사를 낳기 위한 방도일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시간을 학문에 몰두했고, 이런 노력을 통해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으로 자리 잡아 갔던 것입니다.
1800년 6월 28일, 국가개혁의 꿈이 무르익어가던 때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48세.
등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올린 탕약이 문제였습니다.
임종 직전에는 정조의 철천지원수 정순왕후가 혼자 있었습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즉시 노론으로 정권을 갈아치우고 대대적인 남인 토벌을 시행했습니다.
1801년 1월 신유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인을 천주교 덫을 씌워 절멸시킨 것입니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습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1811년 홍경래의 민란을 시작으로 민란이 빈발했습니다.
진주민란, 동학혁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조선 전체의 멸망이었습니다.
한 개혁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입니다.
정순왕후(1745-1805)는 1804년 섭정을 거두고 180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조(1800-1834)가 1804년에 성년이 되면서 더 이상 섭정은 불가능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정조가 몇 년 만 더 살고, 순조에게 왕위가 이어졌다면 신유박해도 없었을 것이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같은 남인이 주요 요직에 등용되어 조선의 개혁을 주도했을 것입니다.
천주교도 큰 박해 없이 정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순조가 친정을 했을 때 조정은 이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가문이 장악해 세도정치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정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1863년 대원군(1820-1898)이 등장할 때까지 대를 이어 50여 년 동안 권세를 누렸습니다.
노론의 세도정치에 눌려 순조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에 사대하던 노론은 일본에 나라를 바치고 친일로 권력과 재산을 유지했습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은 친미로 돌아서 오늘까지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카이사르(BC 100-BC 44)가 터를 다지고 이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집권 41년 동안(BC 27-AD 14) 토대를 놓은 로마제국이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AD 180년 사망) 200년 동안 ‘PAX ROMANA(로마의 평화)’,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이어갔지만, 정조 24년 치세의 국가개혁이 단명으로 끝나고 만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정조를 몇 년 더 살게 하시지 못했을까...
돌아나오는 길의 진달래꽃.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과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성 아오스딩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깊이 생각해볼 말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