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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척이라면 1m80㎝ 정도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대구교도소만 해도 민간인 출입이 가능한 외정문과 수용소 내부로 통하는 (내)정문이 있는데, 이 담장의 높이는 각각 2.5m와 5m다. 그래서 교도관들은 이를 '19척 담장'이라 부른다. 6척이든 19척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교도소 담장은 안과 밖의 세상을 경계 짓는 딱 그만큼의 높이다. 대구교도소(달서구 화원읍)가 올해로 개소 100주년을 맞는다. 대구교도소의 역사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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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대구교도소 내부(사진 위)와 정문. |
◆경상감영 감옥에서 대구교도소까지
대구교도소의 기원은 1908년 '대구감옥(大邱監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을사늑약(1905년)이 맺어지고 국권을 빼앗긴 지 3년 만이다. 대구감옥은 경상감영 내에 문을 열었다.
대구감옥의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제대로 된 감옥시설을 갖춘 곳은 경성감옥이 유일하고 대구감옥은 감방 3개에 온돌도 없었다. 대구교도소 송석근 교감은 "감방이 너무 좁아 수감자가 교대로 잠을 잤을 정도"라고 전했다.
대구감옥은 1921년 중구 삼덕동(현 경북대 치대와 일신학원 사이)으로 자리를 옮긴다. 1923년에는 '대구형무소'로 개칭된다. 한국전쟁은 대구형무소에도 시련이었다. 6·25 당시 전국의 행형 시설이 파괴되자 대구형무소에는 전국의 재소자와 간수들이 밀려들었다.
대구형무소는 1961년 5·16 군사 혁명을 계기로 대구교도소로 이름을 바꾼다. 삼덕동 시절 대구교도소는 빨간 벽돌 담장으로 유명했다. "5·16이 있고 나서 담장색이 흰색으로 바뀌었어요. 안에는 일본식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회기강이 엄하던 터라 교도소는 범접하기 힘든 곳이었어요." (대구 교정 동우회원인 여광석씨)
대구교도소가 현재의 위치인 달성군 화원읍으로 옮긴 것은 1971년 6월이다. 50년간 역사의 격동기를 헤쳐왔던 삼덕동 형무소는 이후 주택가로 변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한때 전국 최대 교도소
대구교도소는 공안사범과 2범 이상 누범자 등을 가둬두는 중구금 교도소로 분류된다. 살인·강간범, 누범, 거물급 조직폭력배 등이 현재도 이곳에 있으며 비리 정치인·공무원들도 거쳐 갔다.
대구교도소는 한때 국내에서 서울구치소 다음으로 큰 행형시설이었다. 대구교도소장을 지낸 정상문씨는 "한때 수용 재소자가 4천500명에 달했다. 기관 서열로는 서울구치소 다음이었고 당시 대구교도소장직은 영전 자리였다"고 말했다. 현재 대구교도소의 재소자 인원은 2천여명이다.
정씨는 "대구 50사단 내에 삼청교육대가 있었다. 당시에 교도소 재소자들도 '삼청교육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삼청교육대가 생기면서 "이렇게 좋은 교육을 죄수들도 당연히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상부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대구교도소에는 현재도 중범수가 많다. 영화 '홀리데이'의 소재가 됐던 '지강헌 탈주사건(1988년)'때 지강헌과 함께 탈주했던 3명이 아직도 남은 형기를 여기서 살고 있다. 사형수도 8명이 머물고 있다. 한때 죄수들의 두려움의 대상이던 청송교도소도 대구교도소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교도관들은 입을 모았다.
(구)대구교도소앞에서 원불교대구강북교구천도재 봉행
백비미디어투쟁단 정재권대표
대구민간인학살의산증인 강창덕선생의 회고
백비민간인학살지 3차지역 대구(구)형무소앞에서 숙연하게 천도재봉행을 집전하는 참석유족들
○ 한국전쟁전후 대구 민간인학살사건
<전쟁 전 정치적 학살>
1946년 ‘10월항쟁’으로 잘 알려진 대구에서는 1948년 5월 11일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5․10선거 전후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식량배급 등에 관해 이야기하던 주민 10여 명이 습격을 당했으며 이중 3명이 총살당했다.
여순사건 이후 대구에 주둔하던 6연대 군인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 사이에 3차에 걸쳐 발생한 ‘대구 6연대사건’이 진압되면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팔공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산호(山虎)부대, 백골부대, 녹귀(綠鬼)부대’라는 국군이 주둔하면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형무소사건>
전쟁 전 대구에는 당시 경북경찰국, 대구경찰서, 남대구경찰서, 대구경찰국 특경대가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대구형무소에 3사단 22연대 소속의 헌병대원 20여 명이 주둔했다.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대구와 경산 등 인근지역에서 대구형무소로 연행된 주민들이 이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대구형무소 재소자 1,438명과 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7월 3일~9일, 7월 27일~31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3사단 22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주로 경산 코발트광산과 칠곡 신동재, 달성군 가창골짜기, 대구시 본리동에서 희생되었다.
한편,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대구지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주로 경산 폐 코발트광산과 달성군 가창골에서 희생되었으며, 이외에 수성구 수성 못 인근 야산, 본리동, 송현동, 팔공산, 논공읍 남리 석밭 등에서도 희생되었음이 확인된다.
전쟁 발발 후 대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들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이었다.
대구형무소는 2,000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49년 8월 재소자 수는 4,397명이었다. 절반 이상이 좌익수였고 대부분이 국가보안법위반자들이었다. 무기수와 15년형 이상의 장기수도 많았다. 「재소자인원일표」에 따르면, 1950년 6월 재소자 수는 기결수 1,397명, 형사피고인 2,315명, 피의자 52명으로 모두 3,889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전쟁 직후에는 대구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까지 합치면 8,0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구에는 대구고등법원이 있어 전국의 죄수들이 항소를 위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여순사건 관련자와 제주도 주민들도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장기수였다고 한다. 한편, 동인동에 CIC 사무실이 있었고 CIC대원들이 지서별로 한 사람씩 파견되어 있었으며 섬유회관 맞은편에는 G2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CIC 대구파견대 사무실이 대구 소재 이비시아 백화점에 있었고, 육군본부 CIC 사무실이 대구 동성로에 있었다. 개전직후 형무소에 헌병대가 주둔했다. 헌병대는 형무소 안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2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구육군형무소라고 불렸으며, 대구지구 헌병대가 형무소를 통제하며 형무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리했다. 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안에 공장과 교회당을 모두 비워 사람들을 수용했다.
학살은 1950년 7월 3일부터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시작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학살은 크게 두 차례에 집중되어 저질러졌는데, 1차시기는 7월 3일부터 9일, 2차시기는 7월 27일부터 31일까지였다. 1차시기 사건에 대하여 「재소자인명부」(1950)에는 7월 3일부터 9일까지 모두 242명이 ‘군 헌병대에 인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중 211명이 7월 7일에 인도된 것으로 보아 이날 학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차시기에는 인민군의 대구 접근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진주 이감’한다며 다시 군 헌병대에 인계하여 학살했다. 위 「재소자인명부」(1950)에 따르면, 이 시기에 모두 1,196명이 ‘군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박씨(박용득)의 증언을 통해 당시 재소자 300여 명을 트럭 5~6대에 태우고 대한청년단 등의 도움을 받아 칠곡군 신동재에서 재소자들을 총살한 사실과 이후 경산코발트광산에서도 재소자들을 총살한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총살은 대구형무소에 파견되었던 22연대 직할 헌병대원들이 저질렀는데, 형무관들이 재소자들을 데리고 오면 헌병들이 형무소 마당에 있던 트럭에 재소자들의 손을 뒤로 묶어 태웠고, 한 대의 트럭에 헌병 4-5명이 탔다. 형무소 근무자들은 사건 후 가족들이 면회를 오면 ‘진주로 이송되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진주형무소를 다녀온 가족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고 한다.
첫댓글 원한서린 대구옛 교도소가 개발된다하니 허탈한 마음 금할수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잡혀들어와 교고소에서 조국을 원망하며
학살현장으로 끌려가 처참하게 당하였으니 무슨말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대구형무소담장을바라보며 처형을기다리던 죄없는 수형자들은 무슨생각을 하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