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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5. 최종회);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4)
(201) ‘금고’ 깃발[金鼓旗]
조선시대 軍旗의 하나로 군대에서 명령을 내릴 때의 信號로 북이나 징 등을 치던 吹打隊를
인도하는 군기이며, 坐作進退(부르거나 앉고 일어서기, 걷고 서기)를 지휘하던 旗로,
황색 雲紋大緞 바탕에 가장자리의 화염은 적색, 한가운데 ‘金鼓’란 글자는 흑색이다.
*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조선시대에는 깃발, 북, 징 등은 중요한 명령전달수단이었으며,
지휘관을 상징하는 깃발, 각급부대 장수와 병사의 계급과 소속을 식별하기 위한 깃발,
하급부대에 명령을 하달하기 위한 깃발, 方位를 비롯한 각종 신호깃발 등이 있었다.
(202) 갑옷[豆釘甲]
조선시대의 대표적은 武將服으로 겉면에는 징을 박고, 안감에는 鐵片을 덧대 전투시에
몸을 防護할 수 있도록 했으며 허리의 양쪽 면을 무릎까지 터서 활동을 편하게 하였다.
(203) 사각 방패[胸 方牌] (*牌: 패 패)
화살을 막기 위하여 사용하던 방패로 조선후기의 兵書 <戎垣必備>에
소개된 長牌와 비슷하나 길이가 짧고 뒷면에 손잡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兵士가 휴대하여 몸을 가릴 수 있는 ‘胸 方牌’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204) 조선의 화살
(205) 조선왕조의 활 쏘기 儀式
(206) 어사례도(御射禮圖)
(207) 허리에 차는 칼[佩刀] (*佩: 찰 패)
패검은 環刀라고도 하며 雲劍도 국왕을 호위하던 신하가 차던 검이므로, 결국 環刀는
佩用하는 刀劍類를 폭넓게 가리키던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환도는 軍事用뿐만 아니라 儀仗用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왕실이나 중앙 조정에서 사용된
환도는 軍器監에 소속된 環刀匠들이 만들고 병사들의 무기로 쓰이는 환도는 각 지방에서
貢納으로 제작되었다.
(208) 사인 참사검(四寅 斬邪劍)-삼인검(三寅劍)
=四寅 斬邪劍: 刀劍은 邪惡한 기운을 끊고 災殃을 막는 도구로 인식되어
왔으며, 호랑이를 뜻하는 ‘寅’字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
寅年, 寅月, 寅日, 寅時(03:00~05:00) 이 네 가지가 모두 적용되는
시기에 제작된 칼을 ‘四寅劍(四寅斬邪劍)’이라고 해서 으뜸으로 여겼다.
劍身 한쪽에는 ‘四寅 斬邪劍’이라고 銀入絲技法으로 銘文하고,
다른 쪽에는 北斗七星의 별자리를 金入絲하였다.
=三寅劍; 僻邪用으로 寅年, 寅月, 寅日, 寅時 중에서 세가지 ‘寅’의 조건을
갖추어 만든 검이다.
*劍과 刀의 차이점
=劍: 양쪽에 날이 있고 끝이 뾰족한 칼로 주로 찌르는 기능을 가진 칼.
=刀: 한쪽에만 날이 있어 베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는 칼.
(209) 大韓帝國과 皇室
(210) 환구단 의궤(圜丘壇 儀軌), 환구단의 祭天儀式 행사내용을 정리한 기록.
*圜丘壇 -사적 제157호-
환구단은 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祭天壇으로, 명칭의 漢字 표기와 讀音을
환구단(圜丘壇), 원구단(圜丘壇/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한자표기는
<高宗實錄>에 기록된 ‘圜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高宗이 제사를 지낸 1897년 10월 당시
<독립신문>을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祭天儀禮의 시작은 고려 成宗 때부터라고 전해지며, 조선 世祖 때 王權强化를 위해
圜丘祭를 다시 부활시켰으나, 세조 10년에 폐지되어 조선을 大韓帝國으로 선포하고 高宗이
皇帝로 즉위하여 천자가 祭天儀式을 奉行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高宗 34년(1897)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南別宮 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한 團地이며 1899년 화강암으로 된 基壇 위에
3층 8각 지붕의 皇穹宇를 축조하고 神位版을 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황궁우 옆에 세운 石鼓壇이 石鼓 몸체에 부각된 용 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穹: 하늘 궁)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日帝에 의해 철거되고 이듬해 철도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 있다.
(211) 고종황제 영정(高宗皇帝 影幀)
高宗이 絳紗袍를 입은 全身 坐像으로 얼굴은 정면을 보고 있고,
배경을 揮帳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며 발 아래에도 花紋席 대신
휘장과 비슷한 무늬의 천으로 깔았다. (*絳: 진홍 강 *紗: 비단 사)
(212)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롱 포드의 <한국 이야기>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 1888년 의사로 한국에 도착한 이후 御醫로 활약한
L.H 언더우드 女史(미국 뉴욕주 출신)는 조선의 첫 인상부터 직접 목격한 궁중생활과
宮中 裏面史, 關西·關北地方 여행, 初代 교회의 어려움, 甲申政變과 淸日戰爭,
乙未事變과 俄館播遷 등 격동의 舊韓末 모습을 폭넓게 기록하였다.
=롱 포드의 <한국 이야기>: 日本에서 외교관을 지낸 英國人 Joseph H. Longford가
한국의 역사를 古朝鮮부터 20세기까지 敍述한 歷史書로 漢陽, 平壤 등의 모습을
圖板으로 실어 당시 風俗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213) 파리만국박람회 記念銅錢-그림-博覽會場 地圖
1900년 파리 萬國 박람회는 지난 世紀를 기념하고 다음 세기를 향한 발전을 가속하자는
의미에서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이다.
(214) 근대 훈장제도, 팔괘장
=近代 勳章制度: 光武 4년(1900) 勳章條例(勅令)를 공포, 한국 최초로 훈장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처음에는 金尺大勳章(無等級), 李花大勳章(무등급), 太極章(8등급),
紫鷹章(8등급)의 4종이었으나, 그 후 八卦章(8등급)·瑞星大勳章(무등급),
瑞鳳章(8등급)이 추가되어 모두 7종류가 되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본의 훈장제도가
적용되었다.
=八卦章: 1901년 4월 추가로 제정∙반포된 훈장으로 勳等은 勳에 해당하고 太極章 아래에
있으며, 1등에서 8등까지의 등차를 두고 文∙武官 중에서 勳等에 따라 수여하였다.
(215) 궁내부 직원들의 인감을 모은 책-궁내부 관제
=宮內府 직원들의 印鑑을 모은 책: 隆熙 1년(1907) 宮內府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職名,
職級, 姓名을 기록하고 印鑑을 찍어 모아놓은 책으로 高宗 31년(1894) 甲午改革 이후
官制改革과 官文書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印鑑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궁내부 官制
*宮內府
조선 후기 王室 부속기관을 총괄하던 관청으로 高宗 31년(1894) 甲午改革을 단행한
朝廷은 近世王朝 최초의 勅令 제1호로 건국이래 500년을 이어온 통치기구를 개혁하여
庶政을 總括하는 議政府와 王室事務를 총괄하는 宮內府로 二元化하여 궁내부 대신을
의정부 총리대신 다음의 서열로 정하였다.
궁내부에는 대신·協辦(次官) 각 1명, 參議·主事 각 3명, 위원 5명을 두고, 承宣院을 비롯한
院·閣·司 등 15개 부속기관을 관장하였다.
(216) 英親王이 입은 軍服
(217) 순종황제 어차(純宗皇帝 御車) -등록문화재 제318호-
美國 GM社가 1918년에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으로 純宗皇帝(재위 1907 ~1910)가 주로
탔던 것으로 알려진 자동차이다.
문이 4개인 7인승 리무진으로 목재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해 진한 밤색을 띠며 황실 문장인
李花 문양의 金鍍金으로 곳곳을 장식하고, 내부는 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치장했으며
의자는 자유롭게 접거나 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배기량 5153cc, 8기통 V형엔진, 최고출력 31.25마력, 최대토크 24.9kg·m이며,
1997~2001년 복원 작업을 거쳐 2001년부터 昌德宮 御車庫에 보관·전시해오다가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1호 자동차는 高宗이 1903년 수입한 포드 A형 리무진이지만 러일전쟁 때 사라져
純宗과 純宗孝皇后의 御車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으며 또한
전 세계적으로 소수만 남아 있는 차종으로 그 稀少價値로 인해 자동차 역사상으로도
중요한 유물이다.
(218) 순종황후 어차(純宗皇后 御車) -등록문화재 제319호-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에 제작한 리무진으로 純宗 妃 純貞孝皇后가 주로 탔던 것으로
알려진 자동차이다.
목재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해 진한 밤색을 띠며 황실 문장인 李花 문양의 금도금으로 곳곳을
장식하였으며, 문이 4개인 7인승 리무진으로 純宗御車 보다는 조금 작아 배기량 3309cc,
4기통 I형엔진이 장착되었다.
1997~2001년 복원 작업을 거쳐 2001년부터 昌德宮 御車庫에 保管·展示해오다가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219) 조선시대 天文學
(220)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
(221) 목판본(木板本) 천상열차분야지도 -寫本-
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太祖 4년(1395) 고구려의 石刻 天文圖의
拓本을 가지고 만든 천문도로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는 고구려가
망할 당시인 서기 668년경 大同江에 빠뜨려 잃어 버렸으나 다행히도
700여 년 후 이 천문도의 탁본을 보관하고 있던 사람이 조선을 건국한
太祖 李成桂에게 獻納했다.
새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대단히 중하게 여겨 權近 이하 12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검은 돌에 그대로 새기도록 하고, ‘天象列次分野之圖’라고
했으며, 그 후 世宗 15년(1433) 그 돌의 뒷면에 형태를 약간 고쳐서
똑 같은 내용을 다시 새겼다.
이 천문도는 宣祖 4년(1571) 太祖 때 제작된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의
天文圖를 基底本으로 木板에 새겨 종이에 찍은 것으로 觀象監에서
여러 점을 제작하여 二品 이상의 文臣들에게 下賜한 것이다.
(222) 별자리 그림
별자리 그림은 4개의 圓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원인 內規는 항상
지평선 위에 나와있어 四季節 관측이 가능한 영역이다.
서로 엇갈려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은 天球北極을 중심으로 하는 원으로 지구의
赤道面을 하늘에 연장한 것이며 ‘天球赤道’ 또는 ‘赤道’라고 한다.
적도와 중심이 어긋나 있으며 같은 크기를 가진 원은 태양이 天球를 운행하는 경로로
이를 ‘黃道’라고 한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同心圓인 ‘外規’는 漢陽에서 觀測 가능한 남쪽 地平線에
올라 올 수 있는 한계의 별들의 領域을 의미하며 외규 밖에도 별은 있으나 漢陽에서는
관측할 수 없는 별들이다.
이 天文圖에 있는 모든 별들은 4개의 領域으로 나누어 지며 天球北極 중심에 있는 별들의
영역을 ‘紫微垣’이라고 하며 그 주위에 인접하여 ‘太微垣’과 ‘天市垣’이 있다. (*垣: 담 원)
그 밖의 영역을 방사선 형태로 28개 영역으로 나누어 ‘二十八宿(수)’라고 하며 이 별자리
전체를 지칭할 때는 ‘三垣二十八宿’라고 한다. 별자리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별의 수는 1,467개이며 295개의 별자리로 구성되었다.
(223) 우리 하늘, 우리 별자리
북극성-北斗七星-紫微垣-太微垣-天市垣-牽牛星과 織女星-奎宿-參宿-南斗六星-翼宿
(*宿: 별자리 수)
우리 先祖들은 하늘의 현상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地上世界의
모든 것을 별자리로 再現하였다.
北極星을 중심으로 별자리가 움직이듯 하늘의 王이 사는 궁궐인 紫微垣을 중심으로
왕이 大臣들과 國事를 살피는 정부기관을 상징하는 太微垣, 일반 백성들이 사는 天市垣으로
北極 주변을 세 개의 領域으로 구분하고, 그 바깥쪽을 28개의 별자리 영역으로 나누었다.
각각의 역할과 의미를 가지는 별자리의 움직임으로 나라의 吉凶을 예측하고,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렸다.
이에 비하여 西洋의 별자리는 별들의 위치에 따른 모양을 보고 동물이나 물건 또는
그리스 神話의 神과 英雄의 이름을 붙였다.
(224) 태조 때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국보 제228호-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은 直六面體의 돌에 天體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으로,
太祖 李成桂가 王朝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權近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에게
만들게 한 것이다. 고구려의 天文圖를 표본으로 그 誤差를 고쳐 완성하였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적혀 있다.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黃道와 南∙北極
가운데로 赤道를 나타내고,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7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 달, 五行星(水星, 金星, 土星, 火星, 木星)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節氣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石刻天文圖는 중국 南宋의 <淳祐天文圖>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지금은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알아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고구려 천문도의 원형을 짐작하게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225) 숙종 때 다시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보물 제837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별자리를 돌에 새겨 놓은 天文圖로 둥글게
그린 하늘 안에 1,467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천문도를 만들게 된
경위와 참여자 명단이 적혀 있다.
構圖上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태조 4년(1395)에 처음 만든 것과
같고, 설명문으로는 權近의 글이 실려있으며, 전체의 구성이 처음
새긴 것보다 더 좋고 당당하다.
1395년 처음 새긴 것은 표면이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肅宗 13년(1687)에 다시 새겨 놓은 것으로, 천문도를 제작하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은 <增補文獻備考>, <象緯考>와 <書雲觀志>에 잘 나타나 있다.
(226) 영조어필-천세력-선기옥형-지구의-평혼의
=揆政閣에 걸었던 英祖御筆: (전략) 七政(해, 달, 화성, 수성, 목성, 토성, 금성)의 움직임은
임금이 나랏일을 돌보는 것과 같아 우리 王朝 初에 欽敬閣을 세우고 簡儀로 天體를
관측했던 것도 이와 같으니 歷과 象, 璣衡 같은 것은 王政에 우선해야 하는데 昌德宮에
놓아 두었으니 애석하다.
다행히 이번 기회에 慶熙宮 興政堂의 동쪽, 崇陽門의 옛 回廊 3칸에 문과 창을 내고
璿璣玉衡을 보관하고 七政을 헤아린다는 뜻의 ‘揆政’이라 이름 지었다. (후략)
*璣衡: 天體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구. (*璣: 구슬 기)
=千歲曆: 正祖 6년(1782) 중국의 曆法을 참고하여 觀象監에서 만든 曆書.
=璿璣玉衡: 天體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天文時計의 구실을 했던 기구.
(*璿: 구슬 선 *璣: 구슬 기)
=地球儀 -보물 제883호- 복제, 원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崔漢綺가 제작한 것으로 10˚간격으로 經∙緯線이 있고, 北回歸線, 南回歸線,
黃道를 표시하였으며, 황도에는 夏至, 冬至 등 24절기가 새겨져 있다. (*綺: 비단 기)
느티나무를 파서 사발모양의 받침대를 만들고 靑銅으로 만든 360˚의 눈금을 새긴
둥근 고리를 받침 위에 붙였으며, 地球儀 자체를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서는 유일한
유물로서 가치가 크다.
=平渾儀: 둥근 黃銅板 앞뒤에 北半球와 南半球의 하늘에 나타난 별자리를 표현하여 절기와
계절의 변화를 측정했던 天文觀測器機이다.
판의 둘레에는 360도의 눈금과 十二支, 중요 별자리 이름, 24절기가 표시되어 있으며
원판 가운데의 地平板을 회전시켜 매일 보이는 하늘의 영역을 표시할 수 있다.
(227) 오목 해시계[仰釜日晷] -보물 제845호-
앙부일구는 世宗 16년(1434) 蔣英實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時計板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仰釜日晷’라고 하며,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時刻線, 季節線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晷: 그림자 구)
靑銅으로 몸통을 만들어 검게 칠하고 글자와 선을 銀象嵌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하여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遺物이다.
(228) 평면 해시계[地平日晷]
서양 해시계의 영향을 받아 高宗 18년(1881) 姜潤이 만든 해시계이다.
受影面이 水平의 평면을 이룬 해시계로 影針은 수영면에 수직이 되게 세워두기도 하고,
天球北極을 향하도록 세워두기도 한다.
(229) 동의보감(東醫寶鑑)
宣祖 29년(1596) 王命으로 內醫院에 編纂局을 두고 許浚 ·楊禮壽 등이 漢나라 때 體系化된
漢醫學을 중심으로 東方醫學의 總集成과 함께 民族醫學을 정립시키는 大役事에
착수하였으나 1년 후 丁酉再亂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許浚은 자신의 一生 事業으로
추진할 것을 결심하고 집념으로 저술에 임하였다.
實事求是의 學究 자세와 명민한 관찰력, 古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풍부한
臨床經驗을 살려 基本學理가 임상에 직결되기까지 일관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의술의 구체화를 이룩하였다.
그 결과 14년 후인 光海君 2년(1610) 25권의 방대한 韓醫書가 완성되어 <東醫寶鑑>이
광해군 5년(1613) 인쇄, 간행되었다.
동의보감은 內科에 관한 ‘內經篇’ 4권, 外科의 ‘外形篇’ 4권, 유행병·婦人科·소아과 등을
합한 ‘雜病篇’ 11권, 약물에 관한 ‘湯液篇’ 3권, 鍼灸篇 1권, 目次 편 2권 등 계 25권으로
편성되었다.
동의 보감은 199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國寶로 승격되었다.
東醫寶鑑(五臺山史庫本) -국보 제319-1호- 국립중앙도서관 所藏 .
東醫寶鑑(茂朱 赤裳山 史庫本) -국보 제319-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東醫寶鑑(太白山 史庫本) -국보 제319-3호-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
동의보감은 2009년 7월 醫學書籍으로는 처음으로 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30) 경혈을 나타내는 청동 인체상[靑銅 鍼經穴 人體像]-약을 가는 기구[藥碾]
=靑銅 鍼經穴 人體像: 全身에 經穴을 점으로 새겨 표시하고 氣血의
흐름을 線으로 나타내고 있는 청동 인체상은 宮中 內醫院에서
鍼灸를 공부하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鍼: 침 침 *灸: 뜸 구)
=藥碾: 韓方에서 약의 재료를 갈아 가루로 만드는 기구. (*碾: 맷돌 연)
(231) 놋쇠 자[鍮尺]와 천칭과 저울추[天秤∙錐] (*秤: 저울 칭 *錐: 송곳 추)
=놋쇠 자: 布帛尺-黃鍾尺-營造尺-周尺-四角基準尺
(232) 편주 의학입문 내∙외집(編註 醫學入門 內∙外集)
*醫學入門 -충북 유형문화재 제286호- 堤川 居住 개인 소장.
중국 明나라 李梴이 1575년에 지은 漢醫學 서적으로 內集 9책과 外集 10책으로 구성된
의학 입문서이다. (*梴: 길 천)
<의학입문>은 조선에 유입되어 醫員 선발을 위한 기본 과목으로 활용되었으며
30여 년 후 출간된 <東醫寶鑑>의 편찬에도 많이 인용되었다.
현재 제천시에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은 復刻本으로 책 서문에 萬曆 乙亥年 仲春의 上丁日의
刊記가 남아 있어 1575년에 작성한 것을 알 수 있어 조선 전기 이후의 活字 鑄造術과
組版術의 발달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233) 자격루(自擊漏)
自擊漏는 자동으로 時報를 알려주는 장치가 있는 물시계로 世宗 16년(1434) 王命으로
蔣英實 등이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세종 때 만든 것은 모두 없어졌으며 유일하게 德壽宮에 남아 있는 자격루(국보 제229호)는
장영실이 만든 것을 中宗 31년(1536)에 개량한 것으로 이 시계는 효종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표준시계로 쓰였다.
*昌慶宮 自擊漏 -국보 제229호-
물의 증가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시계로
사용하였으며, 世宗 16년(1434) 蔣英實이 정해진 시간에 鐘과 징∙북이 울리도록 한
물시계를 처음 제작하였으나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고, 中宗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靑銅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현재 중국 廣東에 남아 있는 明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나,
규모가 크고 만든 솜씨도 뛰어나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234) 측우대[昌德宮 測雨臺]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는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大理石 臺石으로 높이 30.3㎝, 가로 45.3cm, 세로 45.5㎝이며,
正祖 6년(1782) 6~7월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으며
測雨器는 6∙25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어 조선 氣象學史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英祖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으며,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黃銅測雨器는 錦營測雨器(보물 제561호)를 複製한 것이다.
*錦營 測雨器 -보물 제561호- 氣象廳 所藏.
빗물을 그릇에 받아 降雨量을 재는 측우기는 世宗 23년(1441)에 만든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憲宗 3년(1837)에 만든
측우기가 유일하다.
錦營 測雨器는 높이 31.5㎝, 지름 15.3㎝로 원통형의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周尺이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했다.
중앙의 두 마디 사이에는 6줄의 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원래 충남 公州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된 문화재로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235) 조선왕조의 궁중기록화(宮中記錄畵)
宮中記錄畵는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 차원에서 거행된 각종 의식과 행사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으로, 주요 내용은 宮中 宴饗, 耆老所, 과거시험과 放榜, 濬川, 冊封, 陵幸 등이며, 冠禮,
成均館 입학, 會講 등 왕세자와 관련된 의식도 있다.
19세기가 되면서 궁중기록화에는 병풍그림이 크게 유행하고 進饌․ 進宴과 陳賀禮로
주제가 한정되는 등 매우 형식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궁중기록화는 당시의 정치적
기류를 민감하게 반영한 그림을 示唆하는 부분이다.
宮中繪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궁중기록화는 궁중의 의례와 풍속,
미술문화를 탐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시대 圖畵書 畵員의
회화 세계와 채색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236) 매화도 자수 병풍(梅花圖 刺繡 屛風)
조선 말기 圖畵署 畵員 楊基薰이 매화도 병풍 그림을 그리고 宮中 繡房에 소속된 內人들이
刺繡로 수 놓여져 光武 10년(1906) 高宗에게 헌상됐다.
홍매와 백매의 흐드러진 꽃송이가 입체적인 이 10폭 자수 병풍 하단에는 題詩와 양기훈의
款署와 印章을 수놓았다. (*刺: 찌를 자 *繡: 수놓을 수)
(237) 궁중의 모란그림 병풍[牡丹圖 屛風]
모란을 그린 花卉畵로 비단 바탕에 設彩로 그린 8폭 병풍이다. (*卉: 풀 훼)
<愛蓮說>에 ‘모란은 꽃 중에서 부귀한 것(牡丹花之富貴者)’라 했고, <下黃私記>나
<北山集>에는 ‘모든 꽃의 왕(百花之王)’이라고 했듯이 모란은 예로부터 東洋人들 사이에서
富貴의 象徵으로 인식되었다.
이 작품은 화려한 모란꽃송이와 구멍 뚫린 怪石을 함께 그려 모란의 裝飾性과 상징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병풍이다.
(238) 일월오봉도 병풍(日月五峰圖 屛風)
일월오봉도로 꾸민 6폭 병풍으로 다른 일월오봉도 병풍에 비해 크기가 작아 면적이 작은
室內에 설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日月五峰圖: 日月崑崙圖, 日月圖, 日月五峰山圖라고도 한다.
해, 달과 중국 五岳) 중의 하나인 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崑崙山을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비교적 큰 규모로 宮闕의 御座 뒤, 임금의 초상인 御眞을 모신 眞殿이나 魂殿 등에도
비치되었다.
화면의 대부분을 점하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와 그 아래 소나무·폭포·파도, 상단 좌우에
해와 달을 배치하여 左右均衡을 갖춘 매우 圖式的인 그림이다.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발생이나 起源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明·淸時代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현재 중국이나 일본에 소수 남아 있는 작품은 한국과는 描寫와
채색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독특하게 발달하여 정교한 필치와 화려한 채색을 사용, 장중한 모습의
정형화된 그림으로 발전하였으며, 現存하는 것으로는 昌德宮 仁政殿·昌慶宮 明政殿·
景福宮 勤政殿·德壽宮 中和殿의 그림들이 대표적이다
(239) 한궁도 병풍(漢宮圖 屛風)
漢宮圖는 실제 있는 궁궐의 그림이 아니라 中國風의 異國的이고 화려한 건물들을 정밀하게
그린 그림이다.
우뚝 솟은 수많은 건물들이 처마를 맞대고 연이어 늘어서 있으며 건물들은 매우 精巧하고
세부적으로 표현하였으나 건물 사이의 나무와 바위는 매우 圖式的이고 形式的으로
묘사하였다.
(240) 삼국지연의도 병풍(三國志演義圖 屛風)
중국의 魏, 蜀, 吳 세 나라의 역사를 바탕으로 傳乘되어 온 이야기들을 14세기에 羅貫中이
쓴 장편 역사소설인 <三國志演義>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그림으로 4폭의 병풍 2개가 있다.
제1폭은 ‘조운이 장판파에서 後主를 구하다[長坂坡 趙雲 救主]’, 제2폭 ‘장비가 엄안을
사로잡다[張翼德 生獲 嚴顔]’, 제3폭 ‘와룡선생이 기이한 계책으로 화살을 빌리다[臥龍
用奇界 借箭]’, 제4폭 ‘유비가 손 부인과 결혼하다[劉備 結婚 孫婦人]’이다.
옆에 있는 다른 병풍에는 제1폭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하다[死孔明 走 生仲達]’,
제2폭 주유가 적벽에서 크게 싸우다[周公墐 赤壁鏖戰], 제3폭 ‘제갈량이 칠성단에서
남동풍의 제를 올리다[七星壇 諸葛 祭風], 제4폭 ‘가맹관에서 장비와 마초가 싸우다
[葭萌 張飛 戰馬超]’이다. (*鏖: 무찌를 오 *葭: 갈대 가 *萌: 움 맹)
(241) 종묘 祭享의 儀式節次
(242) 宗廟 神室의 내부구조
(243) 종묘의궤(宗廟儀軌)
宗廟의 正殿과 永寧殿에 관한 儀節(儀禮와 節次)을 기록한 책으로 原編 4冊과
續錄 5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편은 穆祖에서부터 肅宗까지, 續錄은 英祖 때부터
憲宗 8년(1842)까지의 의절을 적었다.
(244) 서울 육상궁(毓祥宮) - 사적 제149호-
毓祥宮: 조선왕조 歷代 왕들의 親母로서 正妃에 오르지 못한 7인의 神位를 모셔
제사 지내는 곳이다. (*毓: 기를 육)
英祖 즉위년(1725) 영조가 生母를 기리기 위해 廟를 ‘淑嬪廟’라 이름하고
英祖 20년(1744) ‘毓祥廟’로 개칭, 영조 29년1753)에는 ‘毓祥宮’으로 승격하였다.
영조 49년(1773) 영조의 畵像 두 폭을 봉안하였으며, 高宗 19년(1882) 8월 화재로
燒失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
隆熙 2년(1908) 황제의 詔勅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궁들을 合設하여 元宗의 모친
仁嬪 金氏의 廟인 儲慶宮, 景宗의 모친 禧嬪 張氏의 大嬪宮, 眞宗의 모친 靖嬪 李氏의
延祐宮, 莊祖의 모친 暎嬪 李氏의 宣禧宮, 純祖의 모친 綏嬪 朴氏의 景祐宮 등 5궁의
神位를 육상궁에 함께 奉安하면서 六宮이라고 했다. (*詔: 조서 조 *勅: 칙서 칙)
1929년에 英親王의 모친 純獻皇貴妃 淳嬪 嚴氏의 덕안궁 德安宮 神位를 봉안함에 따라
七宮으로 부르게 되었다.
(245) 편종(編鐘)
國樂器 중 打樂器로 16개의 종을 두 段으로 된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쇠뿔로 된 망치로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고려 睿宗 11년(1116) 宋나라에서 수입하여 宮中祭禮樂에 사용하였고,
世宗 11년(1429년) 鑄鐘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文廟祭禮樂, 宗廟祭禮樂, 洛陽春, 步虛子 등의 연주에 쓰이고 있다.
*洛陽春: 唐피리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管樂合奏曲으로 예전의 특성을 찾을 수 없을 만큼
韓國的인 음악으로 변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의식이나
궁중잔치 등에서 널리 쓰였다.
*步虛子: 長春不老之曲이라고도 하며, 管樂合奏로 연주하는 器樂曲이다.
(246) 특종(特鐘)
國樂器 중 큰 종 하나만 따로 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打樂器로
世宗 때 朴堧이 雅樂을 정비할 무렵 <周禮圖>를 참고하여 黃鐘에
맞추어 만들어 宮中 雅樂에 사용해 왔는데 오늘날에는 登歌(宗廟·文廟 등의 祭享에서 樂器를 편성하는 법)에서만 사용된다고 한다. (*堧: 빈터 연)
(247) 건고(建鼓)
打樂器로 會禮宴 및 宴禮에 쓰이던 큰 북으로 현재는 연주되지 않는다.
(248) 주작 깃발[朱雀旗]
陣營의 前門에 세워 前軍, 前營 또는 前衛를 지키는 四角旗로, 붉은 바탕에 三頭의 朱雀과
靑∙赤∙黃∙白 등 4색의 雲氣가 그려 있으며, 赤色∙藍色 등의 火焰脚, 旗脚이 있는데,
재료는 비단[絹]을 사용하였다.
*大五方旗(大旗幟): 옛 군대의 陣中에서 方位를 표시하던 大旗幟로 大旗라고도 한다.
白虎旗∙靑龍旗∙朱雀旗∙騰蛇旗∙玄武旗의 5가지로, 旗를 세울 때 방위에 따라 바깥 陣門의
표로 세웠으며, 각기 隸屬된 부대를 지휘하는 데 쓰였다.
*騰蛇旗는 陣中의 중앙에 세워 방위를 표시한 大五方旗로 中軍, 中營 또는 中衛를
지휘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황색바탕의 천에 날아가는 뱀과 雲氣를 그리고, 가장자리와
火焰은 적색이다.
*靑龍旗는 조선시대 軍旗인 大五方旗에는 陣營의 왼편 문에 세워서 左軍∙左營 또는
左衛를 지휘하던 청색의 4각기로 靑龍과 청∙적∙황∙백 등 4색의 雲氣를 그렸으며,
火焰脚이 달려 있는데, 재료는 비단[絹]을 사용하였다.
(249) 백호 깃발[白虎旗]
大五方旗의 하나로, 陣營 오른쪽 문에 세워 右軍 혹은 右營, 右衛의 부대를 지휘하는 데
쓰였다. 旗面은 가로 세로 5자의 흰 바탕에 白虎와 雲氣를 그리고, 가장자리와 火焰은
노란빛으로 하였다.
(250) 현무 깃발[玄武旗]
조선시대 軍旗이자, 大五方旗의 하나로, 진영의 後門에 세워 후군 後營 後衛를 지휘한
四角旗이다.
검은 바탕에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靑∙赤∙黃∙白 등 4색의 雲氣와
火焰脚이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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