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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5)】 ‘깨닫는 것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5
세상과학이 정말 설명은 못한다
여기도 이렇게 차이가 있는 거 알지? 그래 이게 중대한 대목이라 그 말이야. 이 사람들로서는 이게 죽는 문제야. 이러니저러니 그래도 유대교니 뭐니 그래도 그랬기 때문에 죽은 사람 살렸다, 나사로 살아났다, 그래 그건 예수, 하나님의 본뜻을 안게 아니라, 그 굉장한 기적을 행했다 하는 데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다 뭐 예수 알고 참 신앙에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어 가지고 자기네 종교가 다 결단이 나니까, 이제 십자가에 돌아가게 되는 비밀이 나오게 되는 거기에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걸 통해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다 하는, 거기 의미가 있는, 그래 이거는 이제 제 딴으로는 이걸 어떻게 체험하는 건가 봅니다. 해석 하는 겁니다. 왠가 하니, 그렇지 않고는 문제가 안 돼.
나사로만 살아났다니 그 놀랐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가 없는, 뭐이 어떻게 됐습니까? 아까 말씀대로 과정을 물어도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과학이 설명을 하지만 과학이 결국은 문제의 연기를 할 뿐이지. 정말 설명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왜 죽었나? 병이 나서 죽었지. 병은 어째서 났나? 박테리아에서 죽지. 박테리아는 왜 있나? 뭐 어쩌고 그렇게 되면 차차차차 하면 무슨 조직이 어떻고 뭐 독소가 어떻고 하지만, 마지막엔 그건 왜 그런가? 모르는 거야. 우리 과학이 거기까지 못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걸 얘기하면 어느 정도 그렇다, 그렇다 그러지만 그걸로 인해서 구경 마지막에 의문이 안 풀립니다. 과학의 설명을 다 해서도 그거 왜 그런지. 그걸 그대로 안심이 안 되는 데가 이 사람의 종교적인 요구예요. 그럼 종교적인 요구는 뭡니까? 철학 상의 말로하면 그건 우리 소위 가치관에, 뭐 사람은 가치, 삶이, 다른 의미의 살림을 하는 건데 그 의미가 만족이 안 돼. 그럼 그 의미가 이렇다, 행동이 하나하나가 떨어진 게 아니라 전체로서의 무슨 의미가 있다, 그렇게 돼. 그래 그러면 병이 안 낫고도 나아요. 병은 반드시 고쳐줘야 고치는 거 아니야. 약을 먹으면 병이 낫지만 그다음엔 아무래도 죽는다, 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말이야. 죽지 않게 하는 의사는 없지 않아요? 또 죽지 않았으면 뭐하겠어? 죽지 않아도 그만치 그대로 가지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나 마나 뭐가 좋으냐? 사람이 사람 된 점이 겉에 있는 게 아니고 속에 있다, 그런다면 본래부터 그걸 안다 그런다면, 병이 어째 이래 있나?
병이 현상에 있지 않아. 죽음이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에 있지 않아. 현상을 말하면 식물계도 있고 동물계도 있지만, 식물에는 죽음이 없고 동물에도 죽음이 없어요. 엄정한 의미로 죽음이 뭐냐? 살았다는 게 뭐냐? 그럴 때 그건 이 생각의 세계의 일입니다. 자연현상으로 영감의 모가지를 칼로 잘라 없어졌다든지, 무슨 숨이 막혀서 심장이 멎었다든지, 그런 것이 동물도 있지만 동물이 언제 그런다고 눈물 흘립디까? 콧물 흘립디까? 무슨 사망에, 인간, 인간이 죽는다, 죽는다 하는 게, 정신적으로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데가 그 죽음이야. 종교는 그거 해결하자는 거. 옛날사람들은 생각이 게까지 못가기 때문에, 이거 어떻게 하면 안 죽지? 그러니까 뭐 사람이 뻔히 죽었는데도 제상에다 올려놓고 “잡수시오.” 아, 먹고 가겠지. 그래 우리 어렸을 때에도 제사 드리면 그담은 그 밥은 삼삼하다고 그래. 와서 먹고 갔기 때문에, 구명을 하고 갔기 때문에, 고 말짱하지만 맛은 삼삼하다고. 삼삼은 뭘 해. 그게 관념에 따라서지. 고대로 있지. 왜 밥맛이 그대로지. 왜 삼삼해요? 허나, 옛날사람들은 실험을 안 해보고 그런 건 모두 그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신화 전설이 종교가 있어 가지고 제사 음식은 삼삼하다, 그건 귀신이 와서 다 먹고 갔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하고 문제가 안 삼으리만큼, 과학이 문제가 안 되지요.
지금 사람은 실험을 다해봤는데도 그러니까 뭐 아무리 효자라 그래도 제사음식을 소중히 안 생각해. 먹지도 않은 거 뭐 우리가 먹는 거. 우리가 먹기 위해 하는 건데 뭐. 그러니까 제사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아요? 모두 이런 식이야. 그러니 그렇다면 이것을 잘못이라고 그럴 것이 아니라, 그걸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높아진 점을 생각을 해야지. 그럼 여기서도 죽은 이후에 말하자면, 죽은 이후에 다시 살아날 줄을 압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 돼. 그게 이게 살아난데, 살아난다고 우리가 솔직히 그러지만 살아 난다기로서 그게 뭐냐? 지금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육체의 요거 이대로가 살아난다고 하는 거를 자꾸 강조를 합니다만, 그건 중점을 잃어버린, 그런 거 아니라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게 부활입니다. 너는 죽으면 단 줄 알지만, 죽으면 정말 죽는 줄 알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현상이 있다고 해서 사망이 아니다, 그거 노자의 말대로 사이불망자수(死而不亡者壽)라, 죽어서도 망하지 않는 게 그게 수야. 수가 70, 80, 90, 120 사는 게 수가 아니라, 사이불망, 죽어서도 육신이 죽어도, 마음이 불망, 마음이 그게 수지. 그게 정말 수했다는, 그러나 그 점에 갈려면 그건 노자는 훌륭한 철학가니까 그렇지만 보통사람은 어디 거길 가요? 수(壽)라 그런다면, 그저 일어서질 못하고 벌벌 기면서도 90, 100을 살아야 거저 수했습니다. 정신을 다 잃어버리고 방안에다 똥을 싸도 수했습니다.(웃음) 그러고 그게 무슨 수냐?
생명의 단계가 일단 높아져야 돼!
그런데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 정도가 높아져. 그런 점 있는 걸 알아야. 여기서도 내세에 다시 살아. 내세에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가지고 뭐냐? 생명의 단계가 일단 높아졌어야 돼. 높아진다고 그런 다음 그담은 여기에 있는 거 아니야. 이게 이대로 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그건 지금 우리가 이대로의 육신을 쓰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에게 체험이 될 때에 예수님이 분명히 와서 생선을 구어다 놓고 “어 이 생선 좀 먹어라” 그러고 “생선도 좀 내오라, 구워먹자” 그래? 그 예수님이 지금도 어디 가서 생선 구어 잡숫고 다니느냐? 그럴 리가 없어요. 그래서 그때에 그들이 예수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러니까 벌써 이 껍데기는 벗어버린 거예요.
벗어버린 건데 우리가 이 마음의 구조가, 심정의 구조가 이게 무슨 표상이 없이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그 표상이 나타나니까 전에 있던 이런 모습도 있고 흰옷도 보이고, 거기 가 있을 리가, 이런 점쯤 좀 확 벗어버리면, 이것 좀 알기가 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런 걸 고집을 해서 자꾸 그렇게 그대로 생각해야 된다고, 왜 이 젊은 과학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점점 어렵게 만드나 그 말입니다.
그러니 생각은 좋은 뜻에 성경을 존중하자고, 아주 깊이 믿자하는 말에 그런 줄 압니다만, 이 시대를 조금 더 동경하는 눈으로 본다, 그런다면 그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거에요.
그래 여기서도 생명이라 하는 단계가 달라져. 그런데 현저하게 차이가 있잖아요? 그런 점은 또 그 다음에 하나 이런 걸 생각하면 왜 그렇게 하셨나 하는 것을 생각을 해. 왜 나사로를 살렸나? 그럼 아까 잠깐 말했습니다만, 육체의 이게 뭐 죽은 거 아까워서,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살려놓으면 그전에 그 모습 그대로 한 나흘 썩어져서, 거의 다 썩어졌다가 도로 살아났겠지, 도로 살아났겠지만 만일 살려줬어도 그전에 나사로 고대로 났다하면 그거 뭐 하러 살렸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사로 죽은 가운데 살리신 것은 나사로의 껍데길 아껴 하는 거 아니라, 나사로의 그 심정, 왜 다른 사람 말고 특별히 나사로를 왜 사랑했을까? 왜 마르다를 사랑하고 왜 마리아를 사랑했어?
그들의 얼굴이 더 고와서 사랑하는 것 아니라 그들의 자기의 말을 이해하는 그 믿음 그것 때문에 사랑한 거니까 말이야. 살아난 데도 그게 없다면 살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게 있다 해도 자라질 못하면 그전 그대로만 있다면 안 살렸을 거야. 살아나면 그 걸음에 더 자란다, 살아난 육체가 있어야만 그게 더 자란다는 것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그걸 계기로 해 가지고, 이 속에서 생명이 뭐 비약을 해 올라가는 거 있다, 그래 살린 거 아니에요?
또 그것만이 아니에요. 기도하시는 내용 “아버지 내 기도를 늘 들으시는 줄 벌써 다 들으신 줄 압니다.” 나하고 당신 사이로 한다면, 거기 내가 주를 넣어서, 나하고 당신 사이로 한다면 새삼스럽게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본래 아버지 나 알고 내가 아버지 알고 기도 다 들어주시는 건데 새삼스럽게 무슨 기도할 필요 있어? 하지만 저를 위한 거 아니라 이 듣는 무리들을 위해서 지금 기도 합니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면 본래 그 아까 맨 처음 말씀했던 대로 시바이하자는 거, 연극 하자는 거 아니지만은, 본래가 여기 껍데기, 여기 있는 거 아니라 보다 높은데 의미가 있어. 나사로 한사람에게 있는 거 아니라, 나사로 하나 살린 것이 전체 사람을 사랑한데서 나온 거, 이 점이 중요하다 그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면 나사로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만을 놀랍게 생각할 수가 있지만, 그런 거 아니야. 이 듣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는, 듣는 무리들한테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던 것이 생명을 일단 높이는 동기가 될 줄 아니까 살리지. 그렇지 않다한다면 뭐 할라고 살려, 살려줘도 이다음에 또 죽을 걸 뻔히 아는 예수, 마치 저기 있으면서도 ,가지 않아도 죽는 줄 뻔히 알고도 안 가셨던 모양으로, 다 아시는 예수지. 살려놔도 이다음에 또 죽을 줄 아는데, 그 뭐 할라고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전체 사람에게 그것이 생명을 일단 높여 직접 지금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류전체로 볼 때에 나사로가 하나 죽었던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난 고로, 인해서 우리가 이 생명이 뭐냐 하는데 대해서, 쑥 이렇게 뚫고 올라 가. 그것이, 종당엔 이제 고원처럼 넓어갈 줄 안다면, 지금은 일선모양으로, 고치모양으로 하나만 뚫고 올라가는 것 같지만, 어떻게나 높이 올라간 거냐? 그 점을 생각해. 그래 그게 이제 모든 사람이 믿는 걸 따라서 누구든지 갈 수 있게 이렇게 번져 가야하는 그런 운동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여야, 그러면 여기 우리가 지식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의문들이 풀리지 않을까. 그건 어떻게 돼서 그랬는가 하는 것을 설명을 가지고 풀지. 기적인 담엔 기적, 그저 믿는 거지. 적어도 신앙인이라고 하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 기적이라면 다 기적이지. 기적이라면 다 기적이지. 우리가 숨을 죽이고, 이것도 다 기적이지. 설명을 못하면 아주 구경에 들어가면 설명을 못하는 거니까, 그 문제에 있는 거 아니야. 그걸로 인해서 어느 점, 우리 이거 없인 토대가, 이 토대가 없인 정신적인 생명이 있을 수가 없지만, 그 근본 되는 점은 그건 그게 얼마큼 발달을…
그러니까 아까 종교의 네 형을 말하지 않았어요? 신비적인 경향, 복음적인 경향, 합리적인 경향, 사회적 인도주의적인 경향, 그런 거 있습니다만, 암만 그래도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건 어디냐 그러면 다 있는 요소입니다만, 그중에 중요한건 어디 있냐 하면 신비적인, 왜 어째 그러냐 하면 직접 사람이 하나님과 이렇게 통할 수 있다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우리 속에 가지고 있다 하는 데가 그 중요한 거야. 사랑의 하나님, 참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생각으로 지어본다면 그 점이 어려워. 만일 암만해도 난 도저히 하나님에게 갈 힘이 없다, 은혜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거저 해 주셨다는데, 그건 물론 고맙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날더러 이렇게 힘쓰는 걸 그만두라는 말씀이야. 도리어 이 점은 지금은 참 우리가 다른 나라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좀 깊이 생각을 해야 돼. 우리는 직접은 정치를 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녜요. 저 사람들 정치하는 사람은 아주 생각이 철저하게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우리하고 세계가, 뭐 사람이야 같은 사람이지만, 보는 데가 아주 많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지옥 없는 줄 알기에 철저히 해 먹는다
그래 내가 저번 때 안 그래요? 저 사람들 지옥 없는 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아주 기탄없이(웃음) 옛날에는 뭐 지옥이 있다 하니까 무서워서 좀 조심을 했는데, 지금은 죽는대도 지옥 없는 줄 아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해 먹는 거 전부 먹고 떨어지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해먹지 않아요? 옛날에는 무서워서 좀 못해 먹었어. 무서울 거 지금은 없어요. 사람이 보지만 않으면 돼. 그래 요새 군대에서 내놓고 그런답디다. 가르친대. ‘도둑질하다가 들키지만 않게. 도둑질 해 오너라.’ 그런데 아이 이런 걸 백주에 나라를 지키라고 하는 군인교육에서 그게 소위 정신교육이라고 하고 한다니, 기막힌 일 아녜요? 왜? 그들의 세계는 현실 밖에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에, 제일 마지막에 가 근거하는 거가 폭력이에요. 왜? 죽인다. 미국 놈 죽이면 다, 죽으면 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러지. 죽으면 그건 그러기 때문에 폭력에 가서 마지막에 결정이 나. 그런데 그들이 아는 건 그건 아주 저 옛날 초대부터 있던 짐승과 거의 공통으로 있는 면이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모든 게 죽어도 죽지 않는 면이 있어. 천당이요 지옥은 거 죽어도 죽지 않는 이건, 그래 “너의 몸뚱이만 지옥에 넣을 뿐만 아니라, 너희 영혼까지도 게다가 넣을 수 있는 이”는 정말 그렇게,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면 생명이 육신만이냐? 육신의 눈으로 하면 천당 간다 그러지만, 복 얻는다고 좋다고 하고, 육신이 여길 가면 지옥 간다, 걱정을 해요. 하나님이란 그런 거 아니라,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속에 생명을 혹 즐거운 데도 두고, 혹 괴로운 데도 두게 되는, 그 자리가 하나님자리지. 그러니까 생명이 굉장히 높은 단계를 가르쳐 준거 아니냐?
그런데 벌써 이거 선발대는 거기를 갔는데 말이야. 이 사람들은 떨어졌어. 장자의 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천지군자(天之君子)는 인지소인(人之小人)이요, 하늘에서 군자라는 거는 땅에서는 소인이고, 땅에서 군자는 하늘에서 소인이다. 그런 반대된다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만, 그래 정신계에서 말하면 믿는다는 사람이 고층건물이에요. 일반세상은 못됐지만 굉장히 절로 올라가는데 땅위에서는 저것들이 고층건물이야. 이제 생명의 정도가 낮은 것들이 될수록 높은 고층건물, 그래 아주 반대되는 심볼 아닙니까? 근데 그렇다고 해도 그들을 멸시하거나 미워해선 안 돼. 믿는다, 그러면 내속에도 있는 모양으로 저 속에도 씨가 있지. 그걸 인정을 해.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라는 거지. 미워하지 마.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폭력이 문제가 안 되는 건, 생명이 보다 높은 단계에 가지 않고는 폭력을 아니 쓸 수가 없습니다.
나는 평화주의란 말 자꾸 하고 현대의 우리나라에 제일 급한 문제는 그 말이라고 그럽니다만, 기독교신앙이 철저히 들어갔다고 그런다면, 저절로 폭력의 의혹이 아닐 겁니다만, 아버지가 참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자라면 저절로 초달, 초달은 안 들게 돼요. 누가 보고도 그러는 거 아니라, 정도가 낮으니까 그런데 기독교에서 조차도 ‘전쟁하라는 말도 없고 전쟁 안 하라는 말도 없지 않아요?’ 그런 정도로 안다 하는 건 참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 건 우리 속에 생명에 대한, 저기 죽으면 다되는 이 생명이 아닌가? 나사로가 죽는 가운데 살은 그걸 통해서 저기 훨씬 보다 높은 생명이, 그게 없이는 이게 죽고 살고가 있을 리가 없다하는, 거기 이렇게 설명이 되잖아요?
동양에선 옛날 생각을 하면 아주 높은 정도라 그러면, 과연 노자라든지 이런 분들은 생사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냐? 그러면 초월한 태도를 취하자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장자 같은 사람은 노자 말에도 그랬지. 살아있는 사람 중에 생지도가 있고, 생에도, 생에 무리, 생에 무리가 열중에 셋, 사지도, 죽음의 무리가 또 십 중에 삼, 또 생동지사지, 살아서 움직여서 죽을 데로 가, 그게 또 열중의 셋, 그러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해석이 조금 어렵습니다만, 대개 남들이 해석을 한 걸로 해 의존해보면 생지도라는 건 뭔가 하니, 살아서 될수록 내생을 귀히 여겨서, 이 옛날사람들은 생이라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니까, 하늘이 준 이것을 유교에서도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不敢毁傷 孝之始也) 요새는 안 맞는다고 합니다만, 그래서 나는 저번에 산에 갔다가 죽었으니까 ‘죽어 싸다’ 그러지. 옛날생각을 하면 못하는 겁니다. 모험이고 뭐이고 캠프생활 재미 보겠다고 갔다가 모처럼 낳아준 이를 이름은 부모라 그랬지만, 역사적으로 내게 끼쳐준 건데, 그걸 그렇게 죽여 버린다면 옛날사람들은 이걸 보존을 해. 어떻게든지 천명, 제 한 명대로 있다가 산다고 그래서, 맹자 말도 ‘믿는 사람은 담장 옆에 안 나선다.’고 그러고, 모험을 했다가 죽는 건 천명이 아니야. 우리가 혹은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서 죽는 거 그건 천명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나할 거를 하고 하는 거로 해가지고 될수록은 천명을 다하게 되는, 그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을 했어. 그럼 그런 게 생지도, 사지도라는 건 뭐 그저 이 감성에 만족을 위해 술 먹고, 뭐 맘대로 하고 해서, 내 생명이 깎아먹어 들어가, 그러다 그러다 죽게 되는, 그래 그건 사지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생동지사지, 살아 움직이는 데 그러다 그러다 죽는 데로 가는, 그것은 사노라는 일이 죽음으로 가는 길 아니에요? 자꾸 산다, 활동한다고 하는데 결국 사망이다, 그러니까 그거 보면 이 땅위에 있는 보통사람은 결국은 사지도야. 죽음에 서는, 노자가 재미있는 게 열 가운데 생의 무리가 셋, 또 사에 무리가 셋, 살아 움직여서 죽을 데로 가는 게 셋, 그러고 아홉이지. 일부는 남아서, 일부는 뭔고 하니, 열 가운데 생사를 초월해서 정말 나는 놈은 하나밖에 안 된다, 고렇게 수가 적은 걸로 보는 거고,
장자의 말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을 그전 깨달은 사람은 어떤가 하니, 생을 부췌현우, 부췌현우(附贅縣疣) 생을 이렇게 혹같이 생각해 군더더기다 그 말이야. 이것 없어도 되겠는데 괜히 달려가지고 그러니까 이 생을 사람의 애착에서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안 되지. 후산이라는 거 어떻게든지 나는 생명을 뭐로든지 아끼자고 하는 생각을 하지만, 생이라는 거 참 깨달은 사람이 보면 군더더기야. 혹이 붙은 거야. 죽음이란 무엇이냐? 종자 곪아서 쭉 째고 고름 쏟아버리는 거와 마찬가지지. 없어지면 시원하지. 안타까울 거 있냐. 말하자면 그러는 거는 생사를 초월을 해서 거기 지배를 면해. 그렇게 해서 보다 높은 생명의 단계에 가자고 노력을 해. 여기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방식은 그런 것과 달라.
그런 아까 말씀대로 여기서 이 세계 이렇게 몽한, 꿈같은 걸로 보지 않아요. 선악이 냅다 싸우는 세계, 이 속에서 서로 참과 거짓이 드립다 싸우는데, 그렇게 해서 통해서 저리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건 이게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이라하는데 이것만 죽어. 이게 이것 토대 없이 되는 건 아니지만, 훨씬 거기 드높은 그런 세계가 있었다고 하는 거. 그래 그걸 위해서 모든 사람이 거길 가도록 위해서 나사로를, 나사로 살린 것만은 아니지마는, 그랬는데도 이상하게 오늘 이것이 문제가 돼가지고서, 아주 충돌이 극단에 올라가서,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게 되는, 그런 게 거저 이렇게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슨 참 깊은 의미가 있는, 그래 그 때문에 또 그 다음 부활이라 하는 게 실지 자기가 정녕 몸소 그래. 그러고 나면 우리 저번에 볼 때 십자가에서 말했던, “나는 누가 내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생명을 지킬 권세도 있고 내 버릴 권세도 있다. 나는 내버린다.” 왜? 보다 높은 거를 얻기 위해서 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셔. 그렇게 평상시에도 생각을 해도 생각만이 아니고, 그게 그대로 예수님의 살림에 나타난 겁니다. 그럼 이다음에 가면 우리가 볼 겁니다. 오늘 말씀 그만 하겠습니다. (녹음중단, 다음 강의에서 계속)
깨닫는 것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한다면 말로 할 수는 본래 없을 겁니다. 말로 할 수 있는 시기는 믿음이라 할 수가 없지요. 믿음은 말로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또 말로 할 수 없는 걸 말로 꼭 해보고 싶은 거고, 또 말로하지 않으면 안 돼. 말로 힘껏 될수록은 참대로 하느냐고 해도, 해놓고 하는 순간 보면 힘을 다해 정성껏 하노라고 하는데, 해놓고 보면 이거는 아닌데,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른 분은 모르겠습니다. 난 글을 써보면 늘 그렇습니다. 글 써놓고 쓸 때는 있는 힘 다해 쓰느라고 쓰지. 허지만 써놓고 본 다음에 이게 참 내 마음대로 다, 난 그렇게 되게 보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렇지 않을까? 다 그럴까? 믿기는 우리가 다 본인이 다 믿지요. 난 사람인 다음엔 아니 믿는 재주 없어. 사람인 다음엔 믿는 재주, 그 믿음을, 믿고 있는 믿음을 어느 정도까지 자기가 자각을 했냐? 스스로 깨달아. 또 그 스스로 깨달은 걸 어디까지 우리 이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나? 믿음은 그만이지, 자각 안 해도 좋은 거고, 또 자각해서도, 말 안 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래도 이제 말씀대로 사람은 말하고 싶은 거고, 믿음이 생기면, 믿으면 싶은 거고. 그러니까 마음에 자연히 내 믿음을 내가 반성을 해서 이런 것도 있나? 또 그걸 말하고 싶은 거고 그런데, 그중에 하나는 제가 이제 설명해 보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 됨’이라 그랬지. 요전에 글 쓸 때도 믿음은 하나 됨이라, 하나 되는 거라. 그러면 또 그건 말을 꺼냈으면 하나 되는 건 어떤 거냐? 하나 됨이란 뭐냐? 그게 또 쉬운 게 아니에요. 제일 알기 쉽게 역시 말로 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비유하는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라든지, 석가에, 하나님이라든지 말씀에 그 비유가 많이 있기 때문에 또 왜 그런가하니 깨닫는 거는 천생 제가 깨닫게 생겼지. 깨닫게 하지는 못한다, 거기가 안타까운 데야. 안타깝지만 거기가 또 좋은 데야. 그런 거예요.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허나 마지막에 깨닫는 건 제가 깨달아야 돼. 대신 해주는, 그 대신 해주는 수가 없어.
난 오늘도 우리 저 모임에 앉아서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회개는 해야지. 회개, 엄정한 얘기로 한다면 회개도 날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시간마다 부단히 회개 있어야 할 겁니다. 허나 예수님께서 전도 하실 때에도 “하늘나라가 가까워왔다, 회개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라 하는 걸 강조해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말씀하기 전에 본래 요한이, 세례요한이 회개하면 세례를 줬다, 회개를 강조했어요. 그전에 올라가면 예언자들도 회개에 대해서 많이 강조해 말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것은 말이 자꾸 곁다리로 나갑니다. 그것만은 보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몰라요. 빛을 알려면 그 배경과 비겨보여야, 이제 어두운 반면에 그림자 있는걸 보여야, 빛만 보고는 보고 있는 동안 빛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빛을 몰라. 느끼질 못해. 그런 데가 빛이지. 한편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야, 이제 회개하라는 일이 예수님께서도 했고, 세례요한도 했고, 우리는 또 거기 익숙해져서 회개해야지. 회개, 우리 알 겁니다마는, 그런 걸 그전과 비교해 보면 알아. 수 천 년 동안을 모세 이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것이 뭐냐 그러면 죄는 알아. 죄짓는다는 건 알아. 죄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온 역산데, 수천 년 역사며 그런 건데, 하지만 할 일이 뭐냐 하면 죄 생각이 나면 곧 제물 드리러 갔어. 아침에 속죄제, 저녁에 속죄제 일 년에 또 한 번씩 속죄제, 속죄제 드리려고 그랬지.
사실은 회개하라고 누가 강조한 사람이 없어요. 가다 있다 보면 이사야든지 예레미야든지 그이들이 그랬지. 시자 종교당국자들 그때 종교를 아주 이렇게 인도하러, 맡아 가지고 나왔던 제사장, 대제사장 그런 사람들은 어느 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성경에 그렇게 나타나 있지는 않아? 그 주로 한 것이 죄 묻는 거. 어떻게 처결 되냐 그러면 속죄제사 드려야 한다, 하나님한테 뇌물 드려야 한다, 이런 일 해라. 그걸 그렇게 해서 수천 년 동안 해오는지 알았지. 회개하라고 하는 건 그때에도 말이 전연 없었겠소마는 그걸 가지고 아주 이제 중심문제로 자꾸 강조해 말한 것이, 그래서 세례요한이에요. 그리고 세례요한의 뒤를 이어서 다시 그 점을 더 밝히 말씀하신 게 예수님, 그래서 지금 오늘날 우리 기독교에선 회개라면 그중 아주 중요한 하나 아니에요?
그런 것이 늘 그런 것 아니에요. 가령 불교 같은데, 좋은 종교지만 그런 것 강조 안 해요. 유교도 상당히 높은, 높은 도덕은 높은 걸로 하면 기독교도 그 이상 더 높은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를 이해하기에 퍽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는 줄 압니다마는.
자꾸 딴 얘기합니다. 교파적인 생각으로 가령 우리 전에 저부터도 그러고 했습니다만, 아 공자님은 기소부욕은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했다, 제가 하고자 하던 걸 다른 사람 하지 말라고 그랬다, 예수님은 네가 생각을 남에게 하라고. 하나는 소극적이고 하나는 적극적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지 우열을 가려보려고 그러지만, 쓸데없는 소립니다. 그런 소리하는 게 공자도 모르는 말이고, 예수도 모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공자님을 두 분을 갖다놓는다면 그런 토론 안합니다. 뭐 나는 소극적이고 너는 적극적이고 같은 말인데, 그때 경우에 이렇게 발표 되고 저렇게 발표되고. 그런 점은 근본 뜻은 뭐냐? 살려서 같이 보도록 마음이 그렇게 돼야지. 과하게 뭘 그런 걸해서 그건 역시 교파심이야.
내 당파라 하는 무의식 리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우열을 가리려고 하지. 시자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이런 훌륭한 그런 이들의 자리는 뭔고 하니, 우열을 안 가리는 데가 예수님 아는 자리, 공자님 아는 자리, 누가 더 크고 누가 하늘나라 가서도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고 그런 소리 하려면,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저 괴테 보고도 누가 그랬다고 그러는데, 괴테 독일의 유명한 시인이고 그 시대 같이 있던 실러도 유명해요. 유명한데 두 길입니다만, 사람으로는 괴테가 훌륭하지요. 하지만 독일에 가면 실러한테 더 난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 누가 괴테 보고 그래 “선생님도 유명한 시인이요. 실러도 그런데 누가 더 훌륭합니까?” 그러니까, “그만치 훌륭한 시인 둘을 독일민족이 냈으면 그만이지. 거기다가 누구 높고 낮고. 누가 채점도 하지 않아도 좋지 않아?” 그랬다 하는, 내 그 문구를 잊어버렸습니다만, 그런 의미의 대답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녹음15, 3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