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에게 보낼 편지를 들고 찬 바람에 떨고 있는 한 소심한 사내가 강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고기는 물의 치마에 새겨진 문양文樣이다. 물속 자유민주공화국에서 비로소 자유를 쟁취한 푸른 지느러미가 맑은 소리를 매달고 흔든다. 물고기의 내장을 통해 차가운 소리가 흐를 때 물고기라는 언어는 편안해진다. 물고기란 언어가 꼬리지느러미에 힘찬 사유思惟를 달고 강물 속에서 유영한다. 저녁노을이 산 뒤로 넘어가자 산이 짧은 순간 더욱 선명한 검은색이 되어 언어들이 헤엄치고 있는 강 속으로 뛰어든다. 물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흰 꼬리지느러미를 단 시간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파란 수초 같은 현재가 끊임없이 새로운 현재로 바뀌는 것을 물고기는 시간도 흐르는 알갱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象徵이다. 사라지는 존재가 사라지는 시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물고기란 언어가 사라지는 인간의 뒷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한 소심한 사내가 살고 있는 산속 작은 집 창문을 저녁 7시가 두드린다. 애인에게 보낼 편지를 아직 보내지 못하고 있다. 편지가 한 사내의 마음을 읽고 꿈속 우체통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글자가 걸어 나온다 2
책 속의 글자를 보면 향기가 난다. 모든 문장들은 착하게 보인다. 도와주기만 할 것 같다. 글자의 진정한 내면內面을 알기 위해서는 글자와 섞여 세월을 보내야 한다. 책에서 걸어 나온 글자를 어루만진다. 책을 버리고 나온 글자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한다. 글자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달콤한 친밀親密을 이야기한다. 슬퍼하는 글자의 마음이 진짜 슬픈 건지 웃는 글자의 마음이 진짜 기쁜 건지 글자를 오랜 기간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책 속의 글자는 가면을 쓰고 있다. 책 속의 글자는 독자를 속이기 위해 눈웃음치고 있다. 속는다. 웃는다. 분노한다. 글자가 보기에 사람들은 바보들이다. 고요함이 주인인 식탁에 놓인 물병이 글자이다. 문장이 소리가 되어 떨어진 물병에도 시간은 흐르고 글자가 사람을 읽는다.
⸺시집 『편지와 물고기』 (2018. 9)에서 ------------ 김경수 / 1957년 대구 출생.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 『다른 시각에서 보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달리의 추억』 『산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편지와 물고기』. 계간 《시와 사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