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무수한 나라의 무수한 보살들이 저마다 자신의 동족을 이끌고 부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부처님께 삼가 공경하여 예배한 다음 결가부좌하였는데 그들의 수는 시방에 차고 또 넘쳤다. 그들은 저마다 부처님의 밑에서 불도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진리를 완성하고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두 무릎에서 무수한 광명을 발하여 끝없는 시방의 모든 세계를 비추셨다. 그 때문에 모든 보살들은 여래의 신통력이 자재함을 볼 수가 있었다.
이들 보살들은 비로자나 부처님이 그 옛날 보살의 도를 행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을 닦을 때의 선지식들이었다.
보살들은 항상 여러 부처님의 깨달음과 신통력을 찬탄하며 스스로 부서지지 않는 법신을 이루었고, 장애가 없는 삼매에 들어, 불가사의한 부처님을 만날 수 있어도 마음에 집착함이 없었다. 보살들은 항상 여러 부처님의 가호를 받으며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위없는 깨달음을 완성하여 부처님 마음의 근본 자리에 들고, 그 청정한 법신은 부처님이 사는 곳에 함께 살고 있었다.
그때 금강당(金剛幢)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끝없는 시방 세계를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여래께서는 커다란 원력으로 자유자재한 불법을 나타내십니다. 이 법은 불가사의하며, 오직 피안에 도달한 사람만이 여러 부처의 경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모양으로 나타난 신체는 여래가 아닙니다. 음성도 또한 여래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재력은 모양과 소리를 떠나지 않고서 작용합니다.
부처님은 이곳에 오는 일도 없고, 저곳으로 가는 일도 없으면서 오직 청정한 법신만이 자재력을 나타냅니다.
만약 보살이 일체의 지혜를 구하여 스스로 위없는 깨달음을 완성하고자 생각한다면 먼저 참으로 그 마음을 맑게 하고 꾸준히 보살행을 닦아야 합니다."
그때 견고당(堅固幢)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끝없는 시방 세계를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세계는 매우 깊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청정함은 흡사 허공과도 같습니다. 또 부처님의 설하시는 법은 배우 깊거니와 인연을 따라 청정한 몸을 나타내십니다.
이와 같은 대승의 지혜가 곧 모든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만약 이 지혜를 구하고자 하면 항상 부처님을 친근히 모시고 배워야 합니다. 만약 청정한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을 받들고 공양하기를 쉬지 않으면 드디어 불도를 이룰 것입니다."
그때 야광당(夜光幢)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시방의 모든 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시방의 모든 세계, 모든 중생은 남김없이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한 생각의 힘이 여러 가지 생각을 낳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한 법신도 여러 가지 부처의 몸을 낳습니다. 법신은 둘이 아니며 또 자성(自性)도 없으며, 청정하게 장엄되어 있어서 시방의 세계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법신은 흡사 허공과 같고, 그 공덕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모든 부처님만의 경계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그 법신이 낱낱이 청정하여 중생의 능력에 따라 그 모습을 여러 가지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까지 내가 어떠한 모습을 나타내리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중생의 근기에 따를 뿐입니다."
그때 이구도(離垢道)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시방 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 광명은 원만하여 세간을 청정하게 합니다. 만약 사람이 중생의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여래는 그 모든 소망에 따릅니다. 그러나 결코 이곳으로 오는 것도, 저곳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의 경계를 염(念)하여 무량한 마음을 내면, 보이는 모든 여래의 수는 무량한 그 마음과 같습니다.
여래는 중생을 위하여 중생의 능력에 따라서 진리를 설하고 남김없이 부처의 몸을 나타냅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무량한 자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중생의 소망에 따라서 부처의 몸을 나타내고 여러 가지 모습에 의하여 세계를 청정하게 합니다."
(<화엄경> 제 20장 도솔천궁보살찬불품(兜率天宮菩薩讚佛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내 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 오직 주님만을 자랑할 것이니, 비천한 사람들아, 듣고서 기뻐하여라.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들으시고, 온갖 재난에서 구원해 주셨다.
주님의 천사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져 주신다.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 사자들은 먹이를 잃고 굶주릴 수 있으나,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어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
네 혀로 악한 말을 하지 말며, 네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주님의 눈은 의로운 사람을 살피시며, 주님의 귀는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
주님의 얼굴은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노려보시며, 그들에 대한 기억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리신다.
의인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시고, 그 모든 재난에서 반드시 건져 주신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오늘 화엄경에서 “법신은 둘이 아니며 또 자성(自性)도 없으며, 청정하게 장엄되어 있어서 시방의 세계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법신은 흡사 허공과 같고, 그 공덕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모든 부처님만의 경계입니다."를 보자.
위 문장은 두 개로 읽힐 수 있다. ‘부처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구나’이고, 또 하나는 ‘나도 저런 인식을 갖도록 노력해야지’ 하는 것이다. 부처도 자성이 없고, 나도 자성이 없고, 모든 것은 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본래의 하나인 부처를 인식한다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모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에서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를 보자.
문장이 좋다. 다르게 써보자.
“내 너의 모든 것을 지켜줄게.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내가 있는 한 단 하나의 뼈도 부러지지 않을 거야. 힘내.”
갑자기 문장이 별로다. 보이지 않는 실체는 현실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냥 믿음이기 때문에 문장이 비장해 보이지만, 지금 문장은 현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밋밋하다.
<식물의 죽살이>에 나오는 글이다.
[빛은 또한 환경에 관한 세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첫 번째는 방향(더 정확히 말하면 빛에 대한 기울기)이다. 빛의 방향은 잎을 빛이 오는 쪽으로 이동시켜 광합성을 하기에 더 좋은 상태로 만들어준다. 두 번째는 빛을 비추는 시간의 길이다. 곧 낮의 길이다. 식물은 낮의 길이를 인지하여 계절을 안다. 세 번째는 빛의 성질(파장)이다. 태양빛은 여러 가지의 파장으로 이루어진 빛들의 총합이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광수용체나 2차 대사물은 특정한 파장의 빛을 흡수한다.]
내 얼굴은 까맣다. 빛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색소가 그래서일까? 이걸 알려면 연구를 해야 한다. 하루에 내가 빛을 쪼이는 시간, 그때의 빛의 강도, 그 빛에 영향을 주는 대기 원소들의 농도,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내 안의 화학물질들,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빚어내는 감정들, 그 감정에 영향을 주는 오랜 기억 혹은 그 순간의 자극들 등등일 것이다. 이것들이 화학식 혹은 구조식 혹은 선이나 각 그리기로 표시되어야 한다. 이런 개념만 있을 뿐 실제로 들어가면 나는 아직도 포도당 화학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 알려면 실험실에 들어가 현미경을 열심히 봐야 할 것이다.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고, 또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한두 번만 볼 것 같다. 이유는 단 하나. 곧 잊어버릴 것 같아서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최초의 관속식물 화석인 쿡소니아는 영국 웨일즈 지방의 4억 2천500만 년 전 고생대 실루리아기 암석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인 식물 화석의 증거에 따르면 홀씨를 생산하는 최초의 식물은 이보다 빨리, 적어도 4억 7천500만 년 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에 출현하였다. 최초의 생명은 적어도 35억 년 전 물 속에서 나타나 약 6억 년 전에는 비교적 큰 몸을 가진 다세포동물이 얕은 바다에서 살았다. 빛과 산소, 이산화탄소가 충만한 육상으로 식물이 진출하기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이런 이야기도 수차례 여기저기 책에서 읽었을 텐데 좀 조리 있게 말을 하지 못하겠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아마 이해를 못해서 그럴 수도 있고, 믿지를 못해서 그럴 수도 있고, 궁극에는 머리가 나빠 그럴 수도 있다. 듣거나 읽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데 말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난감할 때가 많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말이 있다. 모든 게 신비롭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
[그러다 마지막 마차가 지나가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가 오지 않으리라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안고 섬으로 식사를 하러 간다. 저녁 신비에 응답한다기보다는 그 신비를 끝없이 환기하는 듯한 전율하는 포플러 나무 위로, 장밋빛 구름 한 점이 잔잔해진 하늘에 마지막 삶의 빛깔을 투영한다. 몇 방울의 비가 소리 없이 아주 오래된 물 위로 떨어진다. 성스러운 유년 시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계절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빗방울은 줄곧 구름과 꽃의 반사를 망각한다. 더욱 강렬해진 제라늄 꽃의 반짝이는 빛깔이 어두워지는 황혼과 싸워 보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안개가 잠든 섬을 뒤덮으러 온다.]
‘안개가 잠든 섬’이라. 처음 보는 단어의 연결, 그 자체가 신비롭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는 이 아름다고 영리한 여자 예술가 곁에서 황홀한 시간들을 보냈으며, 그녀의 제자가 되었고, 그녀의 애인 겸 친구가 되었다. 그가 살아가는 현재 생활의 가치와 의의는 카말라한테 있는 것이었지, 카마스와미의 장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싯다르타는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그 무엇도 되려 하지 말고
그 무엇도 일구려 하지 말고
내가 이해하는 것까지만
내가 느끼는 것까지만
그 안에서 솔직담백한 문장을 만들자
이게 내가 흘러가는 삶의 물줄기에 대한
작은 예의일 것이다
아니 전부일 것이다
이과 전문용어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문과 전문용어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종교 전문용어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이해하는 데까지만
느끼는 데까지만
숙성하고 발효시켜
나의 문장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