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원로 만나기
청바지 차림 테너 엄정행 교수
세상에 뜻밖의 장면을 시청했다. 테너 엄정행 교수가 사직 야구장 마운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애국가 독창이 아니라 시구(始球)를 하는 게 아닌가! 언론에서는 팬들에게 가곡 ‘희망의 나라’를 선물한다 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그걸 내보내지 않았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오늘 통화를 했는데, 분명 그는 말했다. 어제 ‘희망의 나라’를 불렀다는 것이다. 다만 현장에 있는 사람만 들었다는 것. 누구한테 잘못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엄정행 교수는 내가 구태여 강조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대다수가 아는 성악가다. 외국 유학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실력이 있다는 정평을 받고 있는….그에게 미안하다. 이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이 장삼이사의 한계라니 스스로 한심하다.
한데 그의 이름 석 자만 들으면 나는 자다가도 일어난다. 이걸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그를 사랑해서라고 고백해야 하나? 내친김에 두어 개의 일화.
그 첫째, 그의 애창곡이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삼팔선의 봄’이었다는 것. 담임교사는 엄정행에게 가끔 그 대중가요를 친구들 앞에서 부르게 했다는 대목에서 난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다가 점점 그에 대한 존경심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것 봐 그 사실(?)이야말로, 누구에게나 희망을 주는 메시지 아니고 뭔가? 늦게 시작한 정식 음악 공부로 만고에 이름을 떨칠 성악가로 거듭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는 그가 외국 유학파가 아닌 것보다 더 큰 사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섭섭하게도 그 ‘삼팔선의 봄’은 국방부금지곡이다. 내가 군에 출입하다가 그걸 알고 통곡하다시피 했다.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라…! ‘목숨 바쳐’가 거슬린다고 판단했다나?
그의 선대인 그러니까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양산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다. 양산시 교원예능 경진대회 가곡 성악 부문에 출전하려고, 그 학교 김미숙 교사(왕종근 부인?)로부터 채종선의 ‘향수’를 배우고 있었는데, 가끔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덧붙여 말씀을 주셨다. 결과는 3명 출전에 공동 장려(웃음). 뭐 인생이란 이런 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인사기록카드에 버젓이 등재했다. 밀양에 근무하던 때 음악 특별연수를 받았는데, 그때도 교장 선생님(당시는 교육장)이 몇 시간 우릴 가르치셨었다.
그 양산 교원 예능경진대회 후 33년 만에 엄정행 교수를 봤으니, 그 반가움을 말로써 어떻게 표현하랴. 나도 3년 전 그 마운드에서 시구를 했었지 않았는가? 더구나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 유니폼을 걸친 채여서 친근감이 순식간에 내 전신을 휘감는 듯하였다. 어젯밤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아마도 이번에 그의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그는 더욱 사랑을 받으리라. 다시 한 번 강조하자, 그가 참 좋다. 자랑스럽다!
하루가 지나서 오늘 나는 아버지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행여나 싶었는데, 그는 기대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친절했다. 다행히 다음 주중에는 부산에 머물 예정이란다. 내가 그동안의 사연을 압축해서 설명했다. <실버넷 뉴스>에 모시고 싶다고 했더니, 시간을 내주겠단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근래 오기택과 오숙남(은방울 자매), 고 손인호의 장남 등을 만나 취재했지만 전부 대중가요 가수가 아닌가?
사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힘들고 부담스럽다. 상대가 망설이면 설득도 따라야 한다. 엉뚱한 제삼자가 훼방을 놓기도 할 땐 기가 막히고말고. 그런데 테너 엄정행 교수는 한마디로 시간을 내주겠다는 것이다. 난 계속 부르짖었다. 엄정행 교수 만세, 엄정행 교수 만세!
대신 인터뷰는 메일로 하기로 했다. 전화는 010-7526-123*/ 메일 id*jh@naver.com….내가 질문지를 만들어 그에게 보내면 그가 그걸 보고 대답한다. 보태고 빼고 할 것도 없으리라. 대신 사진은 실버넷 기자 동기인 부산의 류충식 전 동장이 아버지합창단 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만나고 찍는다. 멋진 기사가 창작(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다.)
세상은 아름답다. 엄정행 교수 같은 이웃 아니 원로 성악가가 있어서….그가 얼마 전 장학금으로 양산시에 5백만 원을 기탁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그는 더욱 우리 모두로부터 사랑받아야 할 것이다.
내일은 머릴 싸매고 컴퓨터 앞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할밖에. 그게 행복한 일이니 망설임은 없다.
첫댓글 제가 20대에 엄정행교수를 뵈온적이 기억납니다. 원효로 산호아파트에 사실 때인데 엄교수님 사모님을 좀 알아서 그 덕에... 사모님께서 참 예쁘고 친절하셨어요, 지금은 할머닉 되셨을 까요??? 엄교수님의 노래는 그 시절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