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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욥기 13:1-12
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0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1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2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욥 13:1-12 / [그래도 자네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 보게나! 나는 자네들이 말하는 것을 이미 다 들었네. 또한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도 다 알고 있지. 2) 자네들이 아는 만큼은 나도 알고 있지. 내가 자네들보다는 못하지 않단 말일세. 3) 논쟁하고 싶은 상대는 자네들이 아닐세. 하나님일세. 그분과 함께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 4) 자네들은 거짓말을 해대며 무식한 것을 감추려 하고 있군. 아무 병도 고쳐 주지 못하는 돌팔이 의사와 똑같군. 5) 아무소리 하지 말게. 입이나 다물고 있게. 그러면 지혜롭다는 말이나 들을 수 있지. 6) 그저 내가 주장하는 것을 듣기나 하게. 내 억울한 사정을 들어 보기나 하란 말일세. 7) 자네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자네들이 하나님 편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8) 자네들이 정말 하나님 편에 서겠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 변호하겠단 말인가? 9) 하나님이 자네들을 속속들이 들추신다면 어찌하겠는가? 정말 온전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사람 속이듯 하나님까지 속일 작정인가? 10) 자네들이 가만히 선입견을 갖고 그분 편을 든다고 해서 자네들을 꾸짖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11) 그분의 위엄 앞에서 깜짝 놀랄 것이네. 그분 생각이 두려워 부들부들 떨릴 것이네. 12) 자네들이 슬기롭다고 말하는 격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재처럼 쓸모 없을 뿐, 자네들의 변론은 진흙덩이와 같이 곧 허물어져 내릴 뿐일세.
본문에서 욥은 그의 친구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고전과 같은 고난의 이론에 대해서 자신도 잘 알고 있으나 그 이론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1-2) 욥은 전장에서 인과응보를 넘어서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서술한 후에 자신의 지혜가 실제 경험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 경험은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고 통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소발을 비롯한 다른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고난과 관련된 전통과 이론은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상황에서는 그와 같은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고난 받는 자에게는 원리원칙을 내세워 거기에 그 개인의 상황을 맞추는 이론 보다는 가슴으로부터 가슴에 전해지는 사랑과 위로가 더욱 절실함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3-5) 이제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을 그만두고 하나님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결심하면서 친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언급합니다. 친구들은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이며, 쓸데없는 의원이라고 규정합니다. 고난으로 상심한 친구를 위로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거짓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자들이고, 상처의 원인을 잘못 짚어내는 쓸데없는 의원이라고 강하게 반박합니다. 친구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욥의 결론은 친구들이 차라리 무능함을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랑 없는 공의와 이해 없는 충고는 위로는커녕 도리어 더 큰 회의와 번민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시고 어떠한 상처라도 치료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의사가 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6-12) 욥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친구들에게 변론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돌아보기를 요청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옹호한다면서 실상은 불의를 말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궤휼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들이 만고의 불변의 법칙처럼 의지하고 여겼던 말들은 가치 없는 것이며, 그들이 방어하는 논리는 흙으로 만든 토성과 같이 공격에 쉽게 노출된 빈약한 것이라고 논박합니다. 이처럼 제아무리 훌륭한 언어와 깊은 사고에서 출발한 충고라 할지라도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시원하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적 용 : 욥의 친구들의 권면은 욥에게 위로는커녕 회의와 번민을 낳게 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위로자입니까 아니면 상처를 주는 자입니까?
“Practice what you preach”(네 조언을 실천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재미있는 점은 이 아주 간단한 문장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평소에도 성실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열심히 살아라”라고 조언을 한다면 상대방은 조언을 조언 그대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맞아,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 데’하며 공감하고 자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 바꿔서 매일 늘어지게 여유를 부리는 게으름뱅이가 같은 조언을 한다면 ‘너부터 좀 따라 봐라’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 설 교 >
주만 바라볼찌라
욥기 13:1-5
한 청년이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서 안타깝게도 그만 다리 하나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다리를 잃고 나니까 모든 삶이 절망적이었습니다. 앞으로 결혼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해야 하는데 잃은 한쪽 다리를 생각하니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만 눈에 보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가 복음을 듣는 순간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제까지 없어진 다리 하나 때문에 절망했는데 바로 그때 남은 한 개의 다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그 청년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남은 몸을 드리기로 서원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한쪽에 고무다리를 끼워 가지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아프리카는 매우 위험하고 힘든 선교지입니다. 그곳에 선교를 하려고 갔는데 갑자기 식인종들이 나타나서 잡아먹을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한쪽에 고무다리를 빼가지고 그들에게 던졌습니다. 그 식인종들이 다리를 씹어보더니 도저히 씹히지 않으니까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인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그 당시에는 이해가 잘 안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 해 보면 ‘아하 그런 뜻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주일 성수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갑자기 사업이 안 되고, 자녀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동방에 ‘우스’라는 마을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순전하고 정직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면 열명의 자녀들을 위해 매년 생일 때 마다 번제를 드릴 만큼 철저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에 갑자기 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렇게 잘 되던 사업이 갑자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몇년전 IMF 시절에 우리나라의 많은 중소기업들이 부도가 나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여파로 지금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부도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열명의 자녀들이 건물이 무너져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비보였습니다. 여러분 자녀의 손가락 한 개를 잃었다고 해도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프겠습니까?
얼마전 대구에서 개구리를 잡으려고 나갔다가 실종되었던 성서초등학교 어린이 5명의 유골이 정확하게 11년 6개월만에 와룡산 기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살아 있다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던 다섯 어린이의 부모들은 현장으로 달려와서 아이들의 신발과 옷가지들을 일일이 확인하고는 피맺힌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의 심정은 다 같습니다. 부모의 가슴에 자식을 묻어 둡니다. 욥은 열 명의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사업의 부도와 자녀의 죽음으로 견딜 수 없는 아픔 가운데 생긴 피부병은 그를 완전히 망가지게 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아토피 피부병처럼 아무리 긁어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기와조각으로 긁어도 피만 흐르지 시원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욥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닥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데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가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 이런 꼴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믿을 거예요. 지금 당장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어버리세요”
우리가 욥의 부인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욥은 그 말을 듣고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보, 지금까지 잘 참아 왔잖소. 조금만 더 참으시오. 우리가 그동안 많은 복을 받았잖소. 이제 재앙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
그는 끝까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좋을 때 보다가 어렵고 힘들 때 친구가 필요합니다. 한번은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 명의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한다는 뜻으로 몇 마디 충고를 합니다.
“이보게 친구, 자네가 까닭 없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겠는가? 잘 생각해보게 자네가 분명히 범죄한 일이 있을 것이네. 그러니 그것을 회개하고 반성하면 다시 회복 될 수 있을 것 같네”
욥은 친구들의 충고를 듣고도 입술로 범죄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분명히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피해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같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욥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범죄 하지 않고 이길 수가 있었을까요?
욥은 어렵고 힘들 때, 오직 주만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욥이 부도가 났을 때 부도난 사업을 바라보았다면 그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욥이 열명의 자녀를 모두 잃었을 때 그 자식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결코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욥이 자기의 병든 육신을 보았다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입니다.
욥은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 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 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 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욥은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힘이 없고 연약할 때,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날들을 이겼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더 큰 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 미국의 뉴욕재활병원과 한국의 실로암 안과병원의 벽에 붙어있는 어느 환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미처 표현 못한 기도까지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힘이 드십니까?
사업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까?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친히 해결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