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29일 댓재~이기령 구간을 마친 뒤 거의 반 년 만에 11일과 다음날 이기령~백봉령~삽당령 구간을 밟았다. 이렇게 미뤄진 이유는 여럿이었다. 지난해 11월 13일과 다음날 설악 공룡능선 구간을 미리 다녀왔는데 무릎이 좋지 않았다. 같은 달 15일 산불 경방 기간이 시작됐고 마침 동해 일대에 산불이 며칠째 이어진 데다 산불 소식이 잦아질 때쯤 마음이 동하긴 했는데 무릎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1일 오전 6시 40분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하는 고속버스로 동해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9시 50분이 다 됐다. 택시로 이기령 아랫마을 이기마을로 가며 백봉령 픽업과 다음날 새벽 왕복 주행을 기사(010-3369-9621)에게 부탁했다.
이기령 올라서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초입에 깜박하고 지난번 택시 기사님이 기다리던 곳을 지나쳐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게 하고 말았다. 기사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급히 내려 행장을 꾸렸다. 택시는 위태로운 고갯길을 조심조심 후진해 170m 정도를 돌아갔다. 무척 미안했다. 오전 10시 20분쯤이었다.
복습 차원에서 얘기하는데 댓재~두타산~청옥산~이기령~백봉령 구간은 29km가 넘어 대간 길 중에서도 가장 길고 힘든 구간이다. 중간 탈출로로는 두타산 무릉계곡, 이기령에서 이기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부수베리 마을 내려가는 길이 꼽힌다. 이기마을 쪽이 짧은 편이라 나도 그곳을 탈출로로 삼았다. 내려오며 올라갈 때 장난 아니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올라 보니 더욱 장난이 아니다.
날씨가 솔찬히 덥다. 그렇다고 바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택시 기사는 "날이 좋으면 바람이 거센 게 동해 날씨인데 오늘은 바람도 없이 맑아 손님은 정말 복받은 거"라고 말했던 터다. 그런데 산바람이 요란하다.
위키피디아는 백복령에서 출발해 상월산, 청옥산, 두타산을 넘어 삼척시 댓재로 넘어가는 코스들이 모집 산악회 같은 곳에 많이 있는데 백두대간 어디를 가든 이곳만큼은 멋모르고 결정하지 말자고 경고한 터다. 오르막 내리막이 굉장히 심하고, 봉우리를 수십 개 넘어야 해 백두대간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코스라고 경고하고 있다. 늦가을 이 코스를 밟았던 나로선 해가 뜬 시간을 고려해서라도 이 구간을 이틀에 나눠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6개월 전에 내려온 길인데도 새롭다. 가을과 봄의 차이인가 싶기도 했다. 중간에 봄 꽃나무들이 화사하게 마당을 수놓은 주택도 눈에 들어왔다. 지난 가을에는 응, 집이 있네 했는데 요번은 와, 이렇게 멋진 집이었어 했다. 쌍용자원개발 주식회사가 석회석 채광사업장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기마을 주변에 백두대간 동해소금길이 있다. 중앙에 이기마을을 놓고 한참 아래에 내금곡동이 있어 그곳에서 왼쪽으로 빙 돌아 미역널이 마을까지 오는 코스와 이기마을 바로 아래 장제터에서 오른쪽 국시댕이로 올라 미역널이 마을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난 자연스럽게 국시댕이 거쳐 미역널이 마을로 올랐다. 국시댕이(산마루 길모퉁이에 있는 무덤)는 한양에 과거 보러 가던 이들이 합격을 기원하거나 장사치들이 대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돌에 담아 모은 것이라고 했다. 왜 이 산골에 미역널이 마을이란 이름이 붙여졌을지도 헤아리게 된다. 바닷가에서 말려 오면 훨씬 가벼울텐데 미역을 여기까지 가져와 말린 이유가 분명히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기령(800m) 1.1km 970봉 헬기장 0.6km 상월산(970.3m) 1.3km 원방재(730m) 2.2km 1022봉 1.6km 987봉 3.6km 백복령(780m) 10.4km(낮 12~오후 4시 50분, 4시간 50분)
이기령 정상에 오르니 열댓 명의 산객들이 평상에서 점심을 거의 다 먹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다. 나도 편의점 도시락으로 한끼를 때웠다. 산객들은 떠나고 한 사람이 앉아 담배를 피운다. 조금 있으니 정신적으로 힘든 젊은 친구가 지친 표정으로 도착했다. 이 산객들이 난 낮 12시 출발했는데 계속 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처음에는 담배를 피는 중년 사내가 젊고 아픈 친구의 아버지인가 싶었다. 뭔가 챙기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는데 상월산까지는 그런대로 쫓아왔지만 이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난 초반 그가 너무 힘들어 하길래 사탕 하나를 건넸다. 그 아이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백봉령에서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동해로 왔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가 오지랖 그만 떨자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대간을 하는 꾼들 사이에서는 이기령~백봉령은 힘들기만 하지 별 의미는 없는 길이란 뒷말이 무성한 모양이다. 딱히 볼 것이 없었다. 날은 맑은데 어디 볼 만한 장관이 없었다.
명색이 '일곱 장의 사진으로 남은 백두대간'인데 어울리는 사진을 찾지 못해 탈출로를 되짚어 오르는 길의 앞 사진 석 장을 끼워야 구색을 맞출 수 있었다.
이기령에서 30분쯤 걸으니 970봉 헬기장이 나온다. 처음에는 완만해 산허리를 감고 돌기도 하다가 마지막에 조금 가파른 오르막이 있었다. 대간 길은 2시 방향이다.벤치가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올라가면 상월산인가 했는데 또 아니다. 올라섰다가 한 번 더 가파르게 올라야 진짜 상월산이었다. 댓재부터 한달음에 달려온 앞의 산객들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정상이 좁은 편이라 산객들 피해줬는데 나중에 다른 산행기 보니 벤치 앞에 쓰러진 나목을 촬영한 사진들이 꽤 멋있고, 목책 뒤의 낭떠러지를 내려다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2022년 이기동 더받이령~상월산 사이의 백두대간 줄기에서 대규모 카르스트 지대에서 발달한 원형 모양의 지름 10~60m, 깊이 수십m(추정 불가)의 크고 작은 돌리네가 육안으로만 7~8개 발견됐다. 상월산과 두타산에는 고대 철기유적을 뜻하는 '쇠부리터'가 대거 발견됐는데 이곳 돌리네에는 희귀한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돼 학술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발굴조사와 함께 보전·관리방안 마련이 제기됐다.
돌리네는 카르스트지형에서 지표면에 물이 한 지점으로 계속 빠지면서 주위의 석회암을 녹여 움푹 파인 형태의 지형이다. 강원 도내에는 2004년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된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일대(54만 300㎡)가 대표적인 카르스트지대로, 동해시 천곡동 1003 일원 용정공원(23만197㎡) 일대가 천곡황금박쥐동굴과 연계된 돌리네 카르스트지대로 알려져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오다 언듯 오른쪽 절벽 기암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인데 나중에 다른 산행기를 보니 꼭 봤어야 하는, 사실 그것 밖에 없었다.
원방재까지 내리막으로 25분을 내려왔다. 원방재에서 1022봉 오르는 길도 여간 힘들다. 한 번에 오르지 않고 작은봉우리 올랐다 능선 따라 진행하다 마지막에 아주 빡세게 오르막이 이어진다. 원방재에서 쉬지 않고 올랐는데 앞의 산객들 다섯 정도가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중간중간 널부러져 있었다. 비웃었는데 나 역시 1022봉 올라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앉아야 했다. 댓재부터 걸어온 이들은 여기에서 퍼질 것 같다. 담배 피우는 중년은 여기에서도 두세 가치는 태우는 것 같다.
한참 내려갔다가 오르막 올라 987봉에 닿는데 40분 걸렸다. 그 뒤로도 몇 봉우리를 더 올라야 백봉령이 아래에 보인다. 이제 하산이다 싶다가도 또 오른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은 너무 허망하게 짧다. 택시 기사가 재촉해서다. 나는 하산이 확실한 시점에 맞춰 전화하려 했는데 그가 먼저 걸어와 그가 4시 30분까지 오겠다고 해서 서둘러야 했다.
백봉령 도로에 내려서니 정상 쉼터가 저 아래 있었다. 기사에게 전화해 이리 오라고 하고 화장실 다녀왔더니 그 사이 택시가 지나갔던 모양이다. 내가 생각한 반대 방향에서 택시가 오길래 내가 방향을 잘못 생각했구나 했는데 나중에 안 보이셔서 갔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택시비 동해터미널~이기마을 2만 2400원, 백봉령~숙소 3만 2600원
미리 예약한 렉스 모텔(033-521-0068) 객실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온라인을 보니 색정적인 빨간색 벽지가 있는 방도 눈에 띄었는데 방도 넓고 환했으며 화장실도 넓고 환기도 잘 돼 있었다. 숙소 비용 5만원
저녁은 서둘렀어야 했다. 숙소에서 어슬렁대다 7시쯤 나섰더니 주말이라 일찍 문닫는다고 여주인들이 미안해 했다. 김밥집에서 육개장을 사정사정해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백봉령의 해발 고도는 780m이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과 동해시 신흥동을 이으며, 고개 중간에 강릉시 옥계면을 지난다.
동해시내버스가 하루 두 차례 다녔으나 2018년 6월부터 폐지돼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원방재 쪽에서 접근해 백봉령으로 내려가면 북쪽으로 산등성이 한 가운데가 깎여 희멀겋게 노출된 듯한 벌거숭이 언덕 같은 것이 나타난다.
채석으로 산꼭대기가 아예 깎여나가 한동안 자병산의 정상 872m는 서류 상으로만 존재했다가 현재는 그나마 남아있는 것으로 다시 측정해 776m로 수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