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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번식 충동만큼이나 죽음(해체) 충동이 있다는 걸 철학에서 배웠고 '동물의 왕국'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창 1:28)" 말이 성경의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남이 번성하는 꼴을 못 보지요. 내가 살아야 하니까요. 프로이트가 말하는 '티나토스'는 물론이고 생물학적 해체(죽임) 충동이란 것이 있는데 셀프 임상실험을 하면서 의아한 건 코모도가 임팔라를 통째로 삼키는 것보다 왜? 어미 새(혹은 다른 포식자)가 새끼를 집어삼키거나 찢어 죽기는 것이 더 희열이 있는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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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고물 거리는 새끼 사자-강아지-새끼 하이에나 병아리의 잔망스러움에 미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나는 악동이닷!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앓는 사람을 치료하는 데 인생을 바치면서 삶에 편 만한 고통과 비참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요. 그는 처음부터 공격성에 주목했지만 처음으로 '생명 충동'과 구별되는 '죽음 충동'(Todestrieb)의 개념을 소개합니다(1920).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1921)'에서 '정신분석학 개요'(1938)까지 죽음 충동의 개념을 계속 성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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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음 충동을 포함하는 명확한 이론을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에로스와 모든 면에서 대립하는 '죽음 충동'이 존재할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충동'은 죽음+충동의 합성어로, 죽음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충동을 의미해요. 통상적인 해석에 따르면, '죽음 충동'은 넓은 의미에서 성욕과는 관계없이, 파괴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온갖 현상의 배후에 있는 충동입니다. 필자는 지금 이 지점(죽임 충동)에 꽂혔어요. 사태를 삶과 죽음의 결전으로 보려는 착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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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페도클레스(bc493-430)는 '사랑과 미움'에 기초하여 우주가 변동한다는 사유를 제시했지요. 마니교에 따르면, 선신과 악신이 우주의 통치를 두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유태/기독교적 문화에서도 사탄 내지는 악마가 자율적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요. 필자는 사탄은 묶인 개로 봅니다만. 프로이트 도 '문화의 불만'에서 에로스(Eros)와 죽음(Thanatos)을 나란히 병치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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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개요'에서 '죽음 충동'에 대한 그의 사고실험을 “두 가지 기본 본능, 에로스(Eros)와 파괴 충동(Destruktionstrieb)을 가정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에로스의 목적은 언제나 보다 큰 통일을 이루고 이를 유지하는 것(애착)이고, 반대로 후자의 목적은 연관을 해체하여 사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다음 문단에서, “우리는 파괴 본능의 최종 목적이 생명체를 비유 기체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것을 '죽음 충동'(Todestrieb)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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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자신이 파괴 충동을 '죽음 충동'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러나 공격성(죽임 충동)에 대한 프로이트의 입장은 아주 복잡합니다. 공격성은 생물이 자기를 보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능력입니다. 음식을 포함하여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확보하고, 번식을 위해 짝을 두고서 경쟁하는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공격성이 필수조건입니다. '나쁜 남자'신드롬이 디비도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프로이트는 부친 살해 욕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매우 일찍 제시했지만 죽음 충동을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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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극단적인 공격성과 파괴 성과 폭력을 해명하는데 성욕 이외에 다른 충동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리비도도 힘(power)에 한하여 공격성은 리비도의 부분 충동일 수 있어요. 프로이트는 외상 신경 증자의 꿈에 보이는 반복 강박(compulsion to repeat)과 관련하여 죽음 충동을 실험합니다. 그는 쾌락원칙과는 다른, 심지어 더 원초적인 원칙이 없는가를 물어요. 왜, 사람은 외상적인 경험을 질기게 반복하는가? 프로이트는 처음에 이 반복을 쾌락원칙의 지배와 관련하여 다루어 보려고 애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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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복도 쾌락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두 체계의 어떤 곳에서 반복이 쾌락을 제공하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꿈이 소망 충족이라는 테제를 고수할 수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는 생명체의 내부에 이전 상태로 복귀하려는 충동이 존재한다고 가정해하는데, 만약 이 가설이 지지된다면, 변화와 발달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19세기의 일반적인 낙관주의와는 동떨어진 생명의 보수성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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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명이 절대적으로 보수적이라면 변화를 위한 어떤 활동도 자발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수성을 교란하는 것은 오직 환경의 영향일 것입니다. 모든 변화는 고통의 원인이고 불교가 생로병사, 즉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온전히 죽음 충동이 지배적이라고 하자. 그리고 모든 것은 이제 죽음이라는 절대 사건이 일어나도록, 제대로 일어나도록 준비하는 일종의 구성 충동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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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마저도 죽음의 공포를 한동안 견디게 하는 마약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자. 프로이트는 어떤 곳에서 실러의 시구를 인용해요. “존재의 짐을 감내하게 하는 것.” 이것이 환상의 정의입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영가설'입니다. 죽음에 대한 방어로서 철학만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 전체를 고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생존을 위한 투쟁과 사랑마저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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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충동은 자아-대상의 파괴 내지는 해체와 관련하여 검토될 필요가 있어요. 또는 생명 자체의 해체! 그래서 온갖 형태의 전쟁과 살인과 파괴는 죽음 충동과 관계를 분명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생명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어요. '열역학 제2법칙'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열평형 또는 열-죽음을 향한 움직임. 이것은 생명만이 아니라 에너지를 갖는 온갖 것들과 관련하여 작동합니다. '열역학의 법칙'을 '죽음 충동'의 해명에 활용할 수 있다면, 에로스는 죽음 충동에 대항하여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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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에 열역학에 위배되는 현상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외부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 에너지의 전유를 생명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이런 상상을 해보시라. 유기물에서 막 진화한 원초적인 생명은 생명이라기보다는 무생물에 훨씬 가까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의 행동은 무생물의 행동의 측면에서 더 잘 설명될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서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죽음이 생명을 우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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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명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모든 생명체는 일종의 수명을 갖습니다. 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생명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과 삶-사랑은 생명체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고 있어요. 진화론의 역사에서 남성과 여성이 구별되는 일이 발생했고, 불멸은 이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에로스의 목적을 “합일하고 묶음(uniting and binding)”이라고 간명하게 요약합니다. 생충동은 더불어-삶의 충동, 즉 에로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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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사랑이 (거의) 언제나 섞인다는 점은 경험적으로 분명합니다. 프로이트는 '사디즘'을 죽음 충동의 대표적인 표명으로 간주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사디즘'을 에로스의 구성본능 또는 부정적인 파생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공격과 파괴와 관련되기 마련인 힘, 또는 세력 또는 능동성을 세밀히 고찰할 필요가 있어요. '사디즘'이 사랑에 복무하는 대신에 그 자체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프로이트가 의미하는 '사디즘'은 사랑과 죽음의 묘한 결합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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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따르면, '사디즘'이 결정적으로 대상을 파괴하지 않는 것은 사랑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랑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사도-마조히즘은 매우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힘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죽음의 힘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사도-마조히즘의 궁극적인 목표로 보이는 파괴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마조히즘에서 궁극적인 파괴를 보는 경우는 드물까? 어쩌면 사디즘은 죽음 충동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대한 죽음을 이기는 약한 사랑을 보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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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사랑은 언제나 함께 나타납니다. 사랑은 매우 허약하지만 굴복하지 않아요. 프로이트의 사유는 죽음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매우 허약하지만 질긴 사랑의 모험입니다. 프로이트가'쾌락 원칙을 넘어서'를 썼을 때 60을 넘기며 온갖 풍상과 질병에 지친 노인이었어요. 죽음이 매우 소중한 안식으로 다가오는 나이에 프로이트는 당시까지의 정신분석학을 위협하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합니다. “다시 한번!” 안식의 이미지는 죽음 충동을 통상적으로 결부시키는 현상과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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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리비도 또는 에로스를 “온갖 문제를 야기하는 악동”이라고 불러요. 에로스는 다시 한번 살아보려는 의지겠죠. '문명의 불만'의 끝 대목은 우주적인 에로스를 위해 살았음을 자축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매우 감동적인 문장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물음은 문화적인 발달이 공격성과 자기-파괴의 인간 본능에 의해 야기되는 공동체적 삶의 교란을 제어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 수 있는지 하는 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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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과 관련하여 정확히 현시점은 특별한 관심을 끌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서로를 절멸시키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현재 느끼는 안달과 불행과 불안의 정조의 많은 부분이 그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제 두 ‘천상의 힘들’의 하나, 영원한 에로스가 그의 동일하게 불멸하는 숙적과 투쟁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주장하는 노력을 보일 것이란 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성공과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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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은 1931년에 더해졌대요. 당시 히틀러의 나치가 곧 독일 정권을 잡을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래요. 그렇지만 그가 히틀러를 염두에 두고서 이 문장을 쓴 것은 아닐 겁니다. 인류 절멸을 가능성으로 천착하는 프로이트가 히틀러의 득세에 더 염세적으로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시대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극도로 미약한 것이어도 효력 있는 처방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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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시대를 특유하게 암울하다고 진단하면서, 모가지를 내밀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에로스의 활동을 고대합니다. '문명의 불만'은 종말론적인 희망을 담고 있어요. 죽음 충동이 극에 달하여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불안한 시대에 그는 에로스가 비상할 것을 예감해요. 프로이트는 모든 비관적인 전망을 철폐하지 않고서 상대화합니다. 그 결과를 누가 알 것인가? 그러나 영원한 에로스는 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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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자신의 죽음과 인류의 종말을 한꺼번에 성찰하면서 매우 독특한 희망의 사유를 빚어냅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은 죽음 충동이 아니라 에로스의 편에 서 있음을 확신합니다. 프로이트는 1939년에 죽기까지 글을 썼습니다. 이미 가망 없는 것으로 드러난 젊은 날의 소망들을 회상하는 늙은이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젊은이로서. 죽음을 앞둔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공동체가 거의 해체되고 가족의 삶이 위협받고서야 마지못해 영국으로 떠납니다. 당시 그는 '모세와 유일신교'를 쓰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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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종교의 살아남음을 성찰합니다. 그 지점에서 그는 모세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을까? 프로이트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끝나고 나서도 살아남는 것을 성찰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에로스는 죽음을 제압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해요. 프로이트는 자신이 언제나 무신론적인 유대인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조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에 표명한 매우 어려운 신앙을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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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포함한 생명 전체는 죽음에 맞서는 사랑입니다. 프로이트를 인도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에로스에요. 프로이트는 온갖 우상을 해체해요. 이 해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람의 추악한 실존이지만, 프로이트는 이 실존의 한 모퉁이에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에로스를 발견합니다. 사람이 사랑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향한 충동이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끝에는 사랑이 죽음을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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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43회면 벌써 3/1을 달려왔네요. 진행형 '적벽대전' 입니다. 손권은 주유로부터 대승 소식에 대한 보고를 받습니다. 조조를 왜 잡지 않았냐고 묻자 주유는 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유비가 죽이도록 몰아줬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노숙을 시켜 유비 진영에 가서 조조가 잡혔나 확인해 오라고 해요. 유비가 적벽 대전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에 노숙이 왔고 조조의 생사를 묻습니다. 그때 다들 기다리던 '관우'가 죽을 상을 하고 들어옵니다. 관우는 ‘조조를 살려 주었다’며 자신의 실책에 대한 벌을 자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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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공명은 크게 화를 내며 군령에 따라 참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번에도 장비가 나섭니다. 장비는 그런 공명에게 칼을 들이대며 절대 관우 형님은 죽을 수 없다고 하자, 유비가 나서서 장비를 다그치는 것은 군사인 공명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뜻입니다. 유비가 도원결의를 거론하면서 자기가 먼저 자결하겠다고 했고, 관우-장비-노숙이 차례로 나서서 공명을 설득하자, 공명은 노숙이 부탁을 하는데 고집을 부리면 못 쓸 사람이라며 관우를 참하는 대신에 군령에 기록을 적고 가중처벌을 명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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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진영(강동)에 돌아온 노숙에게 주유가 왜 관운장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왜 말렸냐고 묻자 노숙은 유비 세력이 있어야 조조를 견제하기가 쉽고 유비를 이용해야 강동의 입지를 다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유가 손 권과 불편한 관계로 알고 있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의 불손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조조는 울고 있는 '허저'에게 “네가 살아와서 나는 자다가도 웃는다.“고 명언을 남깁니다. 조조는 자기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리더가 분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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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봐 준 천호진(보스)에게 충성을 바쳤던 조인성처럼 '허저'도 이때 조조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헌병대 조국현이란 녀석이 있었고 성철-종훈이 놈도 생각이 납니다. 패전 병들이 모아놓고 조조는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패배는 나쁜 것이 아니다. 패배를 통해 정확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패인은 한동안 승리만 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주옥같은 명언을 쏟아내고 있는데 병사 한명이 코를 골며자고 있습니다. “이런 식충이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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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옥에 갇힌 인물을 찾아가보니 놈이 조조를 기다렸답니다. 무시기? 적벽대전에서 패한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이놈이? 삼분할 될 중원의 판세와 그러면 조조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까지 깔끔하게 로드맵을 정리해주는데 대관절 너는 누구냐? 중달 사마의가 아닌가.
2025.5.3.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