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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0년 5월 3일 주일오전
성경낭독 : 행2:42-47; 요10:1-10
본문 : 갈3:1-5
제목 : “율법과 성령”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96편 1,2,3,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9편 1,4,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42편 5,7
성경낭독 후 찬송 – 시52편 5,6(고정)
설교 후 찬송 - 시16편 1,3,5
성찬식 찬송 - 시63편 2(고정)
폐회찬송 - 시92편 4,6(고정)
율법과 성령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과 ‘삶’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경건주의적 경향 속에서 터전을 잡아 온 관계로, 우리 속에는 보편적으로 ‘어떤 것을 믿느냐’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보자면 “당신은 어떤 신학을 가졌습니까?” 같은 것은 교회에서 사실 별로 중요하게 취급받지 않지요. 그보다는 “당신은 얼마나 기도합니까?”, “당신은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와 같은 실천적 가치가 훨씬 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들이 ‘성경 공부’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성경 공부라는 것의 내용들이 대부분 ‘제자훈련’과 같은 ‘삶 프로젝트’이지, 신학을 배우거나, 교리를 배우거나, 바른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삶이 믿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라는 점입니다. 언제나 ‘믿음이 삶을 결정짓습니다.’ 물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마음이나 신앙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의도치 않더라도 어떤 행동을 하다 보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압도적인 것은 그 반대로입니다.
제가 종종 사용하는 쉬운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여기 ‘횡단보도를 건넌다’라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금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횡단보도록 건너게끔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행동은 행동 그 자체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에는 언제나 그 배경에 ‘신념’이나 ‘생각’, ‘믿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빨간 불인데도 신호등을 건넌다면 그 사람은 “횡단보도 신호 쯤은 지키지 않아도 돼”라는 생각이나, “바쁠 때는 신호보다 내 필요가 우선이야”라는 생각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지, 그런 생각 없이 행동이 혼자 불쑥, 진공상태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 ‘믿음이 삶을/행동을 결정짓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신앙과 관련된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그 사람의 신학(자신이 ‘신학’이라 부르건 부르지 않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를’ 펼쳐 보여주는 도화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혹은 교회나 신앙 생활 중에서 만나는 여러 판단들 중에서 어떤 것을 중시하는 판단을 하는지, 이런 것들이 모두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 그 사람의 ‘신학’, 그 사람의 ‘신앙적 가치 기준’에 따른 것이지, 그게 그냥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신학은 나와 다르지만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물론 신학이 나쁘다고 사람도 나쁘다......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불신자조차도 친절한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신학이 다르다고 사람이 나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신학이 다르다면 반드시 그 사람과 나는 가치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평소에는 그런 것이 잘 안 나타나지만, 어떤 신앙적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매우 사람 좋아 보이는 장로님이, 당회에서 중요한 신앙적 사안을 결정지으려 할 때, 끊임없이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판단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을 하려고 한다면, 그런 것은 단지 인품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중시하느냐는 결국 신앙의 문제니까요. 행위가 믿음이랑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믿는 바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교리를 배워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교리를 배웁니까? 그저 생각만 바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닌 것이지요. 바른 말씀, 바른 교리, 바른 진리 위에 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각에 있어서 건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르고 건전하게 서야만 거기에 기초한 행동, 삶 역시 발라지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장’을 최우선점에 두고 신학을 무시한 결과물이 바로 교회의 대 부흥들이 일어난 후 채 30년도 버티지 못하고 쇠퇴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바른 행동’은 ‘바른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행동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믿음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삐뚤어지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그릇된 동기들에 기인하게 되고, 결국은 생명력 있는 복음의 능력 있는 행동이 아니라, 잘못된 동기들 때문에 빚어진 악한 행동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3장 말씀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율법과 성령”이라는 주제
오늘 설교 제목에서도 곧바로 알 수 있듯이, 갈라디아서 3장 앞부분은 ‘성령’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문을 읽어보시면 곧바로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읽은 이 짧은 본문,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 속에, 이 짧은 다섯 절 속에 무려 성령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2절에 “성령”, 3절에 “성령”, 또 5절에 “성령”
절 수가 작은 것을 생각하면 거의 매 절 성령이 나온다 해도 틀린 것은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거의 매 절마다 “성령”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고서 본문의 해당 말씀을 잘 보시면, 여기서 ‘성령’이라는 말은 앞의 2장까지 내용에서 계속 이야기해 왔던 주제에서 단어만 바꾼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 2절을 보십시오. 사도께서는 어리석게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가, 그 다음에 거짓 교사들의 꾀임 때문에 ‘행위주의, 율법주의, 곧 율법을 행하는 것도 있어야 의롭게 된다’라는 가르침으로 빠져 버린 이들을 책망하면서 이야기할 때, ‘율법의 행위’에 반대되는 것으로 ‘성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육체’에 반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3장 도입부의 ‘성령’이라는 표현은 이제까지 갈라디아서에 쭉 이야기 해온 ‘율법과 복음’, ‘율법과 믿음’의 대조에서 ‘복음’이나 ‘믿음’ 대신에 사용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께서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그러니까 복음이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 ‘율법의 행위들’, 그러니까 절기를 지킨다거나 할례를 받아야 한다거나......이런 가르침에 미혹되어 율법 준수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려는 성도들을 향하야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가르쳤는데, 3장에 와서는 이 ‘오직 믿음’에서 ‘믿음’에 해당하는 부분에다가 ‘성령’을 넣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성령’이라고 했는지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내용을 살필 때 좀 더 분명해집니다.
1) 먼저 3장 안에서만 생각해 보자면, 갈라디아서 3장은 그 구조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은 이 앞부분이 주제를 말하고, 거기에 이어서 이 주제를 증명하는 다섯가지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절에서 9절은 아브라함을 통한 논증, 10에서 12절은 율법의 불순종이 가져다주는 저주, 13에서 14절은 율법의 저주를 당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취한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논증, 15절에서 18절은 율법에 선행하는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논증, 19절에서 25절은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에 따른 논증......이렇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3장은 전체가, 우리가 소위 ‘교리’라고 부를 수 있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2) 그리고 갈라디아서 전체를 생각해 보면, 갈라디아서 전체의 구조는 크게 한 주제로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 주제가 구체적으로 성도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즉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신자들에게 어떤 삶을 만들어내며, ‘율법의 행위도 있어야 한다’는 교리는 신자들에게 어떤 삶을 만들어 내는가?
이렇게 보면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우리는 ‘율법의 행위냐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교리 논쟁’이 사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리의 문제가 단지 교리의 문제인줄 알지만, 사실은 사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려는 것은 어느 교리가 옳으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는 바’가 ‘삶을’ 형성하기 때문이죠.
갈라디아서는 신학자들의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하느냐, 오직 믿음이라는 생각이 옳으냐” 이것을 신학자들이 아카데미에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만나면, “아유 나는 저런 복잡한 문제는 싫어, 신학은 신학자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해. 나는 지금 당장 교회에서 해야 하는 신앙적인 행동들,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그런거에 더 관심이 많아” 이렇게 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는 ‘무엇을 믿는가’가 어떻게 신자들의 삶의 문제를 만들어가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해 보면 이 정도가 되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거기에 율법적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 어떤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는가? 삶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가?”
바로 이것을 사도께서 강력하게 설명하시기 위한 장치가 바로 ‘성령’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에서 성령님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혹은 능력을 부여해 주는 어떤 신비한 기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님은 대단히 강력하게 삶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신자들의 삶 전체에 연관된 것을 성령님의 사역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혹은 ‘율법과 믿음’ 대신에 ‘율법과 성령’을 대조시킨 것은, 이를 통하여 갈라디아서의 이 주제가 좀 더 현실적인, 좀 더 삶의 적용적인 문제라는 것을 말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제, 이 ‘성령’님이 어떻게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과 연관된다는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5장으로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5장에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
5장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아멘!
이것을 약간만 더 넓은 문맥에서, 4절과 5절을 비교하면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읽으실 때 ‘성령’님께서 ‘율법’과 반대되어 어떻게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 전체를 다시 한번 읽읍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율법과 성령, 율법과 믿음의 대조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4절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5절은 이 4절의 반대말입니다. 반대가 무엇입니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와 반대되는 “우리는,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그렇지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이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기다리는 자가 대조됩니다. 우리가 3장에서 살핀 것과 똑같습니다. 2장까지 ‘율법의 행위를 좇는 사람’과 ‘복음 혹은 믿음’을 대조시켰는데, 3장에서 이것을 ‘성령’님과 대조시켰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둘이 단지 대조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대조가 될 때 그 행동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믿음을 좇는 자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그 키가 뭐냐? 원동력이 뭐냐? 했을 때, 바로 “의의 소망”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는데! “성령으로 믿음을 좇는” 우리들은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소망을 좇아 행하게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성령님 안에서’,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으로 인하여 힘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인지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우리들은 ‘의의 소망’, 곧 미래에 얻게 될 소망이 그 삶의 원동력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5장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진공상태로 읽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이 구절만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정황 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들에 비해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 말씀은 어떤 정황에서 말씀되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추구하고 따르는 이들은 결국 “육체의 욕심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지향점이 달라졌습니다. 목적지가 달라졌습니다! 겉으로 볼 때, “오직 믿음”을 말하는 것은 그저 교리적인 논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직 믿음”을 말하는 이들과 “하지만 율법적 행위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지향점이 다릅니다. 믿음만을 말하는 이들은 5장 5절 말씀대로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따라” 살 것입니다.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의롭게 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율법적 의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16절 말씀에 따르자면 이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가는 이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다시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와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5절을 이해하고 6절을 읽으면, 이 6절의 말씀은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욕심”이 아니라 “의의 소망”을 따라 살아가는,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살아가는 이들은, 그 미래의 얻을 “의의 소망” 때문에, 현재의 삶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믿는 것이, 과연 사상적인 문제, 교리적인 문제였습니까?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완전하게 한다”는 가르침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자의 삶을 더 윤리적/도덕적으로 바르게 할 수 있고, 무언가 삶에 있어 반듯하게 살아야만 하거나, 그럴듯한 종교적인 풍모를 갖게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베푸신 은총 속에서, 사도께서는 진리를 간파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은혜로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는다면” 결국 왕좌를 차지하는 것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 말이지요. 결국 “내가 육체적 행위를 잘 하는 것도 나의 의로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온순해 보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단지 ‘신학적 문제’, ‘사상적 문제’인 것으로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것은 나무를 가장 아래쪽 둥치부터 야금야금 갉아먹어, 결국은 큰 나무 전체가 쓰러지도록 만들 것입니다.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려는 시도는 “육체의 욕심”에 기초하여 있지, “장래에 얻을 의의 소망”에 기초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현저하게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20년, 30년을 교회가 융성하고 흥왕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는 시절은 교회가 이제 곧 20년 정도만 지나면 전 국민의 50퍼센트는 충분히 교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강력함을 자랑하던 시기였습니다. 공공연하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10개 중에 서너 개가 한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으쓱해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끝까지 은혜로만’ 견지하는 법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놓으신 은혜의 터전 위에 자꾸 사람이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회개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거기에 유능한 목사가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하면 교회가 성장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조직이 경영학적으로 어떤 구성을 가지면 더 효과적일지 궁리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교역자들, 그리고 교육학자와 심리학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좀 더 교회에 데리고 올 수 있을까?”라고 방법론을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유럽 교회는 쇠퇴했다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금 500년을 버티고 있는데, 한국교회의 중흥은 30년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무엇을 믿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어떤 믿음을 갖느냐가 결국 그 교회, 그 신자, 그 국가 전체의 교회들의 훗날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오직 은혜의 복음’에만 머물지 않고, 그래서 ‘미래를 향한 의의 소망’에 기초한,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가진 참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고, 따라서 거기에서 넘쳐,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역시 갖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교회 안에는 각양 각색의 “육체의 욕심”만 가득했습니다.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는, 올바른 칭의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하고, 거기에 ‘사람의 육욕’이 깃들어, “우리도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라는 사상이 들이 닥쳤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이 정확하게 말씀해주고 있듯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기” 때문에, 둘은 반드시 적대적입니다. 육체의 소욕도 이루면서 성령의 소욕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육체의 소욕”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지금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이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말하면서 왜 성령의 문제를 언급했는지 이해가 잘 되셨습니까? 그야말로 우리가 믿는 바가 ‘전 삶의 문제’임을, ‘성령님’을 들어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헛됨
이런 배경을 가지고 3절과 4절 말씀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께서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아마,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앞서 말했던 이런 관점으로 보지 않고 이 구절만 따로 떼서 파편적으로 읽으면, 사도께서 말씀하고 있는 이 이야기들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과거에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4절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과거에 “이같이 많은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는 괴로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제와 연관시키지 못하면 ‘그냥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나 보구나’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4절 말씀은 이 전체적인 주제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특히 4절은 3절과 연관성 속에 있지 않습니까? 사도께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이같이 많은 괴로움”은 사실은 3절의 언급, 그러니까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한 것” 때문에 받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께서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원래는 성령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는데, 이제 그렇게 성령으로 시작했던 것을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4절의 “이같이 많은 괴로움”이란, 단지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따르게 위해 받은 어려움”, 그러니까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인,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를 고수하기 위해 이들이 겪었던 어려움들입니다.
이것을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과거 사도께서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 생활을 잘 하던 성도 부부가 있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이분들은 비록 삶은 좀 어려웠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을 성령님께서 주시는 미래의 의의 소망에다가 두고, 지금의 육체의 만족에는 연연하지 않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사두었던 부동산이 올랐어!”라든가, “기도했더니 관절염이 나았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은혜로만”이라고 생각했던 부부가 주위 이야기에 슬슬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지만 매일의 삶이 주께서 주신 은혜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렇게 사는 자기들이 구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분들도 주변 사람들의 경향을 좇기 시작합니다. 새벽 기도를 백일 꾸준히 나가면 사업이 형통하고, 월삭 헌금을 빼지 않고 바치면 물질의 복이 들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목표를 세우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신앙 생활의 핵심이란 겉으로 보이는 교회의 여러 행사들에 빠짐 없이 잘 참석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신앙을 바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오직 믿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따라서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것은 자신의 과업을 의지하지 않는 것인데, 우리가 5장 5절에서 보았듯이, 이렇게 하는 이들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인데, 그것을 팔아먹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대신 육체의 소욕을 좇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자연스럽게 무엇이 없어지게 될까요?
네! 갈라디아서 5장 5절의 결과물인 6절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은 없어지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이 득세하게 되니까 관심과 초점이 자기에게로만 향하게 되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곧 ‘사랑 때문에 그들 속에 역사하는’(“역사하다”가 ‘에너지’-헬라어로-입니다!) 것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지향점이 바뀌었으므로 삶의 양태가 틀려지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이제 육체의 소욕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사도께서는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기 위해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받았는데, 이제와서 왜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무엇을 낳습니까? 믿는 것이 삶을 낳습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만이냐 율법의 행위도 포함이냐의 문제는 ‘신학 논쟁’이 아니고, ‘삶의 문제’입니다.
저는 어떤 성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돈 버는 것은 성도들과 잘 교제하기 위해서다. 성도들에게 열심히 나눠 주기 위해서다.” 이런 성도들의 삶이 (물론 이런 분들도 먹고 사는 문제에 돈을 써야만 되지만) 과연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데에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들과 그 삶의 양태에 있어 같을 수 있을까요? 심방을 다녀 보면 어떤 성도께서는 ‘내가 어떻게 교회에, 다른 성도들에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될까’를 항상 고심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삶은 어디에서 기초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을 믿고,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처음에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을 붙들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넘어져서 ‘육적 소욕을 좇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하죠? 율법의 행위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너희가 절기 잘 지키고, 할례를 받고, 이런 외양의 모양을 잘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냐?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넘어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께서는 “너희가 오직 믿음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많은 괴로움을 받았는데, 이제 그것을 다 헛되게 해 버렸느냐?”라고 책망합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이제 육체로 마치려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신앙이 단순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단색으로, 모노 톤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여러분의 삶은 울퉁불퉁합니다. 굴곡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좀 그럴듯하게 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 같다가, 또 어떤 때에는 ‘도대체 나는 왜 이런가?’ 싶을 정도로 삶이 엉망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종류의 신앙의 양태들이 우리들 삶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도께서 말씀하고 계신 이런 신앙의 거대한 한 줄기, 커다란 한 방향,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온갖 종류의 풍파와 다양한 감정들이 우리들 삶에 뒤섞여 있다고 해서, 우리들이 타고 가는 이 배의 전체 항로가 그 자잘한 일들로 인해서 크게 선회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배의 방향을 올바르게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이요 신학입니다. ‘무엇을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도께서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자잘한 문제에 있어서, 그러니까 어디 이상한 집회 같은 데 가서 성도들이 말씀 좀 몇 마디 들었다고, 그것 때문에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만난 문제는 이 배의 방향 전체를 다른 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즉 ‘은혜의 복음’을 ‘육체의 소욕’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문제를 만났기 때문에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바로 이 신앙과 신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데 집중하십시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 ‘바른 믿음’을 세우는데, ‘바른 교리와 신앙’을 세우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르게 설 때, 그제서야 비로소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있어서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올바르고 온전한 길 주시며, 우리들에게는 거기에 순종할 수 있는 참된 믿음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