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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시사중국(詩詞中國)
1900년 5월 28일(청광서26년), 당시의 대영제국, 아메리카합중국, 프랑스제3공화국, 도이치제국, 러시아제국, 일본제국, 이탈리아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등 8개 주요국가는 당시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짧은 몇달동안, 팔국연군은 신속히 수도 북경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황급히 도망쳤으며, 팔국연군이 북경에 진입한 후 방화약탈을 저지르고, 자금성과 이화원등 황가원림의 보물들을 약탈한다. 이번 전쟁으로 <신죽조약>을체결하게 되었으며,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팔국연군은 5만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겨우 2만여명이고 3만명이 되지 않았다. 인원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일본군으로 1만명이었다. 나머지 러시아군 4천명, 영국군 3천명, 미군 2천명, 프랑스군 8백명, 독일군 100명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라제국의 군대는 둘 다 합쳐도 100명이 되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참가한 이탈리아는 상징적으로 80명을 파견했다.
당시 청나라의 정규군은 북경, 천진, 및 화북지방에 배치된 군대만 하더라도 총인원수가 11만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의화단(義和團)의 민간역량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말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청나라군대는 모두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서양의 총과 대포에 맞섰던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비는 기실 아주 좋았다.
우리의 인상 속에 청나라군대는 당시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싸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총과 대포를 가진 서양군에게 일패도지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사실상 근본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팔국연군이 중국을 침략할 때, 청군의 장비는 이미 팔국연군에 비하여 전혀 못하지 않았다. 똑같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건 양무운동의 덕이다. 일찌기 1884년 중프전쟁이 발발했을 때 청군은 이미 총을 쏘기 시작했다. 1895년 청일전쟁때 청군의 장비는 심지어 당시의 일본보다 뛰어났다. 당시의 북양수군은 아시아제일함대로 불렸다. 특히 청군의 경무기, 활강총포가 이미 출현했다.
단지 청정부의 군대사상은 여전히 고대냉병기전쟁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변발을 머리에 남겼지만, 어떤 사람은 변발을 마음에 남겼다고 말했다.
청군의 장비
당시 청나라군대의 장비무기수준은 이미 세계선진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청군은 일찌감치 천진 대고포대(大沽砲臺)에 독일 크루프(hyssenKrupp)사의 대포를 설치해 두었다. 그리고 4문의 독일제조 어뢰함도 있었다. 대포+어뢰함으로 천진의 대고포대는 금성탕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팔국연군은 청군의 장비를 노획하고나서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기록에 따르면,
보병장비의 무기로는 단발소총, 독일마우저사연발소총이 모두 1만정, 기병장비로는 연발기병소총 1,400정, 장교장비로 6발짜리 권총, 윈체스트소총, Hotchkiss소총 및 소령의 맥심중기관총이 있었다. 3천미터내에서 65.8밀리강판을 관통할 수 있는 크루프대포, 매분 350발을 발사할 수 있고 사정거리가 2천미터인 Nordenfeld기관포등등이 있었다. 이들 무기는 당시로는 세계적 수준이었다.
팔국연합군의 총사령관 세이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시작때 의외로 청군의 이렇게 많은 선진무기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연합군 1만6천명의 군인들이 무장하는데 충분한 여유가 생다. 다만 아쉽게도 우리의 병사들은 한 사람이 겨우 두 개의 손만 가졌다."
이런 장비를 가졌으니 청군의 패배는 장비문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정부는 저항을 했던가?
한 달도 되지 않아, 대고포대가 함락된다.
두 달도 되지 않아, 천진이 적의 손에 넘어간다.
세 달도 되지 않아, 북경이 함락된다.
청군은 저항을 하긴 한 것일까? 실제로 저항을 하긴 했었다.
예를 들어,
1900년 6월 중순, 러시아해군장령의 지휘하에 연합하여 대고구포대를 공격했으나, 수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친다. 청군은 연합군의 함선 6척을 격침시켰고, 연합군 200여명을 사상시킨다. 격렬한 전투과정에서 수비장수 나광(羅光)이 총탄을 맞아 사망하자, 청군은 지휘관을 잃고, 대고포대는 함락되게 된다.
천진보위전에서, 동복상(董福祥)은 의화단의 일부를 이끌고 노용두기차역을 공격하여 러시아군 500여명을 사상시키고, 여러번 기차역을 점령한다. 장덕성(張德成)은 의화단과 청군의 일부를 이끌고 자죽림을 포위공격하며, "화우진(火牛陣)"으로 지뢰지구를 처리하고, 조계지역으로 쳐들어간다. 섭사성(聶士成)의 부대는 성의 남쪽 해광사(海光寺)일대를 굳게 지켰고, 마지막에 섭사성은 총탄 7발을 맞고 내장이 터진 상황에서도 전투를 계속하다가 결국 출혈과다로 사망한다. 팔국연합군은 마지막에는 독가스탄으로 천진을 함락시킨다.
사상자수를 보자.
일본군: 사상자 600여명, 영국군: 사상자 60여명, 프랑스군: 사상자 50여명, 러시아군: 사상자 300여명, 독일군 사상자 100여명, 미군: 사상자 40여명, 이탈리아군: 사상자 10여명, 오스트리아군: 사상자 8명. 팔국연합군은 합쳐서 7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다. 청군은 20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다.
낭방대첩: 팔국연합군 332명 부상, 62명 사망, 의화단 사상자 수천명가량.
팔국연합군의 대고구점령: 팔국연합군 사상 255명, 일본해군대좌 사망, 6 척의 전함손실. 청군 사상자 700여명.
팔국연합군의 천진점령: 팔국연합군 사상 750여명, 러시아군은 다시 200여명 사상. 의화단과 청군: 개략 수천명 사상.
노용두기차역쟁탈전: 팔국연합군 500여명 사상
전체 팔국연군과의 전쟁에서 팔국연군은 일부 군대를 손실했고, 청나라는 이미 의화단의 사상자가 더욱 많았고, 수도북경을 잃게 된다.
장비도 좋고, 인원수도 많았다. 그리고 저항까지 했었는데 왜 참패하게 되었을까?
결국 아래의 몇 가지 원인으로 귀결된다.
첫째, 서태후의 통치하의 청정부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지시가 바뀌었다. 서태후는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완전한 작전방침은 세우지 않았다. 오전에는 공사관을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오후에는 공사관에 양식과 물을 보내주라고 명령한다. 의화단 운동에 대하여 지지할 때는 조서를 내렸지만, 문제가 생기면 교살해버린다. 그러다보니 인심이 흉흉하고 불안해지면서 근본적으로 제대로 싸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둘째, 청군은 훈련이 부족했다. 비록 무기장비는 괜찮았지만,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무기장비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팔국연군의 병사가 이렇게 회고했다. 천진보위전투에서 청군의 총탄이 비오듯이 쏟아졌는데, 사람에게 명중한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현대화훈련이 결핍된 군대에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셋째, 아주 중요한 점은 비록 청군의 인원수가 많았지만, 통일된 지휘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되고 엄밀한 참모시스템도 없었다. 청군은 각자 싸웠고, 혼란스러웠다. 더욱 심한 경우는 청군과 의화단이 서로 불신하였고, 장령과 장령, 관리와 관리간에도 내부적으로 싸우고, 배척하고, 모함하는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천진보위전때 수비장수 섭사성은 의화간과 계속 갈등이 있었다. 의화간을 권비(拳匪)라 여기고, 그들은 나라와 국민에 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의화단은 섭사성이 사수하고 있을 때 후방을 기습한다.
섭사성의 전군(前軍)이 그 2만명도 되지 않는 팔국연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원세개(袁世凱)의 우군(右軍)과 영록(榮祿)의 중군(中軍)은 꼼짝하지 않았다. 송경(宋慶)의 좌군(左軍)은 청일전쟁때 입은 상처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동복상의 후군(後軍)은 기본적으로 하급군대였다. 위로는 청나라조정의 배척을 받고, 아래로는 우군들이 싫어했다. 안팎으로 팔국연합군과 의화단의 협공을 받았으니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 팔국연군의 전투과정에서 동남호보(東南互保)로 국면이 혼란했다. 먼저 청군과 의화단이 싸우고, 의화단과 팔국연군이 사우고, 마지막에 청군이 팔국연군과 싸우고, 청군과 의화단이 다시 싸웠다. 혼란하기 그지없었고, 전투역량은 쓸모없이 소모했다.
넷째, 당시의 백성들은 정말 실망했다. 청나라정부의 백성들에 대한 착취로 이미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진 상태였다. 의화단은 더더욱 토비처럼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팔국연군이 북경을 점령할 때,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사다리를 놓아주었을 정도였다.
수능재주역능복주(水能載舟亦能覆舟). 청군의 참패는 필연적인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