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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창 29:31-35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 29:31-35 / [레아가 자식들을 낳다]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업신여김을 받을 뿐 아니라 미움까지 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는 레아에게 자식을 낳게 하셨다. 그러나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레아는 `내가 이렇게 구박받는 것을 아시고 여호와께서 나를 돌아보셨구나. 이제는 남편이 나를 아껴주겠지' 하면서 `야, 아들이로구나'라는 뜻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어 불렀다. 33) 레아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내게 또 아들을 낳게 하셨구나. 남편한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움만 받는 것을 그분께서 돌아보신거야' 하고는 `들어주셨다.'라는 뜻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지어 불렀다. 34) 레아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레아는 `내가 이렇게 남편에게 아들을 셋씩이나 낳아 주었으니 남편이 이제는 나를 구박하지는 못하겠지. 어쩔 수 없이 내게 매달릴거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묶이다.'라는 뜻으로 그 아이를 레위라 이름 지어 불렀다. 35) 레아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이번에도 또 아들을 주시다니 나, 그분을 항상 찬양하리라.' 하면서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유다라 지어 불렀다. 그때부터 레아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야곱의 두 번째 7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연약하고 소외된 이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레아의 출산(31-32)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보시고라는 말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뜻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받아들이시는 행동, 긍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레아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혼한 여인에게 자녀를 낳는 것보다 더 큰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자신이 아들을 낳은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레아는 라헬과 비교해서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동등하게 여기십니다. 오히려 간절한 기도와 소망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위로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은혜의 이름들(33-35) 본 단락에서 이제 태어나는 자녀들의 이름과 그 의미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다), 시므온(-들으심), 레위(-연합함), 유다(-찬송함). 이렇듯 레아는 아들들의 이름의 의미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과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할 것과 아들을 출산한 기쁨에만 젖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야곱의 아들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은 정욕과 탐욕으로 무한의 경쟁을 강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와 사랑 그리고 관용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큰 민족과 나라를 이룰 때 각 지파 조상들의 이름의 의미와 그 시작을 기억하고 가슴 깊이 되새겼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향해 야곱을 이끌고 계셨고 다음을 예배하고 계셨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 남기신 은혜의 흔적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의 눈을 가리거나 사막과 같은 사방이 똑같은 곳을 걸으면 아무리 똑바로 걸으려 노력해도 결국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이를 ‘윤형 방황’이라 합니다. 인생길 속에서도 목표를 잃게 되면 종종 ‘윤형 방황’을 겪곤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는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의식하고 지향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설 교 >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리라
창 29장 31~38절 / 피영민목사
서론
오늘의 본문 창세기 29장 후반부터 30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두 지파 조상이 누구에게서 탄생했고,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민족의 뿌리’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레아, 라헬, 실바, 빌하라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들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에게 이렇게 많은 자식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야곱과 아내들이 생물학적인 능력의 탁월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모(The Plan of God) 즉,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 가문을 큰 민족이 되게 하고,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 민족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또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종국에는 이 민족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셔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건져 영생을 주시고 영생할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운행하시는 근본 목적은 유대인 중에 남은 자와 이방인 중에 택함 받은 자를 모두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고,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은 역사관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중사관을 받아들였습니다. ‘민중사관’이라는 것은 해방신학의 사관이고, 막스주의 사관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를 쳐서 그들의 것을 빼앗아 평등을 누리고, 결국에는 평등사회를 이루어 유토피아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수많은 역사가들이 이런 민중사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교과서도 이런 식으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민중사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역사관은 ‘구속사관’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나라를 이루고자 하신다.” 이것이 역사가 존재하는 근본목적이라는 것이 바로 ‘구속사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택하여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가문이 여러 가지 죄와 허물과 문제가 많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이 가문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시편 33편 11절에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넘어지는 법이 없고, 쓰러지는 법이 없고, 실패하는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 어떤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다 극복하시고 여호와의 도모를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Ⅰ.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연약함’을 넘어서서 영영히 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3대에 걸쳐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불임의 문제였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30절에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도 불임의 문제가 있었고, 창세기 25장 21절에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불임이었습니다. 또 창세기 29장 31절에도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라헬도 잉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가정은 하나님이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 위해 택하신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3대에 걸쳐 불임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유전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며느리들이 무슨 유전적인 원인이 있는가 생각해 볼 때, 그들은 일가친척이기 때문에 유전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유전적인 문제나,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에 자녀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시고 태를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자녀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은 단연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네 아내들이 자녀를 부지런히 낳았습니다마는 성경을 가만히 보면 여자가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를 열어 낳게 하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9장 31절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29장 32절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29장 35절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30장 2절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0장 6절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30장 18절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30장 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태가 닫히고 열리고 하는 문제도 단순히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물학적인 무능과 연약과 불가능이 있어도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0장 14~21절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월 말 또는 6월 초에 해당하는 맥추절 즈음에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합환채를 얻었습니다. 합환채는 산삼과 비슷해서, 당시에는 임신을 촉진시키는 최고의 명약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은 어려서부터 그런 것이나 찾고 다니는 것이 뭔가 좀 이상하지만 그것을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습니다. 레아에게 드리니 라헬이 그것을 보고 그 합환채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레아가 그냥 주겠습니까? 그래서 거래를 합니다. 그러면 너는 남편과의 동침권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합환채는 라헬이 갖고, 남편과의 동침권은 레아가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레아에게도 남편이 되고, 라헬에게도 남편이 되지만 라헬이 독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레아는 남편과의 동침권도 합환채라는 뇌물을 써야 얻을 수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합환채를 먹은 사람은 분명히 라헬이었는데, 레아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것도 둘씩이나 더 낳습니다. 레아가 맨 처음 네 아들을 다 낳았습니다. 르우벤, 시몬, 레위, 유다 모두 레아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합환채를 라헬에게 내어주고 생산이 끝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둘을 더 주셨습니다. 그 아들들이 잇사갈, 스불론입니다.
합환채 먹은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먹지 않고 남편과 동침한 레아는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합환채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산삼을 먹는다고 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태를 여셔야 자녀를 얻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명백한 진리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생물학적으로 태의 문이 닫혀 있는 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태문을 열어 주시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안 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능히 되는 줄로 믿으시고, 이번 산상집회에도 올라와서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 해 전에도 우리 권사님 며느리가 결혼한 지 10년 동안 자녀가 없어서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응답을 받고 자녀를 낳지 않았습니까? 태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합환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진리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자녀들은 모두 그에 맞는 목적을 가지고 주신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녀들은 나의 생물학적인 능력으로 낳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잘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자녀양육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능력이 없어도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불임이라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주겠다고 하시면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Ⅱ.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감정’을 넘어서서 영영히 서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여기 창세기 29장 30절을 보면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로 레아와 먼저 결혼하게 되었지만, 야곱의 마음은 항상 라헬에게 있었습니다. 라헬이 첫사랑입니다.
어떤 남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자기의 첫사랑을 잊지 못해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첫사랑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끊어내야 합니다. 다 지나간 첫사랑을 기억해 뭐합니까? 그런데 야곱은 지금 여전히 자기의 첫사랑 라헬을 사랑하고, 레아와 결혼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레아가 첫 아내이고, 라헬은 둘째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마음은 라헬에게 있습니다. 레아는 무시되고, 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총이 없다는 것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레아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레아에게 여섯 아들을 주시고, 한 명의 딸을 더 주셨습니다. 야곱이 레아를 원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이토록 자식을 많이 낳을 수 있었습니까? 인간이란 이렇게 속을 뒤집어 보면 사랑하지 않아도 낳을 것은 다 낳고, 아주 음흉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지만, 라헬은 무자합니다. 그러니까 야곱 가정에는 어머니가 네 명이나 되는 것입니다. 네 명이나 되도 그 중에 대표 어머니는 레아입니다. 어머니회 회장 레아, 부회장 라헬, 총무 실바, 서기 빌하. 한 집안에 어머니회가 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레아에게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레위가 레아의 아들이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장들은 모두 레아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유다도 레아의 아들이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도 다 레아의 후손입니다. 레아는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했어도 그 몸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들과 제사장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정을 넘어서서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성경전체에 흐르는 맥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메시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아벨에게 있었습니다. 또 이삭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은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본처가 둘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항상 라헬에게 있었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은 레아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레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계획은 설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영영히 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은 실패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영영히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레아는 얼마나 불쌍한 여인입니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편과 동침하는 것도 합환채라는 뇌물을 줘야 얻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심적인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레아의 그 고통스러운 심정이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마다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발음이 히브리어로 “그가 나의 괴로움을 보셨도다”와 비슷해서 르우벤은 ‘괴로움’이라는 뜻도 됩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 시몬은 ‘듣다’라는 히브리 동사 ‘샤마’에서 나온 단어인데,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아뢰었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아들 레위는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내가 이제부터는 남편하고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찬송’이라는 의미인데, 아들 넷을 낳고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게 되어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레아가 나중에 합환채를 동생에게 주고, 남편과 동침권을 얻어서 두 명의 아들을 보너스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 잇사갈, 열 번째 아들 스불론입니다. 잇사갈은 “하나님이 보상해 주셨다”는 의미이고, 스불론은 ‘명예’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여섯 아들을 낳아주었으니 내 남편이 이제 나를 명예로운 여자로 여겨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레아는 자식들 이름 짓는 것을 봐도 괴로운 여자이고, 사랑받지 못한 여자이며, 남편과 연합되지 못한 여자이고, 남편으로부터 명예로운 대접을 받지 못한 여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레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레아의 인생에 고달프고 슬픈 일들이 많이 있었어도 하나님은 레아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얻도록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감정을 넘어서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이 자주 변합니다. 하루아침에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아무리 사이가 좋은 부부라고 해도 곧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그만큼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안정되지 못한 감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상황에 따라 실현되거나 그렇지 않는 불안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은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무능과 감정을 넘어서서 영영히 서는 것입니다.
Ⅲ.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죄성’을 넘어서서 영영히 서는 것이다.
야곱의 가정은 역기능 가정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은 항상 마음속에 쓴 뿌리를 품고 있었습니다. “나는 외삼촌에게 속았다”, “나는 첫 아내 레아에게 속았다”는 분노와 쓴 뿌리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레아에 대한 분노를 평생 삭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아만 보면 성질이 나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남을 속일 때는 재미있었지만, 자기가 속으니 쓴 뿌리와 분노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야곱은 항상 성질을 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이 딱 한 마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마디가 성질내는 말입니다. 30장 2절입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은 성질내는 말을 딱 한 마디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입만 열면 성질부리는 사나이였습니다.
또한 야곱은 가정에서 리더십도 없습니다. 자식 이름은 보통 누가 짓습니까? 아버지가 짓는 것 아닙니까? 한자와 발음, 그리고 뜻을 고려해서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다 어머니가 지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자식들 이름 짓는 데 한 번도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아무런 리더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분노가 있고, 가정에서 아무런 리더십도 없습니다. 레아와 라헬 두 아내는 자매였지만, 남편을 두고 경쟁하고 시기하며 서로 싸웁니다. 레아는 자식이 많았지만, 남편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편 사랑을 원하고, 라헬은 남편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원하고, 서로에게 없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욕심을 가지고 경쟁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 조상들의 이름을 자세히 보면 ‘인간의 죄성’이라는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 괴로움, 다툼 등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열 두 아들 중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아들은 라헬이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아내로 주어 낳은 자식들입니다. 다섯째 아들인 단은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셨도다”는 뜻으로 ‘억울함’을 의미합니다. 라헬의 마음에는 억울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0장 7절의 빌하가 낳은 야곱의 여섯 번째 아들 납달리는 “내가 형과 경쟁해서 이겼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투쟁’이라는 뜻입니다. 독재자 히틀러가 쓴 자서전이 ‘나의 투쟁’이라는 책 아닙니까? 라헬은 형하고 투쟁한 것입니다. 또 창세기 30장 24절에 드디어 라헬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하나 더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이름에도 라헬의 욕심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인간의 죄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름은 나중에 레아가 자기 아들 넷을 낳고 또 라헬의 여종이 둘을 낳으니까 자기 여종 실바를 주어 얻게 한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갓과 아셀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아들 갓은 ‘행운’이라는 의미이고, 그리고 여덟 번째 아셀은 ‘행복’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성이 없는 이름은 갓과 아셀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갓과 아셀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 속에는 죄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도 선하고 거룩한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지은 죄로 인해 마음에 시험이 들고, 목사님이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그만 믿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의 교회만 죄가 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속에 죄는 계속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는 곧 죄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지금만 죄가 큰 것이 아닙니다. 1세기에도 그랬고, 15세기, 16세기에도 그랬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불태워 죽인 사람들도 다 교회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을 많이 불 태워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역사는 곧 죄의 역사입니다.
중세기에는 특별히 교회의 죄가 싫어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미니칸, 프란시스칸, 어거스티니안과 같은 종단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먼저 남자들이 종단을 이룹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우리도 수녀원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옆에 수녀원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세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아원입니다. 정확하게 생겼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역사는 곧 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죄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거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단 1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죄가 크면 세상은 깨끗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를 다 밝히면 1초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할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모두 죄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된 것은 우리가 의로워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빌려 의인이 된 것입니다. 법적으로만 의인이 된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 가운데에도 끊임없이 역사하셔서 택한 백성을 건져내 구원하시는 구령의 역사를 계속해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도모는 인간의 죄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무능하고, 수시로 감정의 지배를 받고, 성령을 안에 모시고 살면서도 남아 있는 죄성을 따라 죄를 짓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자신만 보고 있으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이 죄 많은 야곱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야곱도 쓰셨는데, 나같이 약하고 허물 많고 죄 많은 사람도 영광스럽게 쓰실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014년도에도 이 세상은 엄청나게 변할 것입니다. 정치도 요동하고, 경제도 어렵고, 문화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러나 영영히 서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호와의 도모는 변하지 않고 영영히 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도모는 택한 백성들을 건져내어 구원하시고, 택한 백성이 다 구원받으면 그 때는 구원의 문을 닫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어 불로 하늘과 땅을 깨끗이 청소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2014년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동참하시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 일에 헌신하는 복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의 자녀들
이윤재목사 / 창 29:31-35, 30:22-24
야곱의 자녀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 세상에 가정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래전에 미국 뉴욕 부둣가에 수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까지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1852년 4월 10일, 알제리에서 사망한 한 미국인의 유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존 하워드 페인, 그는 유명한 정치가도 위대한 명망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노래 하나를 작사했을 뿐입니다. 그 노래는 “즐거운 곳에서는”입니다. 하워드 페인은 이 노래를 작사하고 군대에 입대한 후 알제리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노래를 아십니까? 5월, 가정의 달을 시작하면서 우리 한번 불러 볼까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뿐이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가정만큼 좋은 곳은 없습니다. 가정이 완전한 곳은 아니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에 가정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가정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부모와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자녀를 태어나게 하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은 짓는 방법이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직접 지으셨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짓고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지었습니다. 그러면 아담 이후의 사람은 어떻게 지으십니까? 부모를 통해 짓습니다.
창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아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입니다. 이 말은 “없는 데서 있게 한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부터는 다릅니다. 창4:1을 보실까요?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아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 “득남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원어는 “카니티”입니다. 이 말은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가인 부부가 자녀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고 유에서 유를 만든 것은 사람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시거나 부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창조하시거나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입니다. 부모를 통해 사람을 간접적으로 창조할 때 부모는 하나님의 창조의 대행자가 됩니다. 그래서 부모는 땅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탈무드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무 데나 계실 수 없어 우리에게 어머니를 주셨다”. 부모는 인간이 된 하나님입니다. 오늘 가정의 달 첫 번째 시간으로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모델로 삼은 가정은 야곱의 가정입니다. 야곱과 자녀들간의 관계를 통해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자녀가 많아야 행복합니다.
야곱의 가정의 행복을 생각할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녀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모두 13자녀를 두었습니다. 아들 12, 딸 하나입니다. 야곱은 모두 네 아내가 있었는 데 큰 부인 레아에게서 7명, 작은 부인 라헬에게서 2명, 그리고 몸종 빌하와 실바에게서 4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아들, 딸 모두 13명, 오늘 우리에게 13명은 매우 많은 숫자입니다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 시골 마을에 딸만 아홉을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낳은 가정이 있습니다. 그때는 가난한 시대이기 때문에 그 부모가 10남매를 키우는 데 정말 힘들었지만 요즘 명절 때 시골에 가면 엄청나게 다복합니다. 딸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손에 손을 잡고 한 60명이 들이닥치면 할머니, 할아버지, 10남매 키울 때 괴로움은 다 잊어 버리고 함박 웃음이 됩니다. 마을에서 제일 행복하고 큰 부잣집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저출산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자녀를 안 낳는지 지난 10년간 서울지역의 유치원 30%가 폐업했고, 2008년 이후 초등학교 학생 수도 한 반에 30명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서울 강남지역에서까지 초등학교가 통폐합되고 경북, 전북은 큰 도시를 제외하면 산부인과가 단 한 곳도 없는 지역도 많다고 합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The World Factbook)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14년 출산율은 1.15명으로 전 세계 224국 중 219위입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5번째로 자녀 안 낳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인구억제 정책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먹고 살기는 힘들고 인구는 많아지고 그래서 정부에서 이런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그런 인구억제 정책이 200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정부는 이렇게 홍보했습니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하나 낳고 알뜰살뜰. 사랑 모아 하나 낳고, 정성 모아 잘 키우자“. 그렇게 억제하다보니까 너무 안 낳습니다. 그래서 2천년부터 정부가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촛불보다는 여러 개의 촛불이 더 밝습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저, 출산했어요.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정부 인구장려 정책은 이미 시기를 놓쳤답니다. 인구 정책이 효과를 보려면 한 30년은 지나야 하는 데 너무 늦게 인구 장려 정책을 쓰는 바람에 그 효과를 보려면 앞으로 20년 이상이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출산율은 1970년 4.53명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출산을 억제하는 바람에 1980년에 2.63명, 1990년 1.60명, 2000년 1.47명, 2009년 1.19명, 2014년 1.15명으로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얼마나 출산율이 적은지 도표를 통해 보시겠습니까? 우리 나라 출산율을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등과 비교했습니다.
프랑스 1.99명, 영국과 스웨덴 1.94명, 한국 1.15명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적은 영국, 프랑스보다 적습니다. 문제는 영국, 프랑스는 점점 많아지는 데 한국은 점점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자녀를 안 낳습니까? 가장 큰 문제가 경제문제라고 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아이낳기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녀를 기르는 데 많은 돈이 듭니다. 통계를 보니까 자녀 한 명을 대학 졸업 때까지 양육하는 데 2억 6,00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2명이면 3억 2천, 3명이면 5억 8천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출산하려면 정부에서 많은 정책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임신 8개월이 되면 출산 준비 비용으로 890유로, 약 130만원을 받습니다. 출산휴가는 둘째 아이까지 16주, 셋째 아이는 무려 26주까지 쓸 수 있습니다.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월 560유로, 약 81만원을 지급하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는 비용 역시 전액 지원합니다. 경제적 지원이 출산을 높이는 예는 우리 나라도 있습니다. 전라남도 강진군입니다. 강진군은 지자체에서 신생아 양육비로 첫째 아이는 연간 120만 원, 둘째 아이는 연간 240만 원, 셋째 아이 이상은 30개월까지 720만원을 지원해 줍니다 또 임신부의 초음파 검진비 6만원, 출산준비금 20만원, 출산용품 세트 15만원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습니다. 혹시 자녀를 낳기 원하는 가정은 강진으로 이사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안 낳는 이유가 경제문제라는 것은 믿는 크리스쳔 입장에서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출산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이 땅에 많은 자녀가 태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생육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루”, 씨를 많이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우선 수가 많아야 됩니다. 생육 다음에 번성입니다. “번성하라”는 말은 ”레부“, 점점 커지는 것을 말합니다. 수가 많아지면 점점 커집니다. 경제도 커지고, 축복도 커지고, 행복도 커집니다. 마지막이 “충만”입니다. “충만”은 “말레우”입니다. 이 말은 “언덕”이란 말입니다. 수가 많아지면 점점 커져서 마지막에 언덕처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생육하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후의 대책까지 책임지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까지 다 떠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아무 대책없이 아이만 낳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생육하는 일이요, 하나님이 하실 일은 돌보고 책임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눈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경제문제때문이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 진실로 물어 봅시다. 자녀를 내가 낳았다고 내가 키웁니까? 내가 먹입니까? 내가 장래를 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자녀는 결코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시127:3절에 말했습니다. “자녀는 여호아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녀는 기업입니다. 자녀 하나 양육하는 데 2억 6천만 든다고 합시다. 한 기업이 일생동안 번 돈이 2억 6천만원 뿐이겠습니까? 그나마 그 기업도 “여호아의 기업”이라고 하지 아닙니까? 인간이 기업의 주인으로 일해도 열심히만 하면 기업이 성공하는 데 하나님이 기업의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인인 데 왜 우리 자녀를 2억 6천만원에 묶습니까? 제대로 된 자식 하나 길러 김연아같은 딸 낳고 반기문 같은 아들 만들면 2억이 무엇입니까? 세계적인 인물, 대박이 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한상수, 이정해집사님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6남매가 있습니다. 고3에서 유치부까지 있습니다. 이들을 얼마나 믿음으로 키우는지. 6남매가 매주 금요 심야기도에 나옵니다. 이 두 부부에게 6남매만한 재산이 어디 있습니까? 최고의 재산입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경제 때문에 출산 안하다 보면 나중에 사람이 없어서 정말 경제가 죽습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왜 생긴지 아십니까? 저출산 고령화로 경제인구가 적어졌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먹고 살기 어렵다고 아기 안 낳다 보니까 나중엔믄 경제인구가 없어서 경제가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30년후에 군대갈 사람이 없어 용병을 써야 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더 문제입니다. 인구가 이대로 가면 10년 후에 한국교회는 지금의 반으로 줄고 20년 후에 한국교회는 1/3로 줍니다. 이미 농촌교회의 90%는 교회학교가 없어졌고 서울 강남지역도 반절이 교회학교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를 안 낳기 때문입니다. 경제 때문에 아이 안 낳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믿음 때문에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자녀출산은 이제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여 교회의 존립에 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잘한 것은 자녀가 13명 낳은 것입니다. 야곱은 그 자녀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 자녀 때문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세우고 요셉 때문에 애굽을 살리고 다윗, 솔로몬이후 40명의 왕이 생가고 그 뿌리에서 결국 예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어떻게 자녀들 많이 낳겠습니까? 권사님들이 잘못 아멘하면 내년에 쌍둥이를 낳는 수가 있습니다. 젊은 부부들이 아멘하세요. 일단 믿음으로 아멘하세요.
부부관계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생각할 두 번째가 있습니다. 야곱은 13남매를 낳았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13남매를 자세히 드려다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에 따라 그들이 잘되기도 하고 못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야곱의 자녀들은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됩니다. 우선 아내가 아닌 종의 아들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등중에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 납달리, 갓, 아셀은 그 후의 역사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지 못했습니다. 다음, 레아와 라헬의 자녀들을 비교해 보면 큰 부인 레아의 자녀들은 문제가 많이 드러난 반면에 라헬의 자녀들은 잘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아의 큰 아들 르우벤은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아버지의 첩을 범했습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는 여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했을 때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겜사람들을 대량 학살합니다. 넷째 아들 유다 역시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다섯, 여섯째 아들인 잇사갈, 스불론도 크게 사용되지 못합니다. 그에 비해 레헬이 낳은 두 아들은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 모진 고생을 했으나 끝끝내 고난을 이겨내고 흉년에거 애굽을 살리고 결국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베냐민은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죽지만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의 선조가 되고 그 뿌리에서 북 이스라엘 왕조가 생겨나며 나중에 사도 바울의 선조가 됩니다. 왜 이렇게 자녀들의 차이가 날까? 한마디로 야곱과 그 아내들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자, 야곱에서 두 아내가 있었지 않습니까? 레아와 라헬입니다.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는 데 어쩌다 결혼했습니다. 첫날 밤 일어나 보니 레아입니다. 왜 라헬과 결혼했는 데 레아냐고 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사랑없이 살았습니다. 사랑을 못 받으니까 레아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 눈물바람 많이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거기서 나은 자식들은 사랑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레아가 나은 7남매 보세요. 대부분의 성적 범죄에 빠집니다. 르우벤이 그렇고 유다가 그렇게 디나가 그렇습니다.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성폭행당해서 동정이 가긴 하지만 행동이 올바랐으면 밖에 나갔겠어요? 레아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을 요즘 심리학에서 “대상관계이론”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은 영향이 어떻게 나의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주느냐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부부가 서로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자녀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야곱이 라헬은 얼마나 사랑합니까? 만날 때부터 야곱이 숨질 때까지 야곱은 한번도 라헬을 잊지 못합니다. 야곱이 일생 한번도 운 적이 없는 데 딱 한번 웁니다. 하란에서 처음 라헬을 만날 때입니다. 창29: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렇게 무뚝뚝한 야곱이 우는 모습은 거의 코미디 수준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애굽에서 죽기전에 요셉에게 한 말입니다. 창48: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 라헬이 나를 따르는 중에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야곱의 마지막 추억은 자기 아내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왜 요셉이 잘 될 수 밖에 없을까요? 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 높아진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사랑하신다. 어머니는 사랑받을만한 분이고 아버지는 존경할만한 분이다. 나는 그들의 아들이다”. 라헬도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니까 얼마나 그 사랑을 아들에게 쏟아 부었을까요? 그래서 요셉이 잘된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자 열등의식도 많고 자존감도 낮았습니다. 뭔가 부족한 2%의 사랑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 사랑의 결핍이 레아의 자식들로 하여금 사랑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갈구하게 만들었고 그 것이 성적 범죄로 나타났습니다. 르우벤에 그랬고 유다가 그랬고 디나가 그랬습니다. 사랑을 못받으면 그 불만을 분노로 폭력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스므온과 레위의 집단 학살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자녀교육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5월에 우리 교회에서 4일4색 학부모 세미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자녀교육의 원리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모습을 보고 아빠를 존경할만한 분으로, 엄마를 사랑받을만한 분으로 알고 절대 그들 자녀는 잘못되지 않습니다. 부부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라도 이제 사랑하고 살겠습니까? 부부들이 아멘하세요.
부모의 말이 자녀를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말입니다. 야곱의 13아들들을 자세히 보면 그 부모가 말한대로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말입니다. 100% 그대로 됩니다. 창49장에서 야곱이 죽어가면서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먼저 큰 아들 르우벤에게 말합니다. 창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같았으니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자지만 장자의 구실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는 본토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지금의 오르단 땅을 성급히 분배받더니 언제 사라진지도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49:7절에서 “너는 나뉘어지고 흩어지리라“ 했습니다. 그 결과 시므온지파는 지금의 브엘쉐바 남방 사막지역에 분배받아 역사속에서 소리도 없이 흩어지고 레위지파는 성전에서 일하는 복을 받기는 했지만 땅 한평없이 전국 48개 성읍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의 위력은 야곱이 자식들에게 한 말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이 그 아내 라헬에게 한 말도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란에서 라헬이 그 아버지의 드라빔을 숨겼을 때 야곱은 그것을 누가 숨긴지도 모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31: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라”. 결과적으로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었습니다. 참 말이 무섭습니다.
대구 노인보호전문기관의 ‘노인학대 현황자료’에 따르면 가해자의 70%가 아들과 딸이며, 그 중에서 언어폭력이 40%로 나타났습니다. 형사정책연구원은 전체 살인사건의 24.9%가 가족 안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 중인 살인범의 53.4%가 남편살해범이라는 사실은 가족 관계와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보여줍니다. 서울송파경찰서는 금술 좋은 부부였지만 “남자 구실도 못한다”라는 아내의 말에 둔기를 휘둘러 아내를 살해한 김기섭 가명.65씨에 대하여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수원지검 성남시청은 “너 같은 딸 싫다 창피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집에 불을 지른 박미옥양에 대하여 존속살해와 현주건조물방화 치사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모든 것이 말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으며 특히 부모의 말은 자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충북교육청에서는 초.중.고등학생과 교직원, 학부모등 1,085명을 대상으로 “학교 언어문화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0.2%에 해당하는 544명의 학생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넌 할 수 있어”. 다같이 “넌 할 수 있어”. 어느 집에 자신감이 없는 초등학생을 둔 아빠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난 바보인가 봐”. 아빠가 말했습니다. “넌 바보가 아니야”. 아들이 또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난 진짜로 바보예요. 난 공부도 못하고 친구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넌 바보가 아니야. 너희 선생님도 며칠 전에 나에게 너는 매우 똑똑한 아이라고 말했어”. “아니예요. 아빠. 그것은 선생님이 한번 해본 말이예요. 나는 정말 바보예요”. 아빠가 가만히 듣다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넌 바보가 아니라니까. 이 바보같은 놈아”.
성악가 ‘카루소’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노래에 소질이 없다는 소견을 듣고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성악가가 될 수 있어. 엄마는 믿어”. 그 말에 카루소는 세계적인 테너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말뿐 아니라 어머니의 말도 자녀에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 23절입니다. 창30: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결국 요셉은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의 부끄러움, 어머니의 부끄러움, 이스라엘 민족의 부끄러움을 모두 다 씻었습니다. 말대로 됩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버지의 말대로 요나단은 전쟁중에 죽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여호아께서 네 대적을 치실지어다” 했습니다. 다윗의 대적은 그 아버지 사울이었습니다. 아들의 말대로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대로 이삭이 되고 이삭의 말대로 야곱이 된 것같이 여러분의 말대로 여러분의 자녀가 되리라고 믿습니까? 우리가 자녀에게 항상 할 말이 있습니다. 야곱이 실제 그 자녀들에게 한 말입니다. 20년만에 만난 에서가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창33“5,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아멘. 여러분의 자녀에게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너는 나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의 자녀야”. “너는 잘 될거야. 영어로 할까요? You shall be well. 너는 잘 될거야. You can be done. 너는 잘 할거야”. 잘 될거야., 잘 할 거야.
가정의 달, 5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많은 자녀를 주시기 바랍니다. 부부 사랑이 최고의 자녀교육임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말이 자녀들의 앞길을 이끌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받는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자!
창 29:31-35 / 이정원목사(희망의교회)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사람 믿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목사가 사람을 믿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목회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속고 속이면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목사만큼은 성도들을 믿어야 하고, 성도들로부터 신뢰받는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지 말지 말라는 이 말에는 정말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목회를 해오면서 이 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원칙은 비단 목회하는 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사람을 믿고 의지하다가 낭패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배신할 때,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실망과 분노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을 경계하는 눈초리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가 연약하고 거짓되며,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늘 의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본래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조건을 달지 말고,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 않게 될 것이며, 실망을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가운데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야곱의 가정
야곱은 원치 않게 두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으며,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활한 라반의 음모에 걸려 언니 레아와 동생 라헬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결혼생활이 어땠을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아니 라헬만 사랑했고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매인 두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들이 되어,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경쟁적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자기들의 하녀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면서까지 아이 낳기 경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4명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고, 네 명의 아내들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야곱은 오직 라헬과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의 음모로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아내들의 시기와 경쟁으로 인하여 또 두 명의 아내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4명의 아내를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야곱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의 가정을 통하여 열두 지파를 이루어가셨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가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흠이 많은 가정을 택하시고 축복해주셨을까요? 왜 이러한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고, 전혀 믿음이 없던 자를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도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무한하신 사랑을 보여줍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늘 이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레아는 사랑하지 않고 라헬만 사랑하는 야곱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총각 시절부터 라헬을 사랑했으며, 레아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의 음모에 걸려 억지로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큰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았던 레아와 속아서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레아는 본래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너무 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볼 때 야곱의 처지도 딱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고 소외시킨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레아가 일단 그의 아내가 되었다면, 야곱은 남편으로서 마땅히 성의를 다해 레아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이상형을 찾아서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아내나 남편이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이유로 이혼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가려면 배우자를 존중해주고,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채워주어야 합니다. 결혼한 후 상대방의 부족한 점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사랑하지 않거나 이혼할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일단 결혼했으면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가려줌으로써, 그 배우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총각시절에 공주 같은 처녀를 이상형으로 정해놓고 결혼 대상자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신부감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그 사모님이야말로 그 목사님에게 꼭 필요한 스타일의 배우자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일을 잘 벌이고 다니지만, 뒷감당을 통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을 해놓고도 까맣게 잊어버려서 상대방을 황당하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 사모님이 그 부족한 부분들을 완벽하게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나가고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자기의 배우자를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부부는 서로가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서로에게 더욱 소중한 배우자가 될 수 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비난하기만 한다면, 갈수록 비참해지고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부는 서로에게 매력 있는 배우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사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풀고 퍼지기 시작하면 곤란합니다. 아내가 단정하지 못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생활하면서 남편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항상 아내가 못생겼다고 구박했습니다. 구박을 견디다 못해 아내는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나들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모처럼 화장을 하고 깨끗하고 좋은 옷을 차려 입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서려는 아내를 남편이 붙들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그렇게 예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아내는 평소에 너무나도 자신을 가꾸지 않아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내를 구박한 남편은 더 나쁘지만, 자신을 전혀 가꾸지 않은 아내의 잘못도 있었던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 매력 있는 상대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부부관계가 훨씬 더 좋아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겠습니까?
레아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녀가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레아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먼저 자녀를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31절)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집안은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아로 하여금 단숨에 네 명의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레아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 남편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아내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남편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의무적으로 레아에게로 들어갔으며, 레아는 이렇게 아들들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녀에게 아들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라헬에게는 아들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믿음 지키는 것 때문에 남편에게 핍박을 받는 여성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남편이 다른 데 빠져서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통하여 위로해주시고 축복해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자라서 형통하게 되며, 특히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아드리고 위로해드리는 것입니다.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상해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레아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늘 불행했던 레아에게 하나님께서는 귀한 아들을 네 명이나 낳게 해주셨습니다.
나중에 레아는 두 명의 아들을 더 낳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레아의 자손이 무려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도 결국은 레아를 자신의 본처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레아로 하여금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레아의 아들 유다를 통하여 메시아가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야곱에게 집착하는 레아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하나님께 간구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레아는 그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었습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32절) 이렇게 아들을 낳은 레아는 이제 남편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 이렇게 아들을 낳았으니 야곱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은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레아의 심정은 둘째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지었을 때 더 잘 나타났습니다.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33절)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레아는 “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나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다.”는 의미에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들을 둘씩이나 낳았으니 남편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여전히 레아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레아는 실망했지만 여전히 남편이 자기에게 마음을 주고 사랑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아들이 태어나자, 레아는 더욱 더 그러한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34절) 레아는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을 셋이나 낳았습니다. 이제는 남편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라헬보다는, 귀한 아들을 셋씩이나 낳아준 자신을 진정한 아내로 여겨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야곱의 마음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
이러한 레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35절) 그런데 이렇게 넷째 아들을 낳은 후 레아에게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이제 아들을 넷씩이나 낳았으니 남편이 틀림없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셋이나 낳도록 남편을 사모하며 기다리던 레아는 지칠 대로 지치고,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았으며, 이제 남편에게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레아는 남편을 의지하며 그토록 매달려봐야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의지하고 믿었다가 상처를 받고 실망하면서도, 또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이렇게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 즉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불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살게 해주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사랑하며 정성을 쏟은 사람이 내가 기대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보답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실망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처로 시달리며 마음에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까?
이것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길은 사람을 사랑하되, 믿고 의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연약하고 거짓되고 실망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면 반드시 실망하고 낭패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를 사랑하되 의지하는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게 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넷째 아들을 낳으면서 레아는 결국 남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게 되었고, 이제부터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쓰라린 실망과 아픔을 당하고 나서야, 레아는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넷째 아들의 이름에는 더 이상 남편을 바라보는 기대를 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는 그녀의 온전한 믿음을 담게 되었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은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결단을 가지고 넷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여인의 믿음이 성숙되어가는 단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토록 남편에게 집착하던 레아는 더 이상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레아가 이렇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가장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낳은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당신이 늘 실망하고 삶이 그토록 곤고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과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으로 기뻐하며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리라
창 29장 31~35절 / 양의섭목사(왕십리중앙교회)
요즘 우리교회 새벽기도회가 부흥하여 많은 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2/3가 우리 교우가 아닌 타 교회 교우이거나 초신자들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 강단에 설 때마다 나는 다른 교회 강단에 선 느낌이 듭니다. 새벽 기도회 때마다 강사가 된 느낌입니다. 전에는, 그저 새벽기도회니까 하는 맘으로 서곤 했는데 이제는 새벽기도회가 기다려지고, 하나님이 주실 은혜에 대해 많은 기대감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새벽기도회 말씀 준비에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고, 그러면서 더욱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평생 읽고 묵상한 말씀이지만 새로운 것을 보게 해 달라고, 새로운 시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며칠 전 동기 목사님 글을 보니 당신은 주일 설교는 죽으로 준비하여 교인들을 먹인답니다. 다양한 교인들이 모이기에 누구나 쉽게 소화시킬 수 있는 죽을 먹이고, 오후예배, 수요예배에 나오는 이들에게는 밥을 먹인답니다. 이분들은 조금 더 신앙생활에 중심을 갖는 분들이기에 밥을 먹여도 소화시킬 수 있답니다. 그러면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이들에게는 뭘 먹일까요? 고기를 먹인답니다.
나는 이런 구분은 안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다만 말씀을 쭈욱 묵상해 나가는 새벽기도회 시간엔 늘 말씀이 새롭게 보이기를, 진부하지 않고 늘 그날의 신선한 양식으로 주어지는 만나, 새 말씀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이 새벽기도회의 말씀은 매일 매일 스마트 폰에 있는 왕중교회 앱에 올라가고 있으니 묵은 거야 올릴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영적 상태와 성숙함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보입니다. 어릴 때 보는 성경과 어른이 되어 보는 성경이 다릅니다. 초신자 때의 읽는 말씀과 중견신자가 되어 읽는 말씀이 다릅니다. 아플 때 읽는 것과 기쁠 때 읽는 성경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게 말씀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런 간절함이 더하여져서 그런지 새벽에 늘 신선한 말씀의 샘이 솟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창세기를 묵상하는 중, 새롭게 보이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부인이 둘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 우리는 많은 경우 라헬에게만 주목하여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에게 야곱의 두 아내 중에 누구에게 더 호감이 가느냐 물으면 대부분 라헬이라고 답합니다. 왜 라헬을 더 좋아하는가요?
라헬, 곱고 아리땁다고 창29:17절이 증언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한 눈에 뿅 간 여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한 눈에 반했다고 해서 그 여인이 좋은 여인인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성경을 연구해 보면 라헬은 문제가 많은 여인입니다. 얼굴 예쁜 값을 한 여인으로 질투심이 많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해 하나님께서도 별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데, 죽으면서도 얼마나 원통해 하며 죽는지 모릅니다. 인간적으로는 예쁘고, 지혜롭고, 큰 소리 칠만 했지만 그녀의 영적 상태는 그리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늘 불평과 불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레아의 삶은 다릅니다. 레아가 새롭게 보입니다.
야곱이 장가를 갑니다. 7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 한 대가로 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하여 야곱이 장가가는 날, 술에 너무 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부가 라헬이 아닌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놀라고도 분한 마음에 삼촌에게 가 따졌더니 삼촌이 그럽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동생부터 시집보내는 법이 없다. 그러니 7년을 더 일해라. 그러면 동생 라헬까지 줄께.’ 속은 것이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까지 속이고 삼촌의 집에 피신 왔던 야곱, 이제는 자기가 속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얻느라고 14년을 머슴살이 합니다. 레아는 그야말로 원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보너스로, 플러스 원, 덤으로 얻은 여인이었습니다.
레아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창29:17a). 살림을 빠릿빠릿하게 해야 하는 여인이 시력이 약하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굼뜰 수밖에 없고,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보려고 늘 이맛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얼굴이 밝을 수도 없고, 매력도 없습니다.
이상한 것은 나는 수많은 결혼식에 참석하고, 주례도 해보았는데, 안경 쓴 신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엔 콘택트렌즈가 있고, 아예 각막수술을 받기에 그러겠지만, 예전에도 안경 쓴 신부를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왜 신부는 안경을 쓰면 안 되는 걸까요? 시력이 나쁜 신부는 남편의 사랑을 못 받는다는 레아의 경우를 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레아는 시력이 약했습니다. 늘 눈을 찌푸리고 사물을 봐야했고, 그러다 보니 늘 뭔가 좀 부족해 보이는 인상이었습니다. 같은 일을 할 때도 정상적인 이들보다 뒤처지는 그런 여인으로 남자들로부터 사랑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라반이 평생 시집 못 갈 까봐 라헬이 시집가는데 슬쩍 끼워서 처리한 ‘떨이 인생’으로 서글픈 여인이었습니다.
억지 결혼을 한 야곱은 이 여인을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별로 였을 것입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레아는 늘 뒷전으로 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슬펐을까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 때마다, 관심을 얻지 못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을 것입니다. 결혼하고 난 후, 레아는 더욱 더 슬프고도 슬픈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레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주셨습니다. 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냥 내버려두면 레아는 인생을 저주하며, 슬픔과 비통함 속에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무슨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이런 레아의 슬픈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레아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결코 레아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레아의 아픔, 비통함에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논할진대 제일 먼저 중시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삶에 지쳐서 허덕이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찾아오신 것뿐이며, 그에 대해 내가 반응을 보인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거의 모두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명상을 통하여, 자선을 통하여, 수도를 통하여, 극기를 통하여 ... 모두들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인간이 찾아가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솔직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찾았던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3,8-9)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열심에 의해 발견되고, 움직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의 아픔, 슬픔을 못 본 체 내버려두지 못하시고 찾아와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혹시 곤고한 삶을 사는 분이 있습니까? 어려움과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이가 있습니까? 말 못할 질병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하는 이가 있습니까? 어떤 장애로 심한 열등감 속에 사는 이가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가실, 방문하실 기회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시는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레아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곧바로 레아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예쁘고 똑똑한 여인, 라헬은 무자하였으나 레아는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신학자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몰아주신 적이 없답니다. 누구나 다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 수 있는 것들을 공평하게 주셨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머리가 좋으나 못 생긴 과학자에게 미모가 뛰어나지만 머리가 나쁜 여배우가 청혼을 하였습니다. 청혼한 이유인 즉,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의 좋은 머리에 나의 미모를 가진 아이들이 태어날 텐데, 이 얼마나 인류의 발전을 위해 좋은 일입니까! 그러니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자 과학자가 이렇게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답니다.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의 돌대가리에 나의 못 생긴 얼굴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텐데, 이 얼마나 인류의 발전에 부끄러움인가! 결코 당신과 나는 결혼하면 안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여러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으로 우리 각자에게 좋은 것들을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일찍 찾아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것이지만, 못 찾아낸 사람은 평생 불평과 불만 속에 부정적으로 남만 원망하고, 하나님만 불평하다가 가버릴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나에게 무엇이 없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무엇이 주어졌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먹일 게 없다고, 없는 타령을 하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곤 마침내 그들이 내놓는 그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오병이어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늘 없는 것만 확인하고 실망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이 분께서 뭔가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유용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것이 뭘까요? 내 인생을 축복하셔서 내 삶 속에 숨겨두신 것이 뭘까요? 자신의 삶속에 보물이 숨겨있는 것을 믿고, 늘 보물찾기 삶을 사십시오. 행복을 발견할 것입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쑥쑥 낳습니다. 그러면서 레아는 남편의 사랑에 기대감을 갖습니다. 이제 아들을 낳아주었으니 나를 사랑하겠지 하는 남편에 대한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며 나타납니다.
첫째를 낳고는 “르우벤”이라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보라, 아들이라!”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보라, 아들이라!’고 고함치며 ‘르우벤’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주었으니 남편이 이제 나를 사랑하리라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는 “시므온”이라 불렀습니다. ‘들으셨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으셨다, 그러므로 남편도 이제 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셋째 아들을 낳고는 “레위” 라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연합’이란 뜻으로 남편이 아들 낳은 나를 사랑하여 이제부터 나와 연합하리란 부푼 기대감입니다.
얼마나 남편의 사랑이 그리웠으면, 얼마나 서러운 삶을 살았으면 이렇게까지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라헬은 하나도 낳지 못하는데, 자신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셋씩이나 낳았으니 이제 남편은 나를 사랑하리라! 남편에 대한 사랑을 자신 있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레아의 기대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별로 였습니다. 그 남편은 라헬에게 푹 빠져서 자신이 아들을 낳았음에도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4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유다!” 무슨 뜻일까요? ‘찬송’이란 뜻입니다. 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레아는 비로소 자신의 삶의 기준, 행복의 기준, 평안의 목표를 하나님께로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삶,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찬송하는 기쁨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남편의 사랑을 받는 데 필요한 단순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지! 이제는 주님만을 찬송해야지!
이 자세에 무슨 축복이 레아에게 주어지는가요? 이 신앙의 결단 속에 낳은 아들 유다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가장 강한 지파가 되고 그 후손에서 다윗이 나오고 마침내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마침내 얻은 말째 아들들 요셉과 베냐민, 야곱이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축복했던 이 요셉과 베냐민 지파는 어찌 되었을까요? 마침내 북 이스라엘로 분열해 나가면서 각종 우상을 섬기어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이들은 종래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습니다.
레아, 비로소 하나님께로 자신의 삶의 중심을 바꿉니다. 그리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파,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의 복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자식들은 배신의 길로 들어서 우상숭배 속에 멸망하고 말았지만, 라헬의 자녀들은 든든한 믿음의 집안을 이루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라헬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객지에서 장사되었음에 반하여 레아는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하는 내용 창세기 49장을 보면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창49:30-31)합니다. 즉 레아는 말년에 믿음의 선조들의 묘지에 장사되었다는 것입니다. 존경받는 믿음의 집안 어머니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중심, 행복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것에서, 물질적인 것에서 하나님께로, 영적인 것으로 바꾸자. 그리할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장애, 열등감, 부족함들은 도리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너무 똑똑하기에, 너무 완벽하기에, 너무 부자이기에, 너무 권세가 많기에, 너무 잘났기에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정, 긍휼,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해지고 맙니다.
특별히 어떤 인간적 장애, 핸디캡이 있는 사람은 생각해 보십시오. 핸디캡,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전에 보면 “불리한 조건”이라는 뜻 외에 “경마 경기 등에서 우열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우세한 쪽에 부담을 지우는 것”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핸디캡은 누구에게 있는 것이빈까? 사실 더 훌륭한 인물, 더 완벽한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레아에겐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시력이 나빠서 늘 어두웠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 있게 설 수 없었습니다. 늘 쭈뼛쭈뼛했습니다. 늘 경쟁에서 밀렸습니다. 그러나 맘을 고쳐 잡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리라 고 삶의 방향을 새로 잡을 때 그녀는 믿음의 위대한 선조들과 같은 반열에 섰습니다. 그러니까 핸디캡은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때입니다. 우리를 공평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며,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님 앞에 서서 믿음으로 싱긋 웃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주님, 그래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군요. 그래서 이런 고민거리를 허락하셨군요.” 그리곤 그 주님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가 주님만을 바라보리라! 이제는 내가 더욱 주님만을 찬양하리라!”고 더욱 더 결심하고 신앙의 길로 힘차게 달려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에겐 몹시도 힘들고 부끄러운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것 때문에 큰소리칠 수 없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설 수 없는 그런 부끄러운 육체의 가시, 고통, 흠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무슨 뜻인가요? 안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너에게 준 은혜로 너는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도리어 네 사역에 복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 때문에 위대한 사도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고 평생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자도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더욱 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며 삽시다.
세상도 바라보아야할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거기에 모든 것을 걸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긍휼히 여기시며 도와주시기 기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은 옵니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리라!” 결심하며 사는 가운데 모든 핸디캡이 축복이 되고, 하늘로 내리는 평화가, 축복이 여러분의 삶 안에 가득하기를!
악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창 29장 31~35절 / 이수영목사
야곱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기보다 자기의 꾀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야심이 많았던데 반해 그다지 착하고 정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형 에서가 배고파 할 때를 노려 팥죽 한 그릇으로 그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넘겨받는가 하면 형 몰래 형으로 변장하고 아버지를 속여 아버지로부터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채기도 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 많고 간교한 아우에게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다 빼앗기고 격분하여 아우를 죽이겠다고 하는 형을 피해 야곱은 멀리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삼촌 라반 또한 욕심과 속임수에서 야곱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무려 20년에 걸친 외삼촌과 조카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대결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안쓰러운 대결의 전반부에서는 탐욕스럽고 악랄한 외삼촌에게 조카가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고, 후반부에서는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교활하고 악착같은 조카의 대반격에 외삼촌이 손을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라반은 어느날 갑자기 그의 집을 찾아온 생질 야곱을 아주 반갑게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환영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계산이 깔린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야곱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크나큰 노동력의 증가였습니다. 그리고 노동력의 증가는 곧 재산증식의 수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서는 창29:14-15에서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한 것을 보아 우리는 야곱이 도착해서부터 첫 한 달 동안 라반은 야곱을 공짜로 부려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달이 지나서야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주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때 이미 라반의 둘째딸 라헬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하여 그녀의 아버지 라반을 7년 동안 거저 섬기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라반은 이러한 야곱의 제안에 대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라반은 귀한 노동력인 야곱을 그의 집에 두고두고 머물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야곱이 자기 딸과 혼인하겠다고 하니 그를 더 확실히 집에 붙잡아둘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스스로 7년을 무보수로 일하겠다니 그것이야말로 굴러들어온 떡이고 1석2조의 성과를 앉아서 거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라반은 1석2조로 만족하지 않고 야곱을 1석3조의 횡재의 기회로 삼을 계략을 이미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집보내기 어려운 큰 딸 레아를 야곱에게 떠안기는 것이었습니다. 창29:17에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한걸 보면 레아는 예쁘지도 않았고 게다가 눈이 아주 나빴던 것입니다. 그래서 7년이 지나고 둘째 딸 라헬을 야곱에게 주어야 할 날이 되자 라반은 밤에 라헬 대신 큰 딸 레아를 야곱의 신방에 들여보내는 기막히는 사기극을 자행했습니다(창29:23). 야곱은 그 다음날 아침에야 그가 첫날밤을 보낸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인 것을 알고는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창29:25) 항변했지만 라반으로부터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라”(창29:26)는 태연한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는 야곱을 통해 1석3조의 이익을 얻기 위해 그 말을 미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차피 레아를 아내로 맞았으니 혼인행사기간인 1주일을 다 채운 후 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거저가 아니라 또 7년을 일한다는 조건에서였습니다(창29:27). 그토록 약삭빠른 야곱이었지만 꼼짝 못하고 14년 세월을 외삼촌 집에 묶여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 14년 동안 야곱은 레아와 라헬 그리고 두 아내의 여종들을 통해 열한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드디어 자신의 몸으로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4년간 외삼촌을 위해 일하며 아들만도 열하나를 거느리는 가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만들지 못한 채 그대로 세월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외삼촌을 위해서는 충분히 할 만큼 했고 계속 외삼촌과 함께 있다가는 자기 자신의 집안을 세울 기회를 영영 못 얻으리라 여겼기에 야곱은 떠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처자들을 데리고 자기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라반에게 말했습니다(창30:25-26). 그러나 야곱의 수고로 재산을 크게 늘린 라반은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야곱에게 원하는 대로 품삯을 줄 터이니 그냥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를 뿌리치지 못한 야곱은 결국 또 6년을 외삼촌 집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외삼촌 라반은 결코 야곱에게 정당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야곱이 나중에 라반에게 털어놓은 다음의 항변을 통해서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31:38-42). 창31:31에 의하면 라반은 야곱을 부려먹을 만큼 부려먹은 후 야곱이 굳이 떠나겠다면 자기 딸들은 함께 보내지 않고 야곱만 빈털터리로 내보낼 꿍꿍이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눈치 빠른 야곱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삼촌에게 끝까지 당하고만 있을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외삼촌을 떠나기로 마음먹고도 또 6년을 머물기로 한 것은 마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떠날 것이지만 빈털터리로 떠날 수는 없고 한 몫 단단히 챙겨가지고 나갈 궁리를 한 것입니다. 야곱은 겉으로는 아무런 재산의 욕심이 없고 그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일해 외삼촌의 재산을 최대한 늘려드리겠다는 듯이 보이게 하면서, 사실은 외삼촌에게 엄청난 재산상 손실을 입히고 그만큼 자기의 재산이 늘어나게 할 술책을 마련한 것입니다.
야곱의 술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계속 자기 집에 묶어두려고 야곱이 바라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묻자 야곱은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30:31) 하며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즉 외삼촌의 양 떼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들을 가려내서 그것들을 자기의 품삯으로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희고 좋은 대부분의 양은 외삼촌 것이고 소수의 얼룩지고 비실비실하는 양들만을 자기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30:32). 그리고 언제든지 외삼촌이 와서 조사해보고 야곱의 양 중에 흰 것이 있으면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고 가져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30:33). 라반은 일반적인 품삯에 훨씬 못 미치는 대가를 받겠다는 야곱의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삼촌이 만족해하며 안심하게 한 후 야곱은 외삼촌의 양들 중 튼튼한 양들은 모두 얼룩진 새끼들을 낳게 하여 외삼촌 소유의 양들은 급격히 줄어들게 하고 자기 몫의 양들은 크게 번식하여 자기를 큰 부자가 되게 하는 수를 썼습니다. 창30:35-42에서 전하는 대로의 야곱이 외삼촌의 양들에게 행한 교배방법이 과연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야곱의 행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리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대인의 눈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그 현상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야곱이 그의 아내들에게 행한 설명 가운데서 알 수 있습니다. 창31:6-12을 봅니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20년간의 세월과 고생과 노동력 착취와 설움으로 맺힌 한을 풀기 위한 야곱의 대반격은 완벽하게 성공하고 그는 20년간 스스로의 힘과 수고로 키워놓은 외삼촌의 재산의 대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고향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야곱의 최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나 라반이나 모두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악랄하기까지 한 사람들로 드러날 뿐임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탐욕적 인간들의 속이고 속으며 물고 물리는 싸움 속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시며 또 무엇을 하시는가 하는 물음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라반의 이야기 속에는 라반의 두 딸이며 야곱의 두 아내가 된 레아와 라헬 사이의 일도 끼어듭니다. 이 두 여인은 결국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의 어머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그렇게 정직하고 착하기만 한 여인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곱이 사랑해서 혼인하기를 원했던 라헬 대신 레아가 신혼 첫날밤에 들어간 사실만 해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고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을 외삼촌을 위해 일했으며 그 약속기한이 다 차서 이제 혼인하게 된 것은 온 집안과 마을이 다 아는 일이었을 것인데 느닷없이 레아가 신방에 들어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겠습니까? 적어도 레아와 그의 아버지 라반 사이에 은밀한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고, 필경 라헬도 아버지의 그 계획을 알고 동의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만 모르고 있었지 라반의 온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 기회가 아니면 시집보내기 힘든 언니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혼인시키자는 합의가 다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라헬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멍청히 신랑을 빼앗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라반만 교활한 것이 아니라 레아도 라헬도 외톨박이 야곱을 속이는 일에 동참할 만큼 정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매였던 이 두 여인은 일주일 간격으로 차례로 야곱의 아내가 된 후에는 한 남편의 사랑과 그와의 잠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관계에 서게 되고 말았습니다. 본래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는 야곱에게 아들들을 열심히 낳아줌으로써 그의 사랑을 차지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 이름을 짓는 그녀에게서 우리는 측은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레아는 첫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었습니다. “르우벤”이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그녀의 첫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짓고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기대했다는 것입니다(32). 둘째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지었습니다. “시므온”은 “들으심”이란 뜻입니다. 그녀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33). 둘째 아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남편의 사랑을 받아보려는 애처러운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레위”는 “연합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내가 그에게 아들을 셋씩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하겠지 하고 바랬다는 것입니다.
언니 레아가 연달아 네 아들을 낳는데 반해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라헬은 언니를 시기했고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30:1)고 생떼를 쓰다가 야곱으로부터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는 짜증스런 핀잔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라헬은 자기의 시녀 빌하로 하여금 야곱의 아들을 낳게 함으로써 언니를 따돌리고 야곱의 사랑을 계속 자기에게 붙들어두려 했습니다(30:3-8). 이에 질세라 레아 또한 자기의 시녀 실바로 하여금 자기 대신 야곱의 아들들을 낳게 했습니다(30:9-13).
한번은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그 당시 정력제로도 쓰이고 임신촉진제로 여겨지기도 하던 식물인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린 적이 있습니다(30:14). 그 사실을 안 라헬은 레아에게 그 합환채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의 사랑에 굶주린 레아가 그 합환채를 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말하기를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하고 독하게 쏘아붙였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동생의 남편을 먼저 가로챈 것인데 어느새 그 반대로 여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자 라헬은 그 합환채를 자기에게 주면 그 대신에 남편을 언니와 동침하도록 하룻밤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레아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그 밤을 야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두 자매는 한 남편을 사이에 두고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그다지 착하지 않은 마음씨는 그들이 야곱과 함께 아버지 집을 떠날 때에도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31:15) 하며 입을 모아 아버지를 성토하고는 그들의 남편에게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남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라고 재촉하기도 했습니다(31:16). 또 라헬은 집을 나올 때 자기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해 나오기도 했습니다(31:19). 드라빔이란 그의 아버지가 믿던 가정수호신을 형상화한 조각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훔친 것은 아버지의 복을 훔친 것이나 마찬가지로 간주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직하지 않고 착하지 않은 여인들의 일들 속에서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직하지 않고 의롭지 않은 행위나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의를 이루시며 그가 원하시는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라반은 둘 다 욕심 많고 교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악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의와 선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탐욕을 들어서 야곱의 탐욕을 벌하셨고, 야곱의 악랄함으로 라반의 악랄함을 갚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재산이 늘어나게 하시는 데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결코 야곱의 교활한 속임수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창31:12)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악랄함을 갚으시기 위하여 야곱의 그 술책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시기와 다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을 공평하게 베푸셨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레아에게는 아들을 낳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에게는 야곱의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야곱과 라반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숱한 거짓되고 악한 일들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홀로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 모든 일들을 그의 선하신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데에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라반은 그의 부도덕한 계략을 통해 야곱이 원하지 않았던 레아를 그의 아내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레아를 통하여 레위와 유다를 낳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존립을 지탱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력을 책임지게 하셨으며 유다지파에게는 다윗왕조를 이루어 정치적 주도권을 맡게 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지파와 다윗의 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시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살다보면 이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온통 다 거짓말쟁이들과 욕심꾸러기들과 불의한 자들뿐이라는 생각으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에는 거짓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찬 인간들이 서로 잘했다고 싸우는 것을 보며 환멸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여야가 싸우는 것이 그렇고 미국과 이락이 싸우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악한 자를 들어 악한 자를 치시며 의와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혼돈과 불안정, 인간들의 모략과 술수와 아귀다툼 속에서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시며 의를 세우시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악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고백해야 할 믿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