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반기 내내 최악의 부진을 겪은 박용택은 후반기 들어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LG 선수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사진=연합)
토니 그윈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교타자’ 중 한 명이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20시즌을 뛰며 통산 타율 3할3푼8리를 기록했다.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윈이라고 해서 마냥 전성기만 계속됐던 것은 아니다. ‘슬럼프’는 전설급 타자와 마이너리그 타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든다. 그런 면에서 슬럼프는 감기와 짝사랑을 닮았다. 자칫 심해질 경우, 후유증이 크다.
1987시즌, 그윈은 타격왕에 올랐다. 시즌 타율은 3할7푼이었다. 하지만 1988시즌, 그윈의 시작은 좋지 않았다. 시즌 초반부터 슬럼프에 빠졌다. 첫 8경기를 치르는 동안 그윈의 타율은 겨우 2할이었다. 설상가상, 엄지 손가락을 다쳤다. 부상자 명단에 올라야 했다. 전년도 타격왕은 2할대 중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타격을 해야 했다. 토니 그윈의 1988년 6월13일 타율은 겨우 2할3푼7리였다.
래리 보와 감독은 토니 그윈의 수비 위치까지 바꿨다. 슬럼프 극복을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그윈에게 수비 위치 변경은 굴욕으로 느껴졌다. 그윈은 “비참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윈의 슬럼프 탈출 노력은 처절했다. 평소에도 누구보다 먼저 타격 훈련장에 나타나던 그였지만 슬럼프 기간 동안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원정 경기 때도 홈팀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타격 훈련장 문을 두드렸다. 상대 팀 동료들에게 인사를 했고, 방망이를 들고 스윙을 이어갔다.
그윈은 잃어버린 밸런스를 찾기 원했다. 스윙 메커니즘이 달라지지는 않았는지, 스트라이드 폭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끈질기게 연구했다. 당시만해도 최첨단이었던 비디오 분석 시스템을 동원했다. 자신의 타격 장면을 프레임별로 구분하며 잘못된 점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9프레임과 10프레임 사이의 변화가 눈에 띄었지만, 그것을 찾아낸 것만으로 밸런스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전의 계기는 전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그윈의 아내가 건넨 조언 한 마디 덕분이었다.
그윈의 아내 앨리사는 남편의 고생을 두고 보기 어려웠다. 남편은 온통 자신의 스윙에 매달리고 있었다. 앨리사는 2차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을 남편 그윈에게 소개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패튼 장군은 부하 병사들에게 묻는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병사들이 답했다. “목숨을 바쳐서 싸우겠노라”고. 그러나 패튼 장군은 그 답이 틀렸다고 했다. 패튼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적군으로 하여금 그들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할 수 있어야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희생만으로 승리를 가져올 수 없다. 앨리사는 남편에게 “야구가 잘 안된다고 해서 너무 스스로에게 미안해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앨리사는 “영화에서 패튼 장군이 말했듯, 자신과 싸우지 말고, 투수와 싸워야 한다. 야구에서 이기려면 자기가 아니라 상대 투수가 괴로워하고 미안해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정답이었다. 타자는 자신의 타격폼과, 자신의 밸런스와 싸우는 게 아니었다. 타자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자신을 향해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그윈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집착했다는 점이었다. 그윈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나는 지나치게 내 문제에 집착했다. 투수가 누구인지, 어떤 공을 던지는지에 집중하는 대신, 타격 준비 자세에서 그립의 위치가 제대로 돼 있는지, 스트라이드 폭이 너무 넓지는 않은지, 내 엉덩이와 어깨가 너무 일찍 열리지는 않는지에 집착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윈은 이를 깨달은 이후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그윈은 6월 타율, 4할6리를 기록했고, 마지막 73경기에서 3할6푼7리를 때렸다. 그윈은 결국 시즌 타율 3할1푼3리를 기록했다.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1988시즌 내셔널리그 타격왕으로 충분한 기록이었다. 그윈은 2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 수성에 성공했다.
LG 박용택이 슬럼프를 벗어난 것도 그윈의 예와 무관하지 않다. 박용택은 7월초 “이제는 타석에서 투수들과 싸울 준비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타격폼과 무던히도 싸우면서 시즌 초반을 보낸 터였다. 박용택은 결국 시즌 타율 3할에 도달했다. 그윈이 마지막 73경기에서 3할6푼7리를 때린 것과 비슷하게 박용택도 마지막 56경기에서 3할6푼4리를 기록했다.
타자의 역할은 자신의 타격폼을 완벽하게 만드는데 있지 않다. 타자의 역할은 투수와 싸우는 것이다. 그윈은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서 자신의 폼에 집중해서는 안된다. 투수의 공에 집중하고, 그 공에 반응해야 한다. 그게 타자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박용택의 깨달음도 거기에 있었다. 홈런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타격폼에 집중했던 박용택은 밸런스를 잃어버렸다. 박용택이 싸워야 할 상대는 자신의 스탯이 아니라 공을 던지는 상대 투수였다. 투수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지난 시즌 타격왕 다운 모습이 되살아났다. 박용택의 타구는 좌중간, 우중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박용택의 부활은 LG 트윈스 타자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느 순간 부터인가 LG 타자들은 자신의 타격폼에 지나치게 신경쓰고 있었다. 완벽한 스윙 메커니즘이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 집착하고있었다.
입단 6년차, 여전히 미완의 기대주로 평가받는 박병호가 딱 그랬다. 시즌 중 박병호는 박종훈 감독과 서용빈 타격 코치로부터 집중 ‘과외’를 받았다. 틈만 나면 박감독과 서코치가 배팅볼을 직접 던져줬다. 박병호가 때린 타구가 힘없이 떨어졌을 때 박 감독이 “뭐가 문제였던 것 같냐”고 물었다. 박병호는 복잡한 대답을 이어갔다. “테이크 백 동작이 흔들렸고, 스윙의 궤도가 좋지 않았다. 팔로스루가 센터쪽을 향해야 했는데, 레프트 쪽을 향해서 좋지 않은 타구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박병호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박 감독은 “그저 스윙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스윙 메커니즘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타격은 복잡한 듯 하면서도 어쩌면 단순하다. 박병호의 성장이 더딘 것은 어쩌면, 타격 이론에 대한 지나친 공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박병호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타격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아니라 상대 투수와 싸우는 방법일 것이다. 날아오는 공에 대해 자신의 리듬으로 반응하는 방법. 그윈은 “‘반응’이야 말로 타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용택의 부활은 LG 야수 전체에게 훈련의 필요성과 함께 ‘투수와의 싸움’의 중요성을 알게 했다. 박용택이 슬럼프 기간 동안 보여 준 무지막지한 훈련량은 LG 야수들에게 훈련의 필요성을 알게 했고, 이후 박용택이 투수들과 싸워나가며 보여준 스탯의 상승은 LG 야수들에게 또다시 ‘싸움’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LG가 시즌 막판 보여준 모습은 이같은 ‘박용택 효과’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용택의 2010시즌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타자로서 타율 3할은 나쁘지는 않지만 좋다고 하기 어려운 성적이다. 주장으로서 팀 성적 6위, 8년 연속 가을야구 결석 또한 내세우기 부끄러운 결과다. 하지만 박용택의 2010시즌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2할대 초반에서 3할로 끌어올린 의지와 노력은 평가받을만 하다. 그 과정에서 LG 선수단 전체에게 미친 영향 또한 주장으로서 충분한 역할이었다.
박용택의 2010시즌은 끝났다. 스스로 밝힌 대로 FA 자격 신청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고 싶을 것이다. 타율 3할과 여전히 약점으로 지적되는 외야수비는 박용택의 가치를 높여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목표로 했던 거포 변신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거포 변신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박용택은 자신의 야구를 되찾았다. 아니, 어쩌면 타자 박용택은 더욱 업그레이드 됐을지 모른다.
그리고, 때로는, 어쩌면 더 자주, 보이는 스탯보다 보이지 않는 스탯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박용택의 2010시즌은, 숫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시즌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야구를 되돌아 봤을 때 어쩌면 가장 화려한 시즌이었을지 모른다. 진짜 중요한 스탯은, 결과가 아니라 그 스탯을 쌓아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응원 횟수 0
첫댓글 장문의 글이지만 이해도 높게 설명한 점에서 참 좋은글 같네요
박병호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타격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아니라 상대 투수와 싸우는 방법일 것이다. <-- 이 말이 와 닿네요! 타격폼은 이렇다 할 답이 없는 거 같은데 양신만 봐도....
이 사람 누구죠 ㅎㅎ 글 진짜 잘 쓰네요
참 잘 쓴 글 입니다. 박용택 선수가 홍성흔 선수 성격 반만 닮앗어도 올 시즌 엘지가 큰일 냈을텐데 .... 너무 심각하고 너무 예민한 성격이 아쉽습니다. 타율 보다도 찬스에 강한 타자가 되엇으면 합니다. 엘지에는 타율은 좋은데 팀 공헌도가 낮은 타자가 너무 많아요 야구는 단체 경기지 개인 경기가 아니지요. 팀이 잘 되야 다율 3할도 빛나는 법이지요.
완전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