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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자병산은 국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픈 새끼손가락이다. 백두대간 길을 걷는 내내 그곳을 궁금해 했고, 보고 싶어 했다. 과연 그 참혹한 얼굴을 마주 대할 수는 있으려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곳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정말 마음 아파할 수 있을까 등등을 생각했다.
12일 새벽 5시 숙소를 출발해 30분쯤 백봉령 정상에 돌아왔다. 녹색연합에서 지난 1월 중순 자병산의 환경 훼손 현장을 돌아보는 프로그램 '다시 만난 백두대간 자병산행'을 실시했는데 참가할까 고민한 일이 떠올랐다. 어차피 대간 길을 걸어야 하는 입장이라 그만 뒀고 이번에 걷게 됐다.
강릉시 왕상면 산불 흔적은 아직도 온전히 복구되지 않아 민둥 벌거숭이로 남아 있는데, 훼손된 자병산의 모습은 멀리서 보니 오히려 은빛으로 빛났다. 대간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택시기사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동해에서 20년 넘게 운전대를 잡았다는 50대 기사도 이런 모습을 눈에 담은 것은 처음이라며 적잖이 놀라워했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 위치한 자병산은 여러 모로 아이러니하다. 자줏빛 돌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해서 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1978년부터 한라시멘트가 석회석 노천 채굴을 시작했다. 1998년까지 약 20년 동안 환경영향평가 없이 채광이 이뤄졌다. 자병산은 석회석을 갖고 있다. 오히려 산이 산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처럼 느껴진다. 1990년대 말 프랑스 자원개발업체 라파즈 그룹과 합작법인을 만들어 1998년, 2003년, 2017년에 각각 추가 개발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협의를 통해 광산 개발이 진행 중이다.
우연찮게 라파즈 그룹 기별이 들려왔다. 13일 밤 연합뉴스 기사다.
시리아에서 사업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 이슬람국가(IS) 등 테러단체에 뒷돈을 건넨 혐의로 프랑스 시멘트 제조업체 라파즈의 전 경영진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파리 형사법원은 13일(현지시간) 라파즈의 브뤼노 라퐁 전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이 회사 전직 임원 총 8명에게 테러 단체 자금 지원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법원은 라퐁 전 CEO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하고 곧바로 수감했고, 나머지 7명도 각 징역 1년6개월∼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라파즈에도 벌금 상한선인 112만 5000 유로(약 19억여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프랑스에서 기업이 테러 자금 지원 혐의로 재판받은 첫 사례다.
재판부는 프랑스 기업이었던 라파즈가 2013∼2014년 유럽연합(EU)이 테러 조직으로 지정한 IS와 알카에다 계열의 알누스라전선 등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에 총 559만 유로(당시 환율 기준 78억여원)를 지급한 것으로 판단했다.
라파즈는 2008년 시리아 북부 잘라비야 시멘트 공장을 인수한 후 2010년 가동을 시작했다. 2011년 초 시리아 내전이 격화하면서 이곳이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 단체들의 활동무대가 되자 라파즈는 공장 가동을 유지하기 위해 IS 등에 돈을 지급했다.
법원은 라파즈가 건넨 돈 중 80만 유로 이상은 직원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160만 유로는 IS가 장악한 채석장에서 원자재를 구매하는 데 사용됐다고 판단했다.
재판장은 "테러 조직, 특히 IS를 대상으로 한 이런 자금 지원 방식은 테러 조직이 시리아의 천연자원을 장악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며 "이를 통해 해당 지역과 유럽 등 해외 테러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했다"고 지적했다.
또 라파즈가 이런 뒷돈 제공으로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며 "IS와 실질적인 상업적 파트너십을 구축했다"고 꼬집었다.
재판 과정에서 라파즈의 전 경영진은 "우리는 손을 씻고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공장 직원들은 어떻게 됐겠느냐"며 "두 가지 나쁜 해결책, 즉 최악과 차악의 선택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재판 과정에서 선처를 호소한 라파즈의 전 경영진은 이번 1심 판결에 항소할 뜻을 밝혔다.
라파즈는 지하디스트 단체에 수백만 유로를 지급했음에도 2014년 9월18일 IS의 진격에 직면해 결국 잘라비야 시멘트 공장을 철수했다. 그 이튿날 공장은 IS 손에 넘어갔다.
라파즈는 이듬해 7월 또 다른 세계적 시멘트 업체인 스위스 홀심과 합병해 세계 1위 시멘트 업체 라파즈홀심으로 출범했다.
라파즈는 이 사건 외에도 시리아 내 공장을 계속 가동한 방식과 관련해 반인도적 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추가 수사를 받고 있다.
백복령(780m) 5.2km 생계령(640m) 3.7km 고병이재(900m) 3.2km 석병산(1055m) 1.4km 두리봉(1033m) 4.8km 삽당령(680m) 18.3km(오전 5시 30분~오후 2시 50분 9시간 20분)
12일 오전 5시 30분 백봉령. 산새들이 지저귀는데 소리가 참 고왔다. 새들은 이렇게 미래 자원을 착취하는 현장 근처에 살아도 전혀 살힘(생명력)을 잃지 않는구나 감탄스러웠다. 송전 철탑들을 세 개쯤 지나니 휴일 이른 아침인데도 자병산의 분주한 굉음이 들린다. 언뜻 작지만 폭발음도 들려왔다.
자병산 옆 산자락 틈으로 해가 빨끔 내민다. 오전 6시 3분. 둔덕을 셋쯤 돌아 넘으니 자병산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이 나온다. 참혹한 얼굴을 온전히 담고 싶어 어떻게든 나무나 가지가 가리지 않는 지점을 찾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가리는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다.
둔덕들을 내려와 자병산 채광 현장으로 들어가는 4차로를 건너야 대간 길로 이어진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는데 석회 가루가 묻어 질척거린다. 석회암은 물에 잘 녹는 성질이 있어서 이렇단다. 그 도로를 따라 100m 걸어가면 경고판이 나온다. '여기 들어오면 안전 책임 못 지고 벌금 때릴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파낸 흙을 한 무더기 쌓아놓은 것도 보였다.
그 뒤 보통 백두대간 제20구간으로 불리는 길을 걸었다. 카르스트 지형(석회암 등의 물에 녹기 쉬운 암석으로 구성된 대지가 빗물 등에 의해서 용식되어 생성된 지형)이나 돌리네(지하의 석회암 기반암이 지하수에 의해 용해되어 형성된 지형적 요지. 용식함지라고도 함) 등 지리학 공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구간인데 내내 자병산을 돌아보게 된다. 쉽게 말하면 백봉령에서 시작한 이 구간은 카르스트 분지 안쪽으로 내려갔다가 건너편 석병산 쪽으로 올라 능선으로 두리봉으로 연결, 삽당령으로 내려가게 된다.
아니, 왜 이렇게 길이 편하지. 카르스트 분지로 내려가며 계속 드는 생각이다. 몸이 북쪽을 똑바로 바라보면 바람마저 멈췄다. 조금만 서쪽이 트였다 하면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통상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동풍을 걱정해야 하는 것일텐데 산 위에서 겪어 보니 서풍이 훨씬 위력적이었다.
생계령 못 미처 베이글과 사과로 아침을 들었다. 산새가 우짖는데 여전히 소리가 곱다. 길이 좋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생계령 가는 길과 그 뒤로 모두 북행하는 이들의 왼쪽에 함몰지가 일곱 군데 흩어져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생계령을 벗어나 우거진 숲 능선을 오르면 서대굴 안내판이 나온다. 길이가 500m나 되는 상당히 큰 다층 동굴이란다. 능선삼거리 바로 아래 829m 고지에 도착하는데 올려다보면 능선삼거리에서 석병산에 이르는 대간 마루금이 하늘처럼 높이 보인다.
아무래도 카르스트 지형이라 복잡한 데다 분수계가 분명치 않아 오히려 능선삼거리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죽 대간 길이 이어져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수계에 정통한 이들이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싶다가도 막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능선삼거리에서 저멀리 고루포기와 선자령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나온다. 900m 봉우리로 가는 내리막에서 석병산과 두리봉, 삽당령 가는 길이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온 길을 돌아보니 능선삼거리, 829m 봉우리, 생계령, 저 멀리 자병산의 상처까지 눈에 들어온다.
석병산 정상 오르막에 힘이 부쳐 편의점 도시락으로 점심을 드는 데 이날 유일하게 만난 어르신이 다가온다. 점심 드셨나요? 대답을 않고 자기 궁금증만 해결하려 한다. 혼자세요. 네. 끝이었다. 난 반가워 몇 마디라도 더 나누려 했는데 그이는 벌써 총총 사라졌다.
백두대간 수목원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났는데 낯익다. 김병일-이숙 부부와 우리 부부가 석병산 오려고 걸었던 길이어서다. 그때는 늦가을이었는데 눈도 내렸던 기억이 있다.
오늘은 봄 들꽃들이 한창이다. 석병산 정상은 그렇게 춥고 바람이 세더니 오늘은 다사롭기만 하다. 360도 파노라마를 담았다. 멀리 선자령, 가까이 안반데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아픈 자병산 새끼손가락도 눈에 들어온다. 사진만 찍고 내려왔던 바위 위에 엉덩이를 조금 붙이고 앉았다. 그 아래 일월문으로 건너편 아래를 내려다봤다.
석병산 정상 쪽에서 돌아보니 자병산의 참상이 오히려 진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멀리서보면 그만큼 동화의 정도가 약해지는 게 당연한데, 석병산 쪽에서 바라본 자병산 채굴 현장의 참혹함은 더 크게 다가온다. 채굴을 하며 그 과정에 어쩔 수 없이 폐석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들이 채굴 현장 아래로 떨어져 삼림을 훼손하는 모습이 더욱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대간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봤던 난개발(사과밭, 감자밭, 고랭지 배추밭, 풍력발전기, 골프장 등등)과는 차원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다.
녹색연합 관계자는 당시 이렇게 주장했다. "자병산 채광지는 지형 훼손에 따른 복구 난도가 높기 때문에 복구 계획에 따른 복구 공사와 채광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무리한 채광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특히 경사가 매우 가파른 일부 구간에는 채굴 과정에서 발생한 거대한 폐석이 무단 투기되고 있어 더욱 엄격한 관리와 감독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사실상 산림청과 환경부의 방치 속에서 보호지역 훼손 행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사실 '백두대간 보호법'이 만들어진 계기가 바로 자병산이었다. 1996년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난개발 사례로 지적받은 뒤 행정명령을 통해 반 년 가까이 채광이 중단되기도 했다. 훼손 면적이 크고 원지형으로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백두대간 보호의 필요성과 함께 2003년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녹색연합이 이 법에 따라 백두대간 보호지역으로 자병산이 지정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훼손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 지난해 6월 17일이었다. 이 단체는 자병산의 해발고도가 100m 정도 낮아졌다고 보고 있다. 또 약 277㏊에 달하는 면적의 경사면이 석회석 채굴로 파헤쳐진 채 훼손됐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초 2020년까지 계획됐던 채굴은 채굴량이 감소했다는 등의 이유로 2049년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앞으로도 23년정도 더 훼손이 진행된다고 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산림청은 사흘 뒤 보도자료를 통해 "(라파즈)한라시멘트 채석지는 백두대간보호법 제정 이전 광업권이 설정돼 소급 적용하지 않고, 원인자 복구 원칙에 따라 채굴이 완료된 지역부터 단계적 복구를 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복구 과정에서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와 지역 주민, 전문가, 정부기관으로 구성된 광산모니터링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보호지역 지정은 되고 보호법에 따른 처벌은 소급 적용하지 않는다고 정부 기관이 인정한 셈인데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시늉만 하는 자연 보호, 모니터링이란 이름으로 환경보호 단체들을 관리하는 것이 올바른 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흉내만 내는 관리가 계속된다면 백두대간 보호지역 지정 40주년이 되는 2045년의 자병산은 더욱 처참한 몰골로, 더 이상 산이 아닌 산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두리봉 정상 부근에서 마지막으로 자병산에 등을 돌리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정말로 이 참상을 이대로 그냥 지켜봐야 하는지? 먹먹한 마음에 앞의 '다시 만난 백두대간 자병산행'에 참가한 두 사람의 후기 일부를 소개한다.
이번 일정에서 (석병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보다 더 크게 남은 것은, 내가 보고, 느끼고, 먹고, 숨 쉬는 거의 모든 것이 어느 시절 정부의 선택과 정책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동 중 오르막길을 오르는 버스 창밖으로는 더이상 운영하지 않는 숙소 건물에 걸린 빛바랜 평창올림픽 현수막, 스쳐 지나간 가리왕산 케이블카 입구까지 그 장면들 역시 평창올림픽이 남긴 흔적들이었다.
내가 본 나무(일본잎갈나무, 이른바 '박정희 나무')도 (자병산의) 석회 광산도 대부분 1960~70년대의 산물이었다. 물론 그 시기의 선택이 오늘의 풍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는 그 선택이 어떤 풍경을 남기는지 충분히 알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백두대간을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자원으로 어떻게 남길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강한결>
낮아진 능선과 끊긴 산자락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보호라는 말과 예외라는 말이, 그 풍경 속에서 겹쳐졌다.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도시와 건물,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바라보는 데에서 이야기는 멈췄다. 말은 더해지지 않았고, 그만큼 오래 남았다. 산행의 마지막에 찾은 백복령 카르스트 지형 앞에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진 싱크홀과 돌리네를 바라보며, 자병산이 훼손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풍경이 남아 있는 이유와, 남지 못한 곳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배낭을 풀었다.눈에 젖은 장갑과 흙 묻은 신발을 현관에 두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날 본 산의 풍경과, 그 풍경이 사라진 자리가 번갈아 겹쳤다. 어느 쪽도 쉽게 놓이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김다은>
두리봉에 도착하니 1시 45분쯤이었다. 식탁도 있고 평상도 있어 등산화와 양말 벗고 죽 누웠다. 새벽 3시 일어나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막상 누우니 또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2시쯤 털고 일어나 삽당령에 2시 50분쯤 도착해 3시 45분쯤 정선 임계 가는 버스 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버스 시간표를 보고 2시 반 임계 출발하는 버스가 임계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에게 여쭈니 그 버스는 강릉으로 그냥 내뺀다는 것이며 3시 15분쯤 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다 버스를 놓쳤다. 그렇게 해서 내가 강릉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것이 6시 20분, 버스 출발 20분 전이었다. 정류장이 없어 그냥 손 들고 서 있어야 했다. 10분 정도 서 있었는데 지나가는 승용차나 트럭 운전자들 눈치도 이만저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뒤 경위는 더 상세히 말씀 못 드리겠다. 아예 처음부터 택시 탈 생각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일요일 오후에 콜을 하니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갈팡질팡했다.
여튼 6시 40분 버스로 동서울터미널 돌아오니 9시 30분쯤이었고 역전우동에서 6500원짜리 어묵우동 먹고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거의 6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백두대간, 무릎도 괜찮았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조금 첨언할 것이 있다. 한동안 삽당령과 백복령 모두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삽당령 정상에서는 정선을 출발해 강릉으로 가는 강원여객 버스가 하루 다섯 차례 지나간다. 정선을 오전 7시 40분, 9시 30분, 11시, 오후 2시 20분, 6시 10분 떠나 1시간 9분 뒤 삽당령에 도착한다. 강릉까지는 30분이 채 안 걸린다. 강릉을 출발하는 버스는 오전 7시 20분, 10시 10분, 오후 1시 50분, 5시, 6시 30분 떠난다.
백봉령에도 대중교통이 있었다. 생계령을 향해 걷다 보면 음식문화거리 안내판이 나오는데 그리로 내려가면 백봉령 쉼터가 있다. 백봉령 정상쉼터는 따로 있으니 혼동하면 안된다. 정선 임계터미널과 백봉령 쉼터만 오간다. 임계 출발 오전 7시, 10시 10분, 12시 40분, 3시, 6시 다섯 차례이고, 15분 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