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남장 가던 날
일월 둘째 일요일이다. 방학과 함께 정년퇴직으로 이어지는 생활이라 시간의 구속을 받을 일은 없다. 열흘 전 방학에 들었지만 하루도 한 시도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아니다. 일요일이라도 새벽부터 일어나 고향 형님이 펴낼 한문 문집 자료 편집에 매달렸다. 장시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복잡한 획수의 한자어를 대했더니 눈이 침침해 왔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일기 예보라 바깥나들이가 머뭇거려졌다만 집안에서만 있을 수 없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현관을 나설 때 배낭이 아닌 보자기를 하나 챙겼다. 4일과 9일은 창원 도심에서 상남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산책을 겸해 시장을 봐 올 생각이었다. 창원에서는 진해 경화시장이 제일 큰데 3일과 8일이다. 창원 향교에서 가까운 소답장도 역사가 오래 되는데 2일과 7일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건너편 아파트에서 용호동 주민운동장으로 가봤다. 예전 도지사 관사에서 가까운 체육시설이다. 지난 연말 인조잔디로 새롭게 꾸미는 데다. 이태 동안 나하고 거제를 같이 오간 카풀 지기가 조기축구를 하는 운동장이라 둘러봤다. 지난번 들렸을 때 흙바닥에 인조잔디를 덮었더니 이제 바깥에 우레탄을 깔아 굳어지길 기다려 외부인 출입은 통제시켰다.
메타스퀘어 가로수 길에서 용지호수로 갔다. 휴일 낮을 맞아 산책을 나온 이들이 다수 보였다. 미세먼지도 아랑곳 않고 호숫가 산책로를 거닐고 잔디밭에서도 놀았다. 용지호수에는 올겨울에 북녘에서 찾아온 고니와 쇠물닭이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녀석들은 야생성의 먹이활동을 포기하고 산책객이 던져주는 팝콘에 길들여져 걱정이었다. 닭둘기로 불리는 비둘기가 되어가는 듯했다.
용지호숫가를 한 바퀴 둘러 성산아트홀과 시청 사이에서 로터리를 돌아갔다. 시야는 미세먼지로 흐렸다만 코로나 때문 마스크를 끼었기에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재래시장에선 카드가 통하지 않기에 농협을 지나다가 365코너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집에서부터 상남동 장터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상남장은 도심 빌딩 숲에 상설시장을 겸해 오일장이 서는 독특한 곳이다.
일 년 중 내가 재래시장이나 오일장을 순례하는 철을 겨울 뿐이다. 다른 계절은 내가 산에서 산나물을 뜯어 오거나 지인 농장을 방문해 푸성귀를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장터를 찾을 일 드물었다. 생필품은 집에서 가까운 마트에서 조달이 가능하지만 찬거리를 구하려면 재래시장이나 오일장이 편했다.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매장 채소가 더 신선하고 질이 좋아도 잘 찾지 않은 편이다.
상남동 오일장은 3층의 상설시장 건물을 뱅글 두르는 동선으로 장터가 열렸다. 한 바퀴를 두르려면 삼십 분 남짓 걸린다. 정방형 사각 건물에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몇몇 가지 장을 봤다. 먼저 무공해로 키웠다는 콩나물을 샀다. 족발은 먹음직했다만 건너뛰었다. 생선코너에서 조기를 세 마리 샀다. 화초 가게에서 겨울 꽃을 구경하고 시금치와 물미역과 가래떡을 한 봉지 샀다.
대파가 굵고 싱싱했다만 보자기에 담으려니 양이 넘칠 듯해 마음을 두지 않고 곁에 있던 토마토와 연근을 샀다. 아까 지나쳤던 골목에서 빠뜨린 것이 두 개 남아 있었다. 갓이 통통한 표고버섯을 한 봉지 사고 마지막 남은 선책지가 명태전과 부추전 파는 노천 주점에 들어갈까 말까였다. 근래 곡차를 자제하는 중인지라 발길을 돌렸다. 대신 눈여겨 봐두었던 먹음직한 포장 족발을 샀다.
오일장 장터에서 본 물건들은 보자기에 담아 어깨에 걸쳤더니 제법 묵직한 느낌이 왔다. 왔던 길을 되짚어 시청 로터리를 돌아 용지호수를 지났다. 집 근처 마트에서 맑은 술과 캔 맥주를 마련해 집에 갔더니 아내는 반가워하지 않은 눈치였다. 명태전 안주로 곡차를 대신해 족발로 맑은 술을 한 잔 비워보려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내가 차지할 자리는 점점 좁아간다. 2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