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과 6·10만세운동
일제하 민족적 기개를 보여준 주요 사건 중 하나인 6·10만세운동.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의 숨은 주역이 좌익인사 권오설(1897~1930)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2차 조선공산당이 사전 계획한 만세시위가 굴곡의 역사를 거치며 학생단체와 천도교의 합작품으로 축소됐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야 역사교과서에 ‘좌우합작 운동’으로 표기됨으로써 좌파계열의 공헌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2차 조공 하부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은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실용주의’ 운동가였다. 사회주의는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그를 올바로 평가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해묵은 반공주의 잣대로 20년대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안동의 대중운동가
안동권씨 복야공파 35세손인 권오설은 풍서면 가곡리(현 가일마을)에서 부친 권술조와 모친 풍산류씨 사이에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사족의 반열을 지켜온 안동 명문집안이었지만 그의 부친대에 와선 서당을 운영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전통적 반촌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학문에 대한 열의는 남달랐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3·1운동. 조국해방이 삶의 목표가 돼버렸다. 그는 우선 가일마을에서 학술강습소를 열어 몽매한 농촌을 계몽시키는 데 주력했다. 당시 지방에선 소작료를 7할까지 요구하는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했다. 이는 권오설이 동향선배 이준태, 김남수 등과 함께 23년 풍산소작인회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풍산소작인회는 소작농뿐 아니라 중·소지주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한 5,000여명 규모의 전국 농민조직으로 성장하게 되고 권오설은 이 조직의 집행위원 취임을 계기로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기게 된다.
◇6·10만세 운동의 주역
권오설은 상경한 지 불과 1년도 안돼 사회주의 단체에서 지도자급에 올랐다. 24년 4월 260여개의 가입단체와 5만3천여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노농총동맹의 상무집행위원에 이어 25년 조선공산당 창당작업에 가담한 후 그해 4월 조공 산하 실무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를 맡았다. 특히 2차 조공시기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올랐다.
2차 조공이 벌인 대표적인 업적은 6·10만세운동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이 운동은 3·1운동을 계승, 발전시켜 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완결된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다. 추진과정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참가했다. 국외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임시정부 일부 세력 및 임시정부의 외곽조직인 병인의용대, 국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에서부터 일본 유학생, 국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지방의 보통학교에 이르기까지 이념도 초월했다. 이 거사의 중심에 권오설이 있었다. 그는 만세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규합시킨 주인공이었다. 권오설은 당시 상해에 망명 중이던 김찬, 김단야, 조봉암 등과 연락해 상해에서 격문전단을 인쇄해 조선에 보내도록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격문전단과 투쟁슬로건이 담긴 인쇄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를 3일 앞두고 일제경찰에 발각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권오설은 형무소 안에서도 심문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자행한 일제 경찰을 고소하는 고문사건항의운동까지 전개하며 일제에 대항했다. 일제에 ‘입 안의 가시’였던 권오설은 결국 복역 도중 1930년 4월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권오설, 드디어 부활하다
권오설은 공산주의 계급해방의 논리를 일본이라는 자본가 계급 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무산자 계급의 논리로 해석한 조공의 최고위급 인사다. 오랫동안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국민대 장석흥 교수(사학과)는 권오설을 단순한 공산주의자라고 규정지어 역사적 사실마저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권오설을 “3·1운동에 뛰어든 민족운동가이며 농촌에 신식교육을 보급한 계몽가. 전통적인 성리학이 팽배했던 안동 양반가문 출신답지 않게 소작인 권리찾기에 발벗고 나섰던 혁명가요 전민족적 봉기를 기획하고 이끈 지도자”라고 정의 내렸다.
독립기념관 김희곤 소장은 “그는 일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봉분도 쓰지 못하고 평장을 지냈다. 해방 이후엔 좌우대립으로 방치됐다가 70년이 흐르고 나서야 봉분을 했다”며 “30년대 죽은 사람이 북한 정권과 무슨 관련이 있겠냐”고 말했다.
‘빨갱이 가족’ 60평생 핍박받아
“마난(馬難·권오설의 호)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던 나의 아들. 너를 키우며 가르치는 재미가 났다. 6세때 한시를 지었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너를 먼저 보내는 아비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무하다. 자는 듯 웃는 듯 하던 너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구나.”(권오설 아버지 제문에서)
권오설(1930년 작고)의 아버지 고 권술조옹은 아들의 서거 후 가슴에 맺힌 한을 85장이나 되는 장문의 제문(祭文)에 풀어냈다. 자식을 일찍 앞세운, 그것도 차디찬 형무소 독방에서 의문사한 아들을 허망하게 보내는 아버지의 절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권오설의 양아들 권대용씨(62)는 할아버지가 남긴 제문을 펼쳐 보이며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권오설의 둘째 동생 권오기의 직계. 그러나 권오설의 친아들이 2세때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당시 양반가문의 관습대로 큰 집에 입적됐다. 친아버지 권오기는 해방 후 안동 풍산에서 노동조합장을 지내다 권대용씨의 생모와 함께 곧바로 월북했다. 대용씨는 결국 조부모도 화병으로 세상을 뜨자 갓 20살을 넘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큰어머니 김순여씨(권오설의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대용씨는 현재 대구 칠성동 모 아파트 경비원이다. 84년 고향 안동 가일마을에서 대구로 거처를 옮긴 후 20여년간 문구점을 경영했다. 그는 양아버지 권오설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권오설이 남긴 수많은 책들, 70년이 넘게 숨쉬고 있는 그의 서신들, 역사에 새긴 발자취를 통해 아버지를 만났다. 대용씨는 평생 딱 한번, 꿈에서 권오설을 마주했다. 14살때 권오설의 묘지에 벌초를 하러 갔다 잠이 든 사이 권오설이 앙상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제경찰에 의해 엉성하게 납땜한 관에 차갑게 누워 계셨던 것이 죽어서도 괴로우셨나봐. 너무 어렸던 탓에 이장을 해드릴 생각을 못했었지.”
대용씨는 “‘빨갱이’라는 세 글자는 지금까지도 가슴 깊숙이 박힌 대못”이라며 지난 과거를 되새김질 해갔다. “가슴이 치받혀서” 주먹도 많이 썼다. 어릴 적엔 영문도 모르고 마을 사람들에게 수없이 돌팔매를 맞았다. 권씨가 자신에게도 빨간 낙인이 찍혔다는 것을 안 것은 군대 갈 무렵. 비무장지대(DMZ) 입소를 신청했지만 신원조회에서 ‘불가판정’이 났다. 본격적인 ‘연좌제의 굴레’는 그때부터 그를 옥죄었다. 그는 학업의 기회도 공산주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박탈당했다. 마을 서당에선 ‘권오설가 사람들은 배우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내쫓겼다. 결국 초등학교 2학년까지 독학한 게 그의 학업의 전부다.
증조부 때부터 내려오던 지긋지긋한 가난은 대용씨를 남의 집 머슴살이로 내몰았다. 더구나 68년, 73년 원인 모를 잇단 화재로 살고 있던 집이 재로 변하자 생계는 더욱 막막했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으니 변변한 곳에 취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 집안이라 너는 아무것도 못한다. 농사나 지어라”며 그를 외면했다. 결국 그는 고향에서 터를 내리지 못하고 84년 무작정 대구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대용씨는 “경찰들이 90년대 후반까지도 이유없이 문구점을 엿보곤 했다”며 “다른 곳엔 도둑이 들어도 우리집 만큼은 안전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