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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
역사 속 숨은 인물도 흐른다. 11
ㅡ 요승(?) 신돈 3 ㅡ
어제 올린 신돈개혁에 대해 너무 몰랐었고, 이제사 알게되어 부끄러우면서도 놀랐다는 분이 꽤 있었습니다.
특히 <전민변정도감>은 현 시대에도 만들기 힘든 관청인데 그 시대에 실제로 만들어졌고 강하게 시행했다는 것에 충격까지 받았다 했습니다.
어떤 분은 또 아래 글 신돈의 말에 감동을 크게 받았다 합니다.
[당시 원로 대우를 받던 유학자 이제현은 신돈을 두고 “흉인으로 환난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자, 신돈은 이제현에 맞서 이렇게 공격을 퍼부었다.
"유학자들은 좌주 · 문생이라 일컬으며 조정 안팎에서 서로 끌어 주고 밀어 준다. 그래서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제현의 문생들은 세력을 넓혀 드디어 온 나라에 가득한 도둑이 되었다. 유학자의 해독이 이와 같다."]
ㅡ고려사 열전ㅡ
윗 신돈 말은 7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더 딱 맞는 말이라 섬칫하다 했습니다.
이 긴 시간동안 우리 역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700년 전 신돈이 한 말과 똑 같은 심정이 되지 않습니까?
이토록 개혁적인 신돈을 공민왕은 왜 제거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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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역사학자는 공민왕이 신돈 제거 이유를 아래와 같이 들었다.
첫 째, 신돈 개혁정책으로 권력과 경제기반을 상실한 권문세가와 군사권을 쥔 무장세력의 빗발치는 반대를 공민왕은 더 이상 막아 낼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왕권 기반마저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었다. 공민왕은 그 책임을 모조리 신돈에게 덮어 씌우려 한 것이다.
둘 째, 신돈이 키운 신진 유학자들이 성장해서 공민왕에게 직접 정사를 돌보라고 요구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일 수 있다. 유교학자 눈으로 볼 때 신돈은 어디까지나 불교세력이었다. 신돈은 신진 세력들이 불경처럼 받드는 성리학에는 별로 소양이 없었다.
즉 신돈이 기른 세력에 신돈이 당한 것이다.
셋 째, 신돈은 화엄종세력을 기반으로 불교개혁을 추진하면서 선종세력 지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반대세력으로 만들었다. 가장 명망을 누린 보우를 반대파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지원을 받은 민중과 부녀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없었기에 확실한 신돈 지원세력이 되어주지 못했다.
넷 째, 새롭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와도 관련이 깊다. 원나라는 연경에서 쫓겨나고 명나라가 정식으로 새 제국을 선포해 중국 실체로 떠올랐다. 공민왕은 친명 외교노선을 취하는 한편 양면외교를 추진했다. 그런데 신돈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공민왕은 새 인물로 새 판을 짜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써 신돈 개혁정책은 중단되고 공민왕은 다시 보수세력과 손을 잡았다.
신돈에 의해 쫓겨났던 최영 · 경복흥 등 무장들과 이색 · 백문보등 유학자들이 불려와 다시 등용되었다.
신돈이 죽고 난 뒤 개혁에 대한 반동정치가 극성을 부렸다.
토지제도는 다시 어지러워졌다. 고리대가 횡행했다. 천민과 노비들 사회적 지위 또한 더 낮아졌다. 불교계도 과거로 돌아 갔다. 신돈이 죽은 뒤 보우는 국사로, 혜근은 왕사로 추대되어 옛 자리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신돈이 추진한 토지정책과 노비정책은 뒷날 조준, 정도전에 의해 전면적인 토지개혁이 단행될 때 모델이 되었다.
조선건국 시 노비에 대한 대우가 개선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열어 주었다.
신돈이 추진한 순자법과 과거제는 조선에 들어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더 발전시켜 나아갔다.
신돈은 불교 자비사상과 중생구제 가르침, 유학 정치운용 원리와 실천도덕을 접목시켰다. 그리고 그런 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행한 우리나라 최초 혁명적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 중심 인물이 되어 강력한 개혁을 이루고 민중 고통을 풀려고 한 실천적으로 행한 정치가는 우리 역사에서 신돈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신돈 개혁이 중단되지 않고 더 이어져 고려가 새로운 나라로 다시 태어났음 조선 건국은 없었을까?
우리나라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혁명적 개혁가 신돈은 역사에는 그저 막 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신돈이 키운 신진 사대부들 조차도 신돈을 단순한 요승으로 보았다.
불교세력은 신돈을 선종을 탄압한 승려로 치부했다.
조선건국세력은 신돈개혁을 폄하시키고 고려말 혼란상을 부각시켜야 했다.
그들이 신돈정책을 이어받았다는 것도 철저히 감추었다.
이런 여러 현상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무이 할 정도의 혁명적 개혁가이자 그리고 그 개혁을 현실적으로 실천하기도 한 신돈을 단지 요승으로만 우리에게 기억되게 했다.
신돈의 집권 기간은 6년 정도에 불과하며 정치적 지위도 전적으로 왕권 비호 아래 얻어진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고려말 신돈의 혁명적 개혁은,
"준비되지 않은 개혁은 반드시 반동을 가져 온다."
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교훈과 아쉬움을 함께 주기도 한다.
촛불혁명으로 뭔가 크게 바뀔 줄 알았지만 최근 돌아 가는 세상을 보면 역사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역사의 악순환은 우리나라 역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다.
오래 전 이와 관련 써 놓은 글이다.
글이 넘 길어져서 안 올리려다 그래도 오늘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어 올려본다.
여러 번 올린 바 있으니 글이 너무 길어 읽기 지루하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기 바란다.
글 길다고 불평들 하지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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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난 당신들 편이야~!! ㅡ
오랜만에 IP TV를 통해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로얄 어페어(ARoyal Affair. 니콜라이 감독. 2012년) 라는 영화다. 덴마크 왕국 살벌하고 애틋한 과거 실화 이야기 이었지만 남의 이야기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주인공인 요한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자신을 비난하는 군중들을 향해,
“나는 당신들 편이야~!!”
라는 외침 속에서 혁명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군중(?)들 모습에 영화가 끝나고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 끝 장면은 우리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보았고 지금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 당시 18C 유럽 전역은 귀족 압제와 강한 종교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거기에 맞서 지식인과 자유 사상가들이 개혁과 자유를 요구하는 계몽주의 바람을 일으킨다.
절대왕정이 무르익던 18세기 덴마크, 편집증을 앓고 있는 왕 크리스티안 7세(미켈 폴스 라르)
는 1766년 영국 왕실 죠지 2세의 막내딸 케롤라인 공주(알리시아 비칸데르)와 정략결혼을 한다.
케롤라인은 독서를 즐겼고 여러나라 언어를 할 줄 알며 음악에도 소질이 있다.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크리스티안 왕이 자신처럼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이상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덴마크 왕비인 어린 케롤라인은 한 나라의 왕비로 살면서 남편의 명예를 지키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7세는 공주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편집증까지 앓고 있는 왕은 공주와 하룻밤만을 어찌어찌 보내고 공주에게 임신을 시켜 왕자를 생산한다.
하지만 왕은 곧바로 공주의 고결한척 함에 질려 버린다. 아예 공주를 엄마라고 부르며 다시는 공주를 찾지 않는다. 그리고 창녀촌이나 전전(왕이 창년 촌에 가서 폭행하고 난동부리는 모습 등이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하면서 기행을 일삼는다.
그동안 덴마크 정치는 의회라는 곳에서 실권을 가진 자가 맘대로 한다. 왕은 단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의회 장관들도 그를 철저히 무시해 버린다.
이러할 때 왕의 편집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용된 독일인 의사 요한이 나타난다. 요한은 뛰어난 언변과 왕과 왕비를 감싸주는 포용력으로 그들 신임을 얻어 나랏일에 참여를 하게 된다.
요한의 부추김과 전략으로 왕은 의회와 장관들을 물리치고 모든 정무를 요한에게 맡긴다.
요한은 당시 유럽에 거세게 불던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요한은 계몽주의 사상을 덴마크에서 실현하려 한다. 고문금지 등 당시 시대에 걸맞지 않은 자유로운 사상과 파격적인 개혁 법안으로 덴마크는 유럽에서도 가장 앞서 나가는 선진 개혁국가가 된다. 당시 계몽주의 대 철학가들로부터 칭송의 편지도 받게 된다.
요한의 개혁적인 계몽사상이 왕비 캐롤라인의 생각과도 맞닿아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급기야는 둘은 비밀스러운 만남 을 갖게 되고 왕비가 요한 애까지 임신하게 된다.
요한 개혁 정치에 위협을 느끼는 귀족들 견제는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왕비가 요한 애를 임신하게 된 것을 귀족 세력들이 알게 된다.
귀족세력은 그것을 기회로 ‘요한을 독일에서 온 남성이 왕비를 겁탈하고 임신까지 시켰으며 국정을 농단해 덴마크를 말아 먹고 있다’는 흑색선전을 대대적으로 퍼트려 덴마크 민중을 요한으로부터 돌려 놓은데 성공한다.
그런 뒤 귀족들은 힘을 합쳐 쿠테타를 일으키고 왕을 압박하여 요한을 재판에 회부한다. 쿠테타에 성공한 귀족들이 왕까지 쫒아 내지는 안했지만 왕비를 쫒아 내고 요한은 죽이려고 한다.
요한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지만 사형 직전에 왕이 사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또 허수아비가 된 왕은 왕비와 요한을 살리고 추방만 시킨다는 조건 아래 귀족들 처벌 요구에 동의했지만 귀족들은 왕을 속인 채 왕비는 추방하고 요한은 형장에서 목을 베어 버린다.
왕의 사면으로 추방만 당하는 것으로 알고 가던 요한은 마지막 길이 형장이라는 것을 알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또 그 자리에 모인 군중들이 요한에게 돌을 던지며 비난을 하자 그들에게 향해 마지막으로 처절하게 외친 말이
“ 난 당신들 편이야~”
이었다.
이 영화에서 한국의 시대사가 떠올랐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우리 역사 속에도 비일비재 하지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공민왕과 신돈이었다.
시대는 많이 다르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신돈 등장은 여러 설이 있지만 노국공주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공민왕에게 노국공주와 닮은 반야라는 여성을 소개해 공민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그 사실이 전혀 정설로 밝혀진 것은 아니다.
공민왕과 반야 사이에 낳은 아들이 우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계가 우왕을 밀어 낸 가장 큰 명분이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오해 받을 소지는 있다.
어쨌던 신돈은 6년간 집권기간 동안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설치와 활동을 통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권문세가들이 탈점했던 전민(田民)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신돈은 당시 백성들로 부터 “성인이 나타났다.”라는 찬양을 받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권이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있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고려 권문세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민왕을 움직여 신돈을 반역혐의로 처형 시키는데 성공한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신돈이나 요한 두 사람 공통점은 그들 권력과 지위는 왕권으로부터 의탁을 받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들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 시대상황이 전제군주 국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공개적 검증(의회 같은 제도권)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권력 행사는 아무리 개혁적이라고 해도 위험하며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도덕성을 담보 하지 않은 개혁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가
달라짐으로써 또 다른 수구 이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준다.
우리는 많은 역사에서 본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혁명 등 성공한 혁명도 그 성공 기쁨도 잠시였다.
혁명가들이 너무 앞서 가면서 동시대인들과 눈 맞추기에 실패해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동시대 민중들도 혁명 성공 이후에는 개혁보다는 개인적 욕망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성급히 몰아 붙이는 위로부터 개혁은 동시대 민중과 같은 호흡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몰락하고 반동을 잉태한다는 서글픈 사실을 본다.
그리고 보수반동세력은 이 틈새를 기가막히게 활용 할 줄 안다.
이러한 점은 동서고금을 떠나 역사적 진리가 되어 있다.
로얄어페어 영화는 이러한 점을 재확인 시켜 주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여기서 중우란 말 그대로 "어리석은 대중"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피 흘린 소수의 각성된 시민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중이 그에 따르면서 발전해왔지만 다수의 중우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그 사례는 우리나라 요즘 현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이 영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왕비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왕이 되어 왕비가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써놓은 편지를 읽고 요한의 개혁정책을 요한이 죽은 지 50년 만에 덴마크에 다시 되살려 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역사의 진보는 얼마나 더디고 힘들게 쟁취하는 것인지를 300년 전의 덴마크에서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발견하는 슬픔을 가져다 준 영화이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