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色과 尋伺
名色(化/變成) - 觸 - 尋伺(정思惟, 槪念/반야)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욕계 중생들에게 일상적으로 생겨나는 6觸신(무리)의 根底에는
6處(안이비설신의)와의 觸이, 또한 그 근저에는 과거의 업에 의한
이른바 바왕가의 흐름(명의 무리와 색의 무리가 재생연결識을 중심으로 갈애에 의해 묶임)이
잠재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6觸신이란 근저에서 일어나는 6處觸의 또 다른 모습과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이것은 名과 色 사이에서 識을 통하여 정보를 주고받는 無明觸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살고 있는 욕계 중생들이 외부의 대상(외처)에 대해서 관심을 줄이거나
조심하면서 수용하고 살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사건들(법들)로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이 4념처(身受 ☜ 名色 등) 수행으로 생각되고
만약 색계삼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욕계 삼매 상태(正念에서 正定 사이)에서
이른바 바왕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상좌부에서 말하는 이른바 찰나삼매로 생각된다.
그 자세한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니까야에 산재하여 나타나고 있다.
nāmaṃ kho, āvuso, eko anto, rūpaṃ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 taṇhā sibbinī;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
nāmakāyarūpakāyasaṃghātalakkhaṇaṃ nāmarūpaṃ.
Taṃ chaḷāyatanassa padaṭṭhānaṃ.
정신·물질현상은 정신현상의 더미(名身)와 물질현상의 더미(色身)의 조합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정신·물질현상은] 여섯 영역의 근접요인이다.
Imāni bhavaṅgāni yadā samaggāni nibbattāni bhavanti, so bhavo.
Taṃ saṃsārassa padaṭṭhānaṃ.
그 존재[를 이루는] 부분들이 합쳐져서 발생하는 것이 있다. 그 때 그것이 존재(有)이다.
그 [존재는] 윤회의 근접요인이다.
名身(nāmakāya)-總相(nimitta)-개념(paññatti)때문에
色身(rūpakāye)에 命名觸(adhivacanasamphasso)이 알려진다(paññāyethā)
色身(rūpakāya)-總相(nimitta)-개념(paññatti)때문에
名身(nāmakāye)에 有對(色)觸(paṭighasamphasso)이 알려진다(paññāyethā).
paññatti ☞ adhivacanapatho, niruttipatho,
paññattipatho ☞ 尋伺(心行 <口行> 身行 ☞
paññāvacara / 名 <正思惟 : 慧蘊> 色) ☞ 初禪
Kimārammaṇā samiddhi, purisassa saṅkappavitakkā uppajjantīti?
Nāmarūpārammaṇā bhanteti.
Te pana samiddhi, kva nānattaṃ gacchantīti? Dhātusu bhanteti.
Te pana samiddhi, kiṃ samudayāti? Phassasamudayā bhanteti.
사밋디여,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에게 사유[*尋-思惟]가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정신과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사밋디여, 그러면 그것은 어느 곳에서 다양하게 되는가?
존자들이여, 요소[界]들에서 다양하게 됩니다.
사밋디여, 그러면 그것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감각접촉 때문에 일어납니다.
nāmarūpapaccayā phasso
*여기서의 觸은 名色 내부에서의 觸이다.
‘kāyo’ ti. dve kāyā - nāmakāyo ca rūpakāyo ca.
‘身’이라 할 때, 두 가지 身이 있다. 名身과 色身이다.
katamo nāmakāyo?
‘名身이란 무엇인가?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nāmañ ca nāmakāyo ca,
ye ca vuccanti cittasaṅkhārā. ayaṁ nāmakāyo.
受 ․ 想 ․ 思 ․ 觸 ․ 作意. <*名이라고도 하고, 名身이라고도 하는 것이며,>
心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 名身이다.
katamo rūpakāyo?
‘色身’이란 무엇인가?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ñ ca mahābhūtānaṁ upādāya rūpaṁ
assāso ca passāso ca nimittañ ca upanibandhanā,
ye ca vuccanti kāyasaṅkhārā. ayaṁ rūpakāyo.
四大 ․ 四大 所取 色 ․ 呼․吸 ․ 묶는 相,
身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 色身이다.
Kathaṃ sabhāganimittato sati uppajjati?
Sadisaṃ puggalaṃ disvā mātaraṃ vā pitaraṃ vā bhātaraṃ vā bhaginiṃ vā sarati,
oṭṭhaṃ vā goṇaṃ vā gadrabhaṃ vā disvā
aññaṃ tādisaṃ oṭṭhaṃ vā goṇaṃ vā gadrabhaṃ vā sarati,
evaṃ sabhāganimittato sati uppajjati.
어찌하여 기억은 서로 비슷한 것으로부터 일어납니까.
이를테면 비슷한 사람을 보고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나 자매를 상기하는 것과 같고,
또 낙타나 숫소나 노새를 보고 그와 비슷한 낙타나 숫소나 노새를 상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질(ākāra)들이란 느낌, 인식 등의 서로서로 같지 않은 상태(asadisasa-bhāva)를 말한다.
특징(liṅga)들이란 느낌, 인식 등을
잘 드러내면서 각각 분명하지 않은 뜻(līnamatthaṃ)을 드러내기(gamenti) 때문에 특징이라 한다.” (Ibid)>
Kathaṃ visabhāganimattato sati uppajjati?
Asukassa nāma vaṇṇo ediso, saddo ediso, gandho ediso, raso ediso, phoṭṭhabbo edisoti sarati,
evampi visabhāganimittatopi sati uppajjati.
어찌하여 기억은 서로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납니까.
이를테면 어떤 것에 대하여 모양은 이러하고, 소리는 이러하고, 향기는 이러하고, 맛은 이러하고,
만지면 이러하다고 상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Kathaṃ lakkhaṇato sati uppajjati?
Yo pakatiyā balībaddānaṃ aṅgena jānāti, lakkhaṇena jānāti, evaṃ lakkhaṇato sati uppajjati.
어찌하여 기억은 특징으로부터 일어납니까.
이를테면 소를, 찍힌 도장에 의하여 알아보고 특징에 의하여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하 2023. 06. 27. 10:43 부가된 내용
yo ca sammāvāyāmo yā ca sammāsati yo ca sammāsamādhi
ime dhammā samādhikkhandhe saṅgahitā.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이 [세 가지] 법은 삼매의 무더기[定蘊]에 포함됩니다.
yā ca sammādiṭṭhi yo ca sammāsaṅkappo, ime dhammā paññākkhandhe saṅgahitā”ti.
바른 견해, 바른 사유의 이 [두 가지] 법은 통찰지의 무더기[慧蘊]에 포함됩니다.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며 이 법들은 몸에 계박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槪念/慧 vitakka = saṅkappo>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Āsā ca pihā abhinandanā ca,
anekadhātūsu sarā patiṭṭhitā;
Aññāṇamūlappabhavā pajappitā,
sabbā mayā byantikatā samūlikā’’
기대와 열망 그리고 기쁨,
다수의 계(界)에 확립된 기억들, <*18界에 대한 갈애 ; subhanimitta < 66법에 대한 欲貪(心의 오염)
앎의 없음을 뿌리로 하여 생겨난 갈망들,
나는 이 모든 것을 뿌리 째 끝내버렸다.
* 여기서 sara(기억)는 界(dhātu)에 대한 기억(sati)이며 갈애(딴하)의 동의어로 쓰였다.
니밋따(相, nimitta) 방식으로 기억하고 想으로 진행된다.
욕계 중생들은 欲界 방식의 기억 즉 갈애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고
만약 까마를 벗어나고자 하는 갈애를 지닌 자를 수행자라고 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定蘊에 속하는 身受心法에 대해 念念不忘하는 갈애를
4念處(4가지 수행주제를 잊지 않고 기억함)라고 말씀하신다.
* 또 부기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bāl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無明에 덮이고 愛에 묶여서 이와 같이 이 身이 집기集起한 것이다."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saḷāyatanāni (ka.)],
yehi phuṭṭho bāl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a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
"바로 이 [집기한] 身과 밖으로 名色이라는 쌍이 있으며,
이 쌍을 緣하여 觸이 있고 六處들이 있으니,
어리석은 자는 六處들이나 六處들 중 일부에 접촉(觸)되어 樂・苦를 경험한다."
첫댓글 [ “yaṃ kho, bhikkhu, divā kammante ārabbha rattiṃ anuvitakketi anuvicāreti —
ayaṃ rattiṃ dhūmāyanā.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이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밤 : 명색상태(바왕가) - 훈습 - 有>
yaṃ kho, bhikkhu, rattiṃ anuvitakketvā anuvicāretvā divā kammante payojeti
kāyena vācāya manasā — ayaṃ divā pajjalanā.
비구여, 밤에 사유하고 고찰한 것을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이 낮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낮 : 육입상태 - 현행 - 業>]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 : (안이비설) 身 <口> 意
[ “yaññadeva, bhikkhave, bhikkhu bahulamanuvitakketi anuvicāreti, tathā tathā nati hoti cetaso.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서 일으키고 고찰을 거듭하다보면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
[ 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saññā, uppajjati diṭṭhi, uppajjati vitakko”ti.
비구들이여, 요소를 반연하여 인식이 생기고 견해가 생기고 생각이 생긴다.]
名色과 尋伺
名色(化/變成) - 觸 - 尋伺(정思惟, 槪念/반야)
위 글 봄봄님께서 직접 작성한 것입니까?
//직접 작성한 것입니까?//...
어떤 의미입니까?
@봄봄 위 포스트를 봄봄님께서 직접 작성 하셨다면 여쭙고자 하는 대목이 많아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pakatiyā balībaddānaṃ aṅgena jānāti는 밀린다 왕문경에 나오는 글인데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는
맛지마111 순차대로 공부지음 경과 연계시키기 어려우며
기억은 나마곳따 즉 viññāṇa 있기에 manoviññāṇa가 일어나게 하는 조건paccaya인 마노상카라에 기인하는 12연기의 설명에 미흡합니다.
하지만 "6觸신(무리)의 根底에는
6處(안이비설신의)와의 觸이, 또한 그 근저에는 과거의 업에 의한
이른바 바왕가의 흐름(명의 무리와 색의 무리가 재생연결識을 중심으로 갈애에 의해 묶임)이
잠재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6觸신이란 근저에서 일어나는 6處觸의 또 다른 모습과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처럼 뛰어난 안목은
아비담마에서 거론하는 것이고 이를 실참수행에 연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봄님께서 이러한 원리를 몸으로 체험하려면 사념처 수행에서 빠자나띠가 증진되어야 가능한 부분입니다.
사념처 수행을 안하셨다고 햇는데 어떻게 이를 파악했는지 궁금합니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본문 名色(化/變成) - 觸 - 尋伺은
다른 측면에서는
界 - 相(nimitta) - 念(sati, 기억) - 66법(욕계愛지연기)의 측면과도 연결됩니다.
각각의 법수(ex. sati)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尋伺(명색-개념/시설)가 慧蘊에 속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초선의 尋伺에 대해서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지 싶습니다.
담가요가든지 자니든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다면
알고자 접하고자 공부하여야 하지 싶습니다.
이상의 의견은 이론상 그렇다는 말이지 직접 접한 적은 없습니다.
참고로 위 본문의 한글 번역은 대부분 번역하신 분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글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 번역어 각각에 대해서는 각자 근기에 맞게 새겨 읽으시면 되고
특별한 의견이 있는 점에 대해서는 일부 부기하여 두었습니다.
@봄봄 尋伺(명색-개념/시설) 심이 명색이고, 사가 개념/시설이라는 표현은 신선하기한데
출처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심사란 보통 위따까, 위짜라를 사용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위 내용을 연계시키기 어렵습니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연결되는 단어들을 일대일 대응하게 읽으셨다면
글을 쓴 사람이 잘못 쓴 것입니다.
앞으로는 글이 길어지더라도 나누어 쓰겠습니다.
'nāmaṃ kho, āvuso, eko anto, rūpaṃ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 taṇhā sibbinī' 에서 나마루빠 가 나오며 이후 viññāṇaṃ가 거론 됩니다. 이는 오취온을 파악하는 12연기에서 중요한 즉 마노가 나마루빠를 대상으로 정신을 기울이는 수준이 필요하며
이를 직접 보고알기 위해선 반드시 anāsavacittassa의 체험이 요구 됩니다.
만약 이 부분을 직접 알고보면은 최소 2선정을 증득해야 가능한 부분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사건들(법들)로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이 4념처(身受 ☜ 名色 등) 수행으로 생각되고" 이 표현을 보자면 4념처 수행을 하지 않으신 것이어서 위 흐름을 체험하지 못함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가 아니라 bahira āyatana에서 즉 안이비설신의가 아니라 색성향비촉법에서 발생하고 이는 안이 아니라 밖입니다.
법념처의 살라아야따나와 10상요자나를 통하여 증험되기에 사념처 수행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대목 입니다.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생각(*saṅkappa)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kāmo)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로다.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 뿐이어라(*tiṭṭhanti loke).
슬기로운 자들은 그것에 대한 의욕을 길들이노라.
@봄봄
//...안에서 새던 바가지가 밖에 나간다고 안 새는 것이 아니듯...//
ㅎㅎ
@봄봄 saṅkappa. 이 단어는 ‘성스러운 8차선의 길’(八正道) 중에서 두 번째인 ‘바른 의향’(sammā saṅkappa, 正思惟)에 나온다. 그러나 기존의 ‘사유’라는 한역은 외연이 넓은 부정확한 번역어다. ‘같이(saṁ) 계획하다(√kḷp).’로 파자된다. 무언가 인지한 직후에 생기며(디3-522, 맛3-214) 본격적으로 욕구를 갖고 행위 하기 전에 계획되는 어떤 정신작용이라고 보인다. 바른 의향은 ‘초탈하려는 의향’, ‘언짢지 않으려는 의향’, ‘해치지 않으려는 의향’이라고 정의된다.(상5-190) 이 세 가지는 똑같이 떠올림(尋, vitakka)의 종류로도 다루어진다.(맛1-498) 또한 ‘의향-떠올림’(saṅkappa-vitakka, 앙5-409)이 같이 묶여서 취급되기도 하기 때문에 의향과 떠올림이란 비슷한 지위 내지 성질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인지→의향→욕구→애태움’의 과정(상2-395)과 ‘망상적인 인지의 규정→떠올리기→욕구→사랑’의 과정(디2-464)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출세간적인 바른 의향에 ‘떠올림’과 ‘마음의 지향’(cetaso abhiniropanā)을 부분으로 들고 있기도 하다.(맛4-164)
의향
@봄봄 봄봄님은 바가지가 아니고
커다란 배이십니다.
그리고 새지 않으면 바가지는 썩어 버리기 때문에 새는 바가지가 가치 있는 것이지요.
ㅎㅎ 라는 표현 보니 아가씨 같아 보이시네요..
@봄봄 어휘 즉 '생각'에 속하지 않는 어휘가 없으니 이 용어를 한정하여 아니면 정합성을 높여서 표현하시면 읽는 분과 쓰는 분도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실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남의 글 보다는 자신의 사유를 증장시키는 글,, 부족하지만 자기 글을 쓰는 습관은 존재를 수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삼으로 삼아서 글을 쓰시는 분들은 힘이 있어 보입니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가능하면 파자는하지 마시고
경문에서 용례들을 수집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르게 이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미 정착되어 있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서로 대화하려면 심각한 오류가 있는 표현(ex. 마음챙김)이라도 각자 근기에 맞게 사용하시면서
자신의 의견을 첨언하면 최소한 대화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른 의향'이라는 의미에서 '의향'이 부각되면 또 다른 오해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봄봄은 '의향'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생각(어행/구행)'이라는 의미로 새겨서 읽습니다.
즉 '밥 생각이 난다.'라는 표현은 밥에 대한 의향과 밥에 대한 작의와 밥에 대한 갈애 등등
여러 의미가 포함될 수 있지만 하여튼 어행/구행이라는 의미이지 싶습니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아직 타심통은 ^^
무뚝뚝하지만 늦게 본 외손녀에게는 다정한, 연금으로 몇년째 살고 있는 경상도 머서마임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님께서 마노를 '생각'으로 혹은 담마를 '생각'으로 정하고 나면
다른 분들의 글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봄봄은 대책없는 표현이 '생각'이라고 평소에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마노나 담마가 '생각'이라고 번역하는 것에는 ....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nāmañ ca nāmakāyo ca,
ye ca vuccanti cittasaṅkhārā. ayaṁ nāmakāyo.' 이는 네띠빠까라나와 무애해도에서 언급되지만 경에서는 ~kāya 가 없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나마를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정신계 즉 마노가 파악하는 영역인데 이를 정신이라 명칭을 벗어나 '명'으로 지칭한 위 번역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참고적으로 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서 두 명 밖에 없을 수 있다.
nāmakāyo은 명칭집단이나 명칭의 영역 또는 명칭의 범주 등이 적절할 수 있다.
'nāmarūpapaccayā phasso' 는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로서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nāmarūpapaccayā phasso는 디가15 대인연경에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으며 여기에서
nāmarūpa 는 공통적으로 짜임새들/형태들ākāra이나 특색들liṅgā이나 인상들nimittā이나 집약들uddesa을 동반함을 이해하면 4선과 염오 이욕에 결정적 도움과 이해가 동반되는 제시인 것이다.
saṅgati 는 낄레사로 오렴된 습관이고 중생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향들이다.
名身(nāmakāya)-總相(nimitta)-개념(paññatti)때문에
色身(rūpakāye)에 命名觸(adhivacanasamphasso)이 알려진다(paññāyethā)
色身(rūpakāya)-總相(nimitta)-개념(paññatti)때문에
名身(nāmakāye)에 有對(色)觸(paṭighasamphasso)이 알려진다(paññāyethā).
실례가 있으면 이해가 가능 할 것 같습니다. 또한 12연기 내에서 설명한다면 확연하게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iti aphusitaṃ vā dhammaṃ vimuttiyā phusissāmi,
phusitaṃ vā dhamm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evaṃ kho, bhikkhave, satādhipateyyaṃ hoti.
'아직 接하지 못한 法을 해탈하기 위해 接하리라,
接한 法은 적절하게 반야로써 지속적으로 把握하리라.'라고 -
('위 내용'에 대한) 念이 內로 잘 확립되어 있다.
이와 같이 念이 領導한다.(이끌어 간다.)
세상 참 편하게 사십니다.
그저 복사하여 붙이시니 님의 뜻을 알기 어려워라!!!
해탈을 좋아 하시는 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함께 해탈하여 보도록 내외의 정진 응원드립니다.
참고로 위 경문에 대한 번역은 봄봄의 좁은 알음알이로 쓴 글입니다.
@봄봄 그러면 lim doctor 가 맞는가 보지요..
@존재가 끝났다 no. lim doctor가 이렇게 번역한 적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위 번역은 봄봄의 번역임은 확실합니다.
특히 satādhipateyyaṃ에 대한 번역은 봄봄처럼 번역한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본 카페에 가입한 초기에 아마 10 몇 년전에 본 카페에 의견을 올려 두었습니다.
@봄봄 동일인이 아니시군요
‘‘Accī yathā vātavegena khittā [khittaṃ (syā.), khitto (pī.)], (upasīvāti bhagavā)
Atthaṃ paleti na upeti saṅkhaṃ;
Evaṃ munī nāmakāyā vimutto,
atthaṃ paleti na upeti saṅkhaṃ’’.
“우빠씨바여, 가령 바람의 힘에 꺼진 불꽃은
소멸되어 헤아려지지 못하듯,
성자는 정신적인 것들에서 해탈하여, <nāmakāyā : *名 = 名身 = 心行>
소멸되어, 아무도 그를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