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한(弁辰韓)국가의 하나로 건국한 ' 고녕가야(古寧伽耶)', 그 이름으로 인한 논쟁의 발생 고녕
오늘날 고녕가야(古寧伽倻, 일명 咸 昌伽倻)를 언급하면i)오늘날 고령군(高靈郡)지명과 오늘날 함창읍(咸昌邑)옛 지명
고녕(古寧)의 소릿값이 같아 혼용하게 되어 논란(혼란)이발생했다.ii) 따라서 역사 전문가들도 고령 대가야(高靈 大伽倻)와
함창 고녕가야(咸昌 古寧伽倻) 를 동일시 혹은 바꿔 사용하곤 한다.iii) 그랬다고 고령가야(古寧伽倻)를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고녕가야(古寧伽倻, G ǔ n í ng ji ā y é) 로 표기함이 옳지 않다고들 하고 있으나, 고녕가야(古寧伽倻)는 녕(寧)자가
뒤에 있으므로 두음법칙과 전혀무관하게 녕(寧)의 소릿값 그대로여야 한다. 일예로, ' 창녕(昌寧)'도' 창령'이라 읽지 않고 '
창녕'이라 읽는다. iv)
따라서 해명이 길더라도 정공법으로 고녕가야 라고 표기해야 할 판이다. 중국어 위키페디아(維基百科)에서는 고녕가야(古寧伽倻)
항목에 '522년에 고녕가야와 신라의 성혼관계 (古寧伽倻和新羅 結成婚姻關係)' 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그 이유로 삼국사(三國史)
와 일본서 기(日本書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뭔가 잘못된 게 있지 않을까? 254년에 멸망한 고녕가야(古寧伽倻)가 어떻게
국혼을 추진했는지 의아해서 찾 아봤더니 고녕(古寧, Gun í ng) 과 고령(高靈, G ā o l í ng) 이란 한글을 같이 읽음 에 착오를 범했
다. 362 최근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 들은"고녕가야(古寧伽耶)" 라고 원래대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녕이라 읽음이 맞다고 본다. 고녕가야(古寧伽倻)를 언급하기 전에 오늘날 함창 옛 고녕(古寧)에는
AD 290 년경에 진수(晉壽)가 편찬한「 삼국지 (三國志 )」에서 언급하고 있는 ' 호로 국(戶路國)' 이 고녕(古寧)에 있었기에
고녕가야(古寧伽倻)는 그곳에 건국도 존속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들의 주장을 옮기면 " 호로국 (戶路國)은 진한 12 소국
중의 하나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는 삼한 소국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 소국 이름은 상시 중국
상고음 (上古音) 에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 호로 ( 戶路 )"363 의 중국 상고음(上古音)은' 루올루(ruo-luo)' 이고, 북경음(北京音)은
' 슐루(xu - lu)' 인 데 대체로 우리나라 한자음에 가깝다. 그 위치에는 고녕가야(古寧伽耶)가 있었다.
또 신라 때 고릉군(古陵郡)이었다는데 착안하여 경상북도 상주시함창읍일대로 비정했다. ' 호로(戶路북경음hulu)' 는 중국 상고음
(上古音)에 서 ' 귀뤄(guelue)' 로 발음되어 ' 고녕 (古寧, guning)" 또는 " 고릉(古陵, guling)' 과 음이 비슷하기에 그렇게 비정했다.
이와는 달리 같은 연유로 골벌국(骨伐國, Guf á gu ó)'이 있던 경상북도 영천시 일대로 비정하기도 했다
. 고녕가야(古寧伽倻) 는 진변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관계(結束関係)를 성립한 채,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유지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신라에 점령되었다."라고 한국민족 문화백과사전은기록하고 있다.
고대 국가의위치를 단순하게 발음상으로 비정(比定)하는 것을 두고 " 똥 을 싼다."라는 비근한 표현을 한다. 대구(達句伐)의 삼한시대
(三韓時代) 의 소국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여 ' 탁순국(卓淳國 혹은 啄淳國)' 이라 하여 발음상 ' 달구벌(達句伐)'에 가깝다
고 비정했다가 1986년 이후 몇 차례 창원시(昌原市)도계동 고분군 발굴에서 A.D.2~5세기 출토된 유불을 통 해 ' 탁순국(卓淳國)'을
창원으로 비정하게 되었다. 364
고대 국가의 위치를 찾는데는 단순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신중성을 더하고자 i)발음상 유사성,ii)지역적 특성, iii )문화적
동질성, iv ) 접근이 가능한 문헌상 고찰, v) 현장탐사 등을 통해 분석과 종합적인 고려를 한 뒤에 '학문적 진리 탐구 차원(academic
truth-seeking dimension)'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벌국(沙伐國) 은 출토된 청동기 유물을 기반으로 볼 때 건국 시기는 B.C.
2세기경부터 황산강 유역의 풍부한 해산자원(海産資源)과 수 상 교역(水上交易)의 요충지 (要衝地)로 기원 전후까지 청동기 세력
을 형성 하여 독자적인 소국을 형성했다
.강역(疆域)으로는 오늘날 상주시 일대를 중심으로 사방 40리 소국 (百里小國) 을 형성했다.세력권(勢力圈)은 오늘날 경북 북서
부와 충청도 동부 지역을 권역으로 했다. 전한과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황실 일족의 해상 집단 세력이었다. 그러므로 전한의 첨단
제철 기술을 갖고 A.D.42년경 ' 황산강 건국 벨트(黃山江建國帶)' 로 하여 함창에 고녕가야(古寧伽倻)를 건국했다.
최근엔 기존 청동기 토착 세력이 완강한 저항과 사자 몫(lion's share ) 을 요구했다.
그러나 뒷심 부족으로 건국을 막지못했다. A.D.64년경부터 신라는 고녕가야와 화친을 추진하여i) 낙동 진 (洛東津)에다가 신라의 백제
정벌 병참 기지를 마련했다.ii) 화령재를 백제정벌로로 개척했고,iii) AD156년 계립령을 고구려 정벌로개척함에 지원까지 했다.
그럼에도 iv) 신라는 A.D. 249년에 백제에 기울어진 낌새 를 차리고 A.D.254 년에 고녕가야를 병탄시켰
다. 또한, 그런 감정으로 병탄 후도 고녕가야(古寧伽倻) 의 도읍지를 소경(소경) 으로 예우하지 않았다. 동람군(古冬攬郡)으로
격하시켜 통치했다. 곧이어 먼저 병탄 된 사벌국주(沙伐國州)혹은 사벌주(沙伐州)라는 통치 기구에 포함시켰다.
지정학상 위치 논쟁으로 고녕가야 (古寧伽倻)는 ' 그림자 국가 (shadow state)' 로 단정되는가?
고녕가야(古寧伽倻) 라는 명칭에서부터 오늘날의 고령군(高靈郡)이란 지 명과 혼돈 · 착각하여 고령(高靈 ) 에 있었던 가야로
오해를 하기 쉽다. 최근 재야사학( 在野史學 )에서는 ' 고녕가야(古寧伽倻)'라고 이미 확정하여 강단 사학과의 혼란이가중되고
있다. 현재 ' 고녕가야(古寧伽倻)' 역사를 정립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는i) 가야산(伽倻山)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에서
북쪽 진한의 소국(沙伐國) 으로 강역을 차지하기에는 지정학적 위상 으로 진한계 소국설(辰韓係小國說)이 거론되고 있다.ii)
고녕가야(古寧伽倻)의 명칭에서 경덕왕 이후에 고녕(古寧) 으로 불렸기에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호족세력365의 명분상 고녕가야
로 참칭했다는 주장(豪族借稱說)이있다.여기에다가 iii )
가야 연맹 시대 (伽耶聯盟時代)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대가야(大伽倻) 의 멸망 이후 우륵(于勒)의 중원경 (中原京, 오늘날 충주)
사민에 많은 가야 호족(伽倻豪族)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함창에 머물렀던호족이 고려 태조 23(940)년경에 고녕가야(古寧伽倻)
라고 불렀다는 유입 호족지칭설(流入豪族指稱說)이 있다. iv)
실증 역사학 혹은 고고학상의 유적유물이 고녕가야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역사적 고문헌(歷史的 古文 献) 은 물론 제 1 차적 역사
자료(第一次的 歷史資料, primary historical data)의 빈곤함이 바로 극복해야 할 과제다. 366
이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지정학상(백제와 신라의 점경지역) 강역문제(疆域問題)는i) 오늘날 함창읍, 이안면,공검면,문경시
(점촌읍)는 BC 57년에 건국한 신라와 BC18년에 건국한 백제가 각축하고 있던 접경 지역(接境地域)이었다.ii) 실증사학계(實證史學界)
에서는 가 야연맹체 소국들은 가야산(伽倻山) 을 중심으로 강역을 형성했는데 고녕(咸昌)은 북쪽으로 너 무 떨어져서 진한계(인근
沙伐國이 신라계) 소국에 속했기에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247~261)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주장이다.
한편iii)일본인 역사학자(日本 歴史學者) 나가미치오 (なかみちよ, 那河通世,1851 ~ 1908)367의 고녕가야(古寧伽倻)는 휴인국
(休忍國)과 발음이 비 슷하다. 가야 제국 강역 밖에 있으며, 가야산에서 많이 멀다. 경상도 북서 쪽에 치우쳐 있어 경주와도 떨어져 있다
(古寧伽倻 は 休忍國 と 發音 が 似 てい る. 伽耶諸國 の 疆域 の 外 にあり 、伽耶山 から 多 く遠 い 、 慶尙道北西 に 偏
っており, 慶州 とも 緩 んでいる ) 고 했으나 큰 문제 없이 받아들였다. 368 iv ) 실증역사학 자인이병도(李秉道) 의 「 한국 고대사
연구(韓國古代史研究)」 369 에서'고령(古寧)'이 진주 (晉州) 의 옛 지명 '거타(居陀)" 혹은 ' 거열성(居烈城 ) 370 과 발음 이
비슷하다고, 가야제국에서 지리적 중요성(雄州巨牧) 으로 봐 고녕가야 (古寧伽倻)를 진주(晉州 )의 소국으로 비정했다.
대가야 우륵 선생의 가야금12곡 가운데 제 9곡 '거열(居烈, 거주민이 벼수확에 환희를 부른 향가)'371 이 있는 것으로 봐서 후대에
함창(咸昌)혹은 진주(晉州)로 비정(比定, specifi cation)하는 건 모두가 과오(過誤, mistake)다. 372 최근에는 진주시의회에 서도
진주는소가야에 속했다고 주장했다.
왕사(王史)에 있어서도 가락국기(駕洛國記) 등의 역사적 문헌에도 고로 왕이 둘째 왕임은 기록하나, 그 강역이 함창임은 기록된 것이
아닌 함창 김씨 족보(咸昌金氏族譜)를 기반으로 지난 1979년 작성한「 고녕가야대관(古寧伽倻大觀)」에 A.D.42 년 3월15일 태조
고로왕(古露王)이건국하여 3대 걸쳐 213년 만에 254 년 신라 첨해왕(沾解王,재위 247 ~ 261)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
293년에 오늘날 영덕 해안지역 사도성(沙道城) 으로 호족 80여 호가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고녕가야 왕족
(古寧伽倻王族)임을 표시하고자 했다는 주장도 있다. 고녕(古寧, 혹은 古陵)이란 지명은 경덕왕(景德王)때에 개명된 것으로 봐서
이후 고녕가야(古寧伽倻)가생겼 다는 주장도 있다.
즉 고려광종(光宗)12 (A.D. 961)년 에 함녕군(咸寧君) 으로 개명하였기에 나말여초에 고녕가야(古寧伽倻 ) 를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다.또 하나의 기록상 취약점은 고로왕의 재위 기간이 A.D. 42 년에서 A.D.156 년까지 115 년간이라는데 당시 평균
수명이 50 세 이하였기에 비현실 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2 대 마종왕(摩宗王) 은 A.D. 156 년에 A.D. 220 년으 로 64 년,3대
이현황 (利賢王) 은 A.D. 220 년에서 254 년으로 마지막 왕이 되 었다.
가야 연맹체의 총 왕인 수로왕(首露王)의 재위 기간이 A.D.42 년부터 199 년까지157년간보다는 덜하다.결국은 오십보소백보
(五十步笑百步) 다. 물론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재위 기간이 70 년에서 120년까지 여러 왕조의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가야 연맹 구성국의 소국(小國)으로서 자율적인 국왕 교체(國王交替) 까지도 어려웠다는 사실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대영
김도상. 共著
<다음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