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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춘추소력(春秋小歷)
만력18년, 여곤(呂坤)이라는 사람이 산서안찰사(山西按察使)로 부임했다.
이 직위는 상당히 중요하다. 권력도 아주 크다. 산서성의 법률과 감찰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고, 적어도 정사품(正四品)에 해당한다.
이 여곤이라는 사람은 관리가 되기 전에 명나라의 거유(巨儒)로 학식이 뛰어났고, 책을 편찬하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산서에 부임한 후, 남는 시간에 책 하나를 편찬하여 출판한다. 명칭은 <규범도설(閨範圖說)>이다.
이 책은 인물의 전기로 주로 명나라이전 역대왕조 정결열녀(貞潔烈女), 현부양녀(賢婦良女)들의 이야기이다. 그녀들의 행위를 선양하고, 그녀들의 품덕을 칭송함으로써 천하의 여자들이 본받도록 선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널리 호평을 받고, 산서에서 적지 않은 수량이 인쇄된다. 나중에 진구(陳矩)라는 환관이 북경에서 산서로 출장을 왔다가, 산서에서 이 책을 읽게 된다. 다 읽고난 후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하여, 한권 사서 궁으로 돌아온다.
이 책은 환관 진구가 가지고 왔으므로 궁안에서 이 사람 저사람을 거쳐 만력제(萬歷帝)가 총애하는 정귀비(鄭貴妃)의 손에 들어간다.
정귀비는 이 책을 읽고나서, 고대의 현량여자를 칭송하는 책이므로 자신이 이 책에 내용을 추가하여 자신을 집어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신도 고금의 현량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자기만 이 책에 넣자니 너무 노골적인 것같았다. 그리하여 조금 자연스럽게 집어넣기 위하여, 정귀비는 한꺼번에 적지 않은 사람을 추가한다. 동한 한명제 유장(劉莊)의 황후 마씨(馬氏)부터 시작하여 모두 12명을 추가하고, 마지막에 자신을 집어넣는다.
그후 정귀비는 자신의 집안친척인 백부 정승은(鄭承銀)과 오빠 정국태(鄭國泰)를 시켜 두 사람으로 하여금 신판 <규범도설>을 인쇄하여 출판하게 한다.
그렇게 되니 당시의 대명에 두 버전의 <규범도설>이 존재하게 된다. 제1판은 여곤이 쓴 원본이고, 거기에는 정귀비가 없다. 구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또 다른 버전은 정귀비가 기획출판한 제2판이다. 즉 신판이다.
이 두 버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신판은 구판보다 그저 몇몇 역대왕조의 현후(賢后)를 추가했을 뿐이기 때문이댜. 그러나, 실제로 두 버전의 의미은 천양지차이다. 여곤이 쓴 구판은 사심없이 순수하게 모두가 공인한 현량여자들을 골라서, 그녀들의 평생이력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고, 목적은 그저 이런 고대여자의 품덕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귀비가 수정한 신판은 자신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정귀비가 여곤의 원본을 수정하면서 그녀는 여곤에게 말하지 않아서, 여곤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고친 후에 간행출판하면서 자신이 이 <규범도설>을 고쳤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야는 구판의 <규범도설>과 신판의 <규범도설>을 혼동하여 모두 여곤이 쓴 것으로 여겼다.
다시 몇년이 흐른 후, 여곤이 산서안찰사에서 다시 북경의 중앙정부로 돌아와, 조정에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된다.
여곤은 명신(名臣)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무를 열심히 했고, 국가를 걱정했다. 중앙으로 돌아온 후, 매일 만력제가 조회를 열지 않으며, 매일 후궁 정귀비와 어울려노는 것을 보고 매우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에게 상소문을 쓴다. 이 상소문의 이름은 <우위소(憂危疏)>이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황제에게 일을 열심히 하고, 조회를 잘 열고, 근면절검하면서 여색을 멀리하라는 등이다.
이 상소문을 받았지만, 만력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력제가 조회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이미 통상적인 일이 되었고, 그는 죽은 돼지는 뜨거운 물을 겁내지 않는 것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여곤의 상소문 하나가 그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때 조정에 대사형(戴士衡)이라는 급사중(給事中)이 있는데, 그는 감찰관리였다. 여곤의 상소문을 보고 불만이 컸다. 즉시 여곤을 탄핵한다. 여곤은 이중인격이라는 것이다.
여곤은 깜짝 놀란다. 자신은 이 나이가 되도록 행동은 단정했고, 올바르게 살아왔다. 정은정, 묘는 묘이다. 자신이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일을 열심히 하라고 권했을 뿐이고, 그건 충신의 행위인데, 왜 자신을 이중인격이라고 말하는가?
대사형은 마구잡이로 여곤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곤을 탄핵한 증거를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정귀비가 간행한 신판 <규범도설>이다.
대사형은 책을 들이밀면서 말한다. 이 책을 당신이 쓰지 않았느냐. 이 책은 한편으로 정귀비를 칭송하면서, 심지어 그녀를 고대의 선현열녀들과 나란히 적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소를 올려 황제의 잘못을 지직한단 말이냐. 너는 정귀비의 총애도 받고 싶어하면서, 조정에서는 충신의 이미지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곤은 대사형이 쥐고 있는 책을 보고는 머리가 멍해졌다. 여기에 추가된 것은 정귀비를 비롯한 십여명이다. 그녀들에 관한 부분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어서 억울해 죽을 지경이 된다.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이 <규범도설>을 쓴 적은 있으나, 자신이 쓴 책에는 정귀비를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이 신판에는 정귀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건 자신이 쓴 것이 아니고, 자신은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한다.
만력제는 그러나 똑같았다. 대사형의 탄핵이든 여곤의 변명이든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 이유중 하나는 이런 자잘한 일은 근본적으로 대사와 무관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도 신판 <규범도설>은 정귀비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그걸 까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만일 정귀비가 스스로를 치켜세우기 위헤 한 짓을 까발리면 정귀비는 입장이 난감해 질 것이고, 후궁으로 갔을 때 울고불고 난리치면 자신이 결국 달래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아무런 조치없이 지나간다. 아무도 처벌맏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건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민간의 "연산주동길(燕山朱東吉)"이라는 사람이 구판과 신판 <규범도설>을 읽고난 후의 독후감을 썼다. 명칭은 <우위굉의(憂危竤議)>이다.
그는 이를 다 쓴 후에 인쇄하여 전단의 형식으로 북경에 대량으로 퍼뜨린다.
"연산주동길"이라는 이름 자체도 아주 재미있다.
'주동길'이라는 것은 주명왕조 황제의 장남, 즉 당시 만력제의 서장자(庶長子) 주상락(朱常洛)이 만일 황태자가 되고 이후 대통을 승계하면 천하가 대길(大吉)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신비인 '연산주동길'이 쓴 글의 내용은 직접적으로 여곤이 황제에게 올린 그 상소문 즉 <우위소>를 지향한다.
글에서는 이렇게 썼다. 여곤은 만력황제에게 여러 의견을 제시했다. 황제에게 이걸 권하고, 저걸 권했다. 그런데 황제에게 하루빨리 황태자를 세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가지 설명하고 지나가야할 것이 있다. 당시 만력제의 후계자후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명은 주상락이고 다른 한명은 주상순(朱常洵)이다.
주상락은 장남이고, 주상락은 셋째이다. 계승제도에 따르면, 장남이 황태자가 되어 대통을 이어야 한다. 다만 만력제는 주상락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상락의 모친 왕공비(王恭妃)는 원래 궁녀출신이어서 만력제는 이들 모자의 신분이 하천하다고 여겨서, 황태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오히려 정귀비가 낳은 아들인 주상순을 좋아했고, 계속 폐장입유(廢長立幼)를 꾀하여, 주상순을 황태자에 앉히고 싶어했다.
황제가 주상순을 황태자로 앉히고 싶어하자, 대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와 대신들간에 대치상태가 된다. 황제가 주상순을 세우겠다고 말하면, 대신들이 안된다, 반드시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우겼다. 이렇게 십여년간 논쟁을 벌이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태자의 자리는 계속하여 공석이었다.
"연산주동길"은 글에서 크게 주장한다. 여곤은 문관의 신분으로 자연스럽게 '폐장입유'는 혼란을 부르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조정중신으로 상소를 올려 여러가지를 건의하면서 왜 하루빨리 황장자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워야한다는 말은 빼놓았단 말인가. 확실히 여곤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가 정귀비의 심복이자 일당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규범도설>을 써서 정귀비를 칭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에 대하여 온 북경성이 들썩거렸다. '연산주동길'이 누군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분명히 가명이고 아예 조사할 건덕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곤은 해명이 되지 않은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상소를 올려 이미 신판 <규범도설>은 전혀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황제는 그 일을 그냥 묻어두고 있어 그의 결백을 증명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구경하는 대신이나 백성들은 자세한 내력을 알지 못했다. 구판, 신판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저 둘 다 여곤이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곤에 대하여 본조삼현(三賢)이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오히려 정귀비를 도와주고 있었구나. 신하의 절개라는 것이 어디로 갔느냐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여론의 압력, 이런 공격과 질책하에, 여곤은 너무나 억울했다. 그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결국 분노가 쌓여 병이 된다. 더 이상 조회에 나가지 못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계를 은퇴한다.
전단이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된다. 영향을 받은 것은 여곤만이 아니다. 만력제도 대노한다. 왜냐하면 이 '연산주동길'의 글은 말 하나하나에 의도가 숨어 있었다. 즉 자신이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우지 않고, 주상순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대와 비평이다.
사태가 점점 커지자 만력제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신의 총비를 보호하고, 이 여론풍파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이 나선다.그리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맡는다. 여곤이 쓴 이 <규범도설>은 짐이 사서 정귀비에게 준 것이다. 목적은 정귀비로 하여금 역대선현여자의 품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
결국 이 일은 만력제가 덮어준다.
그러나,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얼마 후, 북경에는 또 하나의 익명전단이 뿌려진다. 이번 전단은 제목이 <속우위굉의(續憂危竤議)>이다.
무슨 뜻인가? 바로 지난번 북경에 널리 퍼졌던 <우의굉의>의 속편이라는 뜻이다. 즉 연재소설의 제2장인 셈이다.
전단을 인쇄하는 것은 돈이 든다. 그리고 전단을 뿌리는 것에도 돈이 든다. 사람을 모아서 사방에 살포하려면 돈이 들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건 돈을 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담량도 커야 한다. 그리고 인맥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편 전단의 배후 주모자는 분명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보통사람이 아닌 주모자는 누구일까? 아쉽게도 그 시대에는 감시통제가 없으니 조사해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또 하나 알아야 할 점은 이 두번째 전단이 북경에서 미친 듯이 뿌려질 때는 첫번째 전단이 출현한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만력제는 신하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타협했다. 이미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단의 주재는 만력제가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목표를 바꾸어, 정귀비가 나쁜 마음을 품고 매일 황제를 부추겨서 황제로 하여금 주상락의 황태자지위를 폐위시키고, 주상순을 다시 황태자로 세우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격대상이 보다 광범위했다. 정귀비가 황태자를 바꾸려고 할 뿐아니라, 황제도 셋째를 편애하고 있고, 더더구나 내각수보(內閣首輔) 심일관(沈一貫)과 대학사(大學士) 주갱(朱賡)도 모두 정귀비의 심복들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이번에는 만력제도 더 이상 참지 못한다.
내가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우지 않았을 때 익명전단으로 나를 공격했었다. 나보다 황태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면서 셋째를 편애한다고 욕했다. 지금은 이미 주상락을 황태사로 세웠는데, 다시 너희는 내가 셋째로 바꾸려 한다고 말하는가. 나를 뭐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지만, 왜 정귀비까지 끌어들이느냐. 너무 심하지 않은가? 어떻게 하더라도 너희는 만족하지 못한단 말이냐?
황제만 멘탈이 붕괴된 것이 아나리, 조야의 국면은 다시 극도의 혼란에 빠지낟.
아무도 이 글을 누가 썼는지 모르기 때문에, 관리들은 모두 전전긍긍했다. 황제가 혹시 자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들은 모두 위기를 느끼면서 서로를 공격했다. A대신은 B대신이 썼다고 말하고, B대신은 C대신이 썼다고 말하며, C대신은 다시 A대신이 쓴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니 멀쩡한 조정이 무상으로 달걀을 나눠주는 채소시장처럼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리게 된다.
일이 이 지경에 되니 정말 통제불능이 된다. 사소한 전단의 글 때문에 대명왕조가 뒤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만력제는 조정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자 골치가 아파졌다. 황제가 압력을 받으면, 압력을 아래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동창, 금의위, 형부, 대리시, 도찰원, 심지어 오성병마사에게까지 익명글의 막후주모자를 찾아내도록 명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모자를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만일 쉽게 찾아낼 수 있다면 제2탄이 나왔겠는가?
막후의 주모자를 찾아낼 수 없으면 희생양을 만들어야 한다.
그 희생양은 모두 둘이었다.
첫째, 순천부(順天府) 생원(生員) 교생광(皦生光)이다. 이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필요없을 듯하다. 그의 신분만 보더라도 생원 즉 보통학생이다. 그가 어떻게 그런 큰 일을 저지른 막후주모자일 수 있겠는가?
조정은 교생광을 붙잡아들인 다음 그의 변명을 듣지 않고 채찍질을 해댔고, 결국은 죽어버린다.
두번째는 조사정(趙士楨)이다.
그는 보통관리로 직급도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때 유명한 군사발명가, 화기연구전문가이다. 적지 않은 화기를 발명하여, 당시 명나라가 연해의 왜구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사람은 분명 기술에 심취해 있고, 이런 조정의 권모술수에 참여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려나 교생광이라는 희생양은 어떻게 보더라도 너무 엉성했고, 자격미달이어서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교생광이 이미 죽었지만, 조야간에는 익명글의 배후에 또 다른 주모자가 있다는 소문이 계속 돌았고, 무슨 원인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사정을 주모자로 지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예전에 사람들이 여곤에게 압력을 가할 때, 여곤은 병을 앓고, 결국 관직을 사직하고 떠났다. 그러나 지금은 여론의 풍향이 조사정을 겨냥하고 있다.조사정도 여곤처럼 병이 든다. 그러나 그의 병은 여곤의 병보다 중했고, 얼마후에 병석에 누어 일어나지 못하다가 죽어버리고 만다.
명나라뗴 이 두 건의 익명전단을 둘러싼 소문은 정말 많았다. 그러나 배후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조사정이 병으로 사망한 것은 만력39년이었다. 그때는 만력제가 이미 조정을 내팽개친지 여러 해가 지난 때였다. 조회도 참석하지 않고, 신하를 접견하지도 않고, 상소문을 읽지도 않고, 상소문에 회신을 하지도 않고, 종묘에 제사를 지내지도 않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궁안에 숨어지내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만력제의 나태함으로 오래된 황궁은 석양이 비추는 아래에 생기가 거의 없었다. 다행히 조사정이 병사하던 해에 대명황족중에 한 아이가 태어나서, 오랜만의 활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 신생아는 모든 사람의 눈에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 아이의 성은 주(朱)이고 이름은 유검(由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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